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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괴담

title: 고양이3전이만갑오개혁2018.01.19 16:03조회 수 2237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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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 중에서

어둡고 참혹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납량특집으로 발췌해 본 것입니다. 

나오는 사건들 중에 사실관계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든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적할 내용을 

보충하거나 수정해야할 사항이 있으시다면 

지적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가능한한 빨리 모두 반영하겠습니다.



주의하실 점이 있습니다. 

아래 내용에는 잔인하고 비도덕적인 내용들에 대한 묘사의

적나라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읽지 않으셔야 하시는 분께서는 

읽지 않고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



 



1



1431년. 

함길도에서 일종의 기생충에 대한 목격담으로 보이는 

기괴한 사건이 보고 되었다.



한 여자가 남자를 저주하기 위해, 

뱀 모양의 그림을 넣어 놓은

 이상한 음식을 남자에게 먹였다. 



이후 남자는 갑자기 복통을 느끼며 괴로워 했다. 

남자의 복통을 치료하기 위해 

약재로 사용하는 곰취 뿌리를 남자에게 먹였더니, 

남자의 배에서 뱀과 꼭 닮은 모양의 

이상한 것이 세 마리가 나왔다. 



이 뱀들 중에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를 개에게 먹여 보았는데, 

그러자 개는 3일만에 죽어 버렸다.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개를 해부해 보았더니, 

뱀은 개의 뱃속에서 

그때까지도 살아 남아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건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몰라서, 

관청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사를 아무리 진행해도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어서 

마냥 사람들을 감옥에 가둬 놓고 

긴 시간 동안 방치하게 된다. 



결국 사람들은 의미 없이 감옥에 끝도 없이 갇혀 있으면서 

조사 당하는 것에 고통을 느꼈는지 

대부분 감옥에서 목을 매어 자살해버린다.



 



2



조선 시대에는 범죄를 수사한 후 

그 범죄를 증명할 때에 

범인의 "자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때문에 자백을 받기 위해 

범인을 고문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기본적인 고문 방법은 나무 몽둥이로 때리는 것과 

채찍으로 치는 것이었다. 

비위생적이고 몸을 가누기 어려운 감옥에 

몇날 며칠이고 가두어 놓으면서 

사람을 치게 되면, 

고통이 커서 거짓 자백하게 되는 일이 많았고, 

고문 중에 사람이죽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고문을 심하게 하는 것의 위험함을 지적하는 의견이 

조정에 계속 제시되었다. 



그리고 고문 방법을 적절히 조절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상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거나, 

사람을 매달아 놓는 

도가 지나친 고문 방법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주리를 틀거나, 

무거운 돌로 짓눌러 다리 뼈를 부수는 고문도 종종 이루어졌다.



1608년. 

온양의 8, 9개 마을에서 

10여명의 사람들이 난데 없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잡혀온 이유가 

곧 반란을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잡혀온 사람들은 반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범한 주민들이었으므로 크게 당황하게 된다. 



사연인즉슨, 

당시 온양의 군수였던 이질수(李質粹)가 

우연히 활을 제조하는 기술자로부터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을 들은 것이 발단이었다. 

온양에서 반란을 도모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은 

막연하게 넘겨 짚는 생각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질수는 반란을 하는 무리들을 체포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취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질수는 정확히 사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충청도 감사 이용순(李用淳)에게, 

자신이 반란을 꾸미고 있는 무리들을 잡을 것이라고 보고해 버린다.



상부에 보고를 하고 

대충 짚히는 사람 10여명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이질수는 그제서야 

자신이 허무맹랑한 뜬소문을 잘못 넘겨 짚고 일을 벌인 것임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이미 "반란을 꾸미는 무리들이 있다"는 

엄청난 보고를 올린 마당에 

자신이 헛소리 한 것이라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란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가 부주의하게 잘못된 사실을 퍼뜨리고 

무고한 사람을 체포한 일이 되어 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승진하는데 큰 얼룩으로 남을 일일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처벌을 받을 가능성도 컸다. 



이질수는 결국 어떻게든 체포된 사람들이 

정말로 반역을 꾸민 범죄자로 꾸며야 했다. 

이질수는 붙잡은 사람들이 진짜 범인이기를 간곡하게 바랬기에 

스스로 자신이 체포한 사람들이 반역자임에 틀림없다고 

자꾸만 스스로 되뇌이면서 믿었던 듯 하다.



그러나, 잡혀 있는 사람들로서도 없는 사실을 실토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반란을 꾸민 죄는 처벌이 사형 밖에 없으며 

그 처형 방식도 매우 잔인했기 때문에 

보통의 고문 방법으로는 범죄에 대한 인정을 하기 어려웠다. 



