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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날 갑자기 - 그녀의 허락

지혜로운바보2017.07.30 09:22조회 수 968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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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허락

 

 

사랑하는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사람을 보내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잡아야 하는 것일까?

 

사랑의 딜레마 중에서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속이 울렁거렸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샤워를 했다.

간밤에 과음한 때문인지 물 먹은 솜처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꼼짝 않고 침대에 누
워 있고 싶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곳을 가야 했다.

 

 

아침도 먹지 않은 채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
로 갔다. 천안행 티켓을 끊고서 자판기에서 커
피를 한 잔 뽑아서 창가로 갔다. 살아 있는 많
 은 사람들이 떠나고 돌아오고 있었다.

 

 

죽은 이들은 결코 돌아오지 못하지.

 

 

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보니 문
득 은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그녀
 의 얼글을 지우고 차에 돌랐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나는 차 창에 머리를
기댄 채 스쳐가는 10월의 경치들을 무심히 바
라보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고속도로는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쓸쓸한 가을을 하늘하늘거리며
떠받치고 있는 코스모스가 물끄러미 나를 쳐
 다봤다.

 

 

천안 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잡아탔
다. 공원 주차장까지는 택시로 올라갈 수 있었
지만 나는 입구에서 내렸다. 석재상들이 늘어
서 있는 길을 따라서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서
울에서 그리 멀리 않은 거리였지만 은영은 너무
도 멀리 있다는 느낌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걸어가다 보니 왼편으로 꽃집이 보였다.

 

 

문득, 꽃을 사오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
다. 전에는 늘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사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은영에게 할 말을 생각
 하느라고 깜빡 잊고 있었다.

 

 

꽃집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무표정하게 맞았
다. 나는 은영이 좋아했던 흰장미를 스물세 송
이 샀다.
양편으로 붉은 기둥만 두 개 서 있는 공원
묘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은영이 누워 있는
 곳은 주차장에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산비탈 아래로 수많
은 무덤들이 드러누워 있었다. 오래 된 무덤,
만든 지 얼마 안 된 무덤, 가난한 무덤, 부유한
무덤, 기독교식 무덤, 불교식 무덤 들이 하늘
아래 낮게 엎드려 있었다. 나는 은영이 살고
 있는 산의 윗부분으로 올라갔다.

 

 

은영의 묘지 앞에는 예쁜 조화가 한 다발 꽂
혀 있었다. 은영의 어머니가 꽂아 놓은 모양이
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은영의 묘지를 바
라보았다. 봉분의 파란 잔디가 금잔디로 바뀌
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사이에 다시 3 개
월이 흐른 것을 깨달았다. 은영은 땅에 묻힌
 지 정확히 3년하고 3개월이 흐른 것이었다.

 

 

가져 온 하얀 장미를 은영에게 내밀었다. 은
영은 손을 내밀어 받지 않았다. 나는 봉분 앞
에 세워 두었다. 하얀 장미를 받고 좋아 할 은
 영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르니 다시 눈물
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가 죽은 뒤에 완전
히 말라 버린 줄로만 알았던 눈물이었는데 .
나는 그녀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짐짓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언제 몰려 왔
는지 검은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금방이라
도 비를 뿌릴 듯한 기세였다.
가을비는 차가울 텐데. 그렇지 않다도 몸이
 약한 은영인데.

 

 

구름을 한동안 올려다보며 멍히 서 있었다.
문득, 은영을 찾아온 목적이 떠올랐다.
허락을 구해야 하는데. 은영은 뭐라고 그럴
까? 나를 꾸짖을까?
나는 다시 은영이 누워 있는 자리를 보았다.
평온히 누워 있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흔들렸
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감추고 그녀 앞에 태
 연한 척 서 있었다.

 

 

그냥 갈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은
영은 이해할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
라도 그녀에게 먼저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무심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연기를 싫어하던, 아니 내가 담배 피우는 것을
무척 싫어하던 은영의 찡그린 얼굴이 떠올랐
다. 그녀의 콧잔등에 잡힌 주름살까지 선명하
 게 보였다.

 

 

은영아, 미안해, 깜빡 했어.
나는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배곽에 넣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아무래도 그녀에게 말을
해야지만 속이 후련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은영을 내려다보다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은영아.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몰
랐어. 너와 함께 할 때는 물론이고 네가 떠나
고 나서도 상상도 못 했어. 난 네가 떠나면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던 사랑도 함께 데리고 갔
다고 생각했어. 나도 그걸 원했고.
그런데 우습지.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러
찾아오고 말야. 나도 내가 한심해 보여.
어젯밤에 술 마시면서 그 노래만 들었어. 너
도 좋아한 노래였잖아.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I dreamed a dream’. 그래, 바로 그
 노래야.

