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게시물 단축키 : [F2]유머랜덤 [F4]공포랜덤 [F8]전체랜덤 [F9]찐한짤랜덤

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광신의 늪 part.1

지혜로운바보2017.07.30 10:03조회 수 837댓글 0

    • 글자 크기


광신의 늪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생겨 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 역사를 보면
어느 재난이나 전쟁보다도,
종교에 대한 광신으로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왔다.

 

준수와의 대화 중에서

 

 

 

약속 장소인 현대백화점 앞은 저녁 시간이
라 퇴근하는 사람, 저녁 장 보는 주부들, 누군
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하
나하나를 살펴 보았지만 아직 준수는 나와 있
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물고 앉아 준수를 기다렸다. 거
의 육개월 만의 만남이었다. 요즘은 뭘하고 지
내는지 무척 궁금하기도 했다.

 

 

 

준수에게서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전화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오랜 만에 걸려 온
그의 전화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준수는 내가 2년 전에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만난 친구이다. 그 당시 나는 어학 연수를 핑계
삼아 미국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다녔었다.

 

 

 

그때 그는 기타리스트를 꿈꾸고 있었는데
영화를 무척 좋아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의기 투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많은 논
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음악과 영
화, 그리고 인생에 대해서 서로의 토로하면서
매일같이 술을 마시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준수와의 그런 많은 추억들 중
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악몽
같던 여행.......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몸서리가 처졌다. 여
행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젓고
있는데 저만치서 준수가 다가왔다. 나는 자리
에서 일어나며 번쩍 손을 들었다.

 

 

 

준수는 육 개월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의 그는 절망에
휩싸여 거의 인생을 포기한 폐인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준수는 뭔가 활기에 넘쳐 보였
다. 눈빛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열로 불타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왼손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검은 장
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낀 손을 보니 다시 그
생각이 떠올랐다. 준수는 이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그 동안 뭐했니? 연락 좀 하
지.......”

 

 

 

나는 애써 그의 왼손을 외면하고 오른손을
힘껏 잡았다.

 

 

 

“그냥...... 좀 바뻤어. 그래 너는 요즘 뭐하
고 지내니? 뭐 좋은 일이도 있니? 얼굴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은....... 나 다시 음악 시작했어. 이
번에는 컴퓨터 음악이야. 손을 많이 안 써도
되지.”

 

 

 

준수가 말하고는 환히 웃었다. 준수의 대답
은 약간은 의외였다. 어쨌든 이제는 손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회복되
었다고 생각하니 반가웠다. 거기다가 다시 음
악까지 시작하다니.......

 

 

 

준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옛날 기분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사람들이 그리 북적거
리지 않는 아주 조용한 노바다야끼였다. 우리
는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으레 나누곤 하
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술을 마셨다.

 

 

 

준수는 지난 날의 충격에서 회복되어 정상
적인 생활로 돌아온 것 같았다. 하긴 벌써 2년
전 일이니까 충격도 딛고 일어설 때도 되었으
리라.

 

 

 

준수는 컴퓨터 음악의 매력에 대해서 한동
안 떠벌였다. 나는 준수의 이야기에 간간이 장
단을 맞춰 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준수는 음악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델라웨어 강변에서 기타를 치면서, 케
니 로긴스의‘The More We Try’를 부를 때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당시 준수는 정말로 멋있었다. 나는 나중
에 준수가 기타를 못 치게 되었을 때 많은 걱
정을 했고, 준수는 실제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준수가 이
렇게 다시 웃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
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음악과 영화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고 점점 취해 갔다. 술이 좀 들
어가자 우리는 서로의 아픈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직도 수민이하고
는 연락을 하고 있냐고 묻자 준수는 태연히 말
했다.

 

 

 

“수민이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대. 이번 겨
울에는 바빠서 못 나올 것 같다던데. 헤야 할
일은 많은데 겨울 방학이 짧아서.......”

 

 

 

하지만 준수의 내면에 균열이 생긴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아직도 힘드니?”
 

 

“아니! 하지만 그 일 이후로 서로에게 벽이
생긴 것 같아. 하하핫! 세월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준수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지만 아무래도
어색했다.

 

 

“참, 너는 이제 은영이 완전히 잊었니?”
 

 

내가 수민이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한 복수
라도 하듯이 은영이 얘기를 꺼냈다.

 

 

“글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미
국에 있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나는 애써 미소를 띄우면서 잔을 들었다. 그
때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왔다.

 

 

 

한떼의 젊은이들이 우르르 들어와 우리 옆자
리에 앉았다. 그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나누
었는데, 근처에 있는 교회 또는 성당의 주일학
교 교사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 같았다.

 

 

 

나나 준수나 꽤 취해 있었지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얼른 준수를 살폈다. 준수가 취
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준수는 옆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한순간 살기 같은
것이 번뜩거렸다. 나는 긴장하며 준수의 어깨
에 손을 올렸다. 준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걱정 마. 이제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으니까.”
 

 

준수는 검은 장갑을 낀 왼손으로 술병을 가
볍게 두드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제 이 손가락들에 대한 미련 다 버렸어.
어차피 끝난 일이잖아.”

 

 

 

나는 굳어 가는 준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빈 잔 위로 다시는 떠
올리기조차 싫은 지옥 같은 여행이 아른거렸
다. 준수의 인생을 파멸로 몰고 갔던 2년 전의
그 여행길이.......

 

 

 

그때 여행 계획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준
수였다. 나는 당시 어학 연수 중이었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말뿐이었다. 우린 주말말 되면
사람들을 모아 차를 끌고 여행을 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준수가 인디아나에
서 공부하고 있는 여자친구 수민이를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자리에 끼기 싫다고 거절을 했다.

 

 

 

하지만 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견우와 직
녀과 만나는데 까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준수가 나하고 같이 가자고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장거리니까 혼자 가면 무료하
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차 때문인 것 같았다.

 

 

 

준수는 국제 면허증이 없어서 운전뿐만 아
니라 카 렌트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나
를 통해서 차도 렌트하고 운전까지도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국 같으면 다른 대중 수단을 이용했겠지
만 미국이다 보니 그런 발상을 한 것이리라.
사실 미국에서는 렌트카가 대중 교통수단의
일부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만큼 싸고 편리하
게 때문이다.

 

 

 

기름값도 우리 나라의 반 값도 안되니 장거
리를 뛴다 해도 그리 부담이 없다. 실제로 기
차나 버스를 이용하는게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보다 비싼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주 먼 거
리가 아니고, 혼자서 여행하지 않는 이상 렌트
카를 쓰는 쪽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망설이는 나에게 준수는 토요일에 렌트해서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자는 것이었다. 저녁 공
연보다 싼 마티네(오후) 뮤지컬 한 편 보고 다
시 출발하자고 나를 유혹했다.

 

 

 

나는 수민이가 있다는 인디아나가 저 중부
에 있는 인디아나 주가 아니고, 같은 팬실베니
아 주에 있는 작은 도시 인디아나이라는 사실
에 흔들렸고, 뮤지컬 보자는 제의에 그만 승락
하고 말았다.

 

 

 

사실 인디아나라고 하면 뉴욕에서 자동차로
10시간 정도의 거리여서 별로 먼 거리는 아니
었다. 준수가 그토록 자랑하는 수민이라는 여
자 친구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행을 가기로 한 토요일이 왔다. 우리는
‘만나 렌트카회사’로 향했다. 예약은 내가 전
화로 먼저 해 놓았기 때문에 차를 끌고 출발하
면 되었다.

 

 

 

미국이라고 해서 아무나 차를 렌트할 수 있
는 것은 아니다. 렌트카회사는 많지만 규정이
조금씩 달랐다. 특히‘헐츠’나‘어비스’같은
대형 렌트카회사는 규칙도 까다롭고 이용료도
비싼 편이다.

 

 

 

주마다 차이는 있지만 플로리다 같은 관광
지를 제외하고 동부에 있는 대부분의 주에서
는 렌트할 때 나이 제한이 있다. 대체적으로
만 25세를 넘지 않으면 회사의 보증이 없는 한
차를 렌트할 수 없다.

 

 

 

그 밖에도 신용카드가 있어야 하는 데다 비
싼 보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차를 빌리기만
한다면 지점망이 수없이 많아 서비스가 대
단히 잘 되어 있다. 차를 돌려줄 때도 상당히
편한 데다 다양한 차종을 선택할 수 있다. 또
한 보험료가 비싼 만큼 보상도 완벽한 편이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만 25살을 넘지 않아서,
다른 작은 회사을 찾아야 했다. 물론‘알라모’
나‘엔터프라이즈’같은 큰 회사는 21세만 넘
어도 차를 빌려 주지만, 그 대신에 가산금을
붙였다. 가산금까지 주고서 렌트할 경우에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애용하던 도요다 렌트카
센터에서 렌트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서는 21
세만 넘으면 아무런 가산금 없이 차를 빌려 준
다. 보험금도 싸고 렌트비도 싼 편이다. 차의
종류는 도요다 차로 한정되어 있지만, 사흘에
보험금과 세금 포함해서 8만원 정도니 우리로
서는 그리 불만이 없었다.

 

 

 

물론 보험금이 싼 만큼 사고가 났을 때 이용
자가 배상해야 하는 몫도 크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우린 싼 데다 쉽
게 렌트가 가능하다는 장점만 보기로 했다.

