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게시물 단축키 : [F2]유머랜덤 [F4]공포랜덤 [F8]전체랜덤 [F9]찐한짤랜덤

단편

수상한 오피스텔

아리가리똥2018.04.13 12:24조회 수 1177추천 수 3댓글 2

    • 글자 크기



 

 

 

제가 아는 분이 대학 동기녀석과 서울 외곽의 어느 오피스텔에서 생활했을 때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소설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비슷한 소재의 얘기도 많지만 표절은 아니므로 참고 바랍니다.

 

 

 

 

 


"째깍...째깍...째깍..."


어렵게 얻은 오피스텔에서의 첫날 밤이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알람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오는 너무나도 조용한 밤이다.

한쪽 벽면의 반 이상이 창으로 되어 있고,

 

반 복층 구조의 천장이 높은 오피스텔이라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이곳 주변은 유흥가가 밀집해 있어서 밤에도 소음이 심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그 곳과 한 블럭 떨어져 있어서 생각보다 굉장히 조용했다.

단지 단점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15층과 거의 같은 높이로 솟아있는 사무실 건물이

 

십여미터 앞에 있다는 것이다. 

 

 

불을 끄고 나와 내 친구인 준혁은 머리 뒤에 두 손을 깍지를 낀 자세로 누워서 달빛조차 

어둠에 묻혀버린 창밖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십수분이 지났을까 나는 슬슬 졸음이 몰려와 깍지를 풀고 몸을 옆으로 돌려 준혁을 향해 누웠다.

그 때 나를 의아하게 만든 것이 있었는데 거의 눈을 깜박이지 안고 무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듯한 준혁의 모습이었다.

 

 

그런 준혁의 표정을 나 또한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런 어색한 상황을 깬 것은 준혁이었다.

자세도 풀지 않은 채 심지어 눈길조차 나에게 돌리지 않고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 이 오피스텔 싸게 들어왔다고 했지?"


"응"


"얼마나?"


"보증금 500에 월세 50인데, 5만원 깍아서 45에 들어왔어."


"아는 사람 통해서 들어온거냐?"


"아니. 그냥 근방의 부동산 중개소에 문의했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준혁은 나의 물음을 무시한 채 아무런 표정없의 그대로의 자세를 유지하고 다시 나에게 물었다.

 

 

 

"중개인이 별다른 안하디?"


"무슨 말?"


"............."


 

 


준혁은 여전히 나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리고는 혼자서 넋두리하듯 입을 열었다.

 

 

 

"말할 리가 없지......."


"무슨 소리야?"


"너 봤어?"


"뭘?"


 

 


나의 물음에 갑자기 준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창밖에 있는 저 형상 말이야."


 

 


준혁은 어둠속에 묻힌 창밖을 보고 있고, 나는 그런 준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준혁이 무엇을 보았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건 준혁의 번뜩거리는 눈빛과 긴장된 표정으로 봤을 때

 

심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옆으로 누워 천장을 향하고 있는 내 오른쪽 뺨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뭔데?"


"몰라....그냥 유리창 밖에 사람같은 게 서 있어."

 

 

 

나는 탁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무서움을 많이 타는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정말 두려워했다.

 

 

 

 

 


내가 다섯살 때 일이었다. 

엄마는 시장에서 투정부리는 내가 귀찮았는지 내가 잠든 사이 잠깐 장을 보러 나갔다.

그런데 엄마가 장을 보러 가자마자 나는 바로 잠에서 깨어버렸다.

엄마의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없는 집.

있어야 될 존재가 없어졌을 때의 두려움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다.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갈수도 없었다.

내 키가 닿지 않는 문고리는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손이 닿는 손잡이 잠금장치는 여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엄청나게 울었다.

 

"쿵!! 쿵!! 쿵!!"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누군가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무서워 방으로 달려가 장롱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어둠속의 밀폐된 공간,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를 부르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너 겁먹었지?"

 

준혁의 물음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겁먹었다. 

내가 원래 겁이 많은 것도 있지만 준혁의 기이한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준혁이도 지금 나의 심정을 알고 있을거다.

준혁은 아주 가끔씩 귀신을 본다고 한다.

귀신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고 한다.

 

 

 

 

한 번은 둘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준혁이 수저로 찌개를 뜨는 자세를 하며 눈을 치켜든 채,

자꾸 내 뒤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검은 롱코트에 검은 중절모를 쓴 남자가

 

식당 내부의 기둥 뒤에 서서 반쯤 몸을 드러낸 채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획 돌려 준혁이 말한 곳을 쳐다 보았다.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준혁이 내게 힘 닿는데까지 성대의 진동을 억누른 숨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쳐다보지마!!!"

 

준혁의 놀란 외침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식탁위에 놓인 찌개에 시선을 모았다.

내 눈의 초점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음을 알았는지 준혁이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를 찾는게 아냐...쳐다보지마"

 

그리고 잠시 후 만취한 상태에서 십여분간 계속 자신의 해병대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식당의 모든 소음을 자신의 목소리로 잠재워버린 50대의 한 아저씨가 준혁의 등 뒤에서 쓰러졌다.

한 수저 들어올린 찌개국물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내 손의 진동에 맞추어

 

여기저기 쏟아져 흘러내렸다.

나중에 그 정체 모를 존재에 대해 준혁에게 물었지만

 

준혁은 그냥 두려웠을 뿐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단지 그가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는 것 뿐이다.

