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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5)

익명_f047162018.09.01 19:36조회 수 15698추천 수 2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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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댓글과 추천 감사합니다.

 

하나하나 대댓글을 못달아도 제가 다 읽고 힘얻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하나하나 다 기억 합니다. 제가 평생 이런 응원 언제 받아 보았겠습니까.

 

 

 

 

이 글은 85%의 실제와 15%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건은 실제에 기반합니다. 그리고, 일부 디테일이 소설에 가깝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은 제 감정과 기억에 기반합니다.)

 

 

 

원래 기획은 98%의 실제와 신원을 숨기기 위한 2%의 소설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스케일이 커지고 디테일에 신경쓰다 보니 소설의 영역이 커지게 되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일부러 가명을 오픈하면서 소설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리얼리티가 떨어지면 집중도가 떨어지지요. 내 주위에. 혹은 나에게 있을 법한 일이어야 집중할 수 있는데 '소설'임을 안 순간 흥미가 확 떨어지는 것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미국 여자 영상보다 일본 여자 영상을 더 좋아하는 이유도 그래도 내 주위에 나에게 있을 법한 사람.... 아 이건 아닌가.. 죄송합니다. (...)

 

자전적 소설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금요일 술을 퍼마셔 놓고 느즈막히 주말에 잘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침에 잘 일어났습니다. 

 

어제밤 술 마시고 집에 걸어온 것도 기억하고 다행히.. 어디 전화하거나 문자보내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과거 전여친들에게 술먹고 전화하는 만행 많이 저질렀는데.. 정말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습니다.

 

의미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점심 무렵 사우나 생각이 간절해 져서 동네 사우나에 갑니다. 딱히 할일도 없어 신문도 일간신문 스포츠신문 하나씩 천천히 정독을 하고 탕도 온도별로 다 돌아다니고 몇 시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조용한 사우나에서 망중한을 즐기다가 배가고파져서 라면이나 좀 먹을까 하여 사우나에 딸린 식당에 라면을 주문하고 옷을 천천히 입으며 전화를 확인하는 순간.

 

 

부재중 1통화

 

그리고 안책임님에게서 온 메세지 두 개

 

[[책임님.]

 

그리고 수분 후에 온. 

 

[[전화 안 받으시네요. 바쁘신가요...]]

 

 

 

!!!!!!!!!!!!!

 

 

아...

벌써 전화와 메시지가 온 것이 한 시간 전.

 

주말에 무슨일이지? 주말에 전화 온 건 처음인데. 정말 급한일인가. 아 뭐지.

 

 

 

안책임님에게서 전화와 메시지까지 온 경우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부탁할 것이 있을 때.

내가 필요할 때.

 

 

 

 

옷을 챙겨 입다 말고 팬티 바람에 전화부터 합니다.

 

 

나: "안책임님! 전화하셨네요. 죄송해요. 이제사 콜백했어요."

 

안: "........아....... 저기.... 바쁘세요?"

 

나: "아니요! 아니요! 안 바빠요! 제가 토요일 낮에 뭐가 바쁘겠어요!"

 

안: ".........음......... 저랑... 잠시 시간좀 보내주실래요?.... 집이세요?"

 

나: "!!!!!!!!!!! 네. 저. 음. 헛... 아니 집은 아닌데. 아.. 저기. 어디세요? 어디서 만나면 되나요?"

 

 

허둥지둥. 

 

머릿속으로 어떡하지. 회로를 돌리는데 잘 계산이 안됩니다.

 

 

 

안: "저.. 지금 양재 근처인데요. 그냥... 있어요. "

 

나: "네? 지금? 양재요? 혹시 애랑 같이 계세요? 차 가지고 갈까요?"

 

안: "혼자 있고. 그냥... 어.....차는 잘 모르겠어요.. .. 그냥.. 와 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목소리도 평소와 다르고. 안책임님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닌데..

 

나: "금방 갈게요! 기다리세요! 가면서 다시 전화할게요!"

 

 

 

추리닝. 패딩 잠바. 속옷 넣어 온 쇼핑백.

