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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11시 11분의 전화

한량이2019.09.24 15:37조회 수 3725추천 수 1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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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

"여보세요?"
"…."

"…이제 제발 그만해요. 끊어요."
"…."

신경질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1분. 또다.
매일 밤 11시 11분이 되는 순간,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었다. 처음 전화가 걸려 왔을 때는 수화기 너머에서 말없이 울기만 하더니,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딱히 할 말이 없다면 끊으면 될 테지만, 어째서인지 이쪽에서 먼저 끊지 않으면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을 태세였다.

이런 전화 따위는 신경만 쓰지 않으면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누구냐고 몇 번, 몇 십번을 물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전화를 거는 여자-울음소리로 미루어 봤을 때 여자인 것 같았다-는 울음소리 이외의 그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상대편에게 매일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잘못 거신 것 같네요, 죄송하지만 먼저 끊겠습니다, 라고.

얼핏 보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이 사건으로부터, 일련의 비극이 시작될 지를 내가 어찌 알았으랴. 이후에도 낯선 여자의 전화는 매일 밤 걸려 왔다. 잘못 걸려온 전화라고만 굳게 믿고 있었던 나는, 전화가 걸려온 지 한 달쯤이 지나자 문득 두려워졌다.

만일 이게 잘못 걸려 온 전화가 아니라면, 만일 이 전화를 받아야 할 사람이 처음부터 나였다면…. 그리고 만일 나의 생각이 맞다면, 여자의 정체는 뚜렷했다. 스토커.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이 구체적인 단어로 집약되자 새삼 소름이 끼쳤다.

그렇지만 스토커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게다가 설령 사실이라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경찰이나 통신사에 협조를 요청해 보았지만, 생각만큼 쉽게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에 말에 의하면, 매일 전화를 거는 여자가 확실히 스토커라고 밝혀진 것도 아니고 나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므로 함부로 개인정보를 공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의외로 그녀가 나의 지인일 지도 모른다며 먼저 전화를 걸어보라고 충고까지 했다.

하지만 나에게 그건 미친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런 하찮은 일로 바쁜 사람 방해하지 마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고, 내말을 제대로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내 입장을 이해할 리 없었다. 아니, 전화가 오는 것만으로도 두려운데, 어떻게 먼저 전화를 걸어 보라는 것인가?

성인 남자가 고작 여자 하나를 두려워해서 되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스토킹이라는 건 직접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더없이 끔찍한 범죄인 건 사실이다. 나는 진심으로 두려웠다. 게다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계속 울기만 하는 수화기 너머의 여자가 누구인지, 나는 정말 짐작도 가지 않았다. 여자친구는 농담 삼아 예전 여자가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나에게 연애는 그 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듣고 그녀는 말했다.

"그럼 자길 전부터 짝사랑한 여자일지도 모르지. 전화 오는 시간이 11시 11분이라고 했지? 그럼 자긴 그거 알아? 11시 11분에 시계를 보면, 누군가가 자기를 그리워하고 있는 거래."

…말도 안 된다, 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화를 낼 뻔 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에게 오후 11시 11분은 악몽의 시간이었다. 쾌활하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심지어는 6월의 후텁지근하고 눅눅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 몸의 잔털이 다 설 지경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으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엿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기엔 더욱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성인 남자가 오후 11시 11분에 있는 장소는 셀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이었다. 집에서라면 그나마 괜찮지만, 대중교통 안이나 직장 혹은 술자리에서 전화가 울릴 때마다 나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사람들 앞에서 전화를 받고 나면 나는 순식간에 침울해졌고, 덕분에 직장 동료 중에는 나를 기피하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물론 전화를 받지 않은 적도 많다. 하지만, 1분간 끈질기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혹은 진동-는 전화를 받는 것 이상으로 나를 미치게 만들 뿐이었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겠지만, 내 전화기의 진동으로 인해 방해를 받은 사람들의 시선은 참을 수가 없었다. 다음엔 받자마자 끊어 버리거나, 수신보류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을 뿐이었다. 여자는 11시 11분만 되면 착실히 전화를 걸었으며, 전화가 끊긴 후에도 아직 11시 12분이 되지 않은 경우에는 다시 걸기까지 했다-11시 11분이 지날 때까지. 착신거부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났다. 몇 번인가 여자의 번호를 스토커라는 이름으로 등록하고 착신거부를 한 적이 있는데, 이틀 후면 어김없이 다른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에 신경을 쓰는 것이 오히려 시간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아예 휴대폰을 꺼 놓거나 무음모드로 설정하려고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곤란했다. 휴대폰을 꺼 놨다가, 혹은 무음을 설정해 뒀다가 중요한 전화를 받지 못했던 적도 있었고, 별 내용도 없는 문자 하나에도 목숨을 거는 여자친구 때문에 많이 싸우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화가 오는 시간에만 무음을 설정하는 건 더 바보짓이었다. 그렇게 하면 애초에 의식하지 않으려던 목적 자체에 어긋나므로….