 

 

 

렌트카 회사는 우리들의 기숙사에서 10블럭
정도 떨어져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기다리기도 지루해 그냥 걷기로 작정했다.

 

 

 

한참 걷다가 준수가 걸음을 멈추고 이상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그 간판을 보니 미국식
점장이 집임을 알 수 잇었다.

 

 

“야, 우리 점 한번 보고 가자!”
 

 

준수가 불쑥 제안했다. 나는 점을 본다는 것
이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시간도 남는 데다
미국에서는 점을 어떻게 보나 하는 호기심도
일고 해서 따라들어갔다.

 

 

 

“야, 미국 점은 어떻게 볼까? 미아리처럼 솔
잎이나, 쌀 같은 걸로 볼까?”

 

 

“교회도 다니는 자식이 점은 웬간히도 좋아
하네.”

 

 

 

나는 준수 뒤를 따라로 지하로 내려갔다. 손
잡이에 손을 대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문이
열리면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내는 몹시도 어두웠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지 쾌쾌한 냄새가 났다. 어둠이 다소 눈에 익
자 흐릿한 불빛 아래 앉아 있는 흑인이 보였
다. 그는 전혀 점장이 같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를 가리켰다. 나
는 소파에 앉아서 실내를 둘러보았다. 특별한
장식은 없었다. 약간은 어두운 색깔의 벽지가
발라져 있었는데 그 위에‘당신의 운명과 미래
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쓰여진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음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준수는 한국에서 점을 보았던 이야기를 했지
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앉아 있는 왼쪽에서 문이 열리고 백
인 여자가 나왔다. 그녀는 우리를 힐끗 보고는
지하실을 나갔다. 흑인 조수가 안으로 들어갔
다가 나오더니 우리를 그 방으로 안내했다.

 

 

 

그 방 안은 더 침침했다. 가운데 알록달록한
테이블보를 뒤집어쓴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
었다. 그 중앙에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커다란 수정 구슬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지?”
 

 

어둠 속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잘
알아듣기 힘든 액센트였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을 보니 이상한 옷을 걸친 흑인 할머니가 앉
아 있었다. 그녀는 마치 대형 포스터 속의 마
귀 할멈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빗자루만 쥐
어 주면 영락없는 동화 속의 마녀였다.

 

 

“한국에서 왔는데요.”
 

 

준수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한국
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잘 아는 건지 건성으로
그러는 건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의미
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뭘 알고 싶어서 왔나?”
 

 

“우리와 미래와 운명을 볼 수 있나요?”
 

 

준수가 다시 말했다.
 

 

“물론이지. 내 손을 잡게.”
 

 

할머니가 뼈가 드러나 앙상한 손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우린 순간 누가 먼저 할까 눈
치를 보았다. 나는 이왕 하는 거라면 내가 먼
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깜짝 놀
랄 정도로 차가웠다.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눈
을 감고서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뭐라고 중
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녀의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한참을 중얼거리던 점장이가 주문을 멈추고
눈을 떴다. 그러더니 나의 미래와 운명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음은 유독 알아듣
기 힘들었는데, 그녀는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걸 감안해서인지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지금 과거의 일로 인해 고통받고 있
군요. 하지만 곧 과거의 아픔에서 회복될 겁니
다. 밤이 가고 나면 초원에 찬란한 태양이 떠
오르듯이....... 하지만 당신의 고통이 깨끗이
씻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고통을 씻는 데
는 좀더 많은 비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은 세
월이 현명하게 해결해 줄 겁니다. 고통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한....... 더 큰
고통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당신은 고통 속에
서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될
겁니다. 지금은 온통 불신뿐이지만.......”

 

 

 

너무도 애매모호한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한 말에
다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
지만 나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죠?”
 

 

“자네가 들은 그대로라네.”
 

 

점장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대단히
실망했다. 그 정도의 예언이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수도 실망한 눈치였다. 준
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점장이의 손을 잡았다.

 

 

 

방법은 같았다. 그녀는 준수의 손을 꽉 잡더
니 예의 주문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데
조금 달랐다. 나를 할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
남에 따라, 그녀의 주문이 점점 빨라지고 커졌
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녀의 몸
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준수가 당황하여 나를 보았다. 나 역시 겁이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예언 때
문이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기를 치기 위해서
사전 공작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흑인 거주지역 안이었다.
범죄가 잦은 곳이라 해가 지면 백인이나 유색
인종은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우
리는 토요일 낮이고 해서 지나가던 길이었는
데, 꼭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안 좋은 예감
이 들었다.

 

 

 

준수가 손을 빼내려고 하는데 점장이가 갑
자기 눈을 떴다. 그리곤, 숨이 차는지 할딱거
렸다. 목울대 밑으로 닭처럼 살이 출렁거렸다.

 

 

 

혹시 강도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돼서
나는 방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점장이가 누
군가와 짜고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것만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점장이는 아무 말 없이 수건으로 이마와 목
덜미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서는 테이블 위에
카드를 올려놓았다. 우리는 그냥 일어서려 하
다가 꺼내 놓은 카드에 끌려 다시 앉았다.

 

 

 

테이블 위의 카드는 포커할 때 쓰는 것이 아
니라 서양에서 점을 볼 때 쓰는 카드였다. 점
장이는 카드를 막 섞더니 피라밋형으로 카드
를 테이블 위에 배열해 놓았다.

 

 

“아무 거나 한 장 뽑아요.”
 

 

점장이가 준수에게 카드를 뽑으라고 권했
다. 왜 나한테는 안 하던 짓을 준수에게 하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고 있는데 준수가 카드 한
장을 뽑아 뒤집었다.

 

 

 

순간 나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준수
가 뽑을 카드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죽
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는 카드였다. 해골로 된
유령이 망토를 두르고 긴 낫을 비스듬히 들고
있는.......

 

 

 

준수의 얼굴을 보았다. 준수는 떱떠름한 얼
굴이었다. 하긴 아무리 장난이라 하더라도 그
런 카드를 뽑고 나면 꺼림칙할 것 같았다.
당황한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카드
를 뽑으라고 한 점장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는 몹시 당황해서 카드를 마구 섞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카드를 꽉 쥐고는 눈을 감은 채 주
문을 외웠다.

 

 

 

이번에는 주문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카드를 피라밋형으로 배열해 놓고, 맨 위
꼭지점 부분에다 남은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
러더니 자기가 피라밋의 양 끝에 놓인 카드를
뒤집었다.

 

 

 

공교롭게도 두 장 다 아까 준수가 뒤집은 카
드와 같은 죽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는 카드였
다. 준수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나도
기분이 몹시 상했다. 점장이도 당황해서는 손
을 마구 떨기 시작했다.

 

 

“다시 한 장을 뽑으세요. 아주 신중하
게....... 주의해서.......”

 

 

점장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준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이 몹시 상했는지 아무
렇게나 한 장을 뽑았다. 뒤집힌 카드를 보았더
니 역시 죽음의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미신이나 사기라고 하지만 기분이
몹시 나빴다. 준수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져 있
었다. 점장이는 준수가 고른 카드를 한동안 내
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체념한
듯이 얘기를 꺼냈다.

 

 

“죽음의 사자가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죽음
의 사자는 당신에게 재앙을 안겨 줄 겁니다.
사악한 믿음을 경계하십시오. 앞으로 한동안
은 아무 곳으로로 떠나지 마십시오. 죽음의 사
자는 먼 곳에서 당신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말을 명심하시오, 젊은이.”

 

 

 

점장이의 말은 우리를 난처하게 했다. 지금
막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런 재수없는 말
을 하다니.......

 

 

 

내 눈에는 정말로 그녀가 마녀처럼 보였다.
준수에게 저주를 내리는....... 나는 몹시도 언
짢았지만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조심스러웠다.

 

 

“That’s okay......”
 

 

준수는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
히려 안절부절하는 쪽은 점장이였다. 점장이
는 조심하라는 얘기를 연발했다. 여행을 결코
떠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나는 준수와 함께 일어났다. 준수는 방을 나
와서 20불을 요금으로 조수에게 건네 주었다.

 

 

방 문 앞을 떠나려는데 점장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분 나쁜 예언을 듣고 점장이 집을 나온 우
리는 렌트카회사로 향했다. 점장이의 얘기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준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면서 도리어 나를 위로했다.

 

 

 

“미국에도 점 같은 걸로 사기치는 사람들이
있다니....... 불길하게 말하면 돈이라도 뭉터
기로 쥐어 주며 살려 달라고 매달릴 줄 알았나
보지.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니까.......”

 

 

 

나는 준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이내
점장이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 이번 여행
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바꾸었다.

 

 

 

“12시에 출발하면 뉴욕에 도착하면 2시쯤
될 거야. 그럼 맨하탄 타임 스퀘어에서 반값으
로 파는 브로드웨이 무지컬 낮 공연을 보는 거
야. 그러고 나서 5시쯤에 인디아나로 출발하
는 거야. 잠은 가다가 모텔에서 자고.......”

 

 

 

준수가 다시 스케줄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우리는 가져온 짐을 뒷좌석에 실고 그대로 출
발했다. 차를 몰고 렌트카회사를 나서자 준수
가 가져 온 가방에서 음악테이프를 꺼냈다. 나도
질세라 차를 한쪽에 세우고 테이프를 꺼냈다.

