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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447번지의 비밀 下

title: 아이돌의젖홍길동2018.12.22 10:20조회 수 108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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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앞에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사장님, 어디 갔어요?"

 

"아까 말씀드렸는데요. 오늘 어디 가신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여직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나는 사장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있다는 멘트만이 돌아왔다.

 

조퇴한 김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아따.. 우리 사장님 좀 그만 괴롭히쇼."

 

직원 중의 누군가가 나에게 명령하듯이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까칠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사장님이 얼매나 좋은 사람인디...뭐 털어봤자 아무것도 안 나온당께요. 전에도 누가 이 건물 무허가라고 신고했다가 군청에서

 

나온 직원 면박만 당하고 돌아갔당께. 그만 하소."

 

"지금 이게 무허가건물 조사하는 것하고 같습니까? 사람이 둘이나 그것도 이 회사 직원이 죽었어요. 댁이 경찰이라면 가만히 있겠소?"

 

"영주는 사고라고 들었고, 승균이 그 친구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장님과는 아무 상관 없을겁니다."

 

"사장과 무관한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승균이 그놈이 노름빚에 허덕일 때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줬당께요. 승균이가 딸내미 잃은 후 일도 안하고 넋이 나가 있었을

 

때도, 사장님이 다 뒷치닥거리 해주고 기다려줬당께요. 그런 분이 뭣땜시 승균이에게 해를 가하겄소? 안그렇소? 우리 직원들한테는

 

친삼촌같은 분인디."

 

"혹시 김태섭씨가 황승균씨한테 노름빚 진 것 알고 있어요?"

 

"승균이, 태섭이, 영주 그 자식들 끼리끼리 노름질 하는 것 땜에 사장님이 엄청 속상해 하셨습니다. 태섭이 이놈은 승균이한테도

 

빚지고, 영주한테도 빚지고...흐미...장난 아니었당께요. 승균이한테는 무슨 차용증까지 썼다 합디다."

 

나는 그에게서 뭔가 정보를 더 얻어낼 것 같았다.

 

 

 

"한달 전쯤 사무실에서 노름하다가 큰 소동이 벌어졌다는데... 알아요?"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겄는디...그 자식들 월급날만 가까워지면 맨 포커질이나 한당께요. 그세 놈이 똘똘 뭉쳐가지고는......

 

월급 받기도 전에 그 날 돈 다 날리고 싸우고 지럴염병을 합디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 친구들 사이가 별로 안 좋았나 보네요?"

 

"처음엔 좋았지라...근디 그넘의 노름질이 다 망쳐놨당께라. 딴놈은 몰라도 승균이 그놈은 사장님 얼굴 봐서라도 그러면 안되는디..."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디 그놈들은 뭔 재미로 허구헌날 셋이서 포커를 친다냐? 포커는 세명이서 하면 패가 안 떠서 재미가 없는디...다섯이 딱 좋은디."

 

"뭐라구요? 세 명이요?"

 

 

순간 나의 미간이 찌푸려짐을 보자 옆에 있던 박형사가 입을 열었다.

 

"어? 김형사님. 취조실에서 김태섭이 말로는 여섯명이서 포커를 했다는데..."

 

이에 그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여섯이오? 고것이 무슨 말이라요? 이 사무실엔 포커 칠 줄 아는 사람이 그놈들 딱 셋하고 나뿐인디...

 

게다가 지는 그런 지저분한 아그들 판에는 안낀당께요"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김태섭...이 새끼...어디서부터 거짓말인 거야?"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콘테이너 사무실의 천장에 쌀알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오늘 야근은 다 날아가부렀네..야근을 해야 돈이 좀 되는디..."

 

남자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더니 푸념을 늘어놓았다.

 

"저 산중턱의 폐가에 대해서 알아요?"

 

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가로 저었다.

 

"오메...형사님. 그런 흉가 얘기는 꺼내질 말랑께요. 못들었소? 거긴 귀신 나타난다믄서...여기 사람들은 그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단

 

말이오. 그랑께 왜 사장님은 이런 곳에 사무실을 차려가지고는....."

 

"황승균씨가 한 달 전에 저 폐가에 갔다던데 알고 있어요?"

 

"뭐시라? 그 폐가에 갔다고라?"

 

"몰랐어요? 김태섭이 그러던데..."

 

"워메...그랑께 승균이가 좀 이상하게 보였구만. 언제서부턴가 말도 잘 안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했는디..."

 

 

나는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는 자리에 쪼그려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한 달전 여기서 포커를 쳤을 것이다. 김태섭의

 

얘기가 상당히 구체적인 걸로 봐서 어느 부분까지는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지금 이 남자의 얘기도 어느 정도 김태섭의 말이 신빙성이

 

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날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냐는거다. 정말로 황승균이 그 폐가에 갔을까?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곳인데...혹시나 황승균이 거길 갔다 하더라도 제 발로 걸어갔을까? 나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확실한 건 그곳에 갔다면 분명히 뭔가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내일이면 죽은 황승균의 발인날이다. 오늘 무언가를 밝히지 않으면

 

이대로 황승균은 사고사로 처리되고 사건은 종료된다. 지금 뭔가를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 박형사에게 말했다.

 

 

"박형사...지금 그 폐가로 가봐야겠다."

 

나에 말에 박형사보다 오히려 그 까칠한 수염의 남자가 더 놀래는 것 같았다. 여직원은 떡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오메... 형사님... 미쳤는갑네. 뭔 짓이라요. 그 집은 귀신 나타나는 흉가랑께요."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멀뚱거리고 서 있는 박형사를 다그쳤다.

 

"뭐해? 차에서 후레쉬랑 우산 챙기고 출발하자구."

 

"예?...정...정말로 가시게요?"

 

"그럼..내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애? 설마 박형사..진짜로 귀신 나타난다고 믿는건 아니겠지?"

 

"그..그게 아니라..."

 

"오메...참말로...형사님. 뭔 귀신 잡으러 가요? 그러지 말랑께요. 귀신이라도 들려오면 어쩔라고 그런다요?"

 

 

 

남자는 여전히 나의 행동을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서 차로 향했다.

 

내 등뒤에서 여전히 그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워메...형사질에 무당질까지 할랑갑네. 김양아...빨리 퇴근해 버려야 쓰겄다. 형사가 귀신들려 오면 뭔 험한 꼴 당할지 모르겄다."

 

이제 막 해가 기울었을 시간인데도 주위는 이미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줄기가 만든 어둠 속에 묻혀가고 있었다. 우산과 손전등을

 

꺼내든 나는 잠시 먼 저편을 응시했다. 사무실 뒷편의 산중턱을 돌아가면 그곳이 있다. 간간히 번쩍이는 번갯불이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듯 조명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박형사에게 나는 말을 건넸다.

 

"정신 차려. 우리는 귀신을 만나러 가는게 아니라 증거물을 찾으러 가는거야."

 

 

 

빗줄기와 바람이 제법 거세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쓰고 있음에도 무릎까지 빗물이 젖어드는 듯했다. 조금씩 콘테이너 사무실이 멀어

 

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박형사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개 끌려오듯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시멘트로 다져진

 

콘크리트길이 서서히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20여년 동안 방치되어 있었으니 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로 신기할 뿐이었다.

 

서서히 그 길은 곧 맨 진흙밭이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중턱을 옆으로 돌아 사무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면에 그 폐가가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번쩍일 때마다 그 심상치 않은 위용이 눈에 꽂혔다.

 

비닐조각인지 천조각인지 모를 기다란 그 무엇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 듯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아....김형사님. 왜 하필 지금 가야 합니까?"

 

빗줄기 속에서 박형사의 외침은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나!! 지금밖에는 시간이 없어!!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와!!"

 

어느새 땅바닥이 질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산을 쓴건지 안쓴건지 온 몸이 속부터 젖어가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 폐가 수미터 앞에 도착하였다. 현관문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그 집을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어둠이 굉장히 짙어졌음을 느낀 나는 손전등의 불을 밝혔다.

 

손전등이 밝히는 조명의 공간 속으로 시선이 모아지자 그 폐가는 더욱 더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들어가자."