 

 

 

"그래. 나 지금 겁먹었어. 여기서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런 말하냐?"


어린아이 같이 울먹이는 듯한 나의 목소리를 들은 준혁은 내가 측은하게 생각되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나에게 돌려 입을 열었다.

 


"전에 중절모 쓴 사람 같지는 않아. 그냥 창 밖에 사람형상 같은 게 보였을 뿐이야. 신경쓰지마"


"뭐? 신경쓰지 말라고? 너같으면 신경이 안쓰이겠냐?"

 


준혁은 힐끔 내 얼굴 표정을 살피더니 깍지 낀 양손을 고정한 채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모르고 넘어가잖아.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거고..... 그냥 너도 모르는 체하면 돼."


"지금 니가 나한테 말해버렸잖아. 말해놓고서는 모르는 체하라니..."

 


내 말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준혁이 잠시 어금니를 깨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친구잖아........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나도 너 만큼 두려워.

어쩌면 너보다 더 두려울지도 몰라.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나 혼자 미칠 것 같아."

 


준혁의 말에 나는 말없이 그의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그의 초점을 응시했다.


나는 겁쟁이인데.........

 

내가 준혁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의 소름끼치는 상황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하는 강심장이기 때문인데....

용기있는 자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운데도 그것에 맞서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준혁의 모습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준혁의 눈동자가 많이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나도 봐도 돼?"

 


그냥 고개를 돌려 볼 것이지, 나는 바보스럽게도 준혁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바보스러운 질문을 아는지 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창밖에 맞추었다.

어슴푸레 주변 상가 불빛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창 밖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저 어둠속에 무엇이 보인다는 건지.....

 

어쩌면 준혁은 머릿속의 허상을 현실에 비추고 있는 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몸살기가 있어서 일찍 잠이 든 적이 있는데 누운지 십분도 안돼 가위에 눌리고 말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어나지 않으면 죽을것 같다는 공포감이 몰려와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아무 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런데 나를 더 공포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장가 소리였다.

 

'잘 자라 우리 아가....앞 뜰과 뒷 동산에......"

 

하이톤의 여자 목소리의 자장가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내 가슴을 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떴다.

 

아니...눈만 뜰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곧 눈을 뜬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하얀 소복에 검고 긴 생머리를 늘여뜨린 낯선 여자가 내 옆에 앉아

 

손으로 내 가슴을 쓸고 있는 것이다.

발처럼 축 늘어진 검고 긴 생머리 속에 묻힌 얼굴 속에서 계속해서

 

그 소름끼치는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달님은 영창으로...은구슬 금구슬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자장가가 이렇고 무섭고 혐오스러울 수가 있다니......

나를 깨운 건 엄마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통나무처럼 굳은 몸으로 눈만 부릅뜨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나는 얼른 주변을 돌아봤다.

그 낯선 여자는 온데간데 없고,

 

반 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나부끼는 커튼이 내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거실 TV에서 들려오는 자장가 소리.....

이 커튼이 내 가슴을 쓸고 있었고,

 

저 TV속의 자장가 소리가 내 심장을 조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 모든 게 내가 만든 허상이었다니.....

 

 

 

 


사람은 얼마든지 공포의 대상을 창조할 수도 있고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준혁이 지난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만의 방식으로 공포의 허상을 창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중절모 사나이는 우연의 일치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의 정리로 인해 나는 잠시동안 창 밖의 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준혁은 이런 나의 짧은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런데...너한테 이 걸 말하는 이유가 또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준혁을 향했다.


 

 

"창밖의 형상이 축 늘어져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어.....그리고......"


'아우....강아지...'

 


난 욕을 거의 안 한다.

 

그런데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금 준혁에게 욕을 하고 있다.

저 저주받은 듯한 주둥아리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이 궁금했다.

 


"그...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창 밖이 아냐......창에 비친거야...지금 이 방이....."

 

 

 

 

준혁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나도 모르게 이불을 뒤집어 썼다.

이런 겁먹은 행동을 하는 나를 배려하지도 않은 채 준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보고 싶지 않은데......이건 진짜 기분 나쁘다.

저 사람이 지금 우리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는 건가?
그런데 왜 창을 통해서만 보이지? 신기하네......"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것도 모자라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누가 죽었나? 전의 입주자도 이 걸 보았나? 그럼 그 사람도 나 같은 사람일까?
아니면 저 사람이 전의 입주자일까? 아니면......"


"그만 해!!!!"

 

 


목이 메이는 숨소리로 나는 소리를 질렀다.

지금까지 준혁이와 지내오면서 오늘처럼 무서운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오금이 저리고, 등골이 모두 얼어붙는 느낌이다.


 


"..준..준혁아..그만 해..."


 


나의 울먹이는 듯한 간절한 목소리에 준혁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준혁아...나 오늘 이 집에서 첫날밤이다. 너 진짜 왜 그러냐?"


 


어린 아이처럼 이불 속에서 눈을 질끈 감은 채 준혁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는 서로의 대화를 멈춘 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듯 했다.

그리고 준혁의 대답이 없자 잠시 동안 죽음같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무섭다. 오히려 더 무섭다.


왜 준혁이가 가만히 있지?


이 자식...또 나를 겁먹일려고 하는건가?

아니면 내가 그만하라니까 그냥 있는건가?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열었다.

그리고 방안의 어둠보다 더 어두운 공간을 만든 이불을 머리로부터 조금씩 걷어냈다.