 

 

우리가 준비해 온 테이프를 합하니 족히 70
여 개는 되어 보였다. 차에서 다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토요일 오전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막히지
않았다.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는 이미 여
러 번 왔다갔다 했던 길이었기 때문에, 지도
없이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길은 전
적으로 지도에 의존해야만 했다.

 

 

 

나는 항상 낯선 곳을 찾아갈 때는 떠나기 전
에 큰 지도를 준비했다. 미국 도로 지도는 크
면 클수록 비쌌지만 비싼만큼 자세했다. 그래
서 아무리 낯선 곳이라 해도 둘 이상 차에 타
면 지도를 보고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다.

 

 

 

뉴욕까지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과
속으로 경찰에게 적발되지 않게끔 조심하면
되었다.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번갈아
가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내가 파코 데 루치아의 기타 연주곡을 틀면
준수는 알디 미올라를 틀었고, 동물원의‘말하
지 못한 내 사랑’을 틀면 준수는 김광석의‘사
랑했지만’을 틀고, 내가 모짜르트를 틀면 베
토벤을 틀고, 내가 페트릭 브뤼월의 노래를 틀
면 그는 루이스 미구엘의 노래를 틀고, 왕걸의
노래를 틀면 왕정문의 노래를, 파바로티를 틀
면 까레라스를, 데이빗 란츠를 틀면 조지 윈스
턴을, 루이 암스트롱을 틀면 빌리 할리데이를,
카펜터스를 틀면 에어 써플라이를, 프랭크 시
나트라를 틀면 헤리 코닉 주니어를, 안전지대
를 틀면 샤게 앤 아스카를, 존 윌리암스의 영
화 음악을 틀면 빌 콘티의 음악을, 데이빗 센
본을 틀면 키스 자렛을, 유재하를 틀면 김현식을.......

 

 

 

우리는 지루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음악을 들었다. 우리는 예정한 시
간 안에 뉴욕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바로 타
임스퀘어에 가서 뮤지컬 표를 구했다.

 

 

 

타임 스퀘어에서는 당일 팔고 남은 티켓을
반값으로 팔고 있었다. 우리는 운 좋게 알랭
보빌리와 클로드 미쎌 숀버그 콤비의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를 볼 수 있었다. 소문대
로 무대에 헬기가 나왔고 소문대로 재미있었
다. 동양 여자를 무시하는 듯한 내용이 기분을
조금 상하게 했지만 나머지는 그런 대로 볼 만
했다.

 

 

 

우리는 극장을 나서며 역시 불후의 걸작 <오
페라의 유령>보다는 약간 처지는 작품이라는
데 동의했다. 차에 오르면서 시계를 보니 4시
반이었다. 우리는 퇴근 시간을 피해 서둘러 맨
하탄을 빠져 나왔다.

 

 

 

이때부터는 처음 가는 길이었다. 옆자리의
준수가 지도를 꺼내 타야 할 도로를 살피기 시
작했다. 우리는 일단 80번 고속도로를 탔다.
가다가 휴게소에서 햄버거로 저녁을 때우고
나서 다시 출발했다.

 

 

 

6시간 정도 계속해서 80번 도로를 달렸다.
피곤하긴 했지만 준수가 운전을 못하니 계속
핸들을 잡아야만 했다.

 

 

 

우리는 모텔에서 잔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기로 했다. 밤 열시 경
에 우리는 지방 국도로 접어들었다.

 

 

 

220번 도로를 타고 내려가다 보니 작은 마
을들이 보였다. 마을마다 교회 십자가가 서 있
었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참 교회 많은 세상이야.”
 

 

“자식, 교회 많아서 불만이냐.”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준수가 나의 말을 걸
고넘어졌다. 나는 지루하던 터라 화제를 아예
그쪽으로 돌렸다.

 

 

 

“야, 너 아니?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교회가 제일 많은 나라 중에 하나라는
걸....... 그런데 교회가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
는 거냐?”

 

 

“그만큼 우리 나라 사람들의 신앙심이 깊다
는 얘기가 아니겠냐.”

 

 

“그만큼 장사가 잘 된다는 뜻도 되지.”
 

 

나는 별 신경 안 쓰고 말했다. 갑자기 옆자
리가 잠잠해져서 보니 준수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내 얘기는 그렇게 많은 교회가 정말로 필요
하느냐 하는 거야. 난 솔직히 종교에 대해서
불신을 품고 있어. 물론 종교는 좋은 일도 많
이 했겠지만 나쁜 짓도 많이 했어. 너, 인류 역
사상 어떠한 재난이나 전쟁보다도 종교의 독
선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아
니?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생겨난 종교때문에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니 아이러니한 일 아니
냐?”

 

 

“종교가 뭘 어쨌는데?”
 

 

“역사를 봐봐. 수백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
신 구교도간의 종교전쟁, 현대에 와서는 이스
라엘과 아랍 전쟁, 이란 이라크전 등등 종교가
원인이 되어 벌어진 전쟁은 끝도 없어. 이러한
전쟁이나 학살은 모두 상대방의 종교를 포용
하지 않고 파괴하려는 독선에서 나온 것 아니
겠어?”

 

 

“종교 전쟁은 근본 원인이 좀더 복잡한 경우
가 대부분이야. 종교 전쟁을 놓고 종교가 근본
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십계명에‘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도 있을 텐데 왜들 이렇게 죽이
는지....... 다른 이교도을 죽이는 건 살인이 안
되는 거니? 이교도들도 분명 하나님의 창조물
일 텐데 말야.”

 

 

“이교도들을 처단한 건 과거의 일이야.”
 

 

“그래, 네 말대로 한낱 과거사였다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어. 인간의 도덕성이 발달함에 따
라 종교도 합리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 봐. 십자군
원정이나 마녀 사냥이 자행되는 그때에는 그
당시의 교리가 절대 선이었잖아. 하지만 지금
은 그 당시의 교리가 옳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최고로 믿고
따르는 지금의 교리도 수백 년이 지난 후에는
야만적인 교리였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일
아니야?”

 

 

“네 말도 일리는 있어. 처음부터 완벽한 것
은 없으니까. 죵교의 역사도 보면 오류를 수정
해 가는 과정이었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신의
뜻에 가깝게 접근하는 거지. 인간은 너도 알다
시피 허점투성이잖아.”

 

 

“하지만 모든 오류가 시정되었다고 할 수 있
을까?

작년에 있던 휴거 소동 기억나니? 물론 사이
비나 이단일수는 있지만, 그것을 믿는 사
람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가치였어. 그들앞
에서 너희는 사이비다라고 말한다면, 말한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걸... 내가 혐오
하는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맹
목적으로 광신하는 사람들이야. 최소한의 이
성도 잃은 채로....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사이
비 종교가 그럴듯한 논리를 들어 번창하는 것
같아..

 

기독교나 불교, 그리고 이슬람교 같은 숭고
하고 거대한 종교들도,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하더래도 서로를 포용하길 꺼려하는 것 같은
데...

 

정말로 자기의 종교가 유일한 진리라면은
다른 종교를 포용하고 설득하는 측면을 중요
시돼야 하는 것 아니니?

 

그런데 뭐하면 종교갈등으로 인한 전쟁이
고, 학살이니....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
들어낸 종교의 논리에는 반감을 가지고 있어.
결국 인간사에서 종교는 자기 행위의 정당
화 논리로 쓰여졌잖아.. 종교의 순수한 목적을
망각하고, 인간의 탐욕과 아집에 이용되고, 나
아가서는 종교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자기가
믿는 것이 옳다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어 수
많은 죄악을 저지르는....

 

 

나는 종교에 대해서는 환상을 가지고 있어..
가장 아름답고 숭고하며, 또 선하고 자기 희
생적인... 그런데 내가 보기엔 현실 종교는 가
장 탐욕스럽고 독선적이게 보여...

 

 

절에서 깡패가 동원되질 않나... 목사가 사
기를 치지 않나...
옛날에는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팔지 않나...”

 

 

 

“자식, 너무 급진적인데...
너 그런 말 함부로 했단 큰일난다.
네가 말한 것처럼 종교에 대한 비난은 곧 신
에 대한 불경으로 받아들여지니까...
여하튼 얘기 잘들었다.”

 

 

 

준수는 내 얘기를 끝까지 기분 상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다.

 

 

 

얘기를 마치고 준수가 지도에 신경을 쓰는
데,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가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사방을 둘러 보았다. 지나가
는 차들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숲이었다. 준
수의 손에서 지도를 뺏어 들었다. 계속 직진하
면 잃어버렸던 도로와 다시 만날 것 같았다.
준수가 돌아가자고 했지만 온 거리가 만만
치 않아서 앞으로 계속 달렸다. 나는 그때 결
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
다. 그때 차를 돌렸어야 했다.

 

 

 

도로에는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앞쪽에 푯말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이정표
가 아니라‘사슴주의’푯말이었다. 도로로 사
슴이 뛰어나오니 조심하라는 푯말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2였다. 어둠이 양편으로 갈
라지며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어느 쪽으로 갈
까 고민하다 우린 왼쪽 길을 택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우리가 선택한 길은 악몽의 시
작이었다.