 

나는 폐가의 현관통로로 발을 디뎠다. 그 집을 관통하는 세찬 바람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와 박형사는 우산을 접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짜그르...."

 

작은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가 제일 먼저 우릴 반겼다.

 

"짜그르...짜그르..."

 

나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박형사를 여기까지 끌고왔지만, 지금은 박형사만큼이나 떨리고 긴장이 되었다.

 

나와 박형사는 손전등으로 이곳 저곳을 비추었다. 순간 손전등의 동그란 불빛에 거실에 걸린 영정사진이 비추어졌다.

 

백발의 할머니인데 그다지 평화로운 모습의 사진은 아니었다. 김태섭의 말이 맞다면 황승균이 가져온 사진이 바로 저것일 것이다.

 

 

"짜그르...짜그르..."

 

유리조각 밟히는 소리는 여전히 멈추질 않았다. 이 집안의 모든 유리제품이 다 박살이라도 난 것처럼 사방에 유리조각 천지였다.

 

가전제품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거미줄로 뒤덮힌 나무탁자, 철제 선반같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김...김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나는 박형사가 말한 곳을 바라보았다. 먼지로 뒤덮혀 무슨 색인지 알아볼 수 없는 소파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먼지 위에 사람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누가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더 나를 놀라게 한건 따로 있었다. 그 먼지 위에 난 자국이 너무나도 선명하다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처럼.....

 

 

"누구지?"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우리는 안방쪽으로 발걸음을 조금씩 옮겼다. 번쩍이는 번갯불과 함께 잠시후 천둥소리가

 

멀리서 몰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계속 옮기려는 순간...다시 한번 큰 번갯불이 집 안으로 파란색 섬광을 내뿜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나무처럼 굳어버렸다. 박형사는 봤는지 모르지만, 지금 내 왼쪽 편에 누군가 서있는 모습이 그 찰나의 섬광과

 

함께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왼쪽 빰이 얼음물에 젖는 듯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나는 잠시 몇 초간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시간이 끝나자 즉각적으로 그 곳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사각진 벽의 구석만 보일 뿐 그 형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오른손은 이미 권총의 손잡이에 가 있었다.

 

 

"김형사님...왜 그래요?"

 

"아...아냐...뭘 잘못 봤나봐."

 

내가 잠시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박형사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았다.

 

"김형사님, 창고 쪽에 뭐가 있는데요?"

 

나와 박형사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것을 살폈다. 녹이 슬어 두꺼운 갑옷을 입은 듯한 쇠기둥에 수십 차례 무엇을 둘둘 감은 듯한

 

청테이프였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영수증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그것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뭐야..이거....신용카드 영수증이네. 이건 현금 영수증....액수도 몇천원짜리네..."

 

"누구 건가요?"

 

"서명을 봐...황씨가 맞는 것 같지?"

 

"예.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이런게 왜 여기에 떨어져 있죠?"

 

"주머니를 뒤진 거야. 황승균을 여기에 묶어놓고...바닥에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쓸려나간 걸로 보아 여기에 묶여있는 상태로 발버둥을 친 것 같애."

 

 

 

갑자기 으스스한 기운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들....."

 

나는 순간 박형사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응? 방금 뭐라 그랬어?"

 

박형사는 뜬끔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

 

"방금 뭐라 그랬냐구?"

 

"아...아무 말도 안했어요."

 

나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박형사는 모르는 듯 했지만 나에겐 정말 들린다. 지금도 그렇다.

 

"아들....."

 

"뭐..뭐라고?"

 

박형사는 정말 아무 것도 안들리는 걸까? 나의 독백에 박형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갑자기 알 수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김..김형사님..왜 그래요?"

 

"아들....."

 

중년 남자의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아들....."

 

나는 쏜살같이 권총을 빼내들어 보이지도 않는 그 누군가를 향해 겨누었다.

 

"누구야? 새꺄!!"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박형사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김형사님!! 미쳤어요? 총 내려요!!"

 

나는 빠른 속도로 사방을 손전등으로 비춰보며 그 소리의 정체를 찾았다. 이유없이 자꾸 눈물이 쏟아졌다.

 

"김..김형사님 정신 차려요!!!"

 

박형사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박형사!! 정말 못 들었어? 장난치는 거지?"

 

나는 박형사의 대답을 듣기 위해 그의 얼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나보다도 박형사가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 정신차리세요. 여기 오기 전에는 저더러 정신차리라고 하셨잖아요!!"

 

박형사는 장난을 치는게 아니었다. 순간 번개의 섬광이 내부에 쏟아졌다. 박형사의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리고 섬광의 잔상과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왜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멈추질 않는걸까?

 

나는 손전등을 들고 재빨리 집안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여기저기 쾨쾨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누구야...어떤 새끼가 장난치는 거야!!!"

 

나의 행동이 기이해 보였는지 박형사가 내 뒤를 좇았다. 집안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살폈지만 그 정체모를 형상과 소리는 어느 곳에도

 

있지 않았다. 나의 뒤를 급하게 좇던 박형사가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리고 침착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김형사님....귀신한테 홀린 거예요? 귀신 없다면서요? 총 주세요."

 

"왜?"

 

"사고날 것 같아요. 주세요."

 

박형사 말대로 사고날 것 같았다.

 

그런데 손에 든 권총을 박형사에게 건네려는 순간 거실창 너머로 누군가의 어두운 형상이 눈에 들어왔다. 번갯불이 그곳을 밝히고 나

 

서야 그것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미친듯이 그를 향해 뛰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질퍽거리는 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그 검은 형상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근접해서야 나는 그가 우비를 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새꺄!!!"

 

마음 같아서는 권총의 방아쇠라도 당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형사 말대로 사고가 날지 몰랐다.

 

나는 들고 있던 권총을 주머니 깊이 박아 넣었다. 손이 가벼워지자 나의 뜀박질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야!! 이 개새끼야!! 거기 안서!!!"

 

천둥같은 나의 외침에 놀랐는지 그가 힐끔 뒤를 쳐다보는 시늉을 하더니 앞으로 고꾸라졌다. 발을 헛딛은 것 같았다.

 

넘어진 그는 발목을 잡고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개새끼..너 누구야!!!"

 

나는 넘어져 잇는 그의 가슴을 제압하고 머리를 덮고있는 우의를 벗겨냈다. 김태섭이었다.

 

 

"너...이 새끼...이럴 줄 알았어."

 

그가 저항을 하려 하자 나는 그의 팔을 비틀었다.

 

"아아아악!!!!"

 

그의 비명소리에 고막이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가 황승균이 죽였지!!!"

 

쏟아지는 빗줄기가 화살처럼 얼굴을 때리자 태섭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헐떡거리며 벌리고 있는 입속으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갔다.

 

"말해 새꺄!!! 니가 죽였지? 뒤가 켕기니까 여기까지 감시하러 온 것 아냐!!!"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어느새 주머니 깊숙히 박혀있던 권총이 그의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김형사님!! 뭐하시는 거예요!! 당장 총 치워요!!!"

 

뒤늦게 따라온 박형사가 나를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박형사의 말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안 죽였어요...정말이예요!!"

 

"그럼 누가 죽였어? 왜 나한테 거짓말 했어? 새꺄!!!"

 

"거짓말 안 했어요!! 정말이예요!!! 켁켁...."

 

"이 개새끼 또 거짓말 하네. 좋아...너와 노영주가 황승균를 묶어놨던 곳으로 가면 떠오를 거다. 일어나 새꺄!!"

 

나는 그의 목을 틀어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는 발을 접질렀는지 제대로 땅에 발을 딛지 못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죽은 개 끌고 가듯이 끌고 갔다. 그 폐가를 향해서...박형사는 어찌해야

 

될 지를 모르며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박형사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하는지 태섭은 더 크게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제발 그만해요!!! "

 

"이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군. 저 집에 들어가면 뭔가 떠오르겠지. 안 그래?"

 

"제..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이예요. 아아악!! 형사님. 저 집에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말해 새꺄!! 누가 황승균이 죽였어?"