이불의 가장자리가 내 머리결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불의 끝자락이 내 눈동자를 지나치자, 준혁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창밖을 향하던 시선은 온데간데 없고,

 

준혁은 파리한 어둠속에서 나를 향해 무표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아니면...뭐...뭐?"


"전의 입주자가 아니면.......그 중절모의 사나이....."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준혁을 발로 힘껏 밀어냈다.


 


"개자식!! 그냥 꺼져버려!!"


 


나의 돌발적인 행동에 준혁이 당황한 듯 보였다.

준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 안의 불을 모두 켰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준혁이 발끝에 닿지 않음에도 계속해서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이불을 온몸에 꽁꽁 둘러싼 채로....


준혁은 멀찌감치 서서 허리에 두 손을 갖다대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 아니다. 이 집에 뭔가 있어....보지 못하는 니가 오히려 속이 편할 수도 있다."


"가버려!! 개자식아!!"


"가버리라구? 내가 가면 너 혼자 오늘 밤을 보낼거냐? 안될 걸? 
분명히 내가 나가면 넌 오늘 여기서 못자고 밤새 밖을 돌아다니며 서성이겠지. 안 그래?
친구니까 말해주는 거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말도 꺼내지 않아.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긴든...."


"내가 뻔히 겁내 하는 것 알면서도 그런 말 해주는게 친구냐?"


"너도 이겨내야 돼. 언제까지 어린 아이처럼 굴거냐? 나만 이런 걸 본다고 생각해?
너도 언젠가 나와 같이 귀신을 볼 수 있을 날이 올지 몰라. 그 땐 그냥 창밖으로 뛰어내릴거냐?"


"젠장. 미친 놈 같으니라구. 니가 보는 게 귀신인지 아닌지 알게 뭐야?"


 


평소 답지 않게 내 말투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준혁은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귀신이든 아니든 이 집엔 뭔가가 있어. 그건 확실해. 
오늘은 그냥 나하고 같이 자고, 내일 전 입주자를 만나보자.
부동산 직원들은 말해줄 것 같지 않고..."

 


그제서야 나는 우스꽝스러운 발길질을 멈추고, 조용히 몸을 바로 눕혔다.

1시간도 채 못잔 것 같았다.

날이 밝도록 뜬 눈으로 지샌 나는 밝은 햇빛 아래서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았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우리 둘은 관리사무실로 내려갔다.

 

 

"저기요, 903호 입주자인데요, 전 입주자 연락처 좀 알 수 있어요?"


 


준혁의 요청에 관리실 여직원이 우리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런 건 알려드리지 못하는데..... 왜요?"


"옷장 구석에 반지함을 놓고 가셨더라구요. 그걸 돌려드릴려구요."

 

준혁은 아무런 얼굴의 표정 변화없이 거짓말을 내뱉았다.

어쩌면 어젯밤 나에게도 저렇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요?"


"비싼 기념반지 같은데 빨리 돌려드리고 싶어요."

 

준혁의 선한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는지

 

여직원은 시큰둥한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여직원은 두꺼운 장부하나를 꺼내고 이리저리 몇 번 뒤지더니 번호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011에 xxx-xxxx요. 그런데 이 분은 입주한 지 3개월도 안돼 집을 비우셨네요.

단기 입주자였나봐요."


"단기 입주자요?"


"그거 있잖아요. 보증금하고 계약기간 없이 월세 더 내고 그냥 달 수로 끊어서 사는것 말이예요."


"아...그게 단기 입주자군요."


"반지함을 놓고 갈 정도로 급하게 이사가셨나 봐요."

 


번호를 받아 적은 준혁은 관리실을 나와 그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몇 번의 벨이 울리자 낯선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준혁의 휴대폰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저기...xx오피스텔 903호 입주자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전 부동산에 다 맡겨서 나왔는데요."


"저....그게 아니라 혹시 사시면서 무슨 일 없었나 해서요."


"무슨 일이요?"


"그냥...사시면서 집 안에서 이상한 일 겪지 않으셨나 해서요.."


"..........."

 

 

준혁의 질문에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듣고 계세요?"

 


준혁의 물음에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네.....그 쪽도 보셨군요."


"그렇군요. 그 쪽도 보신거군요."


"xx대 학생인가요?"


"네."


"저는 xx학과 대학원생인데 수업 없으면 잠시 시간내서 만날까요?"

 


낯선 남자의 제안에 준혁은 선뜻 응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학생회관 앞에 잔디밭 벤치에서 만나죠."


"좋아요."

 


우리가 만난 낯선 그 남자는 28세의 키가 큰 건장한 청년이었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머리만 보면 학생이라기보다는 회사원에 가까워 보였다. 

캔커피를 우리에게 하나씩 건네 준 남자는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느냥

 

말주머니를 풀기 시작했다.

 

"전 원래 이곳 학생이 아니라 지방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이 곳으로 왔죠.
그 오피스텔에 들어 간 건 5개월 전입니다.
목돈이 없어서 단기 계약으로 우선 입주를 했죠.
전 원래 추위에 강해서 웬만한 겨울 날씨에도 창문을 열고 사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 오피스텔은 밤만 되면 추운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난방을 하고, 창문을 모두 닫고 살았죠.
그런데...."