 

 

 

갈수록 길은 더욱 음침해졌다. 어디선가
물안개가 피어올랐다.도로 위로 구렁이처럼
물안개가 기어올랐다. 안개등을 켰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우리 차
에서 나오는 불빛 외에는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세우고 소변을 보면서 나는 장난으로
차의 불빛을 꺼 봤다. 세상은 순식간에 시꺼먼
어둠으로 뒤바뀌었다. 뒤에서 불쑥 뭔가 튀어
나올 것 같아 황급히 불을 켰다.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도로를 달렸다. 어
둠 속에서, 숲 안쪽 어딘가에서 누군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분위기 죽이는데.......”
 

 

준수가 긴장된 음성으로 말하며 테이프를
새로 꽂았다. 마이크 올드필드의‘ 티넬’이
흘러나왔다. 공포영화 <엑소시스트> 주제 음
악답게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우리는 얼마 동안은 숨막히는 어둠이 끝나
고 불빛이 보일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점점
숲은 깊어졌으나 길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일한아, 차를 돌려 돌아갈까?”
 

 

준수도 걱정되는지 끝없는 어둠 속을 들여
다보며 말했다.”

 

 

“글쎄.......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아.
두 시간은 넘게 들어온 것 같은데....... 가는
데까지 가 보자. 가다 보면 표지판이라든가 마
을이 나오겠지.”

 

 

나는 힘껏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미국이 워낙 넓은 나라라는 것은 알지만 설마
하니 끝없이 숲길만 나오지는 않겠지, 하는 일
종의 오기 같은 것이 솟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는 만약 공원이나 산길로 완전히 잘못 들었다
면 큰일이라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준수는 지도를 열심히 보았지만 어느 도로
인지 찾질 못했다. 아무리 간선도로라고 하지
만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꺼림칙했지만 내친 걸
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 안의 분위기는 경직되
어 갔다. 10시간 가량 운전을 한 때문인지 피
로도 슬슬 몰려오기 시작했다.

 

 

“정 길이 안 나오면 길가에 차를 대고 자자.”
 

 

“그러다가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준수가 걱정 같지도 않은 걱정을 했다. 정말
곰이라도 나타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새벽 한 시가 넘어서자 피곤이 급속도로 빠
르게 몰려 왔다. 머리도 아파오고 몸도 으실으
실 떨려 왔다. 밤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이제는
10미터 전방을 보는 것조차도 불가능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지도에 나와 있지도 않
은 길을 달린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
었다.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나서 다시 돌아가
든지 앞으로 나가든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준수가 불쑥 소리쳤다.

 

 

“야! 저기, 무슨 불이 보이는데.......”
 

 

나는 깜짝 놀라 준수가 가리킨 쪽을 보았다.
앞쪽에 흐미한 불빛이 보였다. 서 있는 자동차
불빛 같았다. 정말로 정말 사막에서 오아시스
를 발견한 것처럼 반가웠다. 나는 속도를 내서
달렸다. 길을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한참 달리다 보니
불빛치 허공에 떠 있음을 알 수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동차 불빛이 아니라 집에서 흘러나오
는 현관불이었다.

 

 

 

우리는 속도를 죽여 불빛을 향해 천천히 다
가갔다. 주변을 둘러보니 그 집뿐만 아니라 다
른 집도 드문드문 보였다. 아주 작은 마을인
모양이었다.

 

 

 

불 켜지 집 앞에 차를 세웠다.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지만 불
이 모조리 꺼져 있고 단 한 집만 켜 있다

니....... 마치 유령 마을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밤안
개가 유렁처럼 떠도는 대기 속을 헤치고 불 켜
진 집을 향해 다가갔다. 초인종을 눌렀다.
여기가 도대체 어딘인지, 모텔은 어디쯤에
있는지...... 물어 보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초인종 소리는 고요 속에서 깜짝 놀랄 만큼
크게 울렸다. 너무 소리가 커서 자욱한 안개
속에서 자고 있는 괴물을 깨어날 것만 같은 착
각이 일 정도였다. 작은 마을을 뒤흔든 초인종
소리가 사라지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집안에서 사람이 나오
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삐거덕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40세쯤으로 보이는
선량하게 생긴 백인이었다. 우리가 우려했던
것처럼 자고 있지는 않았는지 두 눈이 초롱초
롱 빛났다.

 

 

 

준수가 우리의 난처한 처지를 그에게 이야
기했다. 나는 옆에서 준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
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백인 사
내는 이상하게도 말쑥한 외출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준수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찮다거나
당황하는 빛 없이 친절하게 얘기를 들어 주었
다. 우리처럼 길을 잃은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봐 온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이 근처에는 호텔
이나 모텔이 없으니, 자기 집으로 들어와 묶었
다 가라는 것이었다.

 

 

 

준수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우린 짧은
순간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그
사람의 호의를 감사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 사람은 친절하게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
했다. 집안은 깔끔해 보였지만, 웬지 자연스럽
지가 못했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방금 전까
지 사람들이 모여 있었던 것처럼 의자들이 제
멋대로 배치돼 있었다. 또한, 테이블 위에 놓
인 재떨이에는 여러 종류의 담배 꽁초가 수북
히 쌓여 있었다.

 

 

 

난 낮에 손님을 맞았다가 치우지 않고 그대
로 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다시 했다. 그는 우리를 맞
은편 소파에 앉으라고 권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교환했다. 우리가 영어
에 익숙하지 못해 더듬거리자 그는 천천히 쉬
운 단어를 골라 가면서 말했다.

 

 

 

그는 자신을 데이빗 윌링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이 마을 이름은 앤센빌(Ansenvill)이라
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
었고 우리가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하니, 놀
란 표정을 지으며 자기는 한국 사람을 처음 봤
다며 몹시 반가워했다.

 

 

 

“밤이 깊으니 우리 집에서 묶었다 가세요.
빈 방은 충분하니까.......”

 

 

 

데이빗은 우리의 목적지를 물은 뒤에 스스
럼없이 말했다. 우리는 그의 제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오랫동안 먼 길을 달려오느라고 피곤했겠
어요. 술 한잔 하세요. 여행자에게 있어 술은
노독을 풀어 주는 아주 좋은 친구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양주병을 들고
왔다. 몸이 몹시도 지쳐 있던 터라 그리 내키
지는 않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술잔을
받았다.

 

 

 

우리는 데이빗과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데이빗은 이 마을의 목사라
고 했다. 나는 선량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
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가족들의 잠을 깨운 거나 아닌지 모
르겠네요.”

 

 

준수가 밤 늦은 방문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녜요! 우리는 지끔껏 이야기를 나누고 있
었어요. 모두들 창문을 통해서 당신네들이 현
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죠. 내가 문을 열려
가자, 동양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 식
구들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각자 방으로 들어
갔어요.”

 

 

“네, 그랬군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긴 했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인종이 말 그대로
짬뽕이 되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동양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니.......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그럴 수 있나?

 

 

“두 분다 하나님을 믿죠?”
 

 

데이빗이 성직자다운 질문을 해 왔다. 나를
빤히 쳐다보길래 나는 사실 대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교회를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죠!”

 

 

준수가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빨리
말했다. 나는 데이빗의 두 눈을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었는데 그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했을 때
는 가만히 있다가 크리스찬이라는 준수의 대
답에 눈을 번뜩였는데, 내가 볼 때는 분명 그
눈빛은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이내 평상시의 눈빛으로 돌아왔고 준
수를 형제라고 부르며 가볍게 손을 잡았다. 하
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질 기미였다.

 

 

난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데이빗에게 물
었다. 꿰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느니 집
안 구경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데이빗이 복도
끝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화장실로 걸어가면서 천천히 집안을
살펴 보았다. 집안은 특별한 장식이나 가구도
없이 아주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는
흔한 텔레비전도 없었으나 집 안은 생각보다
무척 넓었다.

 

 

 

여러 개의 방문을 지나서 복도 끝으로 갔다.
 

 

 

벽에 커다란 그림이 결려 있는 게 보였다. 성
경에서 따온 그림 같았다. 조잡하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다.

 

 

 

화폭에는 이스라엘의 영웅 다윗이 거인 골
리앗을 쓰러뜨린 다음이 밟고 있는 장면이 담
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 구절과는
많이 달랐다.

 

 

 

먼저 그림 속의 다윗의 손에는 골리앗의 심
장인 것처럼 보이는 피묻은 것을 들고 있었다.
골리앗은 그런 다윗의 발 아래 가슴과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다윗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군중과 병사
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림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그것 외에도 또
있었다. 바로 다윗의 눈빛이었다. 다윗의 눈에
서는 성경의 영웅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악하고 탐욕스런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
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쓰러져 있는 골리
앗은 흑인으로, 다윗은 금발을 휘날리는 백인
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흑인들이 보면 몹시 언짢아하겠는데.......
 