 

나는 그의 목덜미를 더 세게 틀어 쥐었다.

 

"아아악!!! 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했단 말예요!!"

 

그제서야 나는 내 손에 끌려오던 태섭에게 시선을 보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사...사장님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해서....으허헝헝"

 

 

 

갑자기 그는 하염없이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는 쥐고 있던 그의 목덜미를 놓았다. 나는 누운 자세로 한참 동안 통곡을

 

멈추지 않고 있던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세를 낮춘 후 그에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장은 다 알고 있었군."

 

"흑흑흑......"

 

"포커를 치던 그날 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콜록.. 콜록.."

 

숨을 돌리는지 아니면 목구멍으로 빗물이 들어가서인지 모르게 태섭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박형사가 우산을 펴고 조용히 다가와 태섭과 나에게 쏟아지는 빗물을 막아 주었다.

 

 

"그날 다툼이 있었어요. 전에 말했듯이 승균이 형님이 돈을 제일 먼저 잃었어요. 콜록...남은 둘이 치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그대

 

로 판을 접으려고 했죠. 그런데 승균이 형님이 계속 돈을 꿔달라는 겁니다. 노름판에서 돈을 꿔주면 그냥 돌고 도는 거잖아요. 우리가

 

전문 타짜도 아니고...안된다고 했죠. 그러자 갑자기 형님이 내 멱살을 잡더니 마구 윽박을 지르는 거예요. 지금 당장 내가 꿔준 천만

 

원을 갚으라는 거예요. 옆에 있던 영주 형님이 말릴려고 했는데 소용없었어요. 어린 놈의 새끼가 도박에만 맛을 들여 돈 귀한 줄 모른

 

다며 타박을 하는 거예요. 우리 셋 다 술에 취해 있었는데...무시하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분노가 치밀더라구요. 한 대 치고 싶었죠.

 

그러나 꾹 참았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형님을 놀려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한 겁니다. 그 폐가의 영정사진을 들고 오면

 

100만원을 빌려주는게 아니라 그냥 주겠다고...그 날 엄청나게 비가 쏟아졌어요. 오늘처럼요. 약속이나 지키라면서 승균이 형님이

 

빗속을 뚫고 비틀거리며 그 폐가로 가는 겁니다. 저와 영주형님은 뒤를 좇았어요. 그 집 현관에 다다르자 승균이 형님이 정신이 들었

 

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는 거예요.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죠. 뒤따라 온 저희는 거기서 승균이 형님을 놀려댔죠.

 

 

 

그러자 승균이 형님이 열이 뻗치는지 갑자기 저의 멱살을 잡고 그 집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제가 반항하며 발버둥쳤는데 그 형님이

 

자꾸 제 뺨을 때리고 욕을 하면서 그 집으로 저를 밀어넣는 겁니다. 그리곤 그 영정 사진 앞에 저를 세우더니, 내가 가져가는 걸 똑바

 

로 보라며 윽박을 질렀죠. 화가 났죠. 저는 100만원어치 값어치를 하려면 혼자 와야지 왜 끌고왔냐면서 승균이 형님의 밀쳐냈습니다.

 

벽에 잠시 머리를 부딪힌 형님은 죽겠다고 엄살을 부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저를 고소해서 콩밥을 먹이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사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그 날 술을 먹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분에 못이겨 그 집 창고 쪽에 있는 쇠기둥에 형을 묶어놨죠.

 

묶어놓고 보니까 그 차용증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형님의 주머니와 지갑을 뒤졌는데 종이쪼가리만 있고 차용증은 없는 겁니다.

 

귀신하고 노름이나 하고 있으라며 형님을 버려놓고 그 집을 빠져나왔어오. 영주 형님이 말리긴 했지만, 영주 형님을 강제로 이끌고

 

저는 그 집을 내려왔어요. 그 땐 정말 겁만 주려고 했던 겁니다. 사무실에 있다보니까 조금씩 술이 깨더라구요. 그 때 승균이 형님이

 

조금 걱정되는 겁니다. 1시간 쯤 지나서 저와 영주 형님은 다시 그 집으로 올라갔어요. 혹시나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도 되더라구요.

 

 

현관에 다다르자 저희는 심장이 멎는줄 알았습니다. 승균이 형님이 나무토막처럼 거실에 떡하고 서있는 겁니다. 창고쪽에는 청테이프

 

같은 것부터 낫이나 호미같은 녹슨 연장이나 도구들이 가득했는데...형님이 한 손에 낫 같은 걸 들고 서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아요. 우린 그 형님한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거예요. 그런데 형님이 조금 이상했어요.

 

후레쉬로 비친 얼굴은 웃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희에게 그러는 거예요.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이제 왔냐고...그러면서 등뒤에

 

감춰둔 영정사진을 저희에게 건네는 겁니다. 소름이 쫘악 돋았어요. 다리가 후덜덜 떨리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어요. 사진을 내밀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진을 받아들지 않으면 죽일 것 같았어요. 우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죠. 그런데 갑자기

 

형님이...저희에게 자기 딸을 소개시켜 주겠대요. 그러면서 안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승균이 형님 딸은 5년 전에

 

죽었거든요. 우린 본능적으로 형님이 귀신 들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린 형님이 안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미친 듯이 그 폐가를

 

도망쳐 나왔습니다. 정말 미친 듯이요."

 

 

 

태섭의 눈빛에는 거짓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뒤로 형님이 조금 이상해졌어요. 생각보다 무척 밝아진 겁니다.  일도 열심히 하고 술담배도 잘 안하고...특히 노름을 갑자기 끊었

 

어요. 그런데 그건 잠시였어요. 시간이 지나자 형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한동안 끊었던 술을

 

다시 했는데 정말 깜작 놀랐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소주 대여섯병을 그 자리에서 나발 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줄었어요. 자꾸 어딘가로 사라지는 겁니다. 어떤 작업자는 승균이 형님이 한밤중에 그 폐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하더라구

 

요. 뭔가를 잔뜩 싸들고 말이죠. 심지어 그 폐가에서 승균이 형님이 한밤중에 누군가와 말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죠. 그 집을

 

부수기로 했어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 형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저희는 도망을 쳤고, 사장님과 다시 그 자리에 돌아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저희는 이상한 말을 듣게 됐어요."

 

 

 

"무슨 말?"

 

"사장님이 형님을 달래려고 가까이 가는데...형님이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며 사장님한테 말하는 거예요. '이봐...홍선이 오랜

 

만이네.' 이러면서요. 순간 사장님이 우리만큼이나 무척 당황해 하셨어요. 형님은 말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 때 자네 왜 그랬나? 왜

 

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었나?' 이러잖아요. 더 놀랄 줄 알았는데 사장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지더라구요. 오히려 미소까지 짓더라니

 

까요. 그러더니 '형님, 그땐 미안했소이다' 이러면서 화를 풀고 승균이 좀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저와 영주 형님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

 

고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승균이 형님한테 승균이를 돌려달라고 하다니요. 사장님이 저 폐가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

 

이 들었어요. 게다가 어떤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이 드니까 갑자기 사장님이 무서워졌어요."

 

 

 

"사장이 니들 입막음을 했겠군. 그렇지?"

 

"사장님이 우릴 협박하거나 윽박지르지는 않았어요. 단지 돈을 몇 푼 쥐어주면서 오늘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 그 뒤로 황승균이는 어떻게 된거야?"

 

"사장님이 저와 영주 형님에게 번갈아가면서 승균이 형님을 감시하라고 했어요. 특히 저 폐가에는 절대 가지 말도록 명령하셨죠.

 

그 날 일당을 톡톡히 챙겨 주시니까 저희들이야 아쉬울게 없었죠. 폐가로 가려는 승균이 형님과 몇 번의 몸싸움이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감시를 하고 있던 영주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승균이 형님이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계속 소주

 

를 사 가지고 온다는 겁니다. 사장님은 무엇을 눈치챘는지 급하게 승균이 형님 집으로 달려갔어요. 저 또한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갔죠.

 

저희 셋이 승균이 형님 집에 들어섰을 때 이미 형님은 죽어 있었어요. 엄청나게 많은 양의 소주를 입에 들이부은 것 같더라구요."