이때문에 이질수는 새로운 고문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이질수는 잡혀온 사람들을 감옥에서 꺼낸 뒤 

철로 되어있는 기묘한 크기의 솥 앞에 앉혀 놓았다. 

그리고 그 솥에 불을 지펴 벌겋게 솥을 달구면서, 

잡힌 사람들에게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달군 솥을 머리통에 뒤집어 씌우겠다고 한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들이 만족할만한 답을 하지는 않았고, 

이질수는 달군 솥을 머리에 씌워 버렸다.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어나갔다. 

이런 방법으로 이질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나갔다.



이질수는 반쯤 미쳐서 고문을 계속 진행해나갔다. 

그런데, 고문을 진행하던 도중 

맑은 대낮에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비가 쏟아졌고, 

불이 꺼지고 솥이 빗물에 식게 되어 

고문을 계속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질수는 크게 겁을 먹고 허겁지겁 고문을 중단했다.



상황이 무시무시하게 돌아가자, 

이질수는 당황한다. 

당시 이질수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마을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이질수는 신분을 위조한 사람들을 쫓아다니다가 

조사하게 되는 민가의 주민들을 심하게 괴롭혔고, 

나중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이질수 스스로 애꿎은 민가의 재물을 

범죄와 연루된 것이라고 몰아 붙이며 약탈하며 다니게 된다. 

결국 나중에는 온양 인근 사람들이 짐을 싸서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이질수가 가두어 두고 고문했던 사람들 중에 살아 남았던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서울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면서 

대부분 죄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후 조정에서는 온양 일대의 민심이 흉흉해진것을 바로 잡기 위해 

특별히 승지를 파견하여 상황을 추스리게 하였다. 

한편 모든 사건의 중심이었던 이질수는 

1609년 1월 3일 지평이었던 한찬남(韓纘男)의 건의로, 

파직되어 자리에서 쫓겨 나게 된다.



 



3



1461년에는 갑산(甲山) 지역의 군사(郡事)로 재직하고 있던 

정희문(鄭希文)이 살인을 저지른 후 감옥에 갇혔다. 

그런데 정희문은 감옥에서 탈출 했다가 

현감으로 있던 진치화(陳致和)에게 다시 체포되었다. 

체포된 정희문이 모든 사실을 자백했는데,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치화는 정희문의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을 했다. 



이에 정희문은 화가 나서, 

진치화가 자신에게 가하는 고문이 부당하다고 지적한 뒤에, 

진치화가 관청의 재산을 횡령하여 

서울의 본가로 몰래 보낸 사실을 말하면서 욕을 한다. 

진치화는 여기에 광분하여, 

정희문의 가족들을 잡아 가두고, 

정희문의 입에 재갈을 물린 뒤에, 

잘 드는 칼로 온몸의 살을 조금씩 조금씩 긁어 내는 잔인한 고문을 가해버린다.



1678년에는 이인한(李仁漢)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인 김제원(金悌元)에게 빚 독촉을 했다. 

그런데 빚 독촉에 시달리던 김제원이 도주해버리자, 

이인한은 김제원 대신에 그 아내인 귀영(貴英)을 붙잡는다. 



참봉 벼슬을 지낸 적이 있었던 부유한 사람이었던 이인한은 

자기 집 안에 사람을 가둘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인한은 바로 이곳에 귀영을 감금했다. 

이인한은 이곳에 귀영을 한 달 이상 감금하면서 

계속 채찍으로 때리며 고문하였다. 

귀영이 결국 그대로 죽어버렸고, 

이인한은 부하들을 시켜 죽은 귀영의 목을 줄로 묶어서 

목 매달아 죽은 것처럼 위장한 뒤에 도성 밖에 시체를 버렸다.



죽은 귀영의 모친이 귀영이 실종된 후 시체로 발견 되자, 

이인한이 의심된다고 신고하여 조정에서는 이인한을 조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인한은 조정의 주요 세력가들과 친분이 있었으므로,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이인한의 부하들만 고문을 당했다. 

고문 과정에서 이인한의 부하들만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부당하다 하여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이인한을 비호했으므로, 

이인한은 결코 같이 조사 받지 않았다. 

이인한은 은 10냥을 벌금으로 내는 정도의 처벌을 받게 되나, 

그마저 후에 사면 받게 된다.