 

 

넌 이 노래 처음 듣고 나서 가사가 너무 슬
프다고 했지. 특히도 이 부분이. ‘I dreamed
that love would never die‘
사랑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꿈이었
을까....
휴우, 이런 말 꺼내기 정말 힘들구나. 어젯밤
술 마실 때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은영아, 나 딴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
그녀가 하늘에서 후두둑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원 묘지는 순식간에 빗소리에 뒤
 덮이고 말았다.

 

 

성묘하러 왔던 사람들이 빗줄기를 피해 뛰
어가는 발자국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난
앉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
줄기가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은영 앞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나
는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 애는 너와 닮았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 애를 본 순간부터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으
니까. 물론 거부도 해 봤지. 하지만 뜻대로 안
되더라고. 그런데 말이지 정말로 웃기는 것은
그 애도 나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
냥 내 감정이 그래.
나 우습지? 너와 헤어진 지 3년하고 3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나도 이런 나 자신이 너무도
싫어. 아, 모르겠어.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입술을 깨물었어. 빗물과 눈물이 뒤섞여 입
안이 짭짜름했다. 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이 보였다. 우산을
 받쳐 든 은영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은영을 처음 만나던 날도 비가 내렸다. 학기
말 고사를 보고 있던 때였다. 강의실 앞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고 있는데 아
주 예쁘장한 후배가 우산을 펼치며 아는 체를
했다.
은영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얼굴만
알던 사이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목례 정도
하는.
나는 그날 은영의 우산을 쓰고 교문을 나섰
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린 친해졌다. 난 그날의
만남을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은영의
 말을 들어 보니 필연이었다.

 

 

그녀는 내가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
다고 했다. 비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는데
우산도 없이. 그래서 우산을 들고 내가 시험이
끝나고 나오기를 강의실 밖에서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수줍은 미소를 띄우던 그녀의 얼굴을 바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멈추었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비가 내리는데 꼼짝않고
앉아 있어서. 제가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요.”
그녀의 출현이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호의를 매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일어나세요. 빗방울이찬데감기드시겠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망설이다
가 일어났다. 바지가 젖어서 다리에 짝 달라붙
어 있었다.
“몹시 사랑하셨던 분이신가 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폈
다. 나이는 스물서넛이나 됐을까? 켤코 미인
은 아니었지만 웬지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
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따
 뜻한 눈길이 그런 느낌을 강하게 줬다.

 

 

“사랑하시는 분이 걱정하시겠어요. 그만 내
려가시죠?”
그녀가 다시 얼굴에 근심을 담고 말했다. 나
는 웬지 그녀의 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은영아, 안녕!
나는 마음속으로 은영에게 작별 인사를 하
고 돌아섰다. 그녀가 우산을 받치고 나란히 걸
었다. 그녀는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지만 나
의 전신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부러워요. 이토록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네, 그랬었죠. 하지만 지금은.”
마땅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들어 보
니 저쪽 끝에 정자가 보였다. 나는 걸음을 빨
 리 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느 분 찾아오셨어요?”
“저는 이 곳에 살아요.”
그녀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
곤 정자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정자에 올라가 있으니 잊고 있었던 추위가
느껴졌다. 담배 생각이 나서 담배를 담배를 꺼
냈다. 담배는 다행히 필터만 젖어 있었는데 라
이터에 물이 스며들었는지 불이 켜지지 않았
다.
“아까 그 분 언제 돌아가셨어요? 봉분을 보
니 돌아가신 지 오래 된 것 같던데.”
불을 켜기 위해 연신 라이터돌을 튕기는데
그녀가 물었다. 나는 담배 피우는 걸 포기하고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래 되기는요. 겨우 3년밖에 안 됐는 걸
요. 하지만 어떤 때는 3년이 아니라 3만 년이
흐른 것 같기도 해요.”
“그만큼 고통스러웠던 세월이라는 건가요?”
“고통이요?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픔을 느
낄 수 있는 건 진짜 고통이 아닌지도 몰라요.”
돌아보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에, 마치 식
물인간처럼 마비된 상태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
쳐야 했던 지난날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병이었나요?”
“아뇨! 그 날은 은영이의 스무번째 생일이었
 어요.”

 

 

나는 멀찍이 보이는 은영의 봉분을 바라보
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은영이 죽고 나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였지만 그녀에게는
웬지 들려 주고 싶었다. 아니, 이제는 가슴속
에만 묻어 두지 말고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
 버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스무번째 생일만큼은 그녀를 세상
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죠.
전 그래서 두 달 전부터 준비를 했어요. 내 손
으로 마련한 선물을 사 주고 싶어서 세차장에
 서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죠.“

 

 

“선물로 뭘 준비하셨는데요?”