 

 

 

"지금 하는 말 진짜야?"

 

"뭐든 조사해 보세요. 지문이 되었든, 족적이 되었든, CCTV가 되었든...우리가 거기에 도착했을 때 형님은 이미 숨이 멎어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그 때 넋두리를 하시더라구요. 승균이를 최씨 형님이 데려갔다는 거예요. 밖으로 나온 저희는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죠.

 

그런데 영주 형님이 승균이는 우리가 죽인거라며 탄식을 하는 거예요. 경찰이 오면 얘기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

 

어요. 승균이 형님 차용증을 경찰이 보면 분명히 저를 의심할텐데, 거기다가 그 폐가에서 있었던 일까지 말해 버리면 용의자 1순위로

 

몰릴 것 같았어요. 놀란 저는 입막음을 하려고 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담담하셨습니다. 신고해 봤자 바뀌는게 아무 것도 없을거라고.

 

살아있는 이승의 사람이 명을 끊은 게 아니니, 경찰이 믿어주지도 않을거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영주 형님은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

 

어요. 불안했어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황승균이 집을 털었군."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허허허.."

 

태섭은 기가 차는지 눈물섞인 웃음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영정사진은 황승균이가 다시 갖다논 거야?"

 

"뭔 소리예요? 우린 그 사진을 어디다 집어던졌는지도 기억도 안 날뿐더러, 그 뒤로 그 거실의 영정사진은 보이지도 않았어요.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훗...이 새끼 봐라...."

 

나는 상의 주머니를 뒤져 촉촉히 젖어가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후 길게 한모금을 빨아들였다.

 

나는 태섭을 노려보며 아무 말없이 연신 담배를 빨았다. 빨고 내뱉고...다시 한번 빨고 내뱉고...두려웠다.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려왔다. 손이 떨려왔고, 정신이 혼미했다. 나의 이러한 소름끼치는 감정도 모른 채 박형사가 거들었다.

 

 

 

"김형사님, 폐가에서 영정사진 봤어요?"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쉬지 않고 담배만 빨았다. 간혹 터지는 푸른색 섬광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태섭을 멍하니 응시한 채 담배의 필터가 타들어갈 때까지 빨아댔다. 연기가 쓴맛을 내자 나는 그제서야 흡입을 멈추었다.

 

"형..형사님..왜 그래요?"

 

태섭은 나를 보면서 두려움에 떠는 것 같았다.

 

"무섭게 왜 그래요? 형사님....."

 

나는 미동도 없이 담배꽁초를 바닥에 떨구고는 주머니에 넣었던 총을 다시 꺼내 들었다. 순간 태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미..미쳤어요? 형사님!!!"

 

태섭은 내가 자기자신을 죽일거라 착각했나보다. 나는 꺼낸 총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뒤에 서 있는 박형사에게 내밀었다.

 

 

"박형사, 받아라."

 

"왜요? 아까 달라고 할 때는 안 주고...."

 

"아무래도 니 말대로 사고가 날 것 같다."

 

나는 긴 한숨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녀석...박형사 니가 좀 데리고 내려와라."

 

돌아서 내려가려는 순간 나는 박형사에게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했다.

 

"박형사, 정말 거실에 걸려 있던 사진 못 봤어?"

 

"예. 사진 같은 건 없었잖아요."

 

"정말?"

 

"김형사님은 보셨어요?"

 

".............사람 소리도 못 듣고?"

 

"정말, 왜 그러세요?"

 

 

갑자기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너털웃음이 삐져나왔다.

 

"허허허..씨발 미치겠네."

 

박형사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태섭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형...형사님. 그 영정사진 본 거죠? 그렇죠? 거기에 걸려 있지도 않았는데 본거죠? 그리고 사람 소리도 듣구요?

 

에이 씨발...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당신도 귀신 들린 거야!!"

 

"닥쳐!! 새끼야!!"

 

나의 호통에 태섭이 찔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김형사님...정말이예요?"

 

박형사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며 산중턱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김형사님, 우산 안 써요?"

 

박형사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그냥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걸었다. 그냥 뭔가 묻은 때를 씻고자 했다.

 

내 몸에 뭐가 붙었는지, 뭐가 묻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다 씻고 싶었다. 갑자기 온몸에 밀려오는 이 무력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일까? 그리고 그 폐가에서 나는 왜 눈물을 흘렸던

 

것일까? 머리가 복잡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오고 다리에 힘이 없다. 근래에 그다지 힘든 일도 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리 피곤한걸까? 눈앞에 펼쳐진 화면이 시계방향으로 돌더니 이내 어둠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여보...이제 정신이 들어요?"

 

눈의 초점이 맞추어지자 아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여..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예요."

 

"우리 딸은?"

 

"안 알렸어.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이야."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박형사님이 그러는데 어젯밤 당신이 근무 나갔다가 산에서 쓰러졌대요."

 

"아...그래?"

 

"병원에선 다행히 별 다른 이상은 없고 그냥 피로가 누적되서 그런 거래."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지금 오후 2시야."

 

 

환자라고 생각하기엔 내 몸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정말로 달고 긴 잠을 잔 듯한 기분이었다.

 

"당신 일어나면 퇴원해도 된다던데..."

 

"그래? 그럼 지금 나가자구."

 

"참...그리고 밖에서 어떤 아저씨 분이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몇 시간째 기다려요."

 

"누군데?"

 

"중장비 사장이라고 하면 안다고 그러던데.."

 

"응..알았어. 그 양반 지금 어디 있지?"

 

"병원 밖의 야외 휴게실에 있어요."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옷을 갈아 입었다. 퇴원수속을 밟은 후 나는 사장을 찾아 나섰다.

 

야외 휴게실에 나서자, 멀리서 벤치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뭔가를 음미하고 있는 듯한 남자가 보였다. 김홍선이었다.

 

내가 그의 앞까지 걸어오고 있음을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틀간 어디 계셨습니까?"

 

나의 물음에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오...퇴원하셨구랴. 한참을 기다렸는데..."

 

"제 발로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뭐 잘못한 것 있으신가요?"

 

"어이쿠...형사 양반. 퇴원하자마자 업무 시작하는구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네.

 

그리고 형사 양반도 나에게 듣고 싶은 얘기가 많지 않나?"

 

나는 그의 맞은 편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직원이 둘이나 죽었는데, 그다지 슬프지 않으신가 봅니다."

 

"왜 슬프지 않겠나. 그냥 그 감정을 누르고 사는거지."

 

"이틀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두 친구 장례식장 좀 들르고, 예전 아는 형님 산소에도 좀 들렀다네."

 

"20년 전에 죽은 최씨라는 사람 산소요?"

 

"어떻게 알고 있었네. 역시 형사들 무섭구만. 그래서 죄 짓고는 못사는 건가봐."

 

"그 사람.....사장님이 죽였죠?"

 

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그가 잠시 온화한 표정을 풀고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대답 대신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형사님..나이가 어떻게 되지?"

 

"마흔둘이요."

 

"사람 죽여 봤나?"

 

 

오히려 그의 물음에 내가 긴장이 되었다. 그가 나의 내면을 뚫고 그 속을 파헤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뇨."

 

"누가 당신에게 살인면허를 줄테니까 죽이고 다니라면 죽이겠나?"

 

"나하고 원수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지요."

 

"그렇지. 보통은 다 그렇다네. 자네 눈빛을 보니 아주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겠구만. 나도 자네만큼이나, 아니 자네보다 더 착하고

 

순진했다네. 닭새끼 한마리 모가지 치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내가 군대에 갔어. 게다가 거기에 있을 때 월남전

 

에 파병을 나갔다네. 돈도 많이 받고, 제대하면 국가유공자로 대우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 참전병들이 부산항에 모인 수많

 

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베트남으로 향했지. 나는 원래 군수지원병으로 들어갔는데 소총수들이 부족하니까 정글에 투입됐었어.

