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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1분간의 사랑

지혜로운바보2017.07.30 09:39조회 수 773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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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간의 사랑

 

 

그를 위해선 남아 있는
네 삶도 버릴 수 있다고 .

 

뱅크의‘가질 수 없는 너‘중에서

 

 

나의 가장 어릴 적 기억은 흑백 텔레비전이
었다. 흑백 텔레비전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의 활기 찬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드라
마 속의 한 장면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은 지는 20년쯤 될까.
난 20년이란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움직여
보지 못했다.

 


온몸을 비트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는 입도
제대로 벌려 본 적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행
동이란 고작 눈꺼플을 깜박거릴 수 있는 것뿐
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진정한 나의 불행
은 육신을 움직일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
니라, 이런 육신을 가진 내가 듣거나 보거나
생각할 수 있다는 데 있다는 것을 .

 

 

테레사 수녀님이 붙여 준 나의 이름은 사무
엘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수위 할아버지
가 나를 화창한 봄날에 주워 왔다고 해서‘상
춘’이라고 부른다.

 

 

나는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움직
일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줄로 알았다.
움직이는 것은 TV에 나오는 그림뿐이라고.
하지만 나는 복지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걸 깨달
았다.

 

 

나는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무척
기뻤다. 이 세상이 지루한 곳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 하지만 나중에 이런 생각들은 나를
괴롭히는 창이 되어서 나에게 되돌아왔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을 깨달아 갔
다. 테레사 수녀님이 나를 낳아 준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나를 낳은 친부모가
나를 이 복지원 앞에다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수녀님의 기도는 나에게 많은 진실을 알려
줬다. 수녀님은 나를‘어린 양’이라 표현했고
나를 버린 친부모를‘죄인’이라 불렀다. 수녀
님은 항상 나에게는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원
했고 나의 친부모는 용서해 달라고 갈구했다.

 

 

수녀님이 기도를 끝마치고‘아멘!’을 외칠
때 나 역시 마음속으로‘아멘!’을 외쳤다.

 

 

하지만 내가 이십여 년 동안 줄곧 깊은 신앙
심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춘기인
열여섯 살 무렵에는 심한 방황을 했다.

 

식물이나 다름없는 나의 처지를 한탄하며 나를 버린
부모들에게 원망과 저주를 퍼부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음식을 거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위장 기관만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다. 입가에 넣어 주는
죽을 거부하려고 마음먹자 위장이 곧바로 토
해내 주었다.

 

먹는 족족 토해 내자 수녀님들은
내가 병에 걸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들
은 나에게 약을 먹였지만 나는 약까지 토해 버
렸다.

 

 

수녀님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배가 고팠지만 죽기로 작정하고 묵묵히
참았다. 그런데 나를 살려 낸 것은 기도였다.

 

 

식음을 전폐한 채 바짝바짝 말라가던 어느
날 나는 혼수 상태 속에서 테레사 수녀님의 기
도를 들었다.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된 기도는
나의 심금을 울렸다.

 

 

수녀님의 기도에는 사념이 없었다. 오로지
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녀님의
눈물은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아, 나의 이기심이 착한 수녀님의 마음을 괴
롭혔구나!

 

 

나는 한순간, 나의 잘못을 뉘우쳤다. 내가 음
식을 받아들이자 수녀님은 무척 기뻐하셨다.

 

 

그 이후로 나는 내 처지에 대해 더 이상 슬
퍼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테레사 수녀
님 같은 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
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나의 세계는 내가 누워 있는 방과 가끔식 휠
체어를 타고 나가 보는 복지원 앞마당이 전부
였다. 내가 아는 사람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우리를 돌봐 주는 수녀님들, 수위 할
아버지가 전부이다.

 

 

가끔씩 낯선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들은
텔레비전 속의 인물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
람들에 불과했다.

 

 

나의 그 밖의 세계와 그 밖의 인물들은 텔레
비전을 통해서 보고 만난다. 텔레비전은 이제
는 할머니가 되어 버린 테레사 수녀님 다음으
로 나와 가장 친한 친구이다.

 

 

우리 방의 친구들은 대부분이 텔레비전을
광적으로 좋아한다. 우린 텔레비전을 통해서
꿈과 상상을 실현하곤 한다.

 

 

우리의 절친한 친구인 텔레비전도 시대와
함께 바뀌었다. 처음에는 흑백 텔레비전이었
는데 이제는 칼라 텔레비전으로 바뀌었다. 거
기다가 비디오라는 것까지 들어와 우리를 즐
겁게 해 줬다.

 

 

나는 거의 모든 지식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얻었다. 텔레비전이 들려 주는 여러 가지 이야
기는 수녀님들이 들려 주는 성경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나는 한때 저만한 텔레비전 속에 어떻게 저
토록 많은 사람들과 동물과 식물, 곤충까지 들
어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텔레
비전은 나의 이러한 궁금증까지 풀어 주었다.