 

남자는 캔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추위가 가시질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면 어디선가 한기가 자꾸 몰려오는거예요.
그런데 그 한기의 방향을 보니까. 
창쪽이 아닌 복층 다락방쪽에서 한기가 몰려오는 겁니다.
다락방 구조 아시다시피 계단으로 올라가면 앉아서 뭔가를 해야 하는 높이 밖에 안되잖아요.
게다가 밀폐되어있고.... 그런데 그 곳에서 한기가 몰려온다는게 이상했죠.
저는 그 곳에 이불을 가져다 쌓아놓고, 그 한기를 막아보려고 했죠.
그런데 그 한기가 더더욱 기분 나쁜 건 몰려오는 주기가 있다는 겁니다."

 

"주기요?"

 

"네. 마치.....

누군가가 숨을 쉬듯 주기적으로 차가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 있죠.
혼자 있는게 익숙한 저는 웬만한 일에는 겁을 먹거나 그러진 않는데

그 집은 솔직히 좀 이상했어요."

 


남자가 캔 음료를 거의 바닥낼 때까지 우리는 단 한모금의 음료도 마시지 못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제가 처음으로 놀란 일이 있었죠.
낮에 청소를 하려고 다락방 이불을 정리하는데 그 이불에 무언가에 눌린 자국이 있는거예요.
누가 기대고 누운 흔적 있죠?
소름이 쫘악 끼쳤습니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이 곳에 있거나

아니면 다녀갔다는 생각에 온몸이 굳는 듯 했죠.
저는 미친 듯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서랍, 옷장, 장롱 등을 열어 젖혔습니다.
없어진 무언가를 찾는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솔직히.....누군가가 이 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르다는 생각이 더 앞섰기 때문이죠. 
경비실에 CCTV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없어진 물건도 없고,

그것 외에는 누가 들어왔다는 흔적이 전혀 없는터라

괜한 웃음거리 만들까봐 쉽사리 그러지도 못했죠.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는데,

자꾸 밤마다 그 기분나쁜 한기가 떠올라 찝찝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죠."

 


그는 갈증이 몰려오는지 거의 비어버린 캔을 연거푸 마시는 흉내를 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로 며칠동안 아무 일이 없길래 그냥 그렇게 그 일이 잊혀지나 싶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아시다시피 거기 오피스텔 화장실이 조금 좁아요. 
문을 닫아야만 변기에 앉을 수 있는 구조잖아요.
그 날은 밤도 아니고 아침이었어요. 
저는 큰 일을 볼려고 문을 닫고 일을 봤죠.
신문을 펼쳐들고 앉아 있는데........ 
그런 소리 알아요?"

 

 

남자의 물음에 우리는 치켜든 눈썹으로 대답했다.

 


"맨발로 장판지 위를 걸을 때 나는 저벅거리는 소리....."


 


남자의 말을 듣자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와....정말 소름이 돋더라구요. 
누군가가 제 거실방을 아주 느린 걸음으로 저벅거리며 돌아다니는 거예요.
현관문이 열리거나 닫히는 소리는 전혀 들은 적이 없는데......
저는 순간 화장실 수납장에 있는 유리로 된 로션병을 오른손으로 감아 쥐었어요.
그리고 천천히 변기에서 일어나 조용히 화장실문 손잡이를 돌렸죠.
휴대폰이라도 들고 들어왔으면 경찰에 신고라도 했을텐데....

휴대폰이 거실방에 있는지라 미칠 것 같았죠.
화장실 문을 거의 반 이상 열었는데도 그 저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거예요."

 

남자는 다시 갈증이 몰려오는지 비어버린 캔을 연거푸 마시는 시늉을 냈다.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캔커피를 그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후........."


 


남자는 긴 한숨을 내뱉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놈의 저벅거리는 소리...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이예요.
그런데 그 소리가 복층 계단으로 향하는 거예요. 
현관이나 화장실문에서는 계단쪽이 보이지 않잖아요.
단지 그 복층 다락방이 머리위에 있다는 뿐이지....
다락방은 바닥은 카페트 재질이라 걷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죠.
저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바로 옆의 현관문을 열고 추리닝 차림으로 냅다 튀었죠.
그리고 경비실로 갔습니다.
아저씨를 한참을 설득해서 복도의 CCTV를 봤죠.
한시간 전 것부터 거의 16배속 재생으로 돌리는데,

제가 있는 호실에는 아무도 출입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츄리닝 차림으로 달려나오는 제 모습만 찍혀 있었구요.
저는 아저씨를 다시 설득해서 제 방으로 동행했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정말 아무 것도......"

 

 

남자는 준혁이 건네 준 캔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전방을 잠시동안 주시하더니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물었다.


 


"그 쪽은 뭘 본거죠?"


 


그의 물음에 준혁이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창밖이요. 또렸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어둠속에서 창밖에 사람이 보였어요. 
처음엔 창밖에 나타난 귀신같은 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방안이 비친거였어요."


"헐...누구였죠? 남자인가요? 아니면....여자? 혹시..어린애? "

 

그도 놀라운지 눈썹을 치켜들며 준혁에게 물었다.

 

"아뇨.. 모르겠어요. 그냥 검은 형체가 천장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거예요."


"목매단 것처럼요?"


"모르겠어요. 그냥 상반신 중간부터 발끝까지만 보였어요.
그런데 그 뒤로 집을 나가신거예요?"

 

준혁의 물음에 남자는 다시 시선을 전방으로 향했다.

 

"아뇨...집에서 전세금을 마련할때까지는 거기서 당분간 살았어야 했어요.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대신 틈만 나면 연구실 동료들과 친해진 학부생들을 집에 불러서 같이 잤어요.
나이 먹고 그러는게 우습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 집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일이 일어났죠.
입주한 지 두 달을 좀 넘겼을 때였어요.
그 쪽과 거의 비슷한 일이예요."

