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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16)

익명_b68b682018.10.26 10:08조회 수 12589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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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13편부터는 너무 바쁜 와중에 써서 약간 어거지로 쓰고 있던 감이 있습니다.

15편도 회사 앞 커피숍에서 새벽에 노트북 펴 놓고 또 어거지로 쓰고 있었는데 이렇게 끝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간에 적당한데서 끊고 올려서 추석이 지나고 이렇게 16편을 올리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재미없네. 늘어지네. 여기저기 원성이 들려오는 듯하지만. 이제 완결을 눈앞에 두고 뭐 고칠 수는 없...)

그 때의 감정이나 일들을 떠올리는데 제법 시간이 걸리고 집중이 되어야 글이 잘 써지는데 막 짜투리 시간을 내어서 쓰다보니 진행이 이상해지고 서술이 중언부언해져서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아서 16편은 좀 천천히 썼습니다.


그리고 너무 천천히 썼더니 
천천히 써도 분량 조절이 안되는군요.

그냥 제 글 솜씨 탓이려니 합니다.
죄송합니다


** 중간에 이름 바뀐것 수정했습니다.
------------




전시 둘째 날은 제법 바빴습니다. 회사 사람들과 함께 파트너 미팅을 계속 했고 계속 영어로 말하고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미팅 사이에 시간이 떠서 몇몇이 담배좀 피러 나간다고 해서 모두 같이 바람좀 쐬러 나가는데 전시장 문에서 안책임님을 딱 만났습니다. 어제 일로 어색해져버리기도 했고 안책임님도 회사 사람들과 안 만나며 출장 일정을 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그냥 눈만 마주치고 지나치려는데.

같이 있던 직원 중 한명인 은지씨(가명)가 안책임님을 부릅니다.



은지씨: "선배님! 책임님! 꺄악! 여기 왠 일이세요!"

안: "어! 은지씨. 출장 왔구나- 잘 지냈어? 오랜만이네- 여전히 이쁘네. 우리 은지."


우리 은지.
하는 걸 보니 되게 친한 혹은 친했던 사이인가 봅니다.
와락 안기는데 난리도 아닙니다.




은지씨: "회사에선 못 만나다가 여기서 보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긴 전 중간에 미국에 있느라 회사를 비우긴 했는데..."

안: "아. 미국 갔었구나. 지금 무슨 팀이랬지?"

나: "어.. 두 분 어떻게 아세요?"

은지씨: "저 신입 때 제 사수셨어요. 절 사람 만들어 주신 분. (웃음) 그 때 배운 걸로 지금 버티고 살아요. "

저와 일행은 앞서 걷고 안책임님과 은지씨는 뒤에서 한참 이야기를 하며 따라 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책임님은 마치 멘토같은 역할이었나 봅니다. 은지씨는 처음엔 회사 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남친에 결혼 이야기까지 종알종알 하고 있습니다. 




주차장에서 안책임님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일행 중 한명이 차에서 뭐 좀 꺼낸다고 두어명이 같이 차로 갔는데 순간 악! 외마디 비명이 들렸습니다.

놀라서 뛰어가자 한명이 코를 움켜쥐고 쓰러져 있고 조수석 문이 반쯤 열려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을 열다가 전화기가 떨어져 줍는 순간 안에 있던 사람이 문을 확 열었고 그 문이 코를 친 모양입니다.

코피가 나는데 일단 피가 나자 당황스러웠습니다. 다친 사람이 너무 아파했고 티슈와 손수건으로 일단 피를 막고 있는데 병원을 가야하네 어쩌네 이러고 있는데 저멀리 안책임님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안: "어머. 많이 다치셨어요? 피가 많이 나네... 병원 가야할 거 같은데."

나: "얼전트 케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ER 가야하나요?"

은지씨: "코뼈 상한거면 어떡해요. "

다친 사람: "응급실 가면 돈 많이 드는거 아니에요? 미국 응급실가느니 비행기 타고 한국 간다는데. 아아. 근데 너무 아파요. "

안: "아니에요. 지금 다친 마당에 돈 걱정을... 회사는 보험없이 출장 안 보내요. 잠깐만요."




그러더니 갑자기 911로 전화를 해서 (또 영어로) 막 설명을 합니다. 

옆 사람이 차문에 부딛혔는데 코가 상했어. 피가 많이 나. 응. 그래. 응급실 가야하지? 응. 오케이. 여기서 제일 가까운 응급실 어디야. 응. 내가 부르는 주소좀 적어 주세요. 주소 뭐라뭐라. 우리는 어떻게 해야해? 그냥 피 막으면 돼? 응. 그래. 고마워.


안책임님이 막 급하게 통화하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무슨 미드의 한장면 보듯 그 광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선글라스를 쓰고 단발의 머리칼을 날리며 영어를 하는 모습에 너무 아이러니 하게도 미국에서, 주위에서 영어만 들리는 나라에서, 유창한 영어를 감상하는 듯 했습니다.