 

 

텔레비전은 움직일 수 없는 나에게 날개를
달아 줘 낯선 나라는 물론이고 달나라까지 갈
수 있게 해 줬고, 텔레비전은 나에게 지느러미
를 달아 줘, 태평안 깊은 곳에서 마음껏 헤엄
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도 될 수 있었고, 마이
클 조던이 되어 덩크 슛도 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못 해 본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사랑’이었
다. 사랑만은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드라마의 즐거리를 쫓아가
다 가도, 사랑이라는 묘한 감정에 다다르게 되
면‘저게 뭔데 저러는 걸까?’하고 되물어 보곤
했지만, 사랑은 여전히 플리지 않는‘수수께
끼’였다.

 

 

나는 한동안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
는‘사랑’이라는 것을 붙들고 정체를 캐내기
위해 씨름을 했었다. 그러다가 이내 체념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음식을 소화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에게 있어, 사랑은 너무도 사치스러운 것 같
아서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생존할 수
도 없는 주제에 사랑은 무슨 사랑 .
하지만 나의 체념은 천사를 만나기 전까지였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햇살이 침대 난간을
막 넘어오려고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난 천
장을 보고 누워 있었지만 20년이 넘게 보아 온
햇살의 움직임 같은 것은 보지 않고도 감지할
수 있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발자
국 소리를 듣고서 이 곳에 자주 오는 김 신부
님과 테레사 수녀님, 그리고 낯선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사람은 날렵한 몸매를 지닌 여자일 거
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불쑥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
다. 그녀는 수녀님이 들려 주었던, 내가 수녀
님의 이야기를 듣고 머릿속으로 그렸던 천사
의 모습, 바로 그 자체였다.

 

 

“이쪽은 사무엘 형제예요. 선천성 뇌성마비
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해요. 사무엘 인사해요,
이쪽은 서지영이에요. 대학생인데 여기서 자
원 봉사를 하고 싶대요. 앞으로 사무엘님도 보
살펴 줄 거예요.”

 

 

김 신부님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왔다.
서지영이라는 아가씨가 싱긋 미소를 띄웠다.
마치 혼이 모조리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무엘님, 잘 부탁해요.”
 

 

그녀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순간 꿈을 꾸고 있
다고 생각했다.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핏줄기는 혈관 속으로 좌충우돌 뛰어다녔다.

 

 

그녀가 옆 침대의 친구에게 인사하기 위해
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
에게 고개를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
다. 나는 신열에 들떠서 천장만을 올려다보았
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지 세상이 온통 아
른아른거렸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왔다. 5시간 가량
그녀는 얼굴 한번 안 찡그리고 우리들을 돌봐
줬다. 징징거리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똥
오줌도 못 가리는 우리들의 속옷을 더럽다는
표정 한번 안 짓고 갈아 주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녀의 따뜻한 시선을 받으면서 마음
한구석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을 때처럼 포
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끔씩 내가 불
쌍하고 측은한지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속삭이곤 했다.

 

 

울지 말아요, 나의 천사여 . 그대가 곁에 있
는 한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다오.
그녀는 나의 이런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여
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대할 뿐이었다.

 

 

그녀의 변함없는 눈길을 대하면서 나는 차
츰차츰 가슴이 매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
작했다.

 

 

아, 단 한마디라도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단 한 번이라도 그녀의 따뜻한 손을
잡아볼 수 있다면.

 

 

나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게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사랑은 사막을 걷는 여행자가
느끼는 갈증과 복권에 당첨된 순간의 기쁨과
소풍을 가기 전날 아이가 느끼는 설레임을 동
반하는 거라는 걸.

 

 

날이 갈수록 그녀에 대한 나의 감정은 깊어
만 갔다. 언젠가 수녀님이‘이 세상에서 사랑
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것은 없다’고 했지만 내
가 느끼는 사랑은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것만
은 아니었다. 그것은 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괴
로움 덩어리였다.

 

 

그녀가 안 오는 날은 세상은 온통 암흑 천지
였다. 또한 그녀가 찾아오는 날은 그녀가 모습
을 드러내기까지 순간순간이 살을 베는 고통
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가고 나면 전신
이 그물로 짠 것처럼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를 만나고부터는 그토록 재미있던 텔레
비전도 보기가 싫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
는 사이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의 처지를
한없이 원망했다. 나를 낳아 준 부모를 저주했
으며 나를 이땅에 보낸 신에게 온갖 악담을 퍼
부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
이 괴로웠다. 차라리 입에 넣어 주는 죽이나
삼킬 줄 아는 그런 인간이라면 이런 고통은 없
을 터인데 .

 

 

괴로움을 몸부림을 치다 보면 그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물로
방으로 찾아왔다. 내 가슴속의 증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고 나는 순한 한 마리
짐승이 되었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천국의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그녀가 몸
을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녀의 감지할 수 있었
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를 때 나의 인
생은 환희에 넘쳤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
라질 때 내 인생은 절망적으로 변하곤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의 모든 것
이 되어 갔다. 그녀가 나의 가슴속에 가득 차
면 찰수록 나의 고통은 심해져 갔다.