 

정글에 있는 기분은 그야말로 두려움의 연속이었어. 정말로 말벌만한 모기도 있고 주변엔 독사들이 득실댔지. 혹시나 베트콩들이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이라도 건드릴까봐 몇미터 전진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건 깊은 정글 어디선가

 

갑자기 쏟아져 나올듯한 베트콩들의 총알 세례였지. 그건 항상 아군의 공통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어.

 

 

첫교전이 있던 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네. 적이 누군지 보지도 못했어. 쏘라니까 그냥 쏘는거야. 나는 참호에 숨어서 총을 난사했지.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도 못하겠더라구. 나는 머리는 숙인 채 총만 밖에 내놓고 그냥 갈긴거야. 총알 날아가는 소리...아니 총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들어봤나? 예리하게 날이 선 장검을 휘두르는 소리와 비슷하다네. 참호 밖으로 목을 내밀면 누가 목을 베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나같은 소심쟁이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지. 적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어. 그냥 정글을 향해 갈기는

 

거야. 월남전 때 총알 2만 발에 한명이 죽었다는 말이 실감이 가더군. 어느 정도 소리에 적응이 되면 그제서야 머리를 조금씩 밖으로

 

내밀지. 조준을 하고 쏘는 거야. 그러면 그 때부터 상대에게 희생자가 생기는 거야.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참호 밖으로 본

 

장면은 다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네. 정글의 수풀 사이로 베트콩들이 힐끔힐끔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열에 서넛은 여자나 어린

 

아이들인 거야. 난 그들을 향해 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를 향해 쏘고 있었지. 차마 그들의 눈을 보고 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머뭇거림은 잠시야. 여기저기서 소대원들이 총탄을 맞고 피를 뿜으며 절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눈이 돌아간다네.

 

그 땐 여자고 아이고 다 필요없지. 보이는 대로 죽이는 거야. 그냥 죽였어. 그들이 누가 되었든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한 번 피맛을 보니까 두려움이 사라지더라구. 한 번은 어느 마을을 점령했는데, 젊은 남자들은 없고 아이들과 여자들만 있는 거야.

 

모두 전장에 끌려나갔다는 거지. 그들은 우리에게 음식도 가져다 주고 호의를 베풀더라구. 그런데 그건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거였어.

 

우리 소대원들이 지나가는 틈을 타서 주변의 베트공들이 총알세례를 퍼붓는 거야. 심지어 그 마을에 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두

 

베트공이더라구.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나는 총탄을 피해가며 내 손으로 십수명의 베트공을 죽였지.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어. 그런데 상처도 만만치 않았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전사했던 거야."

 

 

 

내가 지금 왜 이 얘기를 들어야 하는지 이유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비통하고 원통했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부모 얘기, 애인 얘기, 아이들 얘기를 나누며 서로 울고 웃던 전우들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거야. 그 날 전투가 마지막 임무인 친구도 있었지. 곧 집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는데...분노가 용암처럼

 

끓어올랐지만, 그것보다는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미칠 듯이 두려웠다네. 또다시 내 소심한 성격이 되살아난 거야.

 

전쟁은 놀이가 아냐.  요즘 애들 게임처럼 지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모든 것이...."

 

그는 잠시 회심에 잠기는지 먼 산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얼마후 나는 일생에 큰 변화를 가져올만한 일을 겪게 되었지. 어느 날 사이공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 노인을 만났어.

 

그 날 그 노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몰고오게 될지 그땐 상상도 하지 못했지."

 

"그 노인을 만나기 얼마전 나는 대규모 전투에 투입되었지. 우린 베트콩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한거야. 베트콩의 본거지로 알려진 텅지

 

앙을 공격하기로 한거지. 보병이 투입되기도 전에 그곳에 수백발의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네. 복수심에 불탄 우리는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며, 거의 광기에 가까운 학살을 저질렀지. 부대원의 3분의 1이 민간인처럼 보이는 베트콩들에게 살해당했는데 눈에 보이는게

 

있었겠나? 그 전투의 구호가 뭐였냐면...'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 였다네. 구호만 들어도 얼마나 잔인한

 

살육이 벌어질 것인지 알 수가 있었지. 1969년 말이었을 거야. 나는 거기서 정말로 악마가 되었다네."

 

 

 

그는 과거의 암울했던 기억이 떠오르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텅지앙에 도착했을 때, 이미 포탄 세례로 많은 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있었지. 그곳이 베트콩의 본거지라고 생각이

 

들자 살아 남아있는 건 모조리 죽였어. 하나도 남김없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젊은이, 노인...심지어 거기 있는 가축들까지...그 때

 

는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어. 그냥 우리 동네를 위협하는 지저분하고 사나운 야생동물을 소탕하는 것처럼 느껴졌었지.

 

어렸을 적 이유없이 곤충같은 걸 죽여본 적 있지 않나? 꼬리도 잘라보고 날개도 떼어보고, 불에 태워보기도 하고, 터뜨려보기도 하고..

 

뭐가 그렇게 궁금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면서 뭔가 쾌감을 느끼지 않았나? 그 날 텅지앙에서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네.

 

총을 쏘아 죽이면 확인한다고 목을 잘라냈어. 총에 맞아 신음하는 사람의 복부에 대검을 꽂았지. 분수처럼 피를 뿜으며 절룩거리며

 

도망가는 여자를 산 채로 불구덩이에 밀어넣었어.  어떤 아이는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워 죽였어"

 

 

그의 서로 꽉 잡은 그의 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들 미쳤어. 왜 죽이는지 이유도 모르는 것 같았지. 오로지 죽이는게 목표였어. 머리는 광기로 사로잡혀 있었고 눈은 살기로 가득했

 

지. 그 피비린내나는 학살이 무려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다네. 마을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 몇 그룹으로 나눈 뒤 기관총으로 몰살시키기

 

도 했고, 한 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우기도 했다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서 불에 던져넣기도 하고,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

 

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 짓도 서슴치 않았다네. 천명이 넘게 죽었다네. 그 날 전투가 끝나면 옷이 땀에 젖어야 했지만, 우리는

 

온통 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었지. 너무 많이 죽였어. 너무나도 많이...그것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만큼 잔혹하게...

 

지옥은 멀리 있는게 아니었어. 그 당시 텅지앙은 지옥이었고, 우리는 지옥에 내려온 악마였지."

 

 

 

그의 눈이 촉촉히 젖어오는 듯 보였다.

 

"부대에 복귀했을 대 상부에선 우리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훈장을 수여했지. 그러나 그때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던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었어. 우리의 행동은 용맹함과는 거리가 멀었지. 그러던 어느 날, 그 지역을 남김없이 쓸어버린 후 며칠 지나 부대내에 이상한 소문

 

이 나도는 거야. 실제론 그 지역에 실제 베트콩이라 부르는 베트남민족해방전선 대원들은 별로 없었다는 거야. 게다가 괴기한 소문까

 

지 나돌았는데, 집으로 돌아온 대원들이 죽은 가족들의 피를 모아 나누어 마셨다더군. 죽어서까지 우리를 좇아가 죽일 것을 다짐했다

 

는 거야. 퍼뜨리면 처벌을 할것이라는 상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소문은 부대 전체에 삽시간에 퍼져 버렸어. 부대에 미묘한 기운이

 

흘렀지. 우리보다 더한 광기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피의 보복을 당할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던 거야. 사실 미군들도 국내 여론 때문에

 

서서히 베트남에서 발을 빼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 토사구팽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네. 전쟁은 그들이 일으켜 놓고

 

우릴 부려먹은 다음, 뒤치닥거리는 우리가 하게 된 꼴이지. 다시 한번 우리의 용맹함을 보여주자고 모두들 자신있게 외쳤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었지. 자신들이 죽인 것은 무장한 베트콩이 아닌 베트콩 지역의 양민들이었다고. 정신질환을 앓는 병사들도 생겼어.