 

 

“장미꽃이요. 그녀는 하얀 장미를 무척 좋아
했어요. 거리를 거닐다 하얀 장미를 보면 사달
라고 조르곤 했죠. 전 그런데 돈이 없어 늘 한
송이밖에 못 사 주었어요. 장미꽃을 받아 들고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늘 많이 사 주지 못하
 는 것을 안타까워 했거든요.”

 

 

“그래서 스무 송이를 준비했겠군요.”

 

 

“아녜요. 그 정도는 그녀도 예상하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전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
서 이백 송이를 준비했어요. 꽃 가게 주인에게
며칠 전에 미리 싱싱한 장미로 부탁을 해 두었
 죠.”

 

 

“굉장했겠네요!”

 

 

“네, 저 혼자 들기 버거울 정도로. 저는 카페
로 먼저 가서 그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
와 함께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작전을 짰
어요.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그녀가 들어서기
 만을 기다렸죠.

 

 

그녀는 언제나 약속을 하면 삼십 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곤 했는데 자기는 튕길 줄도 모
르는 바보라고 귀여운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
그날 따라 유난히 늦더군요. 집에 전화를 해
봤더니 아무도 받질 않더군요.
저는 하염없이 기다렸어요. 그녀의 신변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곤 생각도 못 하고.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장미는 점점 시들어 가고, 그녀의 신변에 무
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가슴을 옥죄어 왔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
 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혹시나 해서 우리 집에 전화를 해 봤죠. 그
랬더니 어머니가 사고 소식과 함께 병원을 가
 르쳐 주더군요.

갑자기 지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죠.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의 실성하다시
피 해서 병원으로 뛰어갔어요. 중환자실 복도
에 은영의 아버님이 울고 계시더군요.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보조원이 카트를
밀고 나오더군요. 은영의 어머님이 카트를 잡
고 몸부림 치고 있고. 예감이 이상해서 하얀
 가운을 벗겨 봤어요.

 

 

은영이 하얀 장미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해야 할 은영이 잠들어 있더군요. 난 그
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가 깨울 수 없을 정
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죠. 나
는 순간, 내 영혼이 모조리 빠져 나간 듯한 기
분을 느꼈어요.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속으로 눈물만 하염없이 삼켰죠.
나는 그녀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렇
게 떠나가고 말았죠. 집앞 횡단보도에서 신호
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에 치여서. 별다른 외상
도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사고였는데 그만 쓰러
질 때 머리가 경계석에 부딪히는 바람에. 스무
번쩨 생일에. 그 좋아하던 하얀 장미도 못 받
 아 보고.”

 

 

그녀는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였지만 그녀의 동작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은영 씨는 일한 씨가
수시로 갖다 주는 장미를 받았으니까 행복해
할 거예요. 일한 씨 이런 거 생각해 본 적 있어
요? 은영 씨는 사고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
 까, 하는.”

 

 

나는 머리를 저으며 슬그머니 손을 빼냈다.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거예요. 내가 못 가
면 일한 씨가 많이 기다릴 텐데. 일한 씨를 기
 다리게 하면 안 되는데. 꼭 가야 하는데.”

 

 

그녀는 마치 나와 은영 사이를 잘 알고 있다

는 듯이 은영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사실 은영
이라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
 고도 남을 애였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은영씨를 찾아왔
 죠? 무슨 특별한 날인가요?”

 

 

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아무리 봐도 낯익은 눈길이었다. 부드러운 눈
 길을 받으니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아니에요. 사실 은영이가 떠난 뒤 저는 삶
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은영의 체취
가 그리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학교 다
니는 건 물론이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으니
까요. 이 세상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지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그녀가 있었죠.
살아 있다는 것이 그때처럼 괴로웠던 적은
없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군대를 갔어
요. 일종의 도피였죠. 군 복무를 마치는 동안
저는 제 내면 속에 살아 있는 감각을 죽이기
 위해서 무진 안간힘을 썼어요.

 

 

제대를 한 뒤에는 일 년 가까이 외국을 돌아
다녔어요. 배낭 하나 덜렁 매고 은영을 피해서
지구의 끝까지 갔지만 은영은 거기서도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녀는 여행에 지친 저에게
 그러더군요. 학교로 돌아가라고.

 

 

저는 다시 용기를 내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
했어요. 제가 은영을 잊고 학교 생활을 하는
것이 은영을 위하는 길이라고 나름대로 판단
을 내린 거죠. 그녀는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나의 행복을 빌 거라고. 이기적인 생각인지 모
르지만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조
 금은 편했죠.