 



4



조선시대에는 종, 곧 "노비"라는 신분이 있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주인을 섬기고 복종해야 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물론 종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이면 큰 죄로 처벌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종이 주인을 배반하는데 대해 

주인이 처벌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종종 도가 지나치게 주인이 종을 처벌하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1488년. 

세력가였던 유하(柳河)의 아들 중에 유효손(柳孝孫)은 

자신의 종이었던 효양(孝養)과 강제로 동침하려 하였다. 

효양은 유효손을 계속해서 거부하며 피했다.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유효손은 

이것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처벌을 가하기 위해 효양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유효손은 먼저 효양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꺾어 부러뜨려서 

효양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 뒤에 불에 달군 쇠를 가져 와서, 

효양의 몸 구석구석에 있는 힘줄들을 뜨겁게 지졌다. 

이것은 앞으로는 함부로 반항하지 말고 

도망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효손은 더이상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로 

송곳으로 효양의 발 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버린 뒤에, 

거기에 끈을 꿰어 효양을 묶어 놓았다.



이 사건은 효양의 숙부인 마미치(馬未致)가 

삼사에 고발함에 따라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의 처벌은 유효손의 집안에 있는 

모든 효양의 가족들을 유효손으로 부터 빼앗는 것이었으며, 

더이상 종이 아닌 신분으로 고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된 효양은 

유효손이 붙잡혀서 고문 받으며 조사 받는 곳에 직접 기어나와서는 

유효손의 얼굴을 보고 **범이라고계속 해서 욕을 했고, 

유효손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5



1474년. 

서울 동대문 밖 산에서 

이상한 고기 덩어리 같은 것이 발견되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온몸 구석구석을 뜨거운 쇳덩이로 지져댄 자국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산에 버려진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이 미약하게 나마 붙어 있었다. 

그 사람은 부유한 집안인 신자치(愼自治)의 여자 종으로 

이름은 도리(道里)였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신자치의 부인이었던 이씨(李氏)는 

도리가 신자치와 동침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 때문에 자신이 신자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고 생각한 이씨는 

도리에게 격렬한 질투심과 분노를 느낀다. 



이씨는 자신의 친모와 함께 도리를 붙잡고 형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도리의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린 뒤에, 

도리에게 죄를 물으면서 수없이 구타하였다. 

그리고 쇠를 달구어 우선 가슴과 성기를 지져버린 뒤에, 

몸 구석 구석 이곳저곳을 지지면서 고문하여 

피부 곳곳이 온전한 곳이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동대문 밖의 산에 내던져 버린 것이다. 

그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도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자살 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한참 동안 

혼자 미약한 생명을 조금씩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되어 

세상에 이 끔찍한 일을 알리게 된 것이었다.



1427년 8월 20일. 

거리에서 한 사나이가 알 수 없는 물건을 

지고 가는 것이 발견 되었다. 

그것은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었으나, 

뼈와 가죽만 파리하게 붙은 처참한 모양이었다. 



결국 그것은 덕금(德金)이라는 여자로 밝혀졌다. 

덕금은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로 재직하고 있는 

권채(權採)의 종으로, 

권채와 그 일가족을 조사한 결과, 

무서운 사실이 밝혀졌다.



권채는 덕금을 사랑하여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는 

종인 덕금에게 강렬한 질투와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덕금은 덕금의 할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찾아 뵈러 집을 잠시 떠날 것을 청했다. 

하지만 평소에 덕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정씨는 

덕금이 그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을 허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덕금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신의 할머니 생각이 너무도 애틋하여, 

허락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집을 떠나게 된다.



덕금이 사라지자 권채는 덕금을 찾게 되었고, 

정씨는 권채에게 덕금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서 

간통하러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권채는 격렬하게 질투하고 분노하게 되어, 

덕금이 돌아오자마자 덕금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고 

몽둥이로 덕금을 마구 구타하였다. 

권채는 덕금의 왼쪽 발에 족쇄를 채워서 외딴 방에 감금하였다. 

이후, 권채 일가는 잔혹하고 **적으로 덕금을 괴롭히게 된다.



장씨는 덕금을 바로 칼로 베어 죽이려 했는데, 

또 다른 여자종인 녹비(祿非)가 칼로 죽인 시신은 

소문이 나기 쉽고 금새 누구인지 밝혀낼 수 있으니, 

서서히 고문하면서 병들고 굶어 죽도록 하자는 제안을 한다. 



장씨는 녹비의 제안을 받아 들여서 감금되어 있는 

덕금을 그대로 굶어 죽이기로 한다. 