 

 

 

한밤중에 자살소동을 벌이는 친구도 있었고, 실제로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네. 그들의 핏물이 빠지지 않는다면서 피부가 벗겨져 나가

 

도록 수세미로 맨살을 미는 병사도 있었지. 서로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이미 부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네. 그 때 부대

 

에서 생각해낸 것이 연예인 위문 공연이었다네. 사이공에서 열렸었는데, 많은 군인들이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했지. 어쩌면 그 중의

 

어떤 이에겐 최후의 만찬이 될 수도 있는 축제였지. 공연은 끝났어. 많은 이들이 여자 가수의 잘 빠진 몸매와 풍만한 가슴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걱정부터 앞섰지. 곧 텅지앙에 인접한 퀴년시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거든. 해가 너울너울 기울쯤 부대로 복귀하는 때

 

였어. 부대 차량이 늦어져서 우린 잠시 시내를 둘러보고 있었다네. 그 때 어느 허름한 판자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온갖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가게였어. 산더미 같은 물건 속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백발을 어깨까지 내린 노인이 하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더라구. 나도 그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같이 길을 걷던 부대원들 틈에서

 

이탈하여 이끌리듯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네. 가까이 가서야 나는 그가 백내장 환자임을 알게 되었지. 하얀 눈동자의 초점을 나에게

 

맞추더니 그가 묻더군. 따이한이냐고. 북적거리는 그 사람들 틈에서 그가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나를 어떻게 알아봤는지 이해할 수가

 

없더라구. 내가 맞다고 했더니, 그 노인은 몇 개 남지도 않은 이빨을 드러내 미소를 보내며 무슨 부적 같은 것을 내게 건네더라구.

 

 

자신은 사람의 목숨을 움직이는 흑마술을 알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이 부적과 자신이 가르쳐주는 주문을 외우면 죽음을 피해갈 수

 

있다고 했지.그것을 나에게 사라고 권유하는 거야. 나는 손을 가로저으면서 그런게 어딨냐고 거절했지. 그런데 내가 돌아서려는 순간

 

그 노인에 내게 충격적인 말을 하는 거야. 내가 퀴년시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거야. 난 심장이 멎는 듯했네. 우리의 극비사항을 알고

 

있다는 건 둘째치고 그의 음성이 너무나도 다부지고 매서웠지. 나는 노인을 향해 돌아서서 물었지. 왜 그것을 하필 나에게 파냐고.

 

그랬더니 그 노인은 자신의 흑마술이 가장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하더군. 두려움과 공포가 몸에 배어 있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야. 자신은 느낄 수 있다는 거야. 노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지. 난 사겠다고 했어.

 

악마의 힘처럼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어. 나는 노인을 따라 들어가 좁은 오두막 같은 집으로 안내되었다네.

 

 

오두막에는 무슨 알 수없는 연기 같은 걸로 가득했지. 비릿한 무슨 냄새 같은 것도 나는 것 같았고. 나를 자리엔 앉힌 노인은 나뭇가지

 

같은 걸로 만든 채를 들고 나를 이리저리 쓸더라구. 나는 그 노인에게 여러가지 주술의식을 받았지. 주술의식이 끝날쯤 노인이 나에게

 

어떤 주문을 반복해서 알려 주었지. 그러면서 위험이 닥쳤을 때 이 부적을 꺼내 주문을 외우라고 하더군. 내가 그 오두막을 나가려고

 

하자, 노인이 다시 나를 불렀어. '이보게 따이한...세상엔 공짜가 없다네.' 이러더라구. 나는 그 말이 돈을 달라는 뜻인 줄 알고 주머니

 

에 있던 돈 몇 푼을 그에게 내밀었지. 그러자 그 노인은 돈을 거절하며, 그 몇 개 안 남은 이빨을 다시 드러내더니...앞으로 빚은 천천히

 

갚게 될거라는 말을 하더군.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차리고 그 노인을 생각해보니 너무 묘한 기분이 들더군, 내가 무슨 짓을 했나 하는

 

생각도 들고...그 후 한 달 뒤 우리는 다시 가까운 퀴년시 외곽 전투에 참가했지. 열대성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네. 그 날 따라 우리

 

는 의외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앞으로 전진했지.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전의 우리의 명성 때문에 그들이 우리와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어. 함정이었어. 베트공들의 게릴라 전술이었던 거야.

 

 

 

그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나를 포함한 중대원들이 고립되어 버렸다네. 장대비가 쏟아지는 정글 속에서 전진을 한게 큰 실수였어.

 

총탄은 거의 떨어져 가는데 사방에 수백이 될지, 수천이 될지 모르는 베트공이 깔려 있었다네. 통신은 두절되었고 지원군은 없었다네.

 

어두운 정글 속에서 원숭이 울음소리처럼 끽끽대며 조금씩 다가오는 그들에게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하나둘씩 죽어갔어.

 

온몸에 총탄구멍이 난 채 사지가 너덜거리며 죽어가는 동료를 보면서 나는 광기에 가까운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지. 3개 소대는

 

이미 전멸되어 시체는 이미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우리 소대는 본대와 연락이 두절된 채 그들에게 완전 포위

 

당해 버렸지. 채 십분이 지나기도 전에 나는 수많은 시체더미에서 오직 홀로 살아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네. 짙은 먹구름 아래로 어둠

 

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거야. 몇 시간 동안 전투를 했는지도 모르게 벌써 밤으로 접어드는 거야. 나는 죽은 동료의 시체로 몸을 덮었지.

 

시체에서 쏟아지는 피가 빗물과 섞여 내 얼굴 뒤덮었다네. 그것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문제가 될 상황이 아니었어.

 

여기저기서 가까이 접근하는 베트공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거든...확인사살을 하는지 중간중간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지.

 

목숨을 구걸하고 싶었다네. 어떡해서든...베트콩들은 나의 구걸을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 때 나는 그 노인이 준

 

그 부적을 꺼내고는 주문을 읊었다네. 미친 듯이...숨을 죽여가며 최대한 작은 소리로..."

 

 

그들이 다가왔어. 여기저기서 칼로 찌르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 내 배 위에 얹어진 시체를 밟고 지나

 

가는 베트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소리라도 낼까봐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네. 혹시나 탄로 날까봐 숨쉬는

 

것조차 멈추려 했지.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고통없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어. 베트남 말이

 

아니었어. 괴물소리처럼 꾸엑구엑 대는 거야. 나는 그들의 불쾌한 소리가 너무나도 소름끼쳤지. 그래서 나는 내 몸 위에 올려진 시체

 

들 틈 사이로 그들을 올려다봤지. 그런데 어둑어둑한 배경 사이로, 부릅뜬 내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목격되었다네.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그들은 베트공이 아니었어."

 

"예?"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네. 그렇다고 아군도 아니었어.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저기를 대검 같은 것으로 쑤셔보더라구.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어. 대검으로 쑤시는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긴 손가락에 자라난 맹수의 발톱같은 손톱이었던 거야. 꾸엑꾸엑거리며

 

계속 여지저기를 훑고 다니는 거야. 그런데 그 순간 내 위를 지나던 그 정체 모를 병사와 눈이 마주친 거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

 

병사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시 한번 입을 틀어막았지. 붉은색 눈을 하고 송곳니가 턱까지 내려와 있었네. 얼굴에 수십차례 칼질을 해

 

놓은 것처럼 피부는 너덜거렸고 입에서는 핏물이 토하듯이 쏟아져나왔지.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병사가 나의 존재를

 

확인했는지...갑자기 괴물같은 그 손을 들어올리더니 나를 향해 꽂았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도 안났다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리고 나서야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네. 노인의 말대로 나는 그 부적과 주문으로 죽음을 피해갔지. 지옥의 전장에서 살아나온 병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만큼 긴 잠을 자고 난 기분처럼 왠지 모를 기운이 몸에서 솟아나더라구.