모두들 정신을 차리고 다친 사람을 데리고 운전해서 가려는데 안책임님이 같이 가줘야 하는 분위기에서 제가 제지시켰습니다. 

이건 같은 부서 사람이 데리고 가야 하는거 아니냐고, 영어 다들 웬만큼 하면서 왜그러냐고 우겨서 한 명만 다친사람을 데리고 급히 운전해서 떠났습니다.




이상한 마음.

누구든 안책임님과 도움 주고받아서 더 가까워 지는게 싫은 마음.

이 빛나는 사람이 알려져서 모두가 사모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싫은 마음.


이런 마음이 순간 들었습니다.




은지씨가 법인의 주재원에게 사고를 알렸고 주재원은 자기가 병원에 가서 알아서 처리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소동은 마무리 되었고 저는 다음 미팅시간에 조금 늦어 뛰어서 다시 전시장의 미팅룸으로 찾아 들어갔습니다.






미팅 중에 계속 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면 난 한발짝도 못나갈것 같다.

나랑은 틀렸지만. 아까운건가. 
이런 감정 당연한건가.
찌질하지만 싫다! 나말고 다른 사람이랑 가까운거!


비즈니스 클래스석을 양보하면서 마음을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출장지에 와서 계속 엮이고 있는 걸 보니, 그리고 그에 따라 또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보니 계속 뭔가 남았습니다.

...

저녁이 되어 업무가 남은 사람은 일을 하고 쇼핑을 가는 사람도 있고 저는 근처에 직장을 잡은 친구와 연락이 닿아서 만나 간단히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가면서
저녁에 술좀 먹으러 차를 호텔에 놓고 우버를 타고 나갔던 저는 제법 많은 술을 먹고 호텔방에 오자마자 썸녀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것을 또 잊어버리고 그냥 자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시 마지막 날.

미팅이 취소되면서 하루를 모두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행운이 생겼습니다. 보고서도 이미 보냈겠다 느긋하게 전시를 둘러보고 고생하는 전시팀일도 조금 도와주며 보냈지만 안책임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출장지에서 하루를 더 보낼 수 있어서 모레 한국으로 출발하지만 안책임님은 내일 출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앉아서 이야기라도 해서 뭔가 매듭을 지려면 오늘 밖에 없었습니다.




이대로 한국에 가면 영영 불편한 관계. 
영영 불편한 기분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오후가 되어서 전시도 슬슬 파장 분위기가 시작되고 일이 먼저 끝난 팀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녁과 밤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들을 합니다. 벌써 쇼핑하러 도망간 무리도 있다 하고 헐리우드에 구경을 가네 어쩌네 이야기가 오갑니다.


회사사람1: "손책은 어디 안가요? 우리 끝나서 지금 아울렛 간다는데 같이 안갈래요?"

나: "전 쇼핑 안좋아해요. "

은지씨: "저희 패서디나쪽 가서 저녁 먹을건데 같이 안가실래요?"

나: "저녁에 그 쪽 죽어라고 막힐텐데.. 구글맵이라도 찍어보세요."




신경은 온통 안책임님에게 가 있어서 뭐 쉽사리 하자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은지씨: "저희 팀 분들 야구 보러 간다는 파랑 저녁식사 파가 갈렸는데 전 사실 어디도 가기 싫긴 해요. 책임님은 어디 안가세요? 미국 너무 많이 오셔서 별 느낌이 없으신가."

나: "아 오늘 야구 하는 날이에요? 메이저리그 보러 가세요. 재미있을텐데."

은지씨: "다저스 경기 아니고 애너하임 경기래요. 류현진도 안나오고.. "

나: "마이크 트라웃 보면 되겠네!"

은지씨: "잘 몰라요... 암튼 어디 가세요?"

나: "메이저리그에서 젤 잘하는 선수에요! 얼마나 멋진데."




아 이 아가씨 왜 자꾸 나한테 붙으려 하지.


아마도 출장 자주오던 사람이니 재미있게 보낼거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야구나 좀 볼까 생각도 들었는데 안책임님과 매듭을 짓고 싶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굴 기다린다고 하기도 뭣해서 말도 안되는 걸 반 농담으로 던졌습니다.




나: "어... 난 별 보러 갈라고요!"


이렇게 던지면 큭- 웃으며 에이. 무슨 여기까지 와서 별을 봐요- 이럴줄 알았던 서른 남짓의 젊은 아가씨는 갑자기 반색합니다.


은지씨: "헐 대박.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세요? "


어. 아닌데. 농담으로 받아야 하는건데.


은지씨: "우아. 책임님 너무 멋있다. 출장와서 기껏 한식집 가서 소주먹는 아재들 사이에서 이런 제안이 나올 줄이야!"

나: "에이 요즘에 누가 그래요. 저위에 부장님들이나 한식집 가지..."

은지씨: "아무튼아무튼. 저좀 데리고 가세요! 헐리우드같은덴 가봤고 딱히 먹고 싶은것도 없고."