 

남자는 숨을 한 번 몰아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날은 연구실에서 밤샘을 하고, 대낮에 집에 들어와서 잠에 골아떨어졌죠.
그리고 잠에서 깬 건 저녁 6시쯤이었어요.
그런데 일어나보니 이상한거예요.
베개가 흥건게 젖어 있는 것 있죠. 
땀은 아니고 제가 엄청난 양의 침을 흘리고 잔거예요.
저는 원래 바로 누워서 자기 때문에 침을 흘리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베개의 3분의 1이상이 젖어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침을 흘린거예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냥 누군가가 나와 같이 잠든 것 같다는 묘한 기분.......
그런데 결정적인 일은 그 날 밤에 일어났어요.
밤 9시가 조금 넘어갔을 때였어요.
피곤기가 가시지 않아서 저는 리포트 작성 대신에 영화 한 편을 다운받아 보려고 했죠.
그 때 불을끄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는 영화를 볼 때 습관적으로 불을 끄거든요.
한 참을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왼쪽 창가쪽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거예요.
다 들 아시죠?
밖이 어두우면 실내가 비친다는거......
저는 무심코 창을 쳐다봤죠."

 


갑자기 남자는 준혁이 건낸 캔커피를 찌그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복층 다락방에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있잖아요.
거기에 웬 아이가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겁니다. 내 뒤에서....."

 

 

남자의 얘기를 듣자 나는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려는 듯 5월의 상큼한 바람이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모니터 빛 밖에 없는데도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서인지

그 아이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보였어요."


"그래서 조금 전에 어린아이냐고 물어보셨군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로 놀란 적 있어요?
뭐가 진짜로 놀라는 건지는 모르지만, 전 그 때 진짜로 놀랬어요.
목구멍에 손수건 한뭉치를 틀어막은 듯 전혀 숨을 쉴수가 없었고,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어요.
비명 지른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예요.
정말 온 몸의 그 어떤 근육도 움직이지 못해요.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몸이 갑자기 풀어지죠.
기절하는거예요.
기절해 봤어요?
전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절해봤어요.
갑자기 전방의 화면이 쫘악 멀어지더니 TV화면 꺼지듯이

밖에서 안쪽으로 모아지듯 시야가 좁아지면서 사라져요."

 

남자는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캔커피를 쥔 두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공포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달의 입주기간이 20여일이나 남았는데도 방세를 모두 지불하고 이사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악몽같은 기억이었죠.
그 후로 주변 사람들에게 떠벌리면 돌아다녔어요.
그러지 않으면 저 혼자 미칠 것 같았거든요.
당신들도 거기서 버틸 자신이 없으면 빨리 떠나는게 좋을 거예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무서우면 그냥 불을 켜요. 
그리고....어둠속에서 창이나 거울을 보지 말아요"

 


우리를 겁먹이려는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충고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겁기만 했다.


 


"너 어떡할래?"

 

 

준혁이 나에게 물었다.


 


"미치겠네. 1년 계약해놓고 입주한 지 하룻만에 방을 내놔야 하는거야?
중개수수료는 어떡하고? 다른 입주자가 당장 들어올까?"

 

"그러면 당분간 내가 같이 있어줄까? 
나도 무섭긴 하지만 그 오피스텔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있고...."

 

어젯밤만 해도 미칠듯이 두들겨 패주고 싶은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준혁이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니 부모님한테 뭐라하고?"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지 뭐..."


"믿어줄까?"


"부모님은 나를 믿으신다. 걱정 말아라."


"괜히 나 때문에....고맙다. 준혁아..."


"친구 사이에 무슨 고맙기는......대신 오늘은 너 혼자 있어야겠다. 내일 짐 챙겨서 올게."


 


준혁은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씽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표정과 맞지 않는 재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오늘 밤 잘 버텨봐라. 죽지 말고..."

 


그의 공포스런 장난이 오히려 나에게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래..."


"찬기운 조심하고......후우~~~"

 


준혁은 입을 모아 나에게 휘파람 부는 시늉을 하더니 앞서 걸어가 멀어져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 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준혁의 모습 위로 서쪽하늘 멀리서 몰려오는 불길한 구름떼가 눈에 들어왔다. 


 

 


"아....진짜 어떡하지?"

 


 

 

텅 빈 방에 들어온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서 시간이 지나 준혁이를 빨리 보고 싶을 뿐이다.


 

 

'오늘 밤 잘 버텨봐라. 죽지 말고..'


 

 

준혁이의 장난스런 말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그냥 컴퓨터로 게임이나 할까?


PC방에서 밤샐까?


그냥 학과룸으로 가서 시간이나 죽칠까?


그냥 돌아다닐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없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출혈이 있더라도 그냥 방을 다시 내놓을까?


그런데 그건 너무나도 바보스러운 행동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


단지 전의 입주자와 준혁이의 말 뿐이었다.


나한테 보이지 않는데 나는 왜 이러 겁을 먹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래.....한 번 버텨보자.


어차피 살 집 아닌가?


1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녁 6시 밖에 안되었는데도 밖은 점점 어둠속에 묻히고 있었다.


기분 나쁜 구름떼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전면의 유리창이 모두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드리우고,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신문지를 덮고 테이핑하였다.


그리고 화장실부터 복층 다락방까지 불이란 불은 모두 켰다.