 

 

아, 나는 한송이 꽃보다도 못 하구나. 내가
꽃이라면 향기로운 꽃을 피워 내 사랑을 전할
수 있으련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나는 참담한 절망 속에서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뭘까를 궁리해 봤다. 천만다행
이도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내가 표현해 낼 수
있는 가장 애정어린 눈빛을 보내는 것뿐이었
다. 나는 그녀가 없을 때도 그녀를 생각하며
애정어린 눈빛을 그녀에게 보내곤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그 날도 평상시와 같이 열심히 일을 했
다. 하지만 얼굴 한구석이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난 그런 그녀가 너무도 안쓰럽게 느껴져, 왜
그렇게 우울한지 나에게 말해 보라고 끊임없
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것들을 믿지 않았지만 그녀를 만난 뒤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 그녀
에게 다가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나의 텔레파시가 그녀에게 전달된 걸까? 내
침대 옆에서 꽃병을 정리하던 그녀가 나를 물
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으니 내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해 보세요. 모두.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정신을 집중해서 텔레
파시를 보냈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창 밖을
잠시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다가와 아름다운 입술을 열었다.

 

 

“사무엘님, 움직일 수는 없다고 해도 제 말
은 알아들으실 수 있나요?”

 

 

나는 그녀를 향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지만 내 몸은 안타깝게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무엘님은 참으로
따뜻한 눈빛을 가지고 계세요. 주변을 따뜻하
게 해 주는. 힘드시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
으시니. 사무엘님의 고통에 비하면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데. 하지만 털어놓고 싶어요. 사
무엘님의 눈빛이 모두 말해 보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요.”

 

 

나는 그 순간만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도 행복했다. 그녀가 나의 마음을 알아 준 것
이었다. 그녀는 듣지 못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내 몸의 전 세포들이‘야호!’하고 외
치는 소리를.

 

 

“사무엘님은 누구를 사랑해 보신 적 있나
요? 저는 요즘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것 같
아요. 짝사랑이지요. 그 사람은 제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고 있을 거예요. 전 용기가
없어서 다가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그를 지
켜보고만 있답니다. 제 감정을 털어놓고도 싶
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질까봐 두려워
요.

 

 

그 사람에게는 슬픈 추억이 있대요. 그 사람
은 아직도 바보처러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답니
다. 그래서 제가 그의 가슴속으로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나 봐요. 휴우.

 

 

전 사실 사랑을 처음 해 봐요. 전 그래서 남
을 좋아한다는 것이 행복한 일인 줄 알았어요.
그건데 아니더라고요. 언젠가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었어요. ‘왜 우리는 항상 서로의 등
만 쳐다보고 살게 되는 거죠‘하는. 정말로 그
런 것 같아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저는 도저히 그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만나도 마음에 없는 말만 꺼내게 되고 헤어
지고 나면 몹시 후회해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도
해 봤어요. 그래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좋
은 후배로만 대해 주는 거예요. 이렇게 계속
가다 가는 그 사람이 제 곁을 떠나고 말 것만
같아요.

 

 

휴우 고마워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셔서.
그래도 사무엘님에게라도 털어 놓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사무엘님, 그럼 다음에 봐요.”

 

 

그녀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화병을 들고
일어났다. 물을 갈러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야 했다. 그녀의 얘기를 듣는 동안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지영 씨,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의 외침이 한 마디도 표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
는 눈물조차 흘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니.
 

 

하루종일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되씹었다. 그
녀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에게 적개심과 증오
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적개심과 증오는 금세
질투와 부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왜 우리는 항상 서로의 등만 쳐다보며 살게
되는 거죠?

 

 

나는 그녀가 한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그
말은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자리를 잡
았다.

 

나는 그녀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
과는 등을 쳐다보고 살아도 좋지만 그녀의 등
을 쳐다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그녀 앞에 마주 서서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나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그녀의 고백을 듣고 나니 그녀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의 그녀는 무척
이나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 차
있던 슬픔이나 그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 안을 환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녀의 흥겨운 기분을 감지한 사람은 나뿐
만이 아니었다. 테레사 수녀님도 그러더니 이
번에는 김 신부님도 한마디 했다.

 

 

“오늘 무슨 좋은 일 있는 모양이지? 애인이
라도 만나기로 했어?”

 

 

“애인은요. 정말 애인이라도 있었으면 좋겠
어요.”

 

 

“내 눈은 못 속여. 지영이의 눈빛을 보니 사
랑에 빠져도 보통 빠진 게 아닌데.”

 

 

“신부님 놀리지 마세요.”
 

 

그녀는 부끄러운지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김 신부님이 방을 나가자 그녀는 다시 콧노
래를 흥얼거리며 걸레로 방안을 깨끗이 닦았
다.

 

그녀가 즐거워하자 나도 괜히 흥이 났다.
나는 그녀가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리듬을 따
라했다.

 

 

그녀의 봉사 시간이 끝나갈 때쯤이었다. 그
녀는 약속이라도 있는지 김 신부님 몰래 수시
로 시계를 들여다봤다.

 

나는 그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서 나 역시 사랑에 빠진 여자가 하는
행동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 사람이 나타난 것은. 나는 그
날 침대에 엇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기에
모든 광경을 생생히 볼 수 있었다.

 

스웨터에다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가 문가에 나타나자 그
녀가 단걸음에 달려갔다.

 

 

난 그녀의 반응을 보고 그 젊은이가 얼마 전
에 그녀가 고백했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일한이 오빠, 정말 왔네요. 난 안 올 줄 알
았는데.”