아. 농담이라고 할 타이밍을 이미 놓쳐버렸다.


나: "단 둘이 어떻게 가요. 말 나오고 그래요. "


그래. 차마 둘이 가고 싶다고 들이대진 않겠지.

은지씨: "그럼 누구랑 같이 가면 되죠! 별보러 간다면 다들 진짜 좋아할텐데. 그럼 몇명 모이면 저희도 같이 가요. 네?"


아. 이게 아닌데. 그냥 던진 말인데.

물론 별보는 거 좋고 실제로도 별보러 간 적도 있지만 이렇게 막 던진 말에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와서 혼자가겠다거나 농담이라고 할 수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은지씨는 혼자 신나서 어머 별을 보러간데 ㅋㅋㅋ 이러면서 여기저기 메시지를 보내는 모양입니다.


은지씨: "*선임이랑.. ** 책임 아세요? 둘이 간대요. 그리고 아마 전시팀 사람중에 일찍 철수한 사람들 갈 수도 있을거 같은데. 너무 많이 가면 그런가? 그 사람들 차도 있으니까 상관없죠?"

나: "여기서 빛 없는데 찾으려면 멀리가야 할텐데. 괜찮아요? 내일 비행기 타는 사람들 부담될텐데."

은지씨: "전 상관없어요. 오후 비행기인데요 뭐."


이제 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은지씨는 혼자 신나서 여기저기 전화해보더니 문득




은지씨: "책임님. 근데 안책임님은 어떻게 아세요? 안책임님도 가자고 하면 갈까요? "

어... 잘 모르겠다. 어떻게 답을 해야하지. 
에라. 모르겠다. 


나: "어.. TF같이 했었어요. 한 번 물어봐요. 가는지. 아! 누구누구 가는지 이야기 해주고. 혹시 불편한 사람 있을지도 모르잖아."

은지씨: "아 신난다! ㅋ"


은지씨는 안책임님에게 메시지를 보내더니 "좀 있다 알려주신대요!" 하고는 일을 마무리한다고 총총 사라졌습니다.



별보는 사이트는 구글신이 친절히 알려줘서 별로 어렵지 않게 근방에 있는 걸 찾을 수 있었는데 문제는 안책임님이었습니다. 만약에 간다면 난 처신을 어떻게 해야할 것이며 혹시 말이라도 잘못하면 주위의 오해를 사기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일을 클리어 시키고 주차장에 가기로 한 인원들이 모였습니다. 시간상 호텔에는 들르기 어려워서 바로 두시간 거리에 있는 주립공원(state park) 를 향해 가기로 했습니다. 안책임님이 가겠다는 답을 마지막으로 하며 저까지 여덟 명이 가고 차는 석 대가 모였습니다.

다들 모이면서 
"어우 손책임님. 낭만있다. 그런데를 갈 생각을 어떻게 해?" 라든지 
"크으. 이런건 남자친구랑 가야 하는뎅..." 같은 소리들을 하며 사람들을 기다렸고 

저는 저대로
"나도 당신들이랑 사실 같이가고 싶지는 않아요."

로 응수하며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안책임님과 다른 한 사람이 늦게 되어 한 대가 기다리기로 하고 저와 다른 한대가 먼저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피크닉 블랭킷이라도 하나 사야 펼쳐놓고 누워서 볼 수 있어서 중간에 춥다는 사람 자켓도 살겸 아웃도어 용품점에 들르기로 했고 가는 길 중간에 햄버거집에서 일단 모이기로 했습니다.



저와 은지씨 그리고 다른 남자 선임 하나가 타고 먼저 출발했습니다. 이 밝디 밝은 서른살의 여자는 한참을 종알종알 뒤에서 떠듭니다.


은지씨: "손책임님. 임원 양성프로그램 같은걸로 다니시는거죠? 그렇죠? 우어 되게 멋있다."

나: "아. 그런거 아니에요. 그냥 얼떨결에 온거에요. 은지씨가 보기에도 내가 그런 급은 아닌 것 같지 않나."

남자선임1: "저희 팀에 작년에 이 프로그램하시고 바로 주재원으로 가시던데. 아니에요?"

나: "아. 아니라니까... 그리고 뭐 그렇더라도 임원이 뭐 부러워요? 난 아주 부럽진 않던데... "

남자선임1: "그래도 전 시켜주면 할거 같은데요. "

은지씨: "안책임님 같은 분이 딱 임원아니에요? 완전 초에이스 아닌가. 회사 입장에서는... 애기만 아니면 진즉 엘리트 코스일텐데."


안책임님 이야기에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
아는 척을 하기에도 그렇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나: "....."

남자선임: "그래도 엄마 선임 책임들도 보면 다들 야근도 하고 그러시던데.."

나: "안책임님은 애 봐주는 사람이 없대요. 그래서 야근 거의 못한대..."