 

 

피 흘리고 쓰러진 골리앗을 보니 입안이 씁
쓰름했다. 돌아서려 했지만 그림 속의 다윗의
눈이 자꾸만 걸렸다. 뱀의 눈을 연상시키는,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누군가가 나룰 주시하고 있는 듯한 기
분이 강하게 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여러 개의 방문 중의 한 곳에서 슬그머니 방문
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호기심 많
은 데이빗의 가족이려니 생각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을 보고 손을 싣다 보니 화장실 거울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울에
비치지 않는 드라큘라 백작의 얘기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화장실을 나오자 데이빗과 준수의 이야기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그만 자자고 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방문이 비스듬히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적으로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문 틈으로 방안
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돌아서려는데 뭔
가 움직였다. 나는 깜짝 놀라 안을 자세히 주
시했다.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
은 옷을 입은 채 테이블 둘레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
는 처음에는 데이빗의 가족들이 예배를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곧바로만 예배보기에는 너
무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들은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과 함께 모두들 어깨
를 들썩거리곤 했다. 음성도 음성이었지만 그
들의 몸짓이 너무도 기괴하게 보였다. 어디선
가‘쉬시식’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도 들려 왔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뭘하고 있는 거야?

 

 

 

나는 안을 더 자세히 보려고 바짝 들이댔다.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 사람이 고개를
벌떡 세우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어른이 아니라 열두셋쯤 돼 보이는 남
자아이였다.

 

 

 

금발이 인상적이었지만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심장까지 꿰뚫을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었다. 도저히 어린아이 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차갑고 싸늘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마치 뱀의 눈과 마주쳐 움직일 수 없게 된
개추리처럼,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까지 눈치채
기 전에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물러나서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서는 데이빗과 준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훔쳐본 방안 풍경에 대해서는 언
급하지 않고, 다윗의 그림이 인상 깊다는 얘기
만 했다.

 

 

 

데이빗이 시간도 늦었으니 잠자리에 들자고
했다. 그는 우리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이층에
도 긴 복도를 따라 방이 여러 개 있었다. 우리
를 맨 끝방으로 안내했다.

 

 

 

침대 두개와 화장실이 딸려 있는 깔끔한 방
이었다. TV와 전화만 없어 그렇지, 웬만한 모
텔의 방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자주 우리
같은 여행자가 묶어 갔는지 방안에 먼지도 없
었고, 금방 갈은 듯이 침대 시트나 베개도 깨
끗했다.

 

 

 

데이빗은 아침까지 푹 쉬라며 방을 나섰다.
우리는 데이빗의 호의에 감동해서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준수가 창밖
을 보면서 말했다.

 

 

 

“야, 여기 좀 봐. 이런 시골에도 도둑이 많나
보지?”

 

 

 

나는 다가가서 창을 살폈다. 창문에는 두꺼
운 쇠창살이 처 있었다. 순간적으로 쇠창살은
밖에서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밖으
로의 탈출을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만약 불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쇠
창살을 처 놨을까?”

 

 

내가 중얼거리자 준수가 머리를 쥐어 박으
며 말했다.

 

 

“인마, 재수 없는 소리 그만해.......어, 저것
좀 봐! 불이 켜지고 있어.”

 

 

재빨리 창밖을 보았다. 정말로 쥐죽은 듯이
잠들었던 집집마다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있
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새벽 2시가 넘
은 시간에 일제히 불이 켜지다니.......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거미줄에 희생
물이 걸리자, 자는 척하고 있던 거미가 눈을
뜨고 움직이는 듯한.......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인지 몸도 으실으실
떨리고 머리도 아파 왔다. 준수에게 감기약 같
은 것 없냐고 묻자 준수가 한국에서 비상 상비
약으로 준비해 왔다며 알약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먹은 뒤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우려
는데 바닥에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어, 이게 뭐지?”
 

 

나는 주저앉아 얼룩을 살폈다. 검붉은 얼룩
이 마치 핏자국처럼 보였다.

 

 

“야, 누가 포도주를 먹다 흘린 거겠지. 피곤
하다, 자자.”

 

 

준수가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나는 불길
하게 느껴지는 얼굴을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준수가 불을 껐다.
창문 사이로 마을의 불빛이 새어들어왔다.
쇠창살이 천장에 괴기하게 비쳤다. 준수가 졸
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수민이를 볼 수 있겠지....... 못 만
난 지 벌써 3개월이 넘었어. 그 동안 잘 지내
고 있는지....... 헤어질 때 눈물을 거렸는
데....... 만나면 잘해 줘.......”

 

 

준수는 금세 코를 골았다. 마치 마취제에 중
독된 사람처럼....... 준수의 코고는 소리를 들
으며 나도 금세 잠에 곯아떨어졌다.

 

 

처음엔 꿈이려니 했다. 어디선가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귀에 너무도 거슬리는
소리였다. 곧 그쳐 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비명소리는 계속 이어졌
다. 잔혹한 고문을 당할 때나 낼 수 있는, 폐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쥐어짜는 듯한 신음
이었다.

 

 

 

나는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고 눈
을 떴다. 희미한 신음소리가 현실까지 이어지
고 있었다. 가끔씩 몸서리가 쳐지는 비명소리
도 들려 왔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깜깜했다. 나는 일단 어디
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준수를 깨우기 위해 흔들었다. 하지만 준수
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볼을 때리며
일어나라고 재촉했지만 준수는 마치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준수를 깨우는 걸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나 혼자서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방
문을 열었다.

 

 

삐꺽!
 

 

문 열리는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왔다.
복도는 깜깜하고 고요했다.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귀를 기울여보았다. 신음소리
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아
래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조심스레 마루 위로 발을 내딛었다.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복도 구
석에서 뭔가가 뿔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겁이
났다. 그냥 들어가 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기심이 날 부추겼다.

 

 

 

방에서 계단까지 10미터 남짓되는 거리가
마치 천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긴장한 때
문인지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계단에 서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소리는 이
집 지하에서 나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길게
하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발을 내딛
을 때마다 귀에 거슬리게 삐거덕거리는 소리
가 났다. 거실로 내려서자마자 누가 보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놀라서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
었다. 한참 보고 있자 비로소 그 눈이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복도 저편에 걸려 있는 그
림, 다윗의 눈이었다.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옴
을 뚜렷히 볼 수 있었다.

 

 

 

눈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였다. 형광 물
질 탓이겠지....... 나는 다윗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지하실로 통하는 길을 찾아 보았다.
일층으로 내려오자 신음소리가 더욱 명확하
게 들려 왔다. 귀에다 신경을 모은 채 조심스
레 걸음을 옮겼다.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지하
실로 향하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걸음을 옮기다 보니 거실 끝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 같았다. 물체는 네 발로 이리저리 기어다
니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두 사람이 기어다닌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
싹해졌다.

 

 

 

나는 그것들을 꼼짝 않고 쳐다보았다. 그것
들은 나를 발견했는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얼떨결에 뒷걸음질 쳤다. 그것들은 점점 가까
이 다가왔다.

 

 

 

그것들이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놈집이 사
람 크기만한 검은 사냥개들이었다. 개들은 날
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등
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사냥개가 앞을 가
로막자 당혹스러웠다. 데이빗은 개에 대해서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개라니...
개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으르릉거렸다.

 

 

 

개들이 나를 공격할 것 같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앞으로 한 발 내딛어 보았다.

 

 

 

개들이 갑자기 와락 달려들었다. 나는 기겁
을 해서 뒤로 물러섰다. 이빨을 드러낸 채 개
들이 다시 으르릉거렸다. 마치 한 발만 더 다
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별 수 없이 뒷걸음질 쳤다. 그놈들에게
등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천천히 물러
서자 개들은 드러냈던 적의를 거두었다.

 

 

 

마침내 계단 난간을 잡았다. 개들은 나를 노
려보면 제자리에 슬며시 앉았다. 마치 감옥
앞을 지키는 충실한 간수처럼.......

 

 

 

나는 다시 이층 방으로 돌아갔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집의 분위기로
보아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가정집 같
아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가 귀를 기
울여 보니 어느새 비명소리는 그쳐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야겠어. 예감이
좋지 않아.......

 

 

 

나는 그림 속의 다윗, 늦은 밤의 이상한 예
배, 금발의 소년, 비명소리, 검은 개들.......

 

 

 

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부딪혔던 수많은 의
혹들을 더듬다가 나는 한순간에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데이빗과 마신 술 때문인지 지끈거렸다. 더군
다나 꿈자리까지 뒤숭숭해서 몸이 영 개운하
지 않았다.

 

 

 

준수는 아직도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시계
를 보니 11시였다. 나는 서둘러서 준수를 깨웠
다. 이번에는 몇 번 흔들자 눈을 떴다.

 

 

“야, 열한시야! 빨리 가자!”
 

 

“머리가 너무 아파! 약 탄 술을 마신 것 같아.”
 

 

준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몸을 일
으켰다. 나는 준수에게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
기를 들려 주었다.

 

 

“네가 악몽을 꾼 걸 거야. 몸이 너무 피곤하
다 보면 그럴 수 있거든.”

 

 

준수는 침대에서 내려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괴상한 일이
어서 준수의 말에 반론을 펼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을 여전이 께림칙했다. 한시라
도 빨리 이 집을 나서고 싶었다.

 

 

 

준수를 재촉해서 간단히 씻은 뒤에 짐을 챙
겼다. 방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나섰다. 이층
에서 내려와 복도 저편을 보니,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다. 그림 속의 다윗은 여전히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개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개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데이빗은 거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우리를 맞았다.

 

 

“잘 잤어요?”
 

 

“아, 네.......”
 

 

“함께 식사나 하죠. 아침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점심이라 하기에는 이르지만.......”