 

 

“야, 여기 찾기 힘들더라. 찾아오느라고 애
좀 먹었다.”

 

 

“그래서 찾아오지 말래니까.”
 

 

“야, 그래도 후배가 좋은 일하는데 모르는
척할 수 있냐. 더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맛있
는 거라도 좀 사 줘야지.”

 

 

나는 다정한 그들의 모습에서 질투를 느꼈
다. 질투는 이내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만약
내가 소리라도 지를 수 있었다면 나는 쉬지않
고 고함을 질러댔으리라.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 신부님
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이 인사를 하자
김 신부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띄웠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지영이 오늘 하루종일
안절부절 못하더라니. 자, 지영아 오늘은 손님
도 오셨으니 그만 들어가 봐라. 수고 많았다.”

 

 

“미안해요, 신부님.”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띄우고는 김 신부에
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우리하고 헤어
지는 것이 더없이 기쁜 모양이었다.

 

 

찢어지는 나의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녀는 책과 노트를 챙기더니 그 사람고 함께 방
을 나가 버렸다. 종달새처럼 노래하는 듯한 그
녀의 음성이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그녀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 심한
무력감과 함께 좌절감을 느꼈다. 나는 그날부
터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도무지 내
가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날짜가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동안은 나 나름대로 삶의 방식, 즉 생존의 방
식을 지니고 살았지만 이제는 생존의 방식마
저도 잃어버렸다.

 

 

내 마음속에 즐거움이 어느덧 사라져 버리
고 없었다. 그 대신 시도 때도 없이 허망한 바
람들만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다녔다.

 

 

아, 그 둘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녀는 나 같
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음껏 그들
만의 행복을 누리겠지.

 

 

나의 외로움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녀는 일
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방을 찾아왔지만 나
는 그녀가 있는 동안 내내 눈을 감았다. 그녀
를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겐 더 없는 고통이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서, 보고 싶어하
면서애써 외면하는 것 자체가 더 큰 고통이라
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차라리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잊으려고 안간힘을 썼
다. 하지만 그녀를 말끔히 지워 버리기에는 그
녀의 덩치가 너무도 컸다. 내가 평생을 열심히
문질러 지운다 해도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마음을 다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돌아가려는 그
녀의 손을 테레사 수녀님이 꼭 붙잡았다.

 

 

“이번주 토요일까지만 나오신다고요. 그 동
안 정말 고마웠어요. 너무 열심히 일해주어서
뭐라고 감사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정 들었는
데 이렇게 헤어진다니 몹시 서운해요.”

 

 

나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녀가 나의 곁을 떠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잘된 거야.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나는 쉽게 체념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서운함
이 변질된 거라는 걸 금세 인정해야 했다.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
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눈앞에 닥치니 암담하
기만 했다. 뚜벅뚜벅 돌아보지 않고 끊임없이
걸음을 옮기는 시계가 원망스러웠다. 영원히
토요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았다. 시간
이 가는 것이 두렵기만 했다.

 

 

토요일이 지나면 그녀는 멀리 떠나고 말리
라. 다시는 못 만날 줄도 모르는 그녀를 평생
그리워하며 가슴에 안고 살아야 하겠지.

 

 

나는 그녀를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무력하
게 그녀를 떠나 보내고 나면 평생 회한의 눈물
을 흘려야 할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 말을 붙여 보고, 그녀가 내 물음에
대답하고 그리고 나서 한 순간만이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나는 내 소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터무니없
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이대로 포
기할 수 없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대가 신이든 악마든 가리지 않겠습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저의 영혼
을 달라고 하면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저의 팔
다리를 원하신다면 잘라가십시오. 저의 두 눈
을 원하신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빼드리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육체를 지닌 인간이지만 생
명을 달라고 하면 흔쾌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내 사랑하는 그녀
앞에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서게 하여 주십시오.

 

 

 

그녀에 한 마디 말을 건넬 수 있게 해 주십시
오. 그녀와 함께 단 일 분이라도 마주 설 수 있
게 해 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천
년, 아니 백만 년 동안 당신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수억 년에
다시 수억 년을 곱한 세월 동안 지옥의 유황불
속에서 살라 해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처음이자 마지막
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부디 저의 간청을 저
버리지 말아 주소서.

 


한시도 쉬지 않고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지만
어떠한 신으로부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마침내 토요일이 왔고, 그녀가 잊을 수 없는
독특한 향내를 내며 다가왔다. 그녀는 두 달
동안 해 왔던 일들을 능숙한 손길로 하나씩 처리했다.

 

 

밥을 떠먹여 주고, 기저귀를 채워 주
고, 옷을 갈아입혀 주고, 시트를 갈아 주고, 물
걸레로 바닥을 청소하고, 동화책을 읽어 주고.
내가 이 세상에서 보낸 그 어떤 순간보다도
빠르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녀는 마침내 침대
를 하나씩 돌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사무엘님의 따스한 눈빛이 저에게 많은 힘
이 되어 주었어요. 용기 잃지 마시고 행복하세
요.”

 

 

나의 천사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옆 침대
로 갔다.

 

 

아, 나보고 행복하라고. 자기가 그렇게 떠나
면서..