대낮같이 밝은 밀폐된 공간에 우두커니 나는 서있었다.


거실방 한 가운데 서서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말 나에게도 그들이 보일까?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음악을 들을까? 메신저를 할까? 게임을 할까? 아니면 영화를 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어느 한 가지를 꼭집어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멍하니 부팅이 완료된 모니터의 바탕화면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결정을 내리고 음악플레이어를 켰다.


평소 즐겨듣던 발라드 모음곡이 작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나느 의자를 뒤로 눕히고 책상위에 발을 뻗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노래를 즐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도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는 것 같았다.


수분이 지났을 무렵....


창밖에서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비가 오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껍게 드리워진 커튼의 가운데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은 나는 살짝 그것을 열어젖혔다.


기다란 이등변삼각형처럼 열려진 커튼 사이로 저 멀리서 번쩍이는 푸른색 섬광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이어 커다란 유리창 바깥면을 따라 누군가의 눈물처럼

 

 

빗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봄날의 아지랭이처럼 빗물은 꿈틀대듯 흘러내렸고,

 

 

그 창에 비친 나의 모습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나의 형상은 빗물과 함께 심하게 요동쳤다.


눈의 초점을 조금 더 멀리두자 나의 뒤로 창에 비친 복층의 다락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말한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보였다.


 

 

'복층 다락방에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있잖아요.......
거기에 웬 아이가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겁니다.'

 


순간 남자의 그 말이 떠오르자 나는 재빨리 창을 커튼으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초점을 잃은 눈으로 커튼 앞에 서서 마음을 추스렸다.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름끼치는 상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애써 다락방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다시 의자로 돌아와 몸을 뒤로 눕혔다.


잔잔한 노래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작은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를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다.


언젠가는 누구나 한번쯤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의 고통이었지만 어린 나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것들.....


 

 


아침이면 들리던 엄마의 잠깨우는 소리, 식사를 준비하던 주방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밥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쌀이 익어가는 냄새.........

화장실의 물 내려가는 소리, 아빠의 전기면도기 소리, 작업복 걸치는 소리......

 

아무런 주제도 없지만 늘 밥상에서 재잘거리던 엄마의 수다소리....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모두들 나를 위로하고 안타까워 했지만

 

 

그것이 내 가슴속 깊이 잠재된 트라우마를 씻어주진 못했다.


준혁과 친구가 된 건 2학기 때 자리배치를 다시 할 때부터이다.


그 때 준혁은 내 짝꿍이 되었다.


늘 뭔가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다녔으며,

 

 

짝꿍인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놈이다. 


어디서 싸우고 다니는지 가끔은 얼굴과 팔뚝에서 멍자국이 보이기도 하고,

 

 

귀에서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자리에 앉는 준혁에게서 풍겨나오는 담배냄새도,

 

 

간접적으로 준혁이 어떤 아이인지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준혁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준혁과 친해진 계기가 있었다.


같은 반에 건달같은 길중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준혁을 극도로 싫어했다.


길중은 싸움 좀 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준혁도 거기에 버금가는 아이였다.


그 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준혁을 향한 길중의 증오감은 당사자가 아닌 짝꿍인 나에게로 향했다.


길중과 그 패거리들은 나를 빵셔틀처럼 부려 먹었다.


우악스런 길중의 주먹이 무서웠던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따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낄낄대는 소리, 다른 아이들의 시선, 굴욕감 등은 모두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부모에 대한 말은 그 어떤 것도 용서의 대상이나 인내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길중의 딱 그 몇마디였다.

 

"뭐..돈이 없다고? 아...맞다. 니 돈줄되시는 분들이 멀리 가셨지?"

 

나에게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길중과 뒤엉켜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손에 잡히는 대로 뭐가 되었든지 그것을 길중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그의 패거리들이 나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준혁이 가로 막았다.

 


"꺼져 새끼들아!!! 가까이 오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모두가 얼어있는 사이 준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내 오른손 높이 들려진 철제 필통을 천천히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조그려 앉더니 속삭였다.

 


"그만해라.....애 죽겠다. 누가 길중이를 데리러 온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제서야 피범벅이 되어 있는 길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학이 풀리고 학교에 들어섰을 때 길중이를 포함한 모두가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실은 나의 광기 뒤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는 준혁을 더 두려워했는 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 준혁과 나의 공통점인지 모르지만 그 뒤로 우리는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내 휴대폰의 단축번호 1번은 준혁이다.


나는 옛 생각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팟!!!!'


 

 

옛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 깨운건 정전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은은하게 울려퍼지던 음악소리는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한 적막감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작은 비상등이 켜지면서 빛을 찾아 해매는 내 동공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슴푸레한 노란 불빛이 오히려 음산한 기운을 더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살폈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푸른색 섬광과 비상등 외에는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오늘 정전이라니....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등뒤로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하나씩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몰려왔다.


 

 

'....누군가가 숨을 쉬듯.... 주기적으로 차가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 있죠...'

 

 


그 남자의 말처럼 그 찬 기운은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엄두도 못냈다.


주책없이 떨고 있는 내 오른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이 느껴졌다.


단축번호 1번만 누르면 준혁에게 연결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 몸의 관절이 본드칠을 한 듯 굳어있었지만 나는 힘을 내어 뒤를 돌아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의 나약한 생각일 뿐인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 같진 않았다.


다락방쪽에서 스며나오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내 얼굴을 쓸어내듯 스쳐지나갔다.