 

 

“됐습니다. 우린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실 때 가시더라고 식사는 하시고 가셔야
지요. 이미 다 준비해 놓았답니다.”

 

 

 

나는 한시 바삐 이 집과 이 마을에서 벗어나
고 싶었지만 데이빗이 끈덕지게잡아 어쩔 수
없이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정말로 우리를 위한 아침이 준비
되어 있었다. 먹음직스런 토스트와 신선한 우
유와 커피, 그리고 스크램블 등이 차려져 있었다.

 

 

 

“어서와요. 시장하시죠?”
 

 

데이빗의 부인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았다.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눈초리가 날
카로웠지만 목소리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며 데이빗에게 인디아나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는 식사 후에 밖에 나가
서 자세히 가르쳐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준수는 식사 전에 기도를 했다. 그러자 데이
빗이 허둥대며 준수를 따라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목사님도 식사 전에 기도하는 걸 잊어먹기도 하나?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간이니 그
럴 수 있겠지 하면서 토스트를 먹기 시작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우리는 서둘러서 식사를 끝
마쳤다.

 

 

 

“자, 나가죠. 내가 길을 가르쳐 줄 테니까.”
 

 

식사가 끝나고 나자 데이빗이 식탁에서 일
어섰다. 우리는 데이빗 부인에게 감사의 인사
를 한 뒤에 집을 나섰다.

 

 

 

밝은 대낮에 보는 마을은 그런 대로 정겹게
느껴졌다. 길을 양 편으로 비슷한 모양의 집들
이 사십여 채 가량 서 있었다. 데이빗은 앞으
로 쭉 달리다가 두 갈래 길에서 좌회전하면 잃어
버린 도로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 앞에 서서 데이빗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데이빗은 언제든지 들
러달라며 미소를 띄웠다. 우리는 데이빗과 악
수를 하고 차로 다가갔다.

 

 

 

차 모습이 조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바
퀴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동차의 네 바퀴가 모두 펑크가 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참
으로 난감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누구의 소행인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욕
만 퍼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페어
타이어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시 이 동네에 자동차 수리점이 있습니까?”
 

 

데이빗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의 처지
에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주저앉은 차를 보고 있으니 한숨만 나왔다.
렌터카라서 차를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견인차나 타이어를 보내 달라고 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냐고 물었다.

 

 

데이빗은 자동차 수리점이 있을 정도의 가장
가까운 마을은 여기서 60마일 정도 떨어져 있
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공사 때문에 시외 전
화가 불통라는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주저앉아서 펑
크 난 자국을 살폈다. 칼자국이 나 있는 걸로
봐서는 짐승들의 소행은 아니었다.

 

 

 

대상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다시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데이빗이 미안해하며 아마도
아이들의 소행일 거라고 말했다.

 

 

 

이 난국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 고민
하고 있는데 데이빗이 새로운 제의를 해 왔다.

 

 

“시외전화는 오늘 저녁쯤이면 통화가 가능
할 거예요. 그러니 그때 가서 전화를 하는 게
어때요?”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기분 나쁜 마을을 벗
어나고 싶었지만 데이빗의 제안을 따르지 않
을 수 없었다. 그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도 했다.

 

 

“저희 집에 가서 쉬는 건 어때요?”
 

 

“아, 아닙니다. 천천히 마을이나 둘러보죠,
뭐.”
 

 

“그러세요. 대신 저녁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셔야 해요. 아셨죠?”

 

 

“네, 그러죠.”
 

 

데이빗의 제안을 준수가 받아들였다. 우린
저녁 6시까지 데이빗의 집으로 가겠노라고 약
속을 했다. 데이빗은 6시에 보자며 돌아섰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불쑥
질문을 하나 던졌다.

 

 

“저, 혹시...... 집에서 검은 사냥개를 기르지
않습니까?”

 

 

데이빗은 내 질문에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놀랬다. 하지만 그는 이내 태연한 얼굴로 돌아
서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는 개를 기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그냥...... 밤에 자는데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와서.......”

 

 

“이웃집에서 나는 소리였겠죠.”
 

 

 

데이빗은 의혹의 눈초리로 나를 보다가 미
소를 띄우고는 돌아섰다.

 

 

“이상해....... 분명 개를 봤는데 기르지 않는
다니......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깨우지 그랬어?”
 

 

“뭐? 야, 내가 얼마나 흔들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랬어? 이상하네. 난 원래 잠귀가 밝아서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나는데. 더군다나 난 그
리 피곤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정작 피곤
해서 곯아떨어져야 할 사람은 너 아니었냐?

 

 

장시간 운전을 한 데다 감기 기운이 있다며 감
기약까지 먹었잖아?”

 

 

“감기약?”
 

 

퍼뜩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감기약
이라.......

 

 

“혹시, 어젯밤에 마신 술에 수면제를 탔던
걸이 아닐까? 그래서 너는 잠에 곯아떨어졌던
거고...... 나는 감기약을 먹었기 때문에 수면
제가 약효를 발휘하지 못했던 거고.......”

 

 

“야, 너 영화 찍냐? 데이빗 씨가 우리를 잠
재워서 뭘하겠어?”

 

 

“글쎄.......”
 

 

“쓸데없는 상상하지 말고, 마을이나 돌아보자.”
 

 

준수가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 역시 간밤에 꿈을 꾼 건지도 모르는다는 생
각이 들어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마을은 정말로 너무도 작았다. 데이빗이
2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라고 했을 때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돌아다녀 보니 마을이라
고 부르기도 뭐할 정도로 작은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도로 양편으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이층 가
옥이 늘어서 있었다. 베란다에 놓인 흔들의자
에 앉아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자
주 보였다.

 

 

 

그들은 힐끗힐끗 우리를 돌아보았는데 눈빛
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경계심과 경멸, 그

런 것들이 뒤섞인 듯한 눈빛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추치는 사람들도 표정이 모두
굳어 있었다. 준수 역시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
는지 흥얼거리던 노래를 멈췄다. 아마도 동양
인을 난생 처음 봐서 그럴 거라고 위안을 해
봤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앤센빌이라는 마을은 돌아다니면 돌아다닐
수록 이상한 점이 너무도 많음을 느낄 수 있었
다. 상점 같은 것은 아예 하나도 찾아볼 수 없
었다. 또한 생계 수단으로 삼을 만한 논밭이나
공장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
체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마을 어귀까지 걸어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
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딴청을
피우고 있었지만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 마을 사람들은 빤히 쳐
다보고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떨구곤 했다.

 

 

 

마을을 천천히 돌고 나니 어느새 1시가 넘어
있었다. 아침을 서둘러서 먹은 때문인지 허기
가 졌다.

 

 

 

우리는 식당을 찾아 마을을 돌다가 지나가
는 사십대의 남자에게 식당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저쪽 건물로
가 보라며 하얀 이층 건물을 가리켰다.

 

 

 

그가 가르쳐 준 건물로 가 보았다. 어디에도
식당이라는 표시가 없었다. 간판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건물 자체가 좀 크다는 것 외에
는 특이하게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우리
는 식사를 하기 위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안에는 수십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분명 우리가 들어가기 전에는 웅성거리고 있
었는데,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이야기
를 갑자기 멈추고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
치 기분 나쁜 침입자를 보듯이 강한 적대감을
감추려 하지 않은 채.......

 

 

 

우리가 빈 자리를 찾아 움직이자 그들은 묵
묵히 우리의 동작을 좇았다. 아무래도 분위기
심상치 않았다. 준수가 나가자고 신호를 보냈
다. 나는 준수와 함께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우리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아무도 움
직이지 않았다.

 

 

 

“촌놈들...... 아무리 동양인을 처음 본다지
만 그렇게 기분 나쁜 눈길로 쳐다보다니.......
재수 없는 마을이야!”

 

 

 

준수가 침을 뱉으며 말했다. 우리는 기분 전
환을 하기 위해서 차로 돌아갔다. 차에서 기타
를 꺼내 가지고 우리는 마을 어귀 잔디밭에 앉
아 노래를 불렀다.

 

 

 

이십여 미터쯤 떨어진 벤치에서 마을 사람
들 서넛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
는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마을이야. 데이빗
이 분명 자기가 목사라고 했잖아. 그런데 오늘
이 일요일인데도 예배 같은 걸 보는 것 같지
않아. 마을을 돌아다녀 봤지만 교회 같은 건물
도 보이지 않고.......”

 

 

 

“내가 생각해도 좀 수상해. 아까 식당에서
보니까 전부 백인들만 있더라고. 물론 그거야
시골 마을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문제는 왜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는 거야. 그렇다고 노인들만 있
는 것도 아닌데 말야.”

 

 

 

준수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젯밤에 보았던
금발의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수민이 많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나
저나 빨리 전화가 되야 할 텐데.......”

 

 

“자식, 온통 머릿속엔 수민 씨 생각밖에 없
구나. 수민 씨가 그렇게 좋냐?”

 

 

“수민인 자아가 무척 강한 애야. 거기에 내
가 끌린 건지도 모르지. 그 애는 내 음악을 이
해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야. 게
다가 그 애는 내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고
있어. 그래서 난 그애 앞에서 기타를 연주할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끼지.”