 

 

이제 그녀에게도 적개심과 증오심이 느껴졌다.
나는 내 가슴 깊은 곳으로 흐르는 눈물을 주
체할 수 없었다. 눈물을 하염없이 흘러 금세 강물이 되었다.

 

 

그녀는 테레사 수녀님의 배웅을 받으며 방
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그녀는 마지막으로 병
실을 휘 둘러보았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녀는 내 곁은 떠난 것이었다. 아주 간단하
게. 이제 남은 것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평생
동안 껴안고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안 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제발.
 

 

나는 최후의 절규를 했다.
 

 

그때였다.
 

 

허공에서 이상한 울림이 들려 왔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누군
가 나의 소원을 들어준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울림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구분해
보려 했지만 쉽게 분간이 안 됐다. 하지만 나
의 흥정을 누군가가 받아 준 것 같았다.

 

 

나의 영혼과 생명을 건 계약은 체결된 것이
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 느껴 보
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듯한.

 

 

움직여 봐.
 

 

이번에는 분명 똑똑하게 들려 왔다. 손을 들
어올려 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그 동안 수없이
해 봤던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손이 허공
을 향해 들려졌다.

 

 

이럴 수가.
 

 

22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손이 허공
에서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이번에는
몸을 뒤틀어보았다.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오, 세상에!
 

 

나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적, 기적
을 내가 행하고 있었다. 옆 침대에 누워 있던
기철이 나를 발견하곤‘우우!’하고 늑대 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

 

 

 

나는 개의치 않고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
다.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
게 움직여 왔던 사람처럼 아주 자연스러웠다.

 

 

 

병실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그
들의 시선을 받으며 거울로 다가갔다. 수녀님
들이 가끔씩 손거울로 비쳐 주던 추하고 일그
러진 얼굴이 아니었다.

 

 

 

얼굴 역시 깔끔하게 펴져 있었다. 눈빛은 무
엇에 열망하는 것으로 빛났다.

 

 

 

나는 거울에 손을 비쳐 보았다. 그리곤 천천
히 움직여 보았다. 신기했다. 자유자재로 움직
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었다.
온 세상이 마치 내 거라도 된 기분이었다.

 

 

 

나는 거울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환영을
보았다.

 

 

아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놓치기 전에 그녀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것도 서둘러야 될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안 된
다는 것이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어.
 

 

허공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나는 얼륵
진 환자복을 내려다보았다. 새삼 이런 차림으
로 그녀를 쫓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방을 나갔다. 22년 동안 누워 있던 나
의 세계를 뚜벅뚜벅 걸어서 벗어났다. 난 창고
로 내려갔다. 여기저기서 기증해 온 헌옷 상자
가 여기저기 쌓여 있었다.

 

 

 

난 무슨 옷을 입을까 고르다가 병실에 찾아
왔던 일한이라는 사람의 옷차림을 떠올렸다.
주저없이 청바지에 일한이 입었던 감색 스웨
터와 비슷한 모양의 스웨터를 걸쳐입었다.
어서 가야지.

 

 

 

허공에서 누군가 다시 재촉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서둘러서 복지원을 나섰다. 그녀가 테
레사 수녀님과 나간 지 20분쯤 되었으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으리라.

 

 

 

복지원을 나섰지만 한번도 나가 보지 않은
길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
다. 우두망절 서 있는데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오른쪽으로 가.
 

 

나는 그 목소리에 따랐다. 목소리가 지시하
는 대로 달리니 큰길이 나왔다. 테레사 수녀님
과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막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숨을 헐떡이며 택시 앞까지 뛰어갔
으나 택시는‘부르릉’하는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출발했다.

 

 

 

나는 그녀를 놓쳤다는 허탈감에 휘청거리는
육체를 가까스로 바로잡았다. 이대로 끝내기
는 너무 억울했다. 테레사 수녀님이 고개를 갸
웃거리며 나를 쳐다봤으나 알아보는 것 같진
않았다.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데 다시 음
성이 들려 왔다.

 

 

- 저기 오는 택시를 잡아!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빈 택시 한 대가 달
려오고 있었다. 나는 무작정 도로로 달려가 두
팔을 쩍 벌리고 택시를 세웠다. 택시가 내 앞
에서 미끌어지며 급정거했다.

 

 

 

“뭐야? 죽고 싶어!”
 

 

 

택시 운전사가 창문을 내리고 삿대질을 했
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 급히 올라
탔다.

 

 

“미안해요, 그, 급한 일이 있어서.”
 

 

내 목소리를 내가 들은 것이 그때가 태어나
서 처음이었다. 굵고 남자다운 음성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차도로 뛰어들며 어
떡해요?”

 

 

“저, 저 앞 차 좀 쫓아가 주세요!”
 

 

운전사는 내 말에 재빨리 기어를 넣고 엑셀
러레이터를 밟았다. 택시 운전사는 아무래도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이는지 룸미러로 자주 힐
끔거리며 쳐다봤다.

 

 

 

나는 처음 타보는 택시 안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봐 왔던 수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
다. 이 세상은 내가 TV와 접하던 것과 너무도
똑같았다. 하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
르는 세상 구경이었지만 나는 한가하게 세상
구경만을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녀
를 놓치면 어떡하나 하는 조바심에 시달려야
했다.