누군가 지금 나와 같이 있다.


이제야 그 남자의 두려움을...아니, 준혁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러질 듯한 몸을 추스리고 나는 의자에 털썩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어 고개숙인 자세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뭔지 모를 자존심이 나를 의자에 묶어두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잊은 듯한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둠속에서 창이나 거울을 보지 말아요.....'

 


그 남자의 말......그 남자의 말......


비치는 것이 창이나 거울 뿐인가?


빛을 내기 때문에 평소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 것.....


바로 내 앞에 있는 불꺼진 모니터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풀었다.


그리고 자세를 고정한 채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검은 모니터 속에서 고개를 처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어깨 뒤에서 천천히 흔들거리는 사람의 발끝이 눈에 들어왔다.


기절하고 싶다. 


이것 만이 지금 나를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의지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건지 모르지만, 나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램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천장에 매달려 길게 축 늘어진 어떤 남자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위에 눌린걸까? 


나는 눈동자 외에는 몸의 그 어떤 근육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냥 바라만 볼 뿐......

 

 

 

'그런데 일어나보니 이상한거예요....배개가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 있죠..... '

 

 

 

낮에 만났던 남자의 말이 이젠 이해가 간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그의 입에서 가는 실처럼 계속해서 침이 흘러내렸다.


 

'도대체 넌 누구냐........'

 

이 말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맴돌았지만 난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다.


가위에 눌린게 확실하다.


이러지 않고서는 내가 이렇게 돌처럼 굳어버릴 수가 있나?


사력을 다해 눈동자를 돌려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나 피하면 피할 수록 그의 모습이 더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침은 입에서 흘러내리는게 아니었다.


어떻게 저렇게 길게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혀가 목젖까지 내려와 있었고, 


그 기다란 혀를 타고 흘러내린 침이 혀끝에서 늘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더욱 혼미하게 만든 것은 반쯤 뜨고 있는 그의 눈이었다.


왜 사람들이 죽음보다 더 한 무엇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이해가 간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이 이 정도까지 미치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도 돌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안구를 지탱하는 근육이 끊어질 듯이 나는 눈을 옆으로 돌렸다.


바로 그 때 내 오른손으로 부터 십여센티 떨어져 있는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단축번호 1번.....1번.......1번만 누르면 준혁이가 달려올 것이다.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손가락을 뻗었다.


온몸의 핏줄이 밖으로 기어나오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내 모든 정신과 시선은 오로지 그 작은 휴대폰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 밤 잘 버텨봐라. 죽지 말고...'

 

 

준혁의 말처럼 난 지금 버티고 있었다.


이 가위에서 풀려난다면 난 너에게 이야기 할 거리가 많을 것 같다.

 


 

 

 


'준혁아...너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한거냐?


어쨌든 난 지금 이 끔찍한 고통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이겨내려고 말이다.


결코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길중이를 내려눕힌 나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준혁아......


한가지 내가 넘어야 할 고통이 하나 더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 복층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좁고 가파른 계단에서 앞을 살피지도 않은 채, 그 희멀건 눈동자를 나에게 고정한 채.....


한 아이가 내려오고 있다.


계단의 넓이와 보폭이 맞지않는 걸음을 하고 있다.


그냥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디서 본 듯한 기억이 있는 이 아이가 이리저리 나를 살피고 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다....준혁아...


미안하다. 준혁아...


내가 버틸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다.


어디까지 입이 찢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이 아이가 크게 미소짓고 있단다.


사랑한다. 친구야.........'

 

 

 

 


 

 

"정신이 들어요?"

 

누군가의 부름에 나는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병실같은 낯선 방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의사 복장을 한 남자가 내가 누워있는 침대 끝에 서 있었다.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앞에 보이는 남자는 전에 만났던 입주자였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다..당신이 여기에 어떻게....."

 

 


나의 말에 그는 긴 한숨을 한번 쉬더니,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한 간호사 복장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 또한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관리실에서 봤던 여자였다.


남자는 천천히 발을 옮겨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사무적인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대한 답변을 주저하지 않았다.


 

 

"윤성진이요..."


 

 

그는 뭔가를 받아적더니 다시 사무적인 말투로 내게 물었다.


 

 

"최근에 친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어요?"

 

"준혁이요...김준혁..."

 

 


그런데 준혁이가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녀석 친구가 병원에 있는데 오질 않다니....


아니면 밤새 간호하고 잠을 청하러 간 걸까?


나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내게 물었다.


 

 

"목 매단 남자를 봤나요? 어린 아이도?"

 

 


남자의 질문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그...그걸...어떻게...."

 

 

나의 대답에 그 남자는 간호사를 한 번 더 쳐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남자는 서류철을 간호사에게 건네더니 침대에 누워있는 내 옆에 조용히 앉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 누구죠?"

 

"윤성진이요...윤성진이라구요"

 


남자는 입을 한 번 굳게 다물더니 말문을 열었다.

 


"윤성진씨....당신은 죽었어요."

 

"네? 뭐라구요?"

 

"당신은 윤성진이 아니고 김준혁이라구요. 알겠어요?"


 

 

나는 어이없는 표정의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지..지금...제게 뭐라 그러시는 거예요?"