은지씨: "그러니까. 이래서 여자가 올라가기 힘들다니까... 근데 책임님 안책임님이랑 되게 친한가봐요! "

나: "........ 요즘 세상에 무슨 야근해야 승진을 해요."

은지씨: "그만큼 퍼포먼스도 잘 안나오는거고.... 뭐.. 근데 안책임님이랑 무슨 TF하신거에요?"




그 때 차에 틀어 놓은 음악이 바뀌었고 저는 황급히 음악이야기로 넘겼습니다.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데. 누구 공연갔을때 누가 게스트로 나와서 이걸 불렀네... 하면서 주제를 환기시켰습니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한시간여를 운전해서 만나기로 한 햄버거 집에서 간단한 저녁을 주문했더니 뒤따라 같이 가기로 한 차들이 모였습니다.

저는 안책임님과 그냥 눈인사만 하고 떨어진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차에 올라 공원에 도착했더니 그제야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불편할 줄 알았는데 눈인사라도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아. 진짜 불편하면 안 왔겠구나...



꽤 어두워져 공원 입구 주차장에 돗자리를 몇 개 깔았고 다들 앉지도 않고 어설프게 서 있자 제가

"별은 누워서 봐야 진짜인데." 하며 먼저 눕자
은지씨를 포함한 젊은 친구들이 누웠습니다. 

저는 일어서면서 다른 사람에게 누워보라고 하며 자리를 양보한다음

웃기지도 않은 별자리 설명을 했습니다.




옛날 대학교 1학년 때인가,

여름방학에 농활을 갔는데 밤에 은하수가 깔린 별 아래에서 어떤 형이 별자리를 설명하면서 별자리 탄생 이야기를 곁들이자 여자애들이 탄성을 지르며 멋있다고 난리였던 기억이 났습니다.


나: "자. 모두들 북극성 찾아 봅시다. 잘 모르겠어? 다들 도시사람이긴 한가보다... 그러면 북두칠성. 아. 그래 저건 쉽지. 국자모양... 그러니까요. 진짜 보인다니까. 그 머리끝 방향으로 한 다섯배 움직여봐. 엄청 밝은거 보이나? 그게 북극성!"


다들 좋아합니다.
오. 분위기가 넘어왔...


나: "그리고 고 반대방향으로 더 가봅시다. 더블유 보이나 더블유? 그게 카시오페이아. 동방신기의 그 카시오페이아가 이거라니까! 아 배운 사람들이 그것도 몰라..."


다들 좋아합니다. 

그 뒤로 작은곰자리니 페르세우스니 안드로메다니 이야기를 하다가 아는게 더 없어서 그냥 대충 마무리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너무 좋아해서 데리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고 저도 별을 보고 있으니 좋았습니다. 

몇몇은 갖고 온 디카나 폰카로 찍어보려고 애쓰고 인스타에 올리니 뭐니 하고 있는 와중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사람들 주변을 걷고 있는데 어느덧 안책임님이 옆에 있었습니다.



안: "진짜... 특이한 사람."

나: "제가요?"

안: "좋은 시간 갖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 "은지씨가 연락했잖아요. 그리고 사실. 이거 농담으로 던진건데 은지씨가 진담으로 받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커진..."

안: "그래도요."


이 짧은 대화로 어제의 뻘짓이 용서된 걸까요. 아니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물음과 관계의 정의를 해야하는 걸까요.

하지만 말이 길어지면 또 엄한 소리 할까봐 그냥 아무말 안했습니다.



또 마음속에 또아리를 트는 생각.

사귈 때 이렇게 같이 출장을 왔더라면 
별도 보러 같이 왔을 텐데.
헤어지고 나서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그리고 또 뒤따르는 생각.

그러면 뭐하나. 
결국 이어지지 못할 것을.







돌아가는 길에 은지씨가 안책임님과 같이 타겠다고 해서 셋이 제가 운전하는 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나: "차는 어디다 두셨어요? 전시장에 차 두면 안되지 않아요?"

안: "아침에 아예 호텔에 두고 왔어요. 저녁에 다운타운 갈지도 몰라서 두고 왔는데 이렇게 됐네요."

은지씨: "약속 있으셨어요? 그래도 이렇게 같이 오니까 너무 좋네요. 히히. "



밤에는 앞자리를 비우면 안된다고 운전자 졸지도 모른다고 제가 우겨서 안책임님이 앞에 은지씨가 뒤에 타고 출발했습니다. 한참을 어두운 길을 가는데 은지씨는 뒷자리에서 곯아 떨어진 듯 합니다. 




진짜 자나? 정말 자나?

눈치를 보다가 안책임님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려는데.


안: "누나라니.. 아이고..."

아. 그 이야기구나. 
작고 낮은 소리로 들릴듯 말듯 대화를 시작합니다.


나: "저도 모르게 왜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안: "손책임님은... 현명한 여자를 만나야겠다. 아니 만날거라 생각해요."