 

 

 

준수는 기타를 끌어안고 있다가 래드 제플
린의‘Stairway To Heaven’을 부르기 시작
했다. 나는 잔디 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감
미로은 연주와 노래를 들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감미로울 수도 있구나.

 

 

 

나는 준수의 노래와 연주를 듣고 있으니 졸
음이 몰려 왔다. 어젯밤에 제대로 잠을 못 자
고 설친 때문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
앉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준수의 목소리에 눈
을 뜨니 숲 속에 다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5시반이었다.

 

 

세 시간 넘게 잔 모양이었다.
 

 

준수는 이제 그만 데이빗의 집에 가서 전화
나 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잔디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벤치를 보니 내가 잠들기 전에 보았던
사람들이 그대로 앉아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참 별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색하지 않고 우리는 천천히 데이빗의 집으로
갔다. 데이빗은 집 밖에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
고 있었다. 밝은 표정으로 곧 통화가 될 것 같
으니, 집에 들어가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잡아

끌었다.
 

 

 

점심도 걸러 배가 고프던 차라 우리들은 못
이기는 척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데이빗은
점심때 식당에서 있었던 작은 소동에 대해 마
을 사람들을 대신해 사과했다. 동양인을 처음
봐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식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에
본 미세스 데이빗이 식탁에 앉아 있다가 자기
아들이라며 간밤에 보았던 금발의 소년을 소
개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 아이를 그냥 다윗이라는 애칭으
로 부르죠.”

 

 

아이는 표정없이 우리를 주시했다. 마치 해
부하기 전의 개구리를 노려보듯이....... 유쾌
하지 않은 소년이었다.

 

 

 

소년이 앉은 자리는 식탁의 제일 상석이었
다. 소년은 부모들 위에서 군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데이빗이 식사에 앞서 어제 마시던 술을 가
져와 한잔씩 하라고 권했다. 나는 운전을 핑계
로 사양했지만 입술만 대라고 바람에 마지못
해 잔을 잡았다.

 

 

 

건배하면서 나는 마시는 시늉만 했다. 준수
는 따라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셨지만, 나는 술
에 뭔가 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
도 마시지 않았다.

 

 

 

미세스 데이빗이 수프를 내 왔다. 나는 배가
고파 있던 차라 수프를 남김없이 다 먹었다.
수저를 내려놓으려는데 준수가 갑자기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나는 당황해서 준수를 부축했다. 쓰러진 준
수를 일으켜세우려다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냉담함을 깨달았다. 그들은 팔장을 끼고서 나
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미소
를 입가에 흘리면서.......

 

 

 

순간적으로 술에 뭔가 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한모금을 마시지 않았으니 천만다
행이었다. 나를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입니.......”
 

 

 

데이빗 씨를 향해서 따지려드는 순간, 갑자
기 어지럼증이 일었다. 주방이 빙글빙글 돌았
다. 빈 수프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수프 안에
도 뭔가 탄 모양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버
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 있
으면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에 내가 마지막
으로 본 것은 우르르 몰려온 사람들과 싸늘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다윗의 눈
빛이었다.

 

 

 

소년은 마치 그림 속의 사악한 다윗처럼 냉
소어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나의 의식 속
으로 이내 어둠이 밀려들었다.

 

 

 

눈을 떴다. 전신이 욱신거렸다. 사방이 어둑
컴컴했다. 문득,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세차게 흔들
었다. 점차 저녁 식사와 함께 다윗의 기분 나
쁜 시선이 떠올랐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
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확한 용도는 모르겠
지만 무슨 창고 같았다.

 

 

 

나는 우선 준수부터 찾아보았다. 구석진 곳
에 시커먼 물체가 있어 자세히 보니 준수였다.

 

 

준수는 몸을 벽에 기댄 채로 앉아 있었다. 머
리가 무겁게 떨궈져 있는 걸로 봐서 아직까지
의식을 잃고 있는 모양이었다.

 

 

“준수야!”
 

 

목소리를 낮춰 불러 보았지만 준수는 미동
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어나서 준수에게 다가
갔다. 무심코 발을 옮기는 순간, 뭔가가 다리
를 확 잡아당겼다. 앞으로 넘어지려는 몸의 중
심을 가까스로 잡았다.

 

 

 

정신이 확 들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쇠
사슬이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로마시대에 죄
수들의 발목에 채우던 쇠사슬과 흡사했다. 팔
로 힘을 줘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저앉아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위쪽에 창
문이 있었다. 창문을 통해서 웅성거리는 소리
가 들려 왔다. 출입구를 찾아보았다. 철문은
계단 위쪽에 놓여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차분히 생각
을 정리해 보았다. 앤센빌에 들어와서 생긴 일
들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동차 타이어를 아이
들이 장난삼아 펑크낸 것 같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계획적이었다는 의혹을 저버릴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은 데이빗이 꾸몄으리라. 그는 왜
우리에게 약을 먹인 것일까? 왜 우리를 잡아
놓은 것일까? 돈이 목적이었다면 우릴 좀더
손쉽게 해치울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
는 다른 목적으로 우릴 잡아 놓았다는 이야긴
데...... 도대체 그 목적이 무었일까?

 

 

 

데이빗이 우리에게 약을 먹이고 가두어 둔
이상 순순히 풀어 주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앉아 있다가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여기를 빠져 나가는
것이 최선이리라.

 

 

 

나는 다시 한 번 쇠사슬을 살펴보았다. 발목
을 결박하고 있는 쇠사슬은 3미터 가량 되었
다. 쇠사슬은 벽에 부착되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힘껏 잡아당겨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웅
성거리는 쇠는 이내 광기어린 환호성으로 변
했다. 잡음과 함께 석인 마이크 소리가 들려
왔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집회나 의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환호
성은 파도처럼 낮아졌다가 다시 높게 솟구쳤
다. 마음은 점점 다급해졌다. 준수를 깨우기
위해서 다시금 불러 보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
었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쇳조각이나 작은 콘크
리트 조각으로 던져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보다 많은 양의 약을 먹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준수를 깨우는 걸 미뤄 두고 다시 앉아
서 쇠사슬을 살펴 보았다. 내 오른 발목을 채
우고 있는 것은 마치 커다란 개 목에 채우는
쇠고리와 흡사해 보였다. 두 손으로 힘껏 벌려
보았지만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침착하게
잘 생각해 봐. 겁 먹지 말고.......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지금까지 봐 왔던 수
많은 영화를 더듬어 보았다. 영화 속의 주인공
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탈출했는 지를.......
쇠고리를 내려보다가 무심코 손바닥으로 훑어 보았다.

 

 

뭔가 이음새 같은 부분이 느껴졌
다. 자세히 살펴 보니 나사못이 박혀 있었다.
천천히 나사못 주변을 살펴 보았다. 나사못
만 풀면 자물쇠 부분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묶기 위해 만든
고리가 아니라, 개를 묶어 두기 위해서 만들었
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나사못을 빼기 위해 손톱으로 쥐고 돌
려 보았다. 하지만 손톱만 부서질 뿐 나사못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구...... 도구가 있어야 해!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드라이버나 칼날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쇠톱 부러진 거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볼 텐데 그런 것마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밖에서 들리던 웅성거림이 일시에
뚝 멈췄다. 돌연한 고요가 나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일시적이 고요가 끝나면 엄청난 일이 벌
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 몸에
부착되어 있는 쇠붙이가 없을까 살펴 보았다.

 

 

혁대 버클이 보였다.
 

 

서둘러 혁대를 풀었다. 버클로 나사못을 돌
려 보았다. 나사못의 홈과 버클의 두께가 일치
하지 않아 여러 번 헛손질을 해야 했다.

 

 

 

나는 있는 힘껏 버클로 나사못을 누르며 천
천히 돌렸다. 조금씩 조금씩 돌아가는 기미가
보였다.

 

 

 

서서히 나사못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마
에 땀방울이 맺혔다. 나사는 점점 헐거워져 가
다가 급기야는 손으로 돌릴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

 

 

 

나사못은 빼자‘쨍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가슴속이 환희로 차올랐다. 나는 뻐근한 발목
을 한 차례 문지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둘러서 기절해 있는 준수에게 다가갔다.

 

 

 

준수를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 손을 가져 갔
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준수가 피를 흘
리며 죽어 있었다.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
해 숨호흡을 한 뒤에 다시 한 번 살펴 보았다.
사내는 준수가 아닌 것 같았다. 옷차림도 달
랐고 몸집도 달랐다. 목덜미의 색깔로 보니 흑
인 같았다.

 

 

 

그는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의 앞가슴은 온
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
을 보기 위해 턱을 치켜세웠다가 놀라 엉덩방
아를 찧었다.

 

 

 

그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으며 한쪽 눈알은 빠져
있었다. 나머지 한쪽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밑을 내려다보
다가 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전신을 떨어
야 했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사내의 가슴에는
놀랍게도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누군가 심장을 파내기 위해서 오른쪽 가슴
을 예리한 흉기로 들어낸 모양이었다. 너덜거
리는 살점을 보고 있다 보니 토악질이 나왔다.
나는 토악질을 하면서 준수를 떠올렸다.

 

 

 

준수를 어디로 끌고 간 걸까? 이들은 분명
평범한 마을 사람들은 아니야. 이토록 잔혹한
살인을 할 정도라면 사악한 집단인 것만은 확
실해. 일단 이곳을 빠져 나가자!