 


"김준혁씨....그냥 내 말을 듣고만 있어요.
당신 친구 윤성진은 죽었어요
3년 전 윤성진씨는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았죠.
게다가 학교에서 급우들의 집단 괴롭힘으로 윤성진씨는 더욱 비뚫어진 성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기억 안나요? 
같은 급우 한 명을 흉기로 잔혹하게 살해한 후 윤성진씨는 목매달아 자살을 했구요.
그 걸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유일한 친구였던 김준혁 당신이구요.
당신은 알콜 중독자인 홀아버지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어요.
어렸을 적부터 언제 떠난지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엄마를 마루턱에 앉아 항상 기다리게 일이었어요.
그나마 유일한 보호막이었던 아버지마저 간암으로 죽자,

당신은 윤성진에게 더 집착을 하게 된 겁니다.
친한 친구를 잃은 뒤로 당신 또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결국 당신은 이 곳까지 오게 된 겁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끔찍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당신이 선택했던 방법은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었죠.
당신은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싸움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단지 친구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당신 스스로

윤성진 입장에서 만들어낸 강한 김준혁일 뿐이예요.
이제 모든 게 이해가 가죠?
당신이 거울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의 실제 모습이 비치는 것을 싫어해서 입니다. 
그 아이의 얼굴이 낯익지 않았어요? 
바로 어렸을 적 김준혁씨 당신이예요."

 

 

 

 

갑자기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김준혁씨.....다시 기억이 떠오르나요?
당신이 이곳에 온 지도 2년이 다 되어 가요.
당신의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떠오르는 기억을 애써 지우며 윤성진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저는 지금 다섯번째 똑같은 말을 당신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기억이 도중에 되살아나는지 살피기 위해 당신이 말한 상황을

저와 김간호사가 재연해 주었죠.
이것 또한 벌써 세번째나 하는 거예요. 
도중에 당신 기억이 돌아올거라 믿으면서....
힘들어도 이젠 친구를 떠나 보내세요.
윤성진씨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아요....
당신이 윤성진씨를 흉내낸다 하여도 당신은 결코 윤성진이 아니예요.
이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세요....김준혁씨..."

 

 

 

뜨거운 눈물이 샘 솟듯이 흘러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깨물으며, 나는 울음소리를 삼켰다.


 

 

 

"김준혁씨....젊은 나이에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거예요?
당신의 완치여부는 순전히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힘들어도 과거를 지우지 말아요. 이를 악물고 받아들여요.
당신만 마음가짐을 다진다면 당신은 얼마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당신은 다중인격도 아니고...귀신에 씌운 것도 아니예요.
이제 친구를 떠나 보내세요. 
잡을 수 없을 허상을 찾아 헤매지 마시고, 이제 현실로 돌아와요."

 

 

나는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오른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쏟아져나오는 뜨거운 액체는 감출 수가 없었다.

 

 

 

"김준혁씨....이제 선택하셔야 합니다.
다시 윤성진씨로 돌아간다면 당신은..치료실....

아니 당신이 착각하는 그 오피스텔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다면 다른 완치단계의 환자들과 생활하며,

아무런 제약없이 퇴원할 때까지 정상인들처럼 살아갈 겁니다."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간호사에게 건넸던 서류철을 받아들더니,

 

무언가 받아 적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조용히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눈물이 어느 정도 말라감을 느끼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


나의 대답이 지연되자 남자는 다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뭡니까?"

 


나는 남자의 얼굴과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말을 아꼈다.


그리고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김준혁이요..."


 

 

나의 말에 남자는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당신 친구 윤성진씨는 어떻게 되었죠?"

 

"3년 전에 죽었습니다."

 

 


남자는 흐믓한 표정을 다시 한번 짓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이게 뭔지 알아요? 김준혁씨?"


 

 

남자가 꺼내 든 것은 빨간색 말보로 담배였다.


 

 

"담배요...."

 

"맞아요. 담배죠. 
그런데 그냥 담배가 아니예요.
당신의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당신이 한대씩 피우던 담배예요.
1년 동안 20개피 중에서 이제야 절반 정도 줄었군요.
당신같은 골초가 1년 동안 10개피만 피웠다는 것은

그 동안 김준혁보다는 윤성진으로 산 기간이 더 길었다는 말이예요.
이 담배맛을 기억하나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담배를 내게 건네는 시늉을 하더니 물었다.


 

 

"밖에 나가서 담배 한대 피울래요?"

 

"네...."

 

 


잔디 정원의 벤치에 앉아 맑디 맑은 하늘을 보며 나는 담배 연기 한모금을 빨아들였다.


간만에 맞보는 담배라 그런지 목이 막혀오며 토할 듯이 기침이 쏟아졌다.

 


"콜록! 콜록! 콜록!"

 


내 뒤에 서 있는 두 남녀의 소근거림이 들려왔다.


 

 

"박사님......김준혁씨 담배피면서 기침하는 것 처음보네요."

 

"그러게...."

 

"그리고 김준혁씨가 핸드폰 1번 단축번호로 설정해 놓은게 있는데 모르는 번호예요."

 

"그래?"

 

"뒷자리는 김준혁씨거랑 같구요, 앞자리만 010 이 아니라 016 이예요. 예전 자기 번호인가 보죠?"

 

"그런가 보네...그런데 왜 예전 자기 번호를 단축번호 1번으로 했을까?"

 

 

 

나는 조용히 입 주위에 말라 붙은 침을 털어냈다.

 

 

 

 



    • 글자 크기
내가 겪은 귀신 이야기 1~3편 묶음 (by 아리가리똥) 연쇄살인마들의 한마디 (by 아리가리똥)
댓글 2

댓글 달기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