최후의 수단은 역시 번호를 바꾸는 것이었지만, 기껏 여자친구와 중간 자리를 맞춘 번호를 바꾸기는 싫었다. 사실 몇 번 큰맘 먹고 통신사를 찾기도 했지만, 찾아갈 때마다 같은 가운데 네 자리를 가진 번호가 없었다. 여자친구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녀가 내심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며 너무나 즐거워하던 그녀의 미소에 어떻게 감히 찬물을 끼얹는단 말인가. 게다가, 아무리 두렵다고 해도 애인인 그녀에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 정체불명의 전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전화가 걸려온 지 세 달 무렵 지났을 때에는 공포심마저 무뎌져 있었다. 그것은 강도가 변하지 않는 공포에 대한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여자친구와의 불화가 더 큰 이유였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내 처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 주고 있었고, 내가 힘을 낼 수 있도록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 전화가 와도, 그녀는 웃으며 받으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가 곁에 있어 준 덕에 괜스레 용기가 솟아난 나는, 휴대폰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거나 평소라면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여자친구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며 다그치기도 했지만,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휴대폰을 방에 두고 편의점에 간 동안에 전화가 걸려왔던 모양이다. 그녀는 호기심에 전화를 받았을 터였다. 아무 것도 모르고 집에 돌아오던 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여자친구와 마주쳤다. 그녀는 몹시 혼란스런 표정이었다. 무언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순간적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치 절벽에서 붙잡기라도 한 듯, 오른팔에 강한 하중이 실렸다. 바닥에 구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극히 당연한 내 질문과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혼란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무슨 일이냐고? 너 진짜 웃긴다? 나 갖고 놀면서 이때까지 재밌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아까 전화 받았어. 울기만 했다고? 웃기고 있네. 그년이 너랑 사귄 지 세 달 됐다 그러더라?"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 한 마디 없던 수화기 너머의 그 여자가 대답했다니. 게다가 그 내용이란, 도대체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잠시만, 일단 진정해 봐."
"진정은 무슨 진정이야!"

여자친구가 바락 소리를 지르며 내 손을 뿌리친 덕에, 그녀를 위해서 사 온 만 원 어치의 과자와 음료수들이 몽땅 쏟아졌다. 이쯤 되자 나도 화가 치밀었다.

'혼란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인데, 왜 내 말은 안 들어 주는 거야?'

그 다음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치 세상이 시간의 속도를 잃은 것처럼, 내 주먹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녀가 움찔 하며 계단 쪽으로 뒷걸음친 순간, 그녀가 신고 있던 7센티 하이힐의 오른쪽 굽이 부러졌다. 동공이 커지는 게 보였다. 그녀의 입술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나에게 닿지 않는 손을 뻗은 채,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여자친구는 이미 나를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문병을 갔을 때, 그녀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왜 왔어?"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 진짜 오해야. 난-"
"듣고 싶지 않아. 가."
"아니, 들어. 들어줘."
"가라니까!!!"

그녀는 갑자기 과도를 집어 들고 자기 목에 들이댔다. 뻔한 협박이었지만,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본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 날부터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면회를 모두 거절한 것이다.

그 이후로는 내가 매일 밤 11시 11분에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스토커의 통화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여자친구와 대화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자마자 끊어버렸다- 마치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나는 나대로 계속 전화를 걸었다- 마치 그 스토커처럼.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착신을 거부하자, 이제 나는 11시 11분마다 공중전화로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발악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모든 공중전화를 전전하고, 하나 남은 마지막 부스에서 여자친구와 겨우 통화한 것은 사고 이후 보름이 지나서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웬일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너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제발 좀 들어줘. 넌 지금 오해하고 있어."
"아니, 오해 같은 건 없어."

멋대로 단정짓는 태도에 또 화가 나려는 나 자신을 가까스로 타이르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네가 날 두고 바람을 폈다거나 해서 화가 난 것만은 아냐. 물론 화가 안 났다면 거짓말이지만…"

순간, 수화기 너머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 그 날 사고 때문에 유산했어."

울음기는커녕 한 조각의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비로소 그 말을 이해했을 때,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 나는 그녀에게 따지다시피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였어?!"
"…10주 정도 됐었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당장 결혼하자고 하면 네가 곤란할 것 같아서, 좀 기다려 보려고 했어."

결국 그녀는 또 마음대로 단정을 지어버렸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결혼 요청은 절대 곤란할 리가 없었다. 뒤엉킨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녀의 건조한 목소리 때문인지 울지는 않았다.