헛소리라는 말을 이렇게 에둘러서 표현하는구나.


나: "서울 돌아가면... 이제 뵐 수 있어요? 제가 막 연락해도 되나요?"

안: "......"

약간의 침묵.
그리고 물음.




안: "내일 비행기에요?"

나: "아니요. 모레요. 하루 휴가 내려고 했는데 팀에서 내 편의 봐주는건지 아니면 일이 진짜 생긴건지 법인에 일이 생겼어요. 오전에 잠깐 들르기만 하면 된대요. 책임님은 내일 가세요?"

안: "나는... 음. LA는 모레 떠나요. 사실 난 휴가 붙였어요. 며칠 서부에 좀 더 있다가 가요."

나: "이렇게 오래 계셔도 돼요?"

안: "애기는 어떻게 해결했고... 수시로 전화하고 있는데 잘 지내서 다행. 사촌 오빠네 언니가 잘 봐주고 계시고. 일이 문제지 뭐. 와서 전시는 잘 못보고 사실 회사 일만 계속 하네요."


어.. 내일 여기 있다는 이야기. 

마음이 조급해 집니다. 어찌해야하나.



잠깐의 침묵동안 마음을 들여다 보며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같이 있으면 좋은가 괴로운가. 
- 좋다.
기대가 계속 되는가. 내가 다시 사귀어 보려고 애를 쓰는가.
- 잘 모르겠다.
저 사람은 내가 옆에 있으면 좋을까.
- 싫은 것 같지는 않다.

근데 결정적일 때 왜 나를 자꾸 밀어내는가.
- 모르겠다.


생각을 두어바퀴 돌린 끝에 말을 꺼냈습니다.





내일 계획 있냐고 
물어보는 찰나.



뒤에서 자고 있던 은지씨에게 전화가 왔고 

부시럭거리며 은지씨가 깨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른 차에 탔던 사람들이었고 거의 다 왔네 어디 들르네 그냥 호텔로 가네 이야기가 오갔고 우리의 이야기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안책임님을 호텔에 먼저 내려주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내일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서울에서 보자는 작별과 수고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정이 갓 넘은 시간이었지만 운전을 해서 그런지 몸이 노곤했습니다. 대충 사워하고 티비를 틀고 맥주 한캔 따서 마시자 마자 잠이 몰려오는데 겨우겨우 정신을 붙잡고 안책임님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 [["내일 계획 있으세요? 같이 시간 보내실래요?"]]

답이 없습니다. 
자나 싶어 티비를 끄고 
그냥 마음을 접고 자야겠다 생각하는데


안: [["오전에 법인 다녀온다면서요. "]]

나: [["그러니까 오후에요. 어디 가세요? 일정 있으세요?"]]

또 잠깐의 기다림.
그냥 전화를 할까하다가. 좀 더 기다려 봤습니다.

뭔가 하고 있던건지. 아니면 생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잠결이었는지..


안: [["오전에는 미술관좀 갔다가 점심엔 친구 만나요. "]]

그러니까 오후에는... 이라고 메시지를 쓰고 있는데.

안: [["오후엔 쇼핑가려고 했는데 같이 쇼핑다니실래요? 아니면 그냥 다른데 가고요. 쇼핑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리고 연달아 답이 옵니다.

안: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같은데 가보고 싶은건 아니죠?"]]



딱히 살 것이 있진 않았지만.
어차피 어딜 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LA에 도착하자마자 짧게 쇼핑다녔을 때 좋았던 생각이 났습니다. 

나: [["음.. 쇼핑가요."]]

안: [["내일 오전에 연락해주세요. 굿나잇. "]]





참 다이나믹한 출장이다.

만나자고 해서, 시간보내자고 해서 그렇게 된거 같긴 한데 
사실 어쩌자고 이렇게 된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난 가만히 앉아서 궁금했던 것들을 풀고 바이바이 할 생각이었는데.
쇼핑을 같이 다니게 생겼.....


이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와중에 눈꺼풀이 무거줘졌고 티비도 켠 채로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아예 썸녀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다음날 법인으로 가서 간단히 미팅을 했고 별 일없이 넘어갔습니다. 사실 제가 없어도 되는 미팅이었고 그냥 옵저버 수준에서 한두마디 거들고 대충 미팅 노트만 써서 한국으로 날리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나: [["저 끝났는데. 어디세요? "]]

안: [["저 미술관에 있는데 법인에서 꽤 멀지 않나요?]]

나: [["친구는 언제 만나세요?"]]

안: [["친구는 아침에 만나서 브런치 같은걸로 이미 먹었어요. 뭐라도 먹고 오세요. 난 괜찮을 거 같아요."]]

그리고 곧이어.

안: [["주소 따로 보낼게요. 거기서 두시 반 어떠세요?"]]

나: [["네네"]]



근처 피자집의 노천 자리에서 피자 한조각과 콜라를 먹고 있는데 문득 너무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외국에서
앞으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낸다.

왜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좋아서.