 

 

복학하고 나서는 전혀 여자 생각을 안 했어
요.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런 감정이
안 일었으니까요.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났죠. 전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는 사랑을 못 할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그렇지 않더군요. 전 처음에는 제 감
정을 무시했어요. 그러다가 차츰차츰 저 자신
 을 속이기 시작했죠.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더 이상 속일 수 없더군요. 그래서
고민하다 이 사실을 은영에게 얘기해 주려고
왔어요. 은영이 많이 실망했을 거예요. 이래서
 는 안 되는데 .”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을 피해
은영의 봉분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의 어깨
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그녀가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일한 씨, 은영이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은영이는 살아 있을 때도 그랬듯
이 지금도 일한 씨의 행복을 기원하고 있을 거
예요. <ALWAYS> 보고 나서 서로 그러기로
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하는 길
 이 진정 사랑의 길이라고 .”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 여자가 어떻게
우리 둘이 <ALWAYS>를 보고서 나눈 이야기
를 아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ALWAYS>는 우리가 은영과 내가 함께 비
디오로 감명 깊게 본 영화 중의 한 편이었다. <
고스트>를 보고 시시하다던 은영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펑펑 울었다.

 

 

스필버그가 아름답게 만든 동화 같은 사랑
얘기를 우리는 여러 번 봤다. 은영은 볼 때마
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죽은 남자가 생전에 사랑했던 여인의 행복
을 위해서 다른 사랑을 찾아 준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이다. 결국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으로
하여금 딴남자를 사랑하게 만들어 놓고 쓸쓸
히 남자는 떠나간다. 은영은 떠나는 남자의 뒷
 모습을 보며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곤 했다.

 

 

그때부터 은영이는 홀리 헌터의 팬이 되었
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테마곡은‘SMOKE
GETS IN YOUR EYES’가 되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번은 입씨름
을 했었다. 과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최선책은 무엇이냐를 놓고 .
나는 그때 이렇게 말했다. 너의 행복을 위해
서라면 나 역시 너를 떠나보낼 수 있다고 . 그
랬더니 은영은 삐친 듯이 사랑에 그렇게 자신
없냐고 하면서 자기는 죽어도, 아니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해도 결코 떠나지 않을 거라며 우
 겼다.

 

 

그런데 은영이가 떠난 것이다. 나는 그 뒤로
다시는 <ASWAYS>를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장소에서 그녀가 그녀가
<ALWAYS>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다니 . 우연
치고는 너무도 이상한 우연이었다. 내가 머리
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 망설임없
 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랑은 결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면서요?
은영 씨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닐 거예요. 은
영 씨의 가장 큰 슬픔은 일한 씨를 이 세상에
남겨 놓고 먼저 떠난 거랍니다. 일한 씨를 행
 복하게 해 주지 못한 거랍니다.

 

 

은영 씨는 언제나 일한 씨와 함께 한답니다.

그래서 은영 씨는 일한 씨가 따스한 애정을 느
낄 때, 그 순간 행복을 느낀답니다. 은영 씨는
일한 씨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을 알고 있
답니다. 그녀는 일한 씨가 새로운 사랑을 통해
서 행복해지기를 진정으로 빌고 있답니다.
 허락은 받은 걸로 치세요.”

 

 

그녀는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
를 떨궜다. 어느새 소낙비는 그쳐있었다. 나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은
영과 나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지 .
“당신은 .”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 순간 그녀가 고개
를 들었다. 나는 말을 멈췄다. 그녀는 더없이
슬픈 표정을 짓고서 울고 있었다. 눈물이 주루
 룩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전기에 감전된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곤
빠르게 내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더니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
을 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그녀가 한 말들이
 다시금 귓가에 울려 왔다.

 

 

“행복해야 돼, 내 사랑 이젠 안녕!”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리 생각해도 처음 만난 그녀가 나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걸 거야. 그런데 누구
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
정자를 나와서 은영의 봉분으로 걸어갔다.
가을비를 흠뻑 머금은 하얀 장미가 더없이 순
 수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은영 앞에 한동안 서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
벼워졌다. 그녀가 나에게 하려는 말을 알 것도
 같았다.

 

 

공원 묘지를 나와서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영구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 뒤로
 승용차들이 길게 줄을 잇고 있었다.

 

 

은영이 묻히던 날이 떠올라 걸음을 빨리 했
다. 꽃집 앞을 지나가는데 유리 문 사이로 얼
핏 묘지에서 만났던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걸
음을 되돌려서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녀였다! 그녀가 맨바닥에 주저앉아서 뭔가를
 먹고 있었다.