"…미안. 진짜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 줘."
"아니, 용서 안 해줄 거야. 평생 널 증오하면서 살아갈 거야. 설령 너에 대한 사랑이 식는다 해도, 내 뱃속의 아기는 소중했어. 그 애는 한때나마 너와 내가 사랑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그 애는 자기 아빠 때문에 죽었고, 이제 너랑 날 이어줄 건 아무 것도 없어- 이 핸드폰 번호 빼고. 뭐, 상관없어. 곧 바꿀 거거든. 난 너처럼 무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잘 있어."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반환구로 쏟아져 나오는 동전을 가져갈 생각도 없이, 나는 도망치듯 공중전화부스를 빠져나왔다.   그 후의 기억은 마치 잘라낸 듯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한참 후에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건 내 방 천장의 익숙한 무늬였는데, 원래 하얀 색이었던 벽지가 어째서인지 노랗게 보였다. 깨어난 직후에는 너무 몽롱해서 때가 탔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하늘이 노랗다'는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여자친구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을 어지간히도 마셨던 모양이다. 후에 알아보니 그 날 내가 불러낸 녀석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아마 술집 하나가 문을 닫을 때마다 친구 한 녀석과 헤어지고 다른 술집에 들어가면 또 다른 녀석을 만나기를 반복했나 보다.

희미했던 정신이 점차 뚜렷해짐과 동시에 나는 강렬한 자극을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역한 냄새였다. 지난 밤, 방 안 아무데나 토해 놓은 덕에 악취가 진동했다. 그 다음으로는 심각한 위통이 느껴졌다. 듣자하니 나는 소주건 맥주건 양주건 간에,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술만 주구장창 마셨던 모양이다. 이러니 속이 쓰린 게 당연했다. 이윽고,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쑤셔왔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데도,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다녔을 내 모습이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일단, 일어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힘을 준 순간, 잠시 바닥과 멀어지나 했더니 오히려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간밤의 과음과 구토 때문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토록 무기력한 나 자신을 발견하자,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한 번 눈물이 나기 시작하자, 이윽고 그것은 오열로 변했다. 한심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펑펑 울었다. 뺨에 말라붙어 있던 토사물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울다가 기력이 소진해 버린 나는,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통화목록의 아무 번호로나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건 8년이나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지내온 죽마고우였다. 나는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와 달라는 한 마디만을 겨우 남기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그 이후 몇 달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하나 뿐인 아들을 걱정하셨던 부모님도, 내 사연을 안타깝게 여겼던 친구들도, 잇단 결근에 걱정이 되어 문병을 온 직장 동료들도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꼴을 보면 질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는, 이제 담즙 섞인 토사물의 악취를 지우기 위해 뿌린 방향제 냄새가 더 지독했다. 바닥에는 육안으로도 그 두께가 확인될 만큼의 먼지가 쌓여 있었고, 내가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침대 옆에는 인스턴트식품의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지못해 세수나 양치 정도는 했지만, 몇 달간 목욕은커녕 샤워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서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이 삐죽삐죽 흉하게 자랐고, 며칠 가다 내키면 감는 머리는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밤낮이 바뀐 탓에 햇빛이라고는 본 적도 없어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열악한 영양 상태로 인해 볼은 쑥 꺼지고 몸은 야위었다. 그래도 잠은 많이 자서 기미는 생기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폐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내게 질려 버린 부모님조차 찾지 않는 내 오피스텔에 한 친구 녀석이 계속 와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술이 떡이 돼서 돌아온 날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와 준 바로 그 녀석이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벌써 회사에서 연달아 승진하고 있는 녀석이라 많이 바쁠 테였지만, 그래도 친구로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인지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도와주었다. 참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게 닥친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커서인지 당시에는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스토커의 전화는 변함없이 걸려오고 있었다. 친구의 간호 덕에 기력을 되찾은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보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미 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쪽을 생각해서 바꾸지 않았는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쉽게 바꿔 버리다니….'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혼자서 곱씹고 있을 때, 다시 스토커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계를 보니, 역시 11시 11분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흑, 흑흑."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익숙한 소리. 한동안 침묵 속에서 들리지 않았던 그 울음.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악마의 말을 속삭였던 가증스러운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졌어!! 네가 전화만 안 했어도, 그 따위 거짓말만 안 했어도 헤어질 일은 없었단 말이야!!"

그 후로 몇 분이나 나 혼자서 지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침 튀겨가며 욕을 하던 나는 문득 수화기 너머의 울음소리가 멎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인사불성이 된 나에게, 그 사실은 공포 대신 더 큰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나를 무시하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증오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뭔데? 당장 대답해! 왜 무시하는데!!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거 아냐, 아니면 끊어!!"
"…훗."