쇼핑몰에서 만난 안책임님은 여전히 같은 바지에 위에만 반팔 셔츠 그리고 선글라스 차림으로 나타났습니다. 진짜 짐을 적게 하고 온 모양입니다. 옷 차림이 삼일동안 그리 변하지 않았습니다. 

안: "사고 싶은거 있어요?"

나: "사실... 딱히 없긴 해요. 옷좀 사죠 뭐. 싸면..."

안: "나도 옷 살라고. 일부러 짐도 거의 안 가지고 왔어요. "


근처의 커피집에서 일단 커피부터 사서 들고 다닙니다. 옷가게도 들어가고 화장품 가게도 들어가고 중간에 팝업 스토어같은데도 구경다녔습니다. 어디 방송사에서 쇼를 찍는 것도 멀찍이서 구경하고 웬만하면 비싸서 못 사먹는 고디바 초콜릿도 하나씩 사서 먹어 봤습니다.


안책임님은 중간에 원피스를 하나 사더니 훌렁 갈아입고 그 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고 입었던 셔츠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어버렸습니다. 저도 운동화를 하나 샀는데 뭔가 그렇게 갈아 입는 것이 좋아보여서 저도 바로 신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새걸 사서 집에 와서는 그 산 느낌을 계속 즐기곤 했는데 후딱 그 자리에서 신고 다니니 뭔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나로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던 신발은 그리 낡지 않아 버리진 못했지만)

옷가지 따위를 사면서 우리는 서로 입은 옷태를 봐주고 좋다 어떻다 이야기하면서 또 연인처럼 다니고 있었습니다. 안책임님은 그러면서 휴대폰 케이스도 하나 사고 팔찌도 하나 샀습니다. 



우리는 왜 서울에서는 정작 그러지 못하고 지금 이 만리 타국에서 헤어져 놓고 이러고 있는 걸까. 안책임님은 헤어지자고 해 놓고 자꾸 내 앞에 나타나고 나는 또 좋아서 같이 다니고 있는 걸까요. 





지금 이곳은 다른 곳이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이런 생각 따위를 시작하자 갑자기 용기가 생겨 안책임님의 손을 잡고 싶었습니다.
또 어색해서 갑자기 정색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손을 넌지시 잡는 상상을 하는 순간.





안책임님에게 영상 전화가 왔고.
아마도 딸인 모양입니다.


아. 잠깐만요. 하더니 딸과 멀찍이서 전화를 시작합니다.

딸. 잘 잤어? 응. 엄마는 일 끝났고 지금 놀아- 작은엄마는 뭐하시니? 응. 말 잘들어야해. 엄마처럼 하면 안돼. 응. 우리 딸 착해착해.


통화를 끊고 돌아와서는 또.. 아이고 미안해요.



잠깐의 용기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또 쇼핑몰의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중간에 안책임님은 썬크림을 제 얼굴에 직접 발라주었고 향수를 제 옷에 뿌리더니 향을 맡아 보았습니다. 


예전에 강남역 다니던 생각. 퇴근하면 소소하게 맛있는거 먹으러 다니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토록 못해본 데이트 비슷한걸 지금에서 하고 있는 아이러니에서 계속 벗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안책임님이 너무 신나보였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어두운 표정에서 회사를 나와 신발을 사고 커피를 들이키듯 마시며 명동을 활보하고 살아나던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상황이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지만 옆에서 걷는 안책임님만의 걸음과 표정은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향기와 냄새는 그 때 이후로 
저에게 일관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냄새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요.







시간이 제법 지났고 저녁이 가까워졌습니다.

나: "저녁은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먹을까요? 식당이 뭐 많기는 한데."

안: "음.. 뭐 먹고 싶은거 따로 있으세요?"

나: "글쎄요. 피자 빼고. 점심에 먹어서..."



안책임님은 잠깐 생각하더니.

안: "저기 가서 프렛젤로 일단 허기를 달래고 저녁은 어디 좋은데 가서 먹을래요? "

나: "어우 좋죠. 저도 여기서 저녁먹기엔 좀 아쉽긴했어요."


우리는 근처의 프렛젤 가게에서 핑거푸드같은 걸 시키고 아케이드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안책임님은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안: "책임님. 정말 미안한데. 잠깐 앉아계실래요? 저 잠깐 갔다올게요."

나: "어.. 어디요? 같이 가요."

안: "아니에요. 잠깐 드시고 계세요. 저 애기 옷 하나 사야하는데 깜빡해서요. 금방 다녀 올게요."




갑자기 쇼핑꾸러미를 놓고 안책임님은 자기 가방만 들더니 사라졌습니다.

저도 슬슬 다리도 아프기도 했고 애기 옷이야 제가 봐줄 것도 아니니 그냥 앉아서 콜라라도 마시면서 좀 쉬기로 했습니다.

한 10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20분이 넘어서야 안책임님이 헐레벌떡 나타났습니다.