 

지난 모든 일들이 한밤의 꿈처럼 느껴졌다네. 얼마 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네. 한국으로 가기 전에 꼭 들르고 싶은 곳이

 

있었지. 그 노인의 가게 말야. 사이공에 가서 다시 그 집을 찾아 나섰다네. 그런데 노인은 없었어. 가게 주인에게 수차례 노인에 대해

 

서 설명했지만 그런 사람은 여기에 없다는 거야. 나는 가게 뒤로 돌아가 그 오두막을 찾았지. 생선이나 고깃국을 끓이는 야외 취사

 

장소였어. 오두막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 그 노인은 망령이었어."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죽은 자에게 목숨을 구걸한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노인의 소름끼치는 말이 떠오르더군. 빚을 천천히 갚게 될 거라는 그 말.."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네. 마을 사람들은 나를 반기는 듯했지만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지. 매일같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다 온 나에겐 논밭일이나 하며 그렇게 늙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보였지. 서로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깔깔대며 울고 웃고 하는 것들이 너무나 혐오스럽게 보였다네. 다들 바보같아 보였어. 놀려주고 싶었어. 나는 겁을 주었지.

 

전장에 있었던 얘기를 하며, 공포감을 심어주고 두려움을 불어 넣었지. 그럴 때마다 그들의 표정이 굳어졌어. 그들의 그런 모습에

 

나는 너무나도 짜릿하고 기분이 좋았다네. 매일 같이 사람 죽인 손으로 논밭의 소일거리를 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네. 국가에서 나온

 

돈으로 연명한다지만 진이 빠지도록 뭔가에 미쳐보고 싶었다네. 미칠 것 같았지. 밤마다 괴물같은 공허함이 나를 괴롭혔다네.

 

 

 

온갖 잡생각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지. 미친 사람처럼 컴컴한 방안에서 전쟁놀이를 했지. 사람 목을 다는 시늉도 하고, 총에 맞에 고통

 

스러워하는 시늉도 하고...꿈만 꾸면 나는 그 전장에 서있는 거야. 어느 날 미국이 패전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뉴스가 뜨더군.

 

실로 그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다네. 도대체 그 수많은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쟁은 살아남은 자를 황폐화시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가 마를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타났다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퀴년시 전투에서 보았던 그 악마의

 

병사들이 꿈속에 나타나는 거야.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삭신이 저려왔다네. 잊혀졌던 공포가 다시 몰려왔어. 괴성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지. 그런데 그 꿈을 꾸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 거야. 나중엔 삼일에 한번 꼴로 가위에 눌렸어. 그 때 그 날처럼 나는 죽은 동료

 

의 시체를 뒤덮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지. 그 때마다 그들은 어김없이 나를 나타나 내 가슴에 그 기다란 쇠꼬챙이 같은 손톱을 내

 

가슴에 박았다네. 제대로 잠을 이뤄본 적이 없었다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노인 준 부적을 보며 주문을 외웠지. 효과는 없었어.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어.  어떤 날은 밤길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못보는 형상들이 돌아다니는 거야. 누구였겠나?"

 

 

"그 악마의 형상 말입니까?"

 

"그래. 전장에 나타났던 그 모습 그대로 그 형상이 꾸엑꾸엑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듯 보였어. 나도 모르게 주문을 웅얼거리며 읊었지.

 

그러기를 십년이 넘었다네. 고통이 끊이질 않았어. 그제서야 그 노인이 바라던게 뭔지 알 것 같았지. 내 목숨을 가져가려 한 거야.

 

부적과 주문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거야. 나는 그 전장에서 시체들에 쌓여 기절했을 뿐이고, 나는 그렇게 살아남아 구조된 거였지.

 

그 전장에서 애초부터 죽을 운명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나는 그날 그 노인에게 남은 목숨을 빼앗겼는지도 몰라. 부적을 찢어버렸다네.

 

어느 날 도시 사람들이 찾아오더라구. 개발 문제로 이장을 설득하지 못하니까 가장 건달같이 보이는 나에게 찾아왔지. 한 명당 20만원

 

씩 챙겨주겠다며 사람들의 동의서를 받아오라는 거야. 나는 흔쾌히 승락했지. 깡패처럼 돌아다니면서 협박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

 

았어. 그래서 마음이 맞는 몇 녀석과 청년회를 만들었지. 청년회 회의가 있다, 청년회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대접을 한다, 이러면서 온

 

갖 구실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동의서를 요구했지. 물론 일일이 찾아다니기도 했고...협박도 하고, 회유도 해보고...

 

그런데 최씨 형님이 끝까지 거부를 하는 거야."

 

 

"그래서 죽이셨나요?"

 

나의 물음에 그는 갑자기 껄껄 웃었다.

 

"이보게 형사 양반. 나도 사람이라네. 아무리 내 이 두손에 수십명의 피를 묻혔다고는 하나,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겠나?"

 

"사람 하나쯤은 죽이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요."

 

 

 

"그렇지. 사람 하나 죽이는건 눈 하나 깜빡할 내가 아니었지. 그러나 이곳은 전장이 아니지 않나? 나의 협박에 최씨 형님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네. 그런데도 도장을 찍는 건 끝까지 거부를 하더라구.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어느날 밤, 형님과 술 한잔을 했지. 물론

 

술안주는 그 동의서 얘기였다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지. 사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건 아냐. 그러나 나

 

는 죽이지 않았다네. 술에 흠뻑 취해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나는 앞서 걸었고 형님은 나를 뒤따르고 있었어. 개천을 하나 건너는

 

데 갑자기 형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거야. 나는 아무 생각없이 뒤돌아 보았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네. 형님이 개

 

천에 엎어져 있고,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엎어져 있는 형님의 뒷머리를 손으로 잡고는 연신 개천 사이에 박혀있는 바위덩이에 머리를

 

박고 있는거야. 그 악마의 병사였다네. 형님이 손을 뻗어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네. 그들이 한둘이 아니

 

었어. 도망을 쳤지.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건 곧 또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네. 이젠 형님을 죽은 개 끌고 다니듯이 돌아다니는 그

 

들을 보게 됬다네. 부적을 찢었을 때 그 용기는 온데간데없고, 바보처럼 나는 다시 그 주문을 미친듯이 외웠지. 날이 밝을 때까지 미친

 

듯이...어느 날인가 문득 생의 끄트머리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빚을 갚기로 했어. 난 노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기로 결심했지."

 

 

"뭘 말입니까?"

 

"내 목숨 말일세. 방안에 줄을 묶고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지. 천장에 줄을 매달았네. 지난 십수년 간의 굴곡진 삶을 이젠 마감하고 싶

 

었지. 그런데 의자 위에 올라서 줄을 목에 감고 막 몸을 던지려는 순간...그 노인이 내 앞에 나타나더군. 거의 다 잊어먹은 월남 말인데

 

도 너무나도 생생하게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네. 그가 나에게 말했지. 빚을 언제 갚을 거냐고...나는 조용히 말했다네. 지금 갚겠다고...

 

그러자 그가 다시 나에게 말했어. 빚을 갚지도 않은 채 떠나지 말라고...이해할 수가 없었어. 도대체 그 빚이라는게 뭔지 알 수가 없었

 

다네. 그에게 물었지. 도대체 당신 누구냐고.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더군. 자신은 텅지앙의 망령이라고...텅지앙의 망령...

 

텅지앙의 망령...텅지앙의 망령...수십번을 머리에 되뇌고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네.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무엇인지..."

 

 

나는 눈빛으로 그에게 답을 요구했다.

 

"용서를 비는 것이었다네."

 

"용서요?"

 

"그래...용서. 그들에게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지. 그는 많은 것을 바랬던 것이 아니었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마을을 떠나 십여년 전의 당시 부대원들을 찾아다녔지. 우리 중대는 전멸했기 때문에 다른 중대 부대원들을 찾아다녔다네.

 

몇몇은 나와 거의 비슷하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더군. 나는 생각을 같이하는 그들에게 나의 얘기를 하고, 나의 계획을 말했지.

 

그들도 흔쾌히 승락하더군. 모두가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우리는 돈을 모아 베트남으로 향했다네. 당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에

 

입국은 쉽지가 않았지. 그런데 당시 큰 사업을 하고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태국을 통해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길을 안내해 주더군.

 

우리는 십여년만에 그 처참한 살육의 현장인 텅지앙에 발을 디뎠다네. 우리 손에 죽었던 수 많이 원혼들이 당장이라도 무덤을 박차고

 

일어날 것 만 같았지. 거기서 우리는 위령제를 지냈다네.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했지. 위령제를 지내는 동안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아냈지. 십년 넘게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네. 모든 것은 마음 속에 있었어.