장씨는 덕금이 덕금 자신의 배설물과 함께 

비참한 모습으로 족쇄를 차고 방에 갇혀 있는 모습을 보고, 

굶주린 덕금에게 그 오물을 먹으라고 지시한다. 



덕금은 오물 사이의 구더기를 보고 질겁하여 격렬히 저항하였는데, 

그러자, 장씨는 덕금의 가랑이 사이에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덕금을 괴롭혀서 결국 덕금이 구더기와 오물을 먹게 만든다. 

덕금은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갇힌 채 

매일 고문 받으면서 서서히 굶어 죽어 갔고, 

마침내, 비참한 몰골의 굶어 죽은 시체가 되었다고 보고 

걸레처럼 버려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덕금은 발견되던 순간까지 죽지 않은 상태였다. 

제정신과 온전한 몸을 유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부지해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권채와 정씨, 

그 밖에 권채 집안의 종들을 모두 조사했으며, 

권채의 아내인 정씨가 주범으로 모든 죄의 벌을 받게 된다.



권채는 정씨에게 속았을 뿐이며, 

덕금의 잔인한 처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지를 얻어 

권채는 이후에도 당당하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실제로 권채는 유능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므로,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당시 조정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덕금에 대한 온갖 잔혹한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권채는 정말로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기 보다는,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교묘하게 처신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고아한 양반이었던, 

권채는 조선시대 최악으로 손꼽히는 감금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 이치가 허망하게도 권채가 남긴 저작 중에서 

최고로 꼽히는 것은 인간의 예절과 도리에 대해서 사례를 든 책인 

"삼강행실도"의 서문을 쓴 것이다. 

덕금은 곧 사망했지만, 

후에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 한문학의 걸작선을 모아 편집한 

"동문선"에까지 등재 되어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권채가 쓴 삼강행실도의 서문 본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 효, 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갖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천성이다."



 



6



조선시대에 사람을 저주하는 주술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범죄로 취급되었다. 



따지고보면 한낱 허무맹랑한 헛수작에 지나지 않는것이지만, 

우선 원칙적으로 국론으로 배척하고 있는 

미신을 믿는 것이라는 점에서 죄가 크게 취급 되었다. 

게다가 만약 성공하거나 실제로 저주가 위력을 발휘할 경우에는 

전혀 원인을 알 수 없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섭게 여겨졌다. 



가장 흔한 저주 방법은 

죽은 동물의 시체나 뼈를 저주하고 싶은 사람의 곁에 놓아두는 것이었으며, 

그 방식은 주로 무당들이 개발하고 주선하였다. 



특히 사람의 뼈나 시체가 효과가 좋은 것으로 소개하는 무당들이 많았으므로, 

살인을 하거나 무덤을 파헤쳐서 

은밀히 사람 시체를 구해주는 전문적인 업자들이 있기도 했다. 

이런 업자들 중에는 1730년 체포된 김이건(金二建) 같은 인물이 유명했다.



저주와 관련된 사건들 중에는 장희빈등이 언급되는 

궁중 내부의 저주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가장 악명 높은 사건으로는 

1730년 이만혁(李萬爀) 사건을 꼽을만하다.



이만혁(李萬爀)은 당진(唐津) 현감(縣監)을 맡고 있는 자였으나, 

한 점쟁이가 주장하는 저주 이야기에 심취하게 된다. 

이만혁은 자신이 잘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저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위해 땅에 묻을 특수한 시체를 얻기로 결심하였다. 



점쟁이가 알려준 저주 방식을 위해서는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의 시체를 사용해야 했다. 

우선 이만혁은 종이었던 남자 한 사람과 

여자 두 사람을 붙잡아 모두 죽을 때까지 구타하여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저주를 하기 위해 

제작된 쇠로된 조각을 세 구의 시체 입에다 끼워 넣었다. 

그리고 가시가 박힌 가시나무를 시체에 박아 넣어 

시체 셋이 가시나무에 꽂힌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체를 다리 근처에다가 거꾸로 묻어 놓은 것이다.



이만혁은 시체가 발견되면서 범행이 드러났고, 

당진 일대 사람들이 끔찍하게 생각하여 수군거리게 되었다. 

당진의 많은 사람들이 겁에 질리게 되면서, 

소문이 퍼졌고, 

이만혁은 그 처벌로 자리에서 쫓겨났다.



 



7



1500년대 후반부터, 

조선에서는 점차 일종의 성병이 유행하게 된다. 

주로 **한 생활을 했던 한량들 사이에서 성병이 퍼졌는데, 

그 증상이 매우 고통스럽고 

특히 징그러운 피부병을 앓다고 죽게 되므로 

매우 비참한 질병으로 생각 되었다. 