안: "아휴. 미안해요. 되게 머네."

나: "어디 다녀오셨는데요? 바로 요 코너에 갭이랑 랄프로렌 있던데."


들고있는 쇼핑백은 랄프로렌 폴로였습니다.

안: "랄프로렌이랑. 또 다른거 샀어요. 어. 몇 개 남겼네. 다먹어도 되는데."

나: "어떻게 다 먹어요. 이거라도 좀 드세요."

잠깐동안 우리는 말없이 콜라를 쪽쪽 빨아 먹고 저는 안책임님이 프렛젤을 집어 먹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이런 일은 없겠지.

하다못해 누나동생이라도 이렇게 쇼핑을 다니나. 
마흔이 가까운 누나동생이 무슨 쇼핑을 다니나.



안책임님은 지쳤는지 유난히 말이 없었고 저도 굳이 말을 걸고 싶지 않아 가만히 다니는 행인들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기분이 편안했고 마치 가보지도 않은 신혼여행의 마지막날 같았습니다.

이제 일상의 복귀.
하지만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사람과는 바이바이.


서울로 돌아가면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걸 자꾸 확인하고 묻고 하면 할 수록 지금 있는 시간을 망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손도 못잡지만.
옆에서 가만히 이 사람과 있는 걸로 충분히 좋다.



말을 하지 말자.

말만하면 이 사람은 도망가는 것 같다.

그냥 오늘. 지금 쇼핑이라도 같이 있자.







안책임님이 침묵을 깨고 저녁이야기를 합니다.

안: "손책임님. 피자만 아니면 제가 가자는데 갈거죠?"

나: "네. 또 아무거나 괜찮아요. 라는 답하기 싫으니까 그냥 정해주세요. 흙파먹는데라도 같이 갈게요."

안: (웃음) "그러면.." (전화기로 검색하더니) "여기 식당 어때요. "

나: "네 좋아요. 거기 별도 많고 뭐 좋아 보이네요."



우리는 각자의 차로 LA의 무시무시한 트래픽을 뚫고 늦은 시간에 식당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배고픈 상태로 도착해버리고 말았고 더구나 예약을 한다는 것을 깜빡하고 그냥 가는 바람에 또 삼십여분을 기다리는 바람에 음식을 시키고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안: "이렇게 좋은 식당에서 음식을 무슨 전주비빔밥 먹듯 먹네요."

나: "아이고 순식간에 먹었네..."



말 한마디 안하고 애피타이저 두 개와 요리 두 개를 후루룩 먹고 났더니 오후 아홉시.


밥을 한시간 만에 먹었는데 헤어지기는 좀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기껏 좋은 식당에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밥을 먹어버리다니.

나: "디저트 메뉴 달라고 할까요?"

안: "음... 좀 허무하네요. 여기 식당 이쁜데... 더 있고 싶긴 한데."



사실 술을 같이 먹자고 하고 싶은데 용기가 안납니다. 

또 잘 못말해서 분위기 싸해질까봐.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내가 실수하면 완곡하게 잘 가르쳐주던 사람이었는데...

말 실수 할까 조심조심하는 사람이 되다니.






그런데.

안: "호텔에 바에 가서 뭐라도 좀 마실래요. 나 사실 운전 때문에 여기서 맥주나 와인하자고도 못하고..."

나: "어... 좋죠! 어우. 좋죠. 그럼요."


차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우버나 택시를 타고 되고 뭐 LA에는 대리운전도 있다니까 호텔까지 못갈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식당 분위기에서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는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사실 
다시 만날 수는 없더라도 
왜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간 이야기 못 한 이야기들. 
남편 이야기도 좀 더 해보고 싶었고
관계의 예민함때문에 못한 더 깊은 이야기들을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조곤조곤 이야기 하고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리고 비행기 타면 

진짜 좋은 마무리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책임님의 호텔에 도착을 해서 주차하는 데 안책임에게서 주차하고 기다리면 얼른 내려오겠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주차를 하고 천천히 로비로 걸어와서 바에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을까 생각하는 찰나에 안책임님은 짐을 방에 올려만 놓고 손가방만 하나 들고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나: "여기 바는 하나인데. 분위기는 대충 전형적인 호텔에 있는..."


그런데 갑자기 말을 끊고 난데없는 부탁을 합니다.

안: "책임님... 저기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나: "뭔데요?"

안: "미국에서는 담배 어디서 사요? 호텔에서는 안 팔겠죠?"



어.
담배?




나: "음. 이 호텔엔 잘 모르겠고... 오는 길에 있던 주유소에서 팔거 같은데요. 설마... 피시려고요?"

안: "하나만 사주실래요. 아니 뭐 내가 사도 되긴 하는데..."



우리는 다시 차를 몰고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주유소에서 담배 한갑과 라이터를 사서 다시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담배를 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등학생도 아니고 달라는데 못 줄 이유도 없어서 뜯어서 하나를 주었습니다.