웃음소리와 비슷한,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이 정말로 웃음소리였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멍하니 앉아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나에게 오는 전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고, 사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여자에게는 얼마든지 원망하고, 질책하고, 한탄하고 욕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한 나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11시 11분의 전화를 거는 여자에게만은 더없이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정도가 심해져서 내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오만해질 즈음이면,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비웃음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의 종막을 알리는 새벽의 알람과도 같았다.

매일 11시 11분부터 새벽이 밝을 때까지, 이제는 내가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말을 쏟아냈다. 여자는 이제 울지도 않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처음 며칠간은 무작정 화만 냈지만, 할 말은 금방 없어졌다. 목적도 계기도 잃은 행위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스토커 또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지극히 드문 하나의 인격이었다.

결국 나는 점차 그녀에게 나의 추억이나 과거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즐겁기까지 했다. 아주 오랫동안 전화를 하는 동안에, 평생의 원수는 어느 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간쓰레기가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밤부터 새벽까지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해가 뜨면, 그녀의 미묘한 비웃음 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세계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소개팅 나와라. 좋은 여자 한 명 소개해 줄게. 나랑 같은 부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인데, 예전에 한 번 너랑 나랑 찍은 사진 보고 관심이 좀 생겼던 모양이더라. 예쁘기도 되게 예쁘고. 솔직히 너 같은 놈한테는 아까운 여자지만, 내가 특별히 양보한다! 실연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풀어야지?"

불쑥 전화를 건 친구가 뜬금없이 꺼낸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쩐지 요 며칠간 집에 와서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이려 한다 싶더니, 소개팅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잘 먹은 덕분에 볼품없을 정도로 야위지는 않았지만,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나는 줄곧 의문을 품어왔었다. 그런데, 배후에 숨겨둔 목적이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그러나 사실 내가 더욱 당황한 이유는, 역시 11시 11분의 전화 때문이었다. 누군가 새로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는 또 그 전화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전화의 주인공에게 이미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말솜씨가 서툴고 어수룩한 나는, 다시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 여자친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가 홀로 지낸 지는 거의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겨울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이젠 나도 사람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자, 녀석은 답답했던지 또 곧장 달려와서 반강제로 나를 씻기고 면도를 시켰으며 머리를 다듬고 옷까지 사 주었다. 그러고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친구는 나에게 다음 날 약속에 응할 것을 거듭 요구하며 마지못해 돌아갔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내 성격을, 녀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전화는 걸려 왔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저… 내일, 소개팅 나갑니다. 그동안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통화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어떤 분이신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그리워질지도 모르겠구요. 그렇지만 용서는 하지 않을 겁니다."

두 세계의 경계와도 같았던 그녀의 비웃음 소리가 들릴 새도 없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것도 하나의 이별이라는 생각에, 나조차도 놀랄 만큼 슬펐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방금 온 걸요."

오랜만의 외출은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만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큰 눈, 제법 높은 편인 코, 다부진 입술에 날카로운 얼굴선을 가진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예쁘지만 왠지 얄미운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얼굴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조금 못 생겼더라도 정감이 가는 얼굴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우선 얄미운 인상과는 달리 차분하고 어딘가 친근한 목소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와 그녀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났음에도 마치 나의 일부라도 되는 양 나를 속속들이 꿰뚫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냄에 따라, 나는 그녀에 대해 점차 호감을 품게 됐다.

하긴 애초부터 나는 외모보다는 성격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몇 달이나 사람의 온기에 굶주려 있던 나였다. 처음 만난 여자에 대한 호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갔다. 하지만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덧 밤 11시가 넘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한 그녀와 나는, 헤어지기 전에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기로 했다. 여자에게 먼저 전화를 시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내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번호 찍어 주세요. 제가 전화할게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번호를 찍더니,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

"저는 여기서 지하철 타면 되거든요. 제가 안 보이게 되면 전화 거세요. 또 만나요!"

나는 그녀에게 택시를 타라고 권유했으나, 그녀는 지하철이 더 편하다며 한사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이윽고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계단을 울리는 발랄한 하이힐 소리가 지상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는 그 순진함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스토커.

한 순간, 심장이 멎었다. 제발 아니길, 착각이길 바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11분.

"여보세요?"
"…."

익숙한 침묵. 다리가 떨리다 못해 힘이 빠져서 풀리려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훗, 후훗, 하하. 하하하하!!"

계단을 도로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 메아리는 더 이상 발랄하지 않았다. 점차 가까이 다가온 발소리는, 내 등 바로 뒤에서 인기척으로 변했다.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전화를 받은 채, 내 바로 뒤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웃었다. 언젠가 들었던,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수화기와 등 뒤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많이 그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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