 

증오, 분노, 곹오, 죄책감, 악령들....그리고 그 노인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그 위령제가 끝난 이후로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내 머릿속

 

에서 사라졌다네. 그제서야 그 악마같은 병사들이 누구였지는 나는 알게 되었지. 왜 그들이 아군 복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나는 그 답을 알 것 같았다.

 

"텅지앙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국군이었군요."

 

"그렇다네.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는 악마였지. 그 노인은 나에게 그들의 고통을 보여주려고 했었던거야. 그리고 나에게 바란 건 나의

 

피와 목숨이 아니었지. 용서를 바라는 나의 진실된 마음이었던거야."

 

그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중장비 일을 시작했어. 몇 년간 알뜰하게 돈을 모아 내 사업을 하려고 계획했다네. 돈이 좀 모아지면서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지. 그 때 나의 옛 고향이 떠오르더군. 마을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난 돌아가고 싶었다네. 마을에 들어서자 육중하

 

게 들어선 고가도로와 폐가가 되버린 형님 집이 눈에 들어왔지. 남들은 흉가라고 말했지만, 나에겐 나의 무책임으로 죽어간 형님의 집

 

이었다네. 나는 사업터와 그 형님 집을 사들였지. 그리고 사업을 시작했다네. 그런데 얼마 전 황승균이 이 친구가 그 집에서 빙의되었

 

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이 있었지."

 

 

"노영주와 김태섭이 그 집을 부수려던 때 말이죠?"

 

"승균이를 찾으러 그 집에 갔을 때 난 정말 깜짝 놀랐다네. 승균이 이 친구 입에서 최씨 형님 목소리가 흘러 나오는게 아닌가? 본래 흉

 

가라고 불리는데는 가지 않는게 좋아. 나같이 생사의 경계를 들락거렸던 사람은 별로 상관이 없겠지만 귀신은 그 사람의 나약한 곳을

 

건드려 기를 빼앗아 가거든. 승균이 이 친구가 5년 전에 딸애를 잃고 무척이나 힘들어 했다네. 얼마나 보고 싶었겠나. 정말로 승균이에

 

게 빙의된 그것이 최씨 형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혼령은 승균이의 그 점을 이용한 거라네. 귀신은 살아있는 자의 나약한 점을

 

알고 있거든. 내가 텅지앙의 망령에 시달렸던 것도 그들이 나의 가슴 속 깊이 잠재되어 있던 죄책감을 이용했기 때문이지. 그 친구가

 

그 집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얘기를 듣고 불길한 생각이 들더라구. 딸애를 보기 위해 목숨도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거야. 나는 영

 

주와 태섭이 이 친구들을 시켜서 그 집에 들락거리는 걸 막았다네. 수시로 감시도 하게 만들고. 그러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지. 왜 그렇

 

게 엄청난 술을 마시고 죽었는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네. 최씨 형님이 죽은 딸내미를 보여주는 댓가로 술을 바랬는지도 몰라."

 

 

나는 조용히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그에게 물었다.

 

"사장님. 정말로 그게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시는겁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두세 병의 술도 힘들어하는 친구가 그렇게 많은 술을 마시는게 가능하다고 보나?"

 

"훗...사장님. 그렇게 따지면 제가 형사질하면서 본 죽은 사람들의 반은 다 귀신 짓이겠수다. 사람이 죽은 데에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겁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려고 해도 안되는게 있지 않나? 입원한 태섭이한테 물어보니 자네도 최씨 형님 집에 들어갔다더군."

 

나는 잠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보기에 거만하다고 느낄만한 자세로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워댔다.

 

"소동이 좀 있었다고 하더만...."

 

"그건 착시일 수도 있고, 환청일 수도 있는 겁니다."

 

 

 

그는 잠시 내 눈빛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자네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예?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겁니까?"

 

"그냥 대답해 보게."

 

"그야..제가 제일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제 딸이죠."

 

"아니...말고...자네 깊은 곳에 있는 다른 무언가 말일세.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질 않나? 사무치게 그리운 누군가 말일세."

 

"무슨 말씀이예요?"

 

"자네는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난 걸세..."

 

 

사장의 말에 나는 갑자기 손이 떨려 왔다. 빨아들였던 담배 연기조차 내뱉지 못했다. 숨이 막혀오고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샌가 작은 눈물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누구인가?"

 

나는 담배를 떨어뜨린 채 한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리고 미친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

 

내가 왜 그 집에서 눈물을 흘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내가 들었던 그 정체 모를 소리는 어렸을 적 마지막으로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항상 내 이름보다는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셨다.

 

"누구인지 떠올랐구만."

 

"아버지요..."

 

"그게 자네의 그리움의 흔적이었군. 사고로 돌아가셨나?"

 

"네......제가 아주 어렸을 적....."

 

 

두 눈을 덮은 손 아래로 뜨거운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아주 힘든 어린 시기를 보냈었겠구만. 이를 악물고 살아가게.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라네. 자네 아버지가 자네를 보고

 

싶어해서 부른 것이 아니야. 진정 자네 아버지였다면 자네를 거기서 찾았겠는가? 귀신의 장난이지. 나약한 자는 빙의에 잘 걸린다고

 

하지 않나? 나약한 자가 무엇인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지. 현실에 충실하지 못한 자가 내세를 바라는 거라네.

 

자네의 귀여운 딸에게 똑같은 아픔을 주고 싶진 않지 않은가?"

 

"흑흑..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삶이 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다시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아버지를 보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가서는 안되네. 견뎌야 되네.

 

승균이 그 친구는 그것을 견뎌내지 못했어. 미안하지만 나는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최씨 형님 집을 간직하고 있을 거라네.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형님이 그 곳에서 계속 장사하는 걸 지켜봐 줘야 하지 않은가?"

 

 

나의 흐느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가 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어린 아이였다.

 

내가 사장을 다시 만난 건 인천공항이었다.

 

그는 옛 부대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깔끔한 양복차림으로 출구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호라...자네가 여기까지 왠 일인가?"

 

"베트남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매년 우리 회원들이 위령제를 지내는데 모레가 그 날이라네."

 

"네. 직원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말씀 감사했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허허...그 말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나?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은 걸. 잊지 말게. 형사 양반.

 

모든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는 걸...그리고 열심히 살게나."

 

 

 

가벼운 손짓으로 인사를 마친 그는 출국장을 빠져 나갔다. 얼마 후 굉음과 함께 그가 탄 비행기가 공항을 빠져나갔다.

 

멀리 시야에서 그 비행기가 멀어져 가고 있을 쯤 박형사에게 전화가 왔다.

 

"김형사님. 부탁하신 대로 20년 전 최씨 사건 조사해 봤는데요.당시 부검의 소견으로는 타살의 흔적이 좀 보인다라고

 

기록돼 있던데요? 증거가 부족해서 결국 미결처리되었구요."

 

"그래?"

 

"아무래도 그 김사장이란 사람이...."

 

"수고했어. 어차피 공소시효도 끝난 사건이야."

 

"그런데 왜 그걸 조사하라고 시키셨어요? 바빠 죽겠는데.."

 

"이봐, 박형사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지. 진정 죄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용서를 구하고 죄를 씻고자 노력해야 하겠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냐...아무 것도. 참...박형사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까?"

 

"갑자기 왜요?"

 

"그 폐가 갔다온 뒤로 갑자기 술이 엄청 땡기네. 오늘 죽도록 한번 마셔볼까?"

 

"예? 김형사님, 진짜 왜 그래요? 정말 귀신 들린 거예요?"

 

"하하하...농담이야 농담. 그냥 간단히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휴....사람 좀 놀래키지 말아요. 그럼 이따 경찰서에서 뵙죠."

 

 

 

간만에 맑은 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습도가 높긴 했지만 차창으로 스며 들어오는 공기가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끝-

 

 

 

출처 : 웃대 하드론

 

 

-

 

정말 재미있게 봤던 소설이야 ㅎㅎ 

영화로 나와도 좋을듯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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