 

 

 

수많은 차들이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택시는
앞차를 용케 놓치지 않고 쫓아갔다. 그녀가 탄
차는 복잡한 네거리에서 멈춰 섰다.

 

 

 

나는 그녀를 놓칠새라 재빨리 택시에서 내
리려는데 택시 운전사가 뒷덜미를 낚아챘다.

 

 

 

“학생, 돈 내고 내려야지!”
 

 

 

순간, 나는 당황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광경
들이 떠올랐다. 차에서 내릴 때 뭔가를 주고
내리는.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기
만 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봐.
 

 

나는 음성이 시키는 대로 주머니에 손을 넣
었다. 뭉툭한 것이 잡혔다.

 

 

그걸 줘.
 

 

주저없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운전사에게
내밀었다. 내민 운전사의 손 위에 뭉툭한 것을
내밀자 칼날이‘찰칵’하고 펴졌다. 뭔가 했더
니 잭 나이프였다. 운전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
렸다.

 

 

“내, 내리세요!”
 

 

나 역시 깜짝 놀라서 손 안에 든 것을 살피
는데 운전사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거라도 가지세요.”
 

 

“아니, 됐, 됐습니다!”
 

 

운전사가 극구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들고 내렸다.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녀는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뛰어갔다. 사람들이 갑자기 비
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나는 뒤늦게 내 손에
들린 칼 때문에 사람들이 겁먹고 있다는 걸 깨
닫고는 칼날을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문 안에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걸어다니고
있었다. 손에 책이나 가방 같은 것을 들도 있
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뛰어올라가다 보니 고
풍스러운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여기
가 그녀가 다니는 학교인 모양이었다.

 

 

 

삼사 미터 전방에 그녀 혼자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음을 늦추었다. 여기까지는 막
상 쫓아오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
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녀는 로마 시대의 건축물 같은 거대한 건
물 앞에 멈춰 섰다. 누구를 찾는 건지 연신 사
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더니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넋 놓고 바라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막혀 왔다.

 

 

아름답지? 그녀를 갖고 싶나?
 

 

귓가에 은근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솔
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녀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방법
을 가르쳐 줄까?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바라보
고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데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면 정말로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봐. 그래, 그 동
그란 버튼을 눌러.

 

 

 

시키는 대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날카로운 칼날이 빛살을 튕겼다.
이제 그녀에게 살금살금 다가가서 심장을
찌르는 거야. 그 다음에 그 피를 혀로 핥으며
너는 그녀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지. 아무도
너희들을 갈라놓을 수 없어. 어때?

 

 

 

나는 칼과 그녀를 바라보다가 칼날을 편 채
로 잭 나이프를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그녀에게 다가갔다.

 

 

 

인간의 사랑은 참으로 짧지. 그들의 사람
은 대체적으로 십 년도 지속되지 못하지. 하지
만 내가 시킨 대로 하면 너와 저 여자는 영원
히 사랑할 수 있어. 천 년, 아니 수백만 년이 흐르도록.

 

 

 

그녀는 내가 다가서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
었다. 주머니 속에 넣은 칼의 차가운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 옆에 섰다. 머
리카락에서 잊을 수 없는 그녀의 향휘가 느껴
졌다. 이토록 가까이서 그녀를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찔러, 이때야!

 

 

 

나는 칼을 꼭 움켜 쥐었다. 그 순간,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
들렸다. 그리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 울림은
이제 귀가 멍해질 정도로 웅웅거렸다.

 

 

 

나는 의아해 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
죠?”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나의 이런 질문에 그녀를 난도질하라고 난
리치던 그 울림은 당황한듯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를 재촉했다. 그
녀의 영원한 소유를 위해서 그녀의 심장을 후비라고...

 

 

 

그녀는 내 질문에 시계를 보더니 친절하게
대답했다.

 

 

 

“3시 43분인데요.”
 

 

 

나는 미친듯이 울리는 그 가슴속의 울림에
도 불구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
녀와 함께 꼭 하고 싶었던 일을...

 

 

 

“아, 그래요?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요, 지금부터 일 분 동안 시계를 보고 있다가
일 분이 지나면 저에게 가르쳐 주시겠어요?”

 

 

“네?”
 

 

 

그녀가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안 가는지
반문했다.

 

 

 

“간단한 거예요. 그냥 일 분 동안 시계만 들
여다보고 계시다가 제게 가르쳐 주시면 돼요.
아무것도 안하고 단지 일 분동안만 가만히 시
계만 보고 계시다가 제게 가르쳐 주시면 됩니
다. 이상하게 생각되시겠지만 부탁입니다...”

 

 

 

그녀는 나를 말뚱말뚱 쳐다봤다. 나의 엉뚱
한 부탁에 그녀는 놀라는 것 같았다. 이제 내
가음속의 울림은 완전히 절규였다. 빨리 그녀
를 난도질하라고...

 

 

 

잠깐 동안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허공에서 음성이
들려 왔다.

 

 

 

이때야! 그녀의 심장을 빨리 찔러! 어서.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그러죠, 뭐. 자
지금은 정확히 3시 45분이에요.”

 

 

그녀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시
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만의 부탁을 충실히 들어 주고
있는 그녀를.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도 들려 오지 않았다.
 