 

 

나를 이상한 예감에 꽃집으로 들어섰다. 그
녀는 노란 푸리지아꽃을 똑똑 따먹고 있는 중
이었다.
“이봐요.”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녀가 고개
를 돌렸다.
“히이!”
이를 환히 드러내고 있는 그녀는 아까의 그
녀와 너무도 달랐다. 한눈에 보기에도 실성한
여자임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비슷한 사람을
 잘못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려는데 낯익은 우산이 보였다. 우산
은 분명 좀전의 그녀가 쓰고 있던 거였다. 나
는 자세히 그녀를 살폈다. 분명 내가 만났던
그녀였다. 머리카락 길이는 물론이고 신발까
지도 같았다. 아니, 결정적인 증거는 목에 나
 있는 까만 점이었다.

 

 

“이봐요! 나 모르겠어요?”

 

 

나는 꽃잎을 따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
다. 그녀가 다시 이를 환히 드러내고‘흐흐흐’
 웃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짐작조
차 할 수 없었다. 멀쩡한 국화꽃잎을 뚝뚝 따
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에게 꽃을 팔았던 그 할머니
 였다.

 

 

“그 애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소용없수다.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그 모양이었느니까.”

 

 

“그래요? 내가 잘못 봤나?”

 

 

우산과 그녀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할머니
 의 말이 곧이 곧대로 믿기진 않았다.

 

 

“묘지에서 내 딸년을 만났수?”

 

 

“네 .”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년이 당신이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디까?”

 

 

“네!”

 

 

할머니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까, 신기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만 . 어째, 한동안 좀 뜸하다 했더니 .”

 

 

“그게 무슨 뜻이죠?”

 

 

“나도 처음엔 안 믿었는데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난다오. 이 애는 열네 살 때부터 이렇게
제정신이 아니라오. 그런데 가끔씩 묘지에 올
라가 정신이 말짱해져설랑은 묘지를 찾아온
사람과 이상한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오. 그러
니까 죽은 사람의 혼령이 이 아이에게 잠깐 씌
이는 거라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 아이를 통해 전해 주는 거지. 죽은 자와 산 자
 는 말이 안 통하니까 . 안 믿어도 할 수 없수 .”

 

 

할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쌓였던 의혹이 스
르르 풀렸다. 따스한 기운, 낯익는 여인의 눈
 길 그 것들은 바로 은영의 것이 분명했다.

 

 

“아가씨, 나하고 잠깐만 올라가죠!”

 

 

“이젠 늦었어. 소용 없어.”

 

 

“아녜요! 잠깐이면 돼요!”

 

 

나는 꽃잎을 따서 씹고 있는 실성한 여자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가 소용없
 다고 만류했지만 난 억지를 부렸다.

 

 

은영을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나는 반 강제로 실
성한 아가씨를 끌고 은영의 무덤으로 올라갔
다. 그리론 은영에게 한 번만 더 만나자고 간
청을 했다. 아니, 간청이 아니라 일종의 절규
 였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
다는 듯이 풀잎을 뜯어 치마에 담았다. 나는
해가 질 때까지 갖은 애원을 하며 은영에게 매
 달렸으나 은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의 묘지 앞에서 두 무릎을 꿇고 그리움
과 안타까움에 목이 메여 흐느끼고 있는데 할
머니가 딸을 데리러 올라왔다. 그녀는 아가씨
 의 손목을 잡고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젊은이도 그만 내려가슈. 이제까지 한 번
나타난 귀신은 다시는 이 애에게 안 왔수. 그
래도 젊은이는 행운아외다. 죽은 사람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

 

 

나는 밤이 늦어서 공원 묘지를 내려왔다. 서
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은영이 내게 한 말들
을 한마디씩 한마디씩 떠올렸다. 은영은 나의
행복을 위해, 나를 떠나 보내 주기 위해 내 앞
 에 나타난 것이 분명했다.

 

 

나쁜 계집 같으니라고 . 혼자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더니 .

 

 

머릿속은 한없이 복잡했지만 나는 차근차근

가슴속에 얽힌 실을 풀어나갔다. 자정이 다 되
어서 집 앞에 이르렀을 때 난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하더
라도 은영은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아
니라, 나와 영원히 함께 하는 거라는 것을.
나는 집에 들어서려다가 돌아서서 내가 걸
어온 길을 보았다. 어둠 저 편에서 은영의 목
 소리가 들려 왔다.

 

 

일한 오빠, 꼭 행복하세요. 내 몫까지 .
자식...
서울로 오는 길 내내,
 내 볼에는 두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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