1560년대 중반부터, 

바로 이 성병을 치료하는데, 

인간의 쓸개를 이용해 약을 만들면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허황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 의원이 얼버무린 이야기가 발단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는 병에 걸린 사람이, 

살인을 하는 전문 업자에게 돈을 주고 부탁하여, 

사람을 깊은 산속으로 붙잡아 와서 

살아 있는 채로 나무에 묶어 놓은 뒤, 

칼로 사람의 배를 잘라서 

쓸개를 빼내는 형태의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범죄가 늘어나면서 주로 어린아이들이나, 

허약하면서 가족이 없는 노숙자들이 범행의 주요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직업적으로 사람을 공격해서 

쓸개를 빼내는 범죄자들이 생겨났다. 

결국 1607년에는 조정에 업자들이 이렇게 쓸개를 얻어서 

중국으로 밀반입해서 더 큰 돈을 벌기도 한다는 보고가 나올 지경에 이른다.



1565년 무렵, 

1576년 무렵, 

1607년 무렵, 

세 차례에 걸쳐 이러한 사건들은 대유행 하였다. 

서울의 종각 근처와 

동활인서(東活人署), 

보제원(普濟院), 

홍제원(弘濟院) 근처의 거리에는 당시 노숙자들이 많았다. 



주로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걸치고 

바가지를 든채 음식을 구걸하면서 연명하는 허약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참혹한 범죄의 희생이 되어 

소리 소문 없이 점차 붙잡혀 죽어갔고, 

결국에는 일대의 노숙자들이 모두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노숙자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민가의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범죄가 최고로 유행했을 때에는, 

산골짜기에 나무에 묶인 채 배가 칼로 잘려서 내장을 드러내고 

썩어 가고 있는 시체들이 잇달아 발견되어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들어가는 것을 꺼릴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 중에는 농사하러 밭에 나가 있는 것 조차 

혼자 있기를 무서워하게 되기도 하였고, 

항상 거리를 다닐 때에 공격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이 서로 무리지어 다니게 되기까지 했다.



1607년, 

조정에서는 사건이 이처럼 심하게 퍼지도록 방치한 책임을 물어 

포도대장을 파직시켰으며, 감옥에 수감하였다. 

이후 이러한 사건이 이전처럼 심하게 유행한 적은 없었으나 

비슷한 부류의 잔인한 살인사건은 가끔 발생하였으며 

심지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범죄는 완전히 근절되지 못했다.



 



8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일본인 해적들이 피해를 입히는 일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밀수를 위해 조선에 모여드는 일본인들도 잦았다. 

때문에 1500년대 초반에는 일본인이라면 

일단은 해적이나 밀수꾼의 무리, 

혹은 이리저리 흘러들어와서 민폐를 끼치며 사는 

무리 정도로 보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더우기 군인들로서는 일본 해적들과 싸우는 것이 

실전에서 공을 세우는 가장 흔한 기회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일본인을 멸시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조정의 허가를 받고 

해변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 때문에 조선 당국은 여러가지 골치아픈 문제를 많이 겪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이 일본인들은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단적인 예로 수사(水使)로 재직하고 있던 이종의(李宗義)는 

바닷가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던 일본인 10여명을 보고는, 

괜히 해안에 온 해적이라고 착각이라도 했는지, 

이유 없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린 일도 있었다.



이중에 가장 악명 높은 사람으로는 

부산포 첨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우증(李友曾)을 꼽을 수 있다. 

군인이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을 여러가지로 괴롭히는 것을 

일종의 놀이로 여기며 즐기곤 했는데, 

그중에서 활쏘기 놀이가 널리 회자 되었다.



이우증은 일본인을 붙잡은 뒤에 머리카락에 노끈을 묶고는 

그 끈 끝트머리를 집의 천장에 그대로 매달아 놓았다. 

그러면 매달린 사람은 

머리카락이 아파서 매달린 채로 팔다리를 버둥거리게 되는데,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으로 부터 한참 떨어져서 서서는 

갑자기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하겠다고 활을 빼든다. 



그리고, 이우증은 화살을 쏘아서 

일본인을 매달아 놓은 끈을 맞추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매달린 일본인은 화살을 잘못 맞을 까봐 

크게 겁을 먹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가 화살을 맞춰서 끈이 끊어지면 

일본인이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지게 되고, 

그러면 이우증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즐거워하며 자신의 활솜씨를 뽐냈다.