 

 

허공에서도 더 이상 그녀를 찌르라는 목소리
가 들려 오지 않았다. 마치 비눗방울처럼 밀폐
된 공간 속에서 그녀와 단 둘이 서 있는 느낌
이 들었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녀는 나를 위해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
는 사랑스런 그녀의 모습을 한없이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비록 대화나 육체적인 접촉은 없지만 나는
그녀와 완벽한 합일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세상
에서 존재하는 있는 오직 그녀와 나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숨을 죽인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황홀하도
록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그녀에게 시계를 1분 동안 보아
달라고 한 제안은 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비
디오에서 본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이다.

 

 

비디오를 보면서 나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한번 써 먹어 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택시 안에서 퍼뜩 떠올라 실행에 옮긴 것 뿐이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1분이 지나가고 있었
다. 바쁘게 살아가는, 그러다 보니 삶의 소중
함을 잊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1분은 아
주 보잘 것 없는 시간이리라. 하지만 지금 내
가 살고 있는 1분은 나의 전 생애보다도 더 값
진 시간이었다.

 

 

 

12자에서 출발하였던 시침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결국 1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일분이 지났는데요. 지금은 4시 46분이에
요.”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이 몇년도 몇
월 몇일이지요?”

 

 

 

그녀는 나의 뚱딴지 같은 질문에 고개를 갸
우뚱거리더니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음 오늘은 1995년 4월 30일인데요.”
 

 

 

“아, 그렇군요. 그럼 이렇게 되겠군요. 1995
년 4월 30일 오후 3시 45분부터 46분까지 나
는 당신과 같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단 둘이
서. 이 시간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마저도... 정말 감사합니다. 나
에게 이처럼 소중한 추억과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그녀는 처음에는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
은 것 같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
한 뒤에는 나를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럼, 행복하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고개를 드
니 병원에서 보았던 일한이라는 사내가 저편
에서 바삐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서 질투를 느끼지 않았
다. 나에게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 분에 불과
했지만, 난 불성실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서 한
사랑보다 더 깊이 그녀를 사랑했노라고 자신
할 수 있었다.

 

 

 

마음속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 동안 험악하
게 몰아치던 분노와 시기의 태풍도 피눈물을
동반한 비바람도 멎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
로 그녀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룬 사람처럼 행복했다. 이
제 그녀의 행복을 빌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
면 나도 아주 짧지만 그녀의 인생의 일부를 소
유하게 되었으니까... 아무 여한도 없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하나 생각해보았다.
 

 

 

봄날의 화사한 햇살이 학교안을 내리쬐고
있었다.

 

 

 

젊은이들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더 살고 싶은 욕구가 은근히
고개를 쳐들었다.

 

 

 

나에게 이런 기적을 일어나게 해준, 그 울림
의 분노의 을림이 들리는 것 같았다. 영원히
내 소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울림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 울림의 분노를 나는 상관않
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천천히 길거리로 들어섰다.
 

 

 

그때 그 울림의 득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앞이었다.
 

 

 

그녀가 보였다. 그녀 옆에는 일한이라는 사
람이 걷고 있었다. 좁은 도로를 건너오던 그녀
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그녀는 일한의 몸
을 잡고 가까스로 섰다. 다리를 접찔린 모양이
었다.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아서 구두를 벗어
들었다. 뒷굽이 떨어져 나가 너덜거리는 게 보
였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골목 안쪽으로 돌렸다. 봉고차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와 그를 향
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차는 멈춰 설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
겼다.

 

 

 

가만 있어! 세상을 더 살아 보고 싶지 않나?
 

 

 

허공에서 예리한 음성이 날아왔다. 나는 걸
음을 우뚝 멈추었다. 봉고 차는 점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났
는지 운전사의 당황해하는 얼굴이 역력했다.

 

 

 

환희에 찬 그 울림이 가슴속에서 메아리
쳐오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듯
이... 나는 아무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달려오는 봉고차 앞
에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섰다.

 

 

 

운전사의 놀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운전대에 머리를 박았다.

 

 

 

바보 같은 자식!
 

 

 

허공에서 몹시 분개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순간, 가슴과 얼굴에 엄청난 통증이 왔다.
난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뒤통수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아스팔트 위에 길게 드러누운 나의 팔과 다
리 위로 봉고 차가 지나갔다. 지금까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끔찍한 통증이 뇌 속으로 파
고들었다. 봉고는 내 몸을 밟고 지나가다가 진
로를 바꿔 가로수에‘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
딪혔다.

 

 

 

“아악! 사람이 치었어!”
 

“도와 주세요!”
 

“빨리 구급차를 불러!”
 

 

웅성거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왔다. 나
는 봄날의 아스팔트 위로 내 몸 안에서 나온
뜨거운 피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 보았지만 한쪽 눈밖에 보이지 않았
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다
행히도 그녀는 무사해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잡고 있었던 의식의 끈을 놓았다.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갔다. 온몸은 고통으로
꿈틀거렸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 선택에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나
는 비로소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
다. 그는 악마였다. 인간을 끊임없이 유혹하는.
고맙소!

 

 

 

나는 악마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악마에게.