 

 

 

울렁거리는 뱃속을 어루만지며 창가 쪽으로
갔다. 한쪽에 부서진 의자와 빈 박스가 보였
다. 정신없이 의자와 박스를 창문 밑으로 날랐
다. 수북히 쌓아놓은 뒤에 조심스레 밟고 올라
갔다. 밑에 있는 것들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가까스로 창틀을 잡고 매달렸다.
턱걸이 하듯이 몸을 끌어올려 밖을 보았다.
바로 눈앞은 화단이었다. 저 멀리서 여러 개의
햇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무슨 제단 같은 것
도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모여
있었다.

 

 

 

한참을 내다보고 있으니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 왔다. 시체가 벌떡 일어나 내 뒷덜미
를 잡아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창
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사방을 살폈다.

 

 

 

내가 우려했던 그런 일들은 다행히도 벌어
지지 않았다. 시체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시선
은 자꾸만 시체 쪽으로 갔다. 시체가 불시에
벌떡 일어나 나를 덥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창문을 통해 나가려면 유리와 창틀을 부술
도구가 필요했다. 잡동사니를 쌓아둔 곳을 뒤
져 보었다. 야구 방망이 하나가 보였다. 두 손
에 쥐니 전신에 힘이 솟았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다시 잡동사니들을 창틀 아래 차근차근 쌓
았다. 그 위에 올라서서 야구방망이로 유리창
을 깼다. 창틀에 달라붙은 유리조각까지 떼어냈
지만 몸이 빠져 나가기에는 무리인 것 같았다.
창틀을 야구방망이로 쳐서 넓혀야 할 것 같
았다. 나는 다시 내려와서 헝겊조각을 야구방
망이에 감았다. 그리곤 다시 위로 올라가 야구
망망이를 힘껏 휘둘러 창틀을 넓혔다.

 

 

 

시체가 자꾸만 걸렸다. 시체가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
았다.

 

 

 

창틀이 일그러지며 몸이 빠져나갈 정도의
공간이 생겼다. 창 밖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으
나, 화단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모
두 집회 장소에 모여 있는 듯싶었다.

 

 

 

 

갑자기 집회장에서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
다. 사람들이 음악에 맞춰 노래인지는 주문인
지 분간할 없는 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는 음악과 합창이었다. 마치 악마의
제단에 희생물을 바치기 전에 부르는 악마 예
찬가 같았다.

 

 

 

나는 야구 방방이를 먼저 밖으로 던져 놓고,
창틀에 매달렸다. 그리곤 있는 힘을 다해 창틀
로 올라갔다. 흩어진 유리파편이 손바닥과 가
슴을 찔렀다.

 

 

 

가슴을 가까스로 창틀 밖으로 빼낸 순간, 갑
자기 누군가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필사
적으로 몸을 뒤틀어 뿌리치고서 창문을 빠져
나왔다.

 

 

 

야구방망이를 들고서 창고 안을 들여다보았
다. 시체가 따라온다면 머리통이라도 한 대 갈
길 생각이었는데 창고 안은 잠잠했다.

 

 

 

불쑥 손이라도 튀어 나와 내 목을 잡아챌 것
같았지만 기분뿐이었다. 나의 일시적인 착각
이었나 보았다. 시체는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자세로 구석에 기대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회장을 돌아보았
다. 창고에서 일단 벗어는 났으나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난감했다. 준수는 어디에 있는지조
차도 모르는데 차는 펑크가 나 있으니....... 일
단은 이 마을을 한시라도 빨리 빠져 나가 외부
에 도움을 청하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주위를 살피며 살금살금 자리를 옮겼다. 조
금 걷다 보니 내가 갇혀 있던 곳은 데이빗의
집 지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집회에 참가했는지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문득, 내가 간밤에 들었던 비
명소리의 주인이 바로 시체가 된 흑인의 것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간밤의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도대체 이 마을은 어떤 마을이길래 사람을
감금하고 난도질하는지.......

 

 

 

데이빗의 집을 빠져 나가니 공터에 세워져
있는 펑크난 코로라가 보였다. 그 주변으로 마
을 사람들의 차들이 십여 대 가량 서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안을 살펴 보았지만
키가 꽂혀 있는 자동차는 없었다. 영화에서라
면 쉽게 문을 따고 시동을 걸었겠지만 그런 기
술이 없는 나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차로 이 마을을 빠져 나갈 수 없다면 도보뿐
이 없었다. 하지만 데이빗의 말로는 가장 가까
운 마을이 60마일 밖이라고 했다. 60마일이라
면 하루종일 걸어도 안 되는 거리였다.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도로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였다. 혼자서 이 마을을 빠져 나간다면 빠
져 나갈 수도 있겠지만 준수 때문에 선뜻 실행
에 옮길 수 없었다. 준수를 버리고 간다면 평
생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야만 하리라.

 

 

 

나는 달아나고 싶은 생존 본능과 준수를 구
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야구
방망이를 힘껏 쥐고 집회장으로 접근했다. 죄
의식 속에서 평생을 허덕이느니 친구하고 같
이 죽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았다.

 

 

 

하늘에는 초생달이 떠 있었다. 벽에 바짝 붙
어서 집회장으로 다가갔다. 기이한 합창소리
가 점점 크게 들려 왔다. 햇불과 함께 사람들
의 그림자가 출렁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 손에 횃불을 들고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연단을 향해 서
있었는데 연단 위에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십
자가가 두 개 서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집회 장소로 다
가갔다. 모두들 연단 쪽을 향해 서 있었기때문
에 나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
는 집회장과 가까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비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테라스로 올라가 집
회장을 살펴 보았다.

 

 

 

사람들이 얼추 이백여 명 가량 되어 보였다.
연단에 십자가 세워져 있는 걸로 봐서는 무슨
종교 의식 같았다. 하지만 집회장 분위기나 광
기어린 사람들의 음성으로 봐서는 사이비 종
교 같았다.

 

 

 

갑자기 기괴한 노래가 일제히 멈추고, 환호
성이 들려 왔다. 연단 위에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두른 데이빗이 제일 먼저 올라
왔고, 그 뒤를 다윗이라는 꼬마가 마치 교주라
도 된 듯 거만한 걸음걸이로 올라왔다. 얼마
간의 사이를 두고 네 사람이 강제로 피투성이
가 된 흑인을 끌고 왔다. 흑인이 얼굴을 보자
아까 창고에서 본 흑인의 시체가 떠올라 몸서
리가 처졌다.

 

 

 

혹시나 하고 있는데, 그 뒤로 준수가 꽁꽁
묶여 사람들의 손에 끌려서 연단 위로 올라오
는 것이었다. 준수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호흡이 가빠 왔다. 이 미친놈들이 흑인과 준
수를 제물로 삼아 무슨 의식을 거행하려는 모
양이었다. 연단에 서 있는 십자가 두 개가 예
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데이빗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데이빗은 빠른 어조와
강한 액센트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이
야기인지 듣고 싶었지만 이상한 단어들이 많
아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충 듣기로는
이런 뜻 같았다.

 

 

<다음편에 계속>
 



    • 글자 크기
어느날 갑자기 - 광신의 늪 part.2 (by 지혜로운바보)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1분간의 사랑 (by 지혜로운바보)
댓글 0

댓글 달기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추천 수
7547 미스테리 선사시대 세계 미스테리한 건축물3 title: 금붕어1아침엔텐트 2102 0
7546 전설/설화 카르낙신전-이집트 룩소르의 파라오의 영광이 묻혀있는곳1 title: 금붕어1아침엔텐트 871 0
7545 미스테리 세계의 미스테리 1 :: 카르낙 열석 title: 금붕어1아침엔텐트 1188 0
7544 기타 EBS 다큐 프라임 - 인류문명탐험 2부: 사막 위에 꽃을 피우다, 이집트 문명 title: 금붕어1아침엔텐트 488 0
7543 전설/설화 과학자들, 거대한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title: 금붕어1아침엔텐트 955 1
7542 실화 해녀1 화성인잼 1731 1
7541 실화 강원도 바다에서2 화성인잼 2337 2
7540 실화 저승 가는 길1 화성인잼 1717 0
7539 실화 노란 매니큐어1 화성인잼 1200 1
7538 미스테리 아름다운 신부 마네킹의 비밀 title: 메딕셱스피어 1148 0
7537 미스테리 화성탐사선 큐리오시티 ufo 발견4 title: 메딕셱스피어 1897 1
7536 기묘한 사람을 홀리는 정체불명의 목소리 다섯가지2 지상 2026 0
7535 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지혜로운바보 990 0
7534 단편 어느날 갑자기 - 광신의 늪 part.2 지혜로운바보 805 0
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광신의 늪 part.1 지혜로운바보 837 0
7532 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1분간의 사랑 지혜로운바보 773 0
7531 단편 어느날 갑자기 - 그녀의 허락 지혜로운바보 968 0
7530 단편 외딴섬의 무당귀신1 익명_ddc990 476 1
7529 혐오 (약혐) 피멍든 손톱 타임랩스.gif2 익명_54f5ea 669 1
7528 실화 이모가 만난 무속인1 여고생너무해ᕙ(•̀‸•́‶)ᕗ 5990 2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