이우증이 일본인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그 끈을 활쏘기하면서 노는 것은 

당시에 절도사로 재직하고 있던 유계종(柳繼宗)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계종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즐거워 하면서 크게 칭찬하였고, 

덕분에 이우증이 매달아 놓은 일본인에게 

활을 쏘면서 괴롭히는 행동이 크게 유행해서 

일본인들이 머무는 곳 근처에 있는 

조선군 부대 각지에 이렇게 일본인을 괴롭히는 것을 따라하게 된다.



얼마후, 조선에 거주하던 부산 일대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주 휘하 세력의 지원을 얻어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삼포왜란인데, 

이우증은 바로 전날까지도 일본인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묵살했고, 

도리어 화를 내며 보고한 사람를 문책하였다. 

이우증은 뒤늦게 일본인들이 급습해 오자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결국 풀섶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이우증은 

일본인들에게 발견되었고, 

여러 일본인들에게 마구 난도질 당하여 죽게 된다.



폭동이 일어나자 일대의 조선군들은 겁을 먹고 

대부분 도망치거나 후퇴해 버려서, 

일본인들은 부산 일대의 마을들을 장악한다. 

일본인들은 마을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여 

매일밤 술판을 벌이며 놀기 시작했다. 

이때 불탄 조선의 민가가 1천채에 가까웠는데, 

공식 기록에는 796호가 불에 탔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퇴한 조선군은 반격하지 않고 숨어 있으면서 

조정에 계속 지원군을 보내줄 것만을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마땅히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폭동을 일으킨 일본인들의 관련 세력과 어떻게 화친을 맺어보자는 

다소 얼토당토 않은 논의까지 진행되기도 했다.



마침내 조선군에서는 유담년을 지원군을 이끄는 장군으로 삼아 

부산 방향으로 지원군을 보낸다. 

유담년은 지나치게 잔인한 일을 많이 저지른 부패한 군인으로, 

그 죄로 자리에서 쫓겨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유담년은 다시 장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팔뚝을 걷어 붙이며 

"나는 가뭄이 들었을 때의 나막신과 같아서, 

아무 쓸모 없이 여기다가, 

장마가 졌을 때가 되면 그제서야 쓰일 뿐이다"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소리 질렀다. 



당시 조선 군인들은 대낮에 괜히 약탈을 하는가 하면, 

서울 시내의 폭력배와 범죄자들이 약탈을 하기 위해 

군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약탈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군은 일본인들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여, 

일본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끝없이 널브러져 있게 된다. 

이때 가장 악명을 떨친 사람은 소기파(蘇起坡)라는 군인이었다. 

소기파는 재물이나 승진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오직 전투에만 전념하는 사람이었다. 

소기파는 이미 북방의 여진족들과도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고, 

아마도 전쟁터에서 사람과 싸우고 사람을 죽이는데, 

기괴한 취미를 갖게 된 듯 보인다.



소기파는 당시 죽은 일본인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찾아 다녔다. 

만약 시체들 사이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기파는 자신의 칼을 뽑아서 그 사람의 배를 갈라버렸다. 



그리고 얼굴과 손에 그 피를 묻혀 바르며 즐거워 했고, 

그 자리에서 술병에서 술을 따라마시면서 

그 사람의 내장을 그대로 꺼내어 씹어먹으며 안주로 삼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끔찍하게 여겨서, 

소기파를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의 마귀인 야차와 같다고 하여, 

소야차(蘇夜叉)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사건은 295명의 일본인의 목을 잘라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높다란 무덤으로 쌓아 놓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삼포왜란 당시의 초라한 후퇴와 문제가 많은 전투들에 대해서는 

책임 문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당시에 이르렀던 졸렬한 화친 논의에 대해서도 

뒤에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덮어 놓고 잊고 넘어가기에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만 더욱더 극심해졌는데, 

그러다보니 어이 없는 일들이 자주 벌어졌다. 

1545년 전라도 흥양(興陽)에서는 

중국배 세 척이 표류하여 해변에 도착한다. 

당시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던 소연(蘇連)은 

이 배에 탄 중국인들이 일본인 해적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인근 부대에 연락하여 일대의 모든 군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은 일본인도 아니고 

일본인 해적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면서 산속으로 숨었는데, 

조선군은 끝까지 이들을 추적하여 표류한 중국인 108명을 학살해 버렸다.



조정에서는 표류한 중국인들을 잘못 죽인 것을 나중에 알고, 

이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지 않도록 고민해야 했고, 

괜히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성대하게 치러주는 따위의 일을 벌였다.