 

 

 

점점 의식은 흐려지고 온몸은 고통으로 경
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숨쉬기도 힘들어졌다...
 

 

이제 죽는다는 깨달았다. 사람들이 웅성거
리고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 중에 그녀와 그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다행이였다...

 

 

죽는다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
했다. 단 하나뿐인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서 버릴 수 있다는 것이...

 

 

 

후회도 없었다. 생존하는 것에서 삶을 영위
하는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
은 내 자신을, 내 자신의 의지로, 내 자신이 소
중해하는 사람을 위해 바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3년 5개월 11일 5시간 생존해오다가, 1시간
23분 인간으로 살았고,

 

 

1분동안 사랑했다...
 

 

가슴속 그 울림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울리는 것 같았다...

 

 

점점 주위가 어두워졌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갔다...
 

 

하지만 나의 인생은 후회없었다...
 

 

나의 생명과 영혼이 내 육체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든 그 계약은 완료되었다...
 

 

지영이와 도서관앞에서 3시반에 만나기로
했는데, 좀 늦었서 서둘러서 도서관앞으로 갔
다. 지영이는 이미 와 있었고, 어떤 남자와 얘
기하고 있었다.

 

 

누군가하고 다가가는데, 그 사람은 지영이
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내 옆을 지나갔다. 지나
가면서 그 사람은 나를 이상할 정도로 따뜻하
게 바라보고 지나갔다. 어색한 옷차림새와 뭔
가 움직임이 어색했지만 그 눈빛만은 인상적이
었다. 나는 지영이에게 궁금해하며 다가갔다.

 

 

 

“지영아, 늦어서 미안하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 누구니?”
 

 

“일한이 오빠, 왜 맨날 늦어요.
그러니 이상한 사람도 만나잖아..
 

 

 

처음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친숙했어요..
시간을 묻더니, 다시 1분동안 가만히 있어
달라더니,

 

 

 

그 시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하더니
그냥갔어요..

이상한 사람이야...”
 

 

“어, 그거 왕가위 감독의 <아비정전>에 나
오는 장면인데...

저 사람 그 영화를 감명깊게 보고, 아무나
에게 흉내내는 것인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리는 그 자리
를 떠났다.

 

 

오늘 지영이 자원봉사도 끝나고 해서, 오랫
만에 써클 후배들과 술 마시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길거리에 다 나가서 지영이가 갑자기
넘어졌다.

 

 

발목이 접질린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저기서 부웅하는 차소리가 들렸다.
봉고였다.

 

 

학교안 길이라 저렇게 과속하는 차가 없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석을 보고, 나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운전사가 차에 이상이라도 생겼는지, 당황
한 표정으로 사람들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필
사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리
쪽으로 돌진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영이 손을
잡고 그 자리에서 피하려 했다.

 

 

 

하지만 완전히 주저앉은 지영이를 쉽게 일
으킬 수 없었다.

 

 

지영이도 달려오는 봉고를 보고 얼굴이 새
파랗게 되었다.

 

 

여기서 꼼짝없이 사고나는구나 생각했다.
 

 

그때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어느 사람이 튀어나오더니, 봉고
앞을 두손을 펼치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
는 듯한 자세로 그 앞에 섰다.

 

 

다음 순간 그 사람은 봉고에 튕겨나갔다. 그리고 바로 우리앞
에서 봉고에 깔렸다. 그 사람을 치어서 그런
지, 봉고는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빗겨 옆 가로수를 박았다.

 

 

 

나는 멍해있는 지영이를 일으켜 그 괴상한
사람이 쓰러진 쪽으로 다가갔다.

 

 

그 사람은 완전히 만신창이였다. 얼굴과 가
슴은 피 투성이었고, 팔 다리는 봉고에 깔려
뭉그러져있었다. 피는 그 사람밑에 홍건히 괴
여 있었다.

 

 

한쪽눈만깜빡거리다그눈도움직이지않았다.
끔찍했다. 하지만 뭔가 끌렸고, 그 피투성이
얼굴은 편해 보였다.

 

 

평소 끔찍한 것이라면, 쳐다 보지도 못하는
지영이도 그 사람의 시체를 물끄러미 보면서,
한마디 했다.

 

 

“죽을 때 그렇게 고통스러웠을텐데, 왜 그
렇게 편안해 보이지...”

 

 

“지영아, 너 이 사람 아니?”
 

 

“아뇨, 친숙한 기분은 느껴졌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예요..

전생에 만나적이 있나?”
 

 

“그래도 고마워하자, 결과적으로 이 사람
때문에 우리가 목숨을
구했으니까...”

 

 

 

우리는 자리를 떠나면서, 그 사람의 끔직하
지만 편안한 죽음에 대해 애기했다. 그리고 심
년감수했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자기의 피 속에 쓰러져 있는 그 이름모를 사
람을 보니, 왠지 모를 슬픔과 동정심이 느껴졌
다. 갑자기 이 사람이 봉고앞으로 왜 뛰어들었
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마 우리를 구해주
기 위해 뛰어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던지면
서 구할리는 없을 테니까..

 

 

왜 그런식으로 목숨을 버렸을까...
 

 

자살이었나...
 

 

그 사람의 죽음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런 관계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들에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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