나: "혹시... 처음 피시나요?"

안: (웃음) "아니요. 근데 뭐 진짜 몇 번 안 펴봤으니까. 늘 처음 피는 느낌인 것 같네요."

나: "언제 펴보셨는데요?"


안: "대학교 처음 들어가서 어쩌다보니 밴드에 들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밴드에서는 다 기본적으로 담배를 피던 때라... 요즘엔 안그렇겠죠? 아무튼 결국 담배를 배운답시고 술을 먹고 담배를 피는데 난 안 맞나봐요. 잘 안 펴지더라고... 밴드도 일학년만하고 그만두고..."

나: "밴드도 하셨다니 몰랐네요."

안: "키보드 쳤는데 뭐 정기 공연에서 딱 한 곡 시켜주데요. 금방 재미없어져서 바이바이. 뭐 그건 그렇고. 담배는 그 이후도 너무 힘들고 그러면 친구에게 달라해서 펴 봤는데 늘 실패. "

나: "근데 오늘은 왜 피신다는 거에요? "


담배 안피는 사람이 담배 달라고 하면
꼭 주기 전에 몇번을 주저하라고 하던데...



안: "오늘. 좀 다른 사람으로. 아니 다른 세상에서 사는 기분이어서. "

나: "안 줄 수가 없는 이유네요."

안: "아니 안주다니. 내 돈으로 산건데." (웃음)


우리는 차에 기대 서서 한 대 씩을 폈습니다. 
안책임님은 당연히 콜록콜록 대며 피웠고 저는 그냥 연기를 넘기지 말고 빨아서 뱉어내라고만 했습니다. 


안: "아니 누가 몰라요. 진짜 피는 거 처럼 피려고 했지."

나: "그렇게 피는게 뭐 가짜로 피는건가요. 그리고 시가는 실제로 그렇게 피기도 해요."

안: "아.. 그런가. 나 그럼 하나 더 필래요."


또 하나를 핍니다.



안: "아 누구 영화처럼 펴보고 싶은데 생각나는 영화가 없네..."


어색하긴 하지만. 
멋있어요.


나: "저도 뭐 생각나는게 없네요. 타짜에 김혜수가 담배를 피던가..."

안: "하하. 그런걸 상상한건 아닌데.. 어우. 써. 고만 펴야겠다."



그러더니 담배를 아래로 던져서 발로 비벼 끕니다. 

안: "나 이거 해보고 싶었어요. 가요. 갑시다. 줍지 말고."


이런거 싫어하는데 오늘은 그냥 맞장구 쳐주기로 했습니다. 주위에 경찰도 없는 것 같고.




로비로 들어서면서 봐두었던 칵테일 바로 향합니다.

나: "만족스러우신가요."

안: "매우. 너무 좋아요."



담배로 이렇게 신나 할 줄이야.

사실 이렇게 자유로운 안책임님을 본 적이 없었으니 오늘의 안책임님은 아마 저에게도 그리고 그 자신에게도 매우 낯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근데 입이 너무 쓰다. 뭐 빨리 마시고 싶네요."

나: "네 뭐 빨리 마셔요."


시간에 제법 늦었는데도 테이블 자리가 없어 바텐더 앞 바에 둘이 앉았습니다.


저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시켰는데 안책임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안: "하이볼이 뭔지 아세요?"

하이볼? 하이볼 로우볼? 아.. 술 이야기 하는구나!



나: "소다에 위스키같은 술 섞으면 하이볼이라고 하는 거 같던데. 맞나.."

안: "하루키 책 보면 하이볼을 마신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는거야. 근데 정작 이런 바텐더에게 하이볼을 주문할 일이 없었네요. 오늘 그래서 드디어 해보려고."


안책임님은 바텐더에게 제일 잘하는 하이볼을 물어왔고 바텐더는 진에 라임과 스프라이트를 섞은걸 주었습니다.

안책임님은 후루룩 마시더니 

안: "와. 이거 되게 맛있네요. "

나: "무슨 칵테일을 막걸리 마시듯 드시네요. 천천히 드시..."


그러더니 다른 하이볼을 한잔 더 주문해버렸습니다.





저도 술에 대해 딱히 잘 아는 편은 아니어서 덕분에 바텐더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이야기하면서 한잔 두잔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브랜디. 이건 진. 이건 왠만하면 다른 거랑 섞어 먹지. 맛없으니까.. 원래 약으로 먹는 술이래. 원래 술이 다 약 아닌가요. 하하... 하면서...


제법 이런 저런 술을 마시다보니 머리위에 티비의 야구 혹은 농구들이 중계가 끝나자 사람들이 많이 떠났고 테이블에 몇 팀. 그리고 바에는 저 멀리 한 팀을 제외하곤 우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조금 분위기가 차분해지는 듯 하고 
바텐더도 우리 앞에서 자리를 피하자 

저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다음 최종회16-2 는 월요일10/1 에 올라갑니다.)



익명_b68b68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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