당시 역사를 편찬하던 기록을 보면 

삼포왜란을 기점으로 일본인들이 조선을 무시하고 

가소롭게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볼만하다는 평이 있다.



 



9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리며 비참한 일들을 겪은 기록 중에 

가장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은 1670년과 1671년, 

2년간 이어진 대기근이었다. 

이 2년 동안 각종 자연재해로 농산물이 매우 부족해지고 

전염병마저 유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참사가 일어났다.



1671년 1월 무렵의 겨울이 그 피해가 최악에 달한 시기였는데,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들이 

관청에서 나눠주는 죽을 얻어 먹으려고 나와 있다가 

창고가 텅텅비어 죽을 못 먹게 되자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가 죽는 일들이 속출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서로 도둑질을 하는 일들이 많았고,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으면 곧 약탈을 당하곤 했다.



거리 곳곳에 죽은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관청에서는 시체를 수레에 수북하게 쌓아서 계속 운반해야 했다. 

쌓여 있는 시체들 중에는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는데, 

시체 속에 묻힌채로 그렇게 실려가다가 서서히 죽어갔다. 

시체의 발에 줄을 묶어서 질질 끌고 가서 묻기도 했는데, 

굶어죽기 직전의 사람들이 

미리 발에 줄을 묶어 놓은 채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으면서 

죽기를 기다리는 비참한 광경이 도처에서 펼쳐졌다. 

1671년 1월 11일 전라도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오시수(吳始壽)는 

"전 지역에서 갓난 아이를 기르기를 포기하고 

강물과 개천에 내던져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 하기도 했다.



추위가 심했으므로, 

옷을 벗겨 훔쳐가는 강도들도 많아졌다. 

굶어서 걸인이 된 사람들은 

귀신과 같은 몰골로 

맨몸에 짚푸라기를 엮은 것을 배와 등에 두르고 

추위에 버티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시체에 입혀 놓은 수의를 벗겨가기 위해 

산에서 무덤을 파헤쳐서 썩은 시체에서 옷을 벗겨가는 일도 많았다. 

여기 저기에 굶어 죽고 얼어 죽은 시체가 많았으므로 

빈민을 구체하는 진휼청에서는 

시체를 흰 천으로 싸서 땅에 묻게 하였는데,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은 이것을 파헤쳐서 시체를 싼 천 조각을 훔쳐갔다.



1671년의 기근을 일컬어 노인들은 생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으로 평가했고, 

임진왜란을 겪은 생존자들은 

이 기근이 전쟁보다도 더욱 참혹한 상황이라고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기근을 버텨내기 위해 

조선의 모든 빈민 구제 제도들과 관계 관청들이 모두 동원되었으며, 

역사적으로는 당시 조선의 정치와 경제 상황의 

많은 사항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1671년의 대기근을 지내는 동안 

한 가족이 모두 굶어 죽은 집은 물론이요,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굶고 병들어 죽어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정식으로 무덤을 만들만한 사정이 되지 못해서 

성벽 아래에 대충 시체를 파묻곤 했는데, 



약 100년 후인 1753년, 

지평으로 일하고 있던 이상윤(李尙允)은 

동대문 일대의 성벽을 수리하는 공사 과정에서 

성벽 아래에서 수천명 분량의 사람 뼈들이 발견된 것을 알고 경악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1671년의 기근은 조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논의된 일이었으므로, 

정치 파벌간의 싸움에서 중요한 소재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지방 관청에서는 

자신의 구역에는 주민들을 잘 구제하여 평화롭다는 것을 

상부에 내세우면서 자신의 자랑을 하고 싶어했다. 



때문에 일부 지방 관청은 비참하게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상황을 

일부러 숨겨서 조정에 구호물자를 요청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피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주민들의 구제에 공을 세웠다는 표창을 받기 위해 

몰래 사망자가 없는 것으로 조작하고 

포상을 떼어먹는 관원들이 지적당하기도 하였다.



 



10



조선시대에 정식으로 조정에서 논의된 사건 중에 

가장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꼽는다면 

1530년대를 무렵에 일어난 어린이에 대한 살인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531년 남대문에서 문안에서는 

이상한 자루가 내던져진 채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자루를 열어보니 안에는 

10살이 조금 넘은 여자아이가 목이 잘려서 자루속에 담겨 있었다.



발견된 여자아이의 머리를 보면 귀고리를 한 모습이었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한성부 판윤 윤은보는 시체를 검사해 본 결과 

살인하여 죽은 시체인 것 같지는 않다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그냥 땅에 묻어 버릴까 말까 망설이면서 시간을 보냈고, 

그러는 사이에 사건은 영원히 잊혀져 버렸다.



1533년 2월 17일. 

감사로 재직하고 있던 김귀성(金貴成)의 집이자 

무당의 집 뒤의 거리에 

5~6세된 여자 어린아이 한 명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아이가 발이 잘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아이를 발견한 김귀성은 

황급히 아이를 구조하여 관청에 보고했는데, 

어린아이는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자신의 이름은 "개춘(開春)"이라고 했고, 

자신의 오빠가 있는데 

그 이름이 "어리가이(於里加伊)"라고 했다. 

아이에게 발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그저 "칼로 내 발을 잘라내면서, 

죽어라, 죽어라고 했어요"하고 대답했다.



조사를 진행하자 한덕(漢德)이라는 종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덕은 자신의 주인 집에 가다가 

하반신에 동상이 걸린 아이를 발견했는데, 

아이가 불쌍해 보이고 

마침 자신에게 아이가 없기에 데려가서 보살폈다고 했다. 



그러나 한덕의 주인이 더러운 아이를 집안에 들여 놓을 수 없으므로 

쫓아내라고 하기에 다시 거리에 버렸다는 것이다. 

한덕이 이후의 소식을 들어보니, 

그 이웃 중에 궁궐 출신의 어느 집에서 데려갔다가 

다시 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그 후에는 김별좌(金別坐)의 종인 연수(連守)가 

다시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한덕은 아이가 발이 잘린 이유는 모른다고 말했다.



한편 조사 중에 중덕(仲德)이라는 종이 

또다른 주장을 펼쳤다. 

발견된 아이는 옥가이(玉加伊)라는 아이로,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중덕은 지난해 9월 29일에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5개월 만에 문득 알 수 없는 아이가 

발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본 즉,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 아이는 조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던 

한덕이 곁에서 보살펴 주고 있었다. 



사건의 조사를 담당하던 한성부에서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직접 도대체 누가 발을 자르며 죽이려 했는지 물었다. 

그때 한덕이 아이에게 죽을 먹여주고 있었는데, 

아이는 죽을 먹다 말고 죽을 먹여주고 있는 한덕을 바로 가리키면서, 

"이 여자가 내 발을 잘랐어요"하고 말했다. 

아이는 자신이 발을 잘릴 때 

털모자를 쓴 사람을 보았다는 말을 했으므로, 

한성부에서는 아이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사람들을 각기 털모자를 씌운 모습으로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그 때 본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으나, 

아이는 여기에는 실패했다.



이후 의금부의 담당자들이었던 유보(柳溥)와 심언경(沈彦慶)이 

직접 사건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이에게 무엇으로 발을 잘렸는지 물었고, 

아이는 "칼이요." 하고 답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방 안에서" 라고 답했다. 

언제 발을 잘렸는지 묻자 아이는 "낮에"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아이 앞에 한덕과 중덕 두 사람을 동시에 데려와서 

누가 발을 잘랐는지 물었는데, 

그러자 아이는 한덕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에요"하고 답했다. 

아이는 "두 손을 묶고, 입을 솜으로 틀어막고 내 발을 잘랐어요"라고 답했다.



아이의 발을 자른 범인은 한덕으로 굳어지는 듯 했으나, 

사람들 간에 몇가지 석연찮게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무당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이라든가, 

아이가 동상에 걸려 있어서 발이 썩어서 

떨어져 나갔을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점들이 

의심스러운 점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최고의 의원들에게 

아이의 발이 잘린 자리를 관찰하게 하여 

썩어서 발이 떨어져 나간 것인지 

잘려 나간 것인지 조사하게 하기도 했으나, 

어린아이의 말만으로는 

큰 죄를 속단할 수 있는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쪽으로 맺어졌다. 

결국 이 사건은 아이의 말이 나이에 맞지 않게 

일관되어 있고 정리정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히 묻혀 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아이를 잃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산 속에서 몰래 살인해버리거나, 

어린아이를 납치한 뒤에 몰래 종으로 삼아 노비로 기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점이 문제거리로 중요하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한 사건들을 이후에도 벌어졌다. 

1546년에는 아직 어린 여자와 두 세살 바기 아기의 시체가 

서울 거리에 굴러다니는 것이 발견되었다. 

시체는 온몸 이곳저곳이 불로 지진 참혹한 상태였고, 

특히 아랫배와 배꼽 주위를 마구 지져 놓은 모양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시체를 발견한 집에서 

다른 곳으로 몰래 시체를 옮겨 놓았다는 정도가 더 조사되었을 뿐, 

이후에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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