지갑엔 삼만원. 카드 두 장.

 

여름이 아니길 다행이다. 쪼리 신고 나올 뻔했는데. 다행히 농구화.

 

 

그래도 집에 가야하나? 너무 동네 모드 옷인데. 

 

차를 가지고 가는게 편하지 않을까? 이 추운 겨울날에 밖에 걸어다니게 하고 싶지 않은데. 

 

연말에 주말인데 강남에 차를 왜 가지고 가.. 아니. 그래도 차가 필요할 수도 있어.. 집까지 뛰어갔다 오면 그래도 시간 차이 안나지 않을까. 집까지 택시를 탈까. 

 

 

 

의식의 흐름이 갈팡질팡. 

 

이 순간. 저 쪽 식당에서 "라면 나왔어요!"

 

 

 

지금 이 순간. 라면이라니. 라면이라니!

 

식당에 아무나 드실분 드리라고 하고 황급히 일단 옷부터 챙겨 입습니다.

 

일단. 가야겠다. 집에 뛰어갔다 나와도 이삼십분은 더 걸려.... 

 

 

짐을 챙기고 락커를 닫는 순간. 속옷이 들은 쇼핑백은 어찌할 것인가...

 

(이하 상상)...

"손책임님 오셨어요? 그 손에 들고 오신 건 뭐에요?"

 

"아... 입던 팬티랑... 저기.."

 

"팬티를 왜 들고 오셨어요?"

 

......................

 

 

 

 

아 이러면 안되겠다. 이건 그냥 버려야겠다. 입던 팬티를 여자 만나는 데 들고 나간다니 안될 말이지...

 

일단 머리를 말렸는데 왁스도 뭐도 없어서 한참을 두리번 거리다 왁스를 바르고 있는 아저씨를 찾아 손톱만큼 얻어 바르고 또 그 아저씨가 바르는 스킨도 냄새가 괜찮은거라 얻어 발랐습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그때 지하 주차장에서 부르던 때가 생각 나 더 급해졌습니다. 

 

뭔가... 내가 진짜 필요한가보다.

 

 

 

하늘이 돕는지 나가자마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택시를 집어 탔고 양재까지 내달렸습니다. 토요일 오후 두시의 코스트코-경부고속도로-양재-남부순환로 일대는 기본적으로 피해가는 곳인데 저는 그 한가운데로 혈혈단신으로 개인택시와 함께 돌파해 내고 있습니다. 

 

전성기의 루이스 피구같은 택시 기사님의 신들린 끼어들기,  거의 전성기  AC 밀란 오른쪽 윙어 시도르프를 보는 듯 한 우측 버스전용차로 파고 들기 , 그리고 조이 보토의 선구안에 비견될만한 차선 선택에 힘입어 양재역에 빠른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팁 좀 더 드리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기사님.

 

 

 

 

택시에 내려 안책임님이 있다는 커피숍을 향해 뛰어가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두리번두리번. 

 

저 구석의 창가 자리에서 안책임님을 발견했습니다.

 

아....

 

 

초라함.

 

 

 

 

늘 안책임님을 보면서 화려하진 않아도 단아하고 침착하고 당당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 달라진 사람이

 

너무 작은 모습으로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달랑 커피 머그컵 하나만 두손으로 잡고 창 밖을 멍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실내에서도 코트를 그대로 입고 있었고 목도리는 단정하게 맸으나 그 목도리때문에 더욱 움츠러 들어 보입니다. 날씨보다 더 탁한 회색빛의 니트, 귀걸이도 안하고 화장기도 없고 헤어밴드로 그냥 머리만 정리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눈이 쾡해 보입니다.

 

그렇게 빛이 나고 당당하게 펴진 어깨로 가슴선에 혼미하게 만들던 사람이 오늘은 그렇게 작고 웅크린 둥지에 숨은 새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책임님."

 

안: "오셨네요. 미안해요.... 주말에. 전화도 하고 그래서... 저기.. 만나자고 할 사람이 없었어요. 친구들은 다 애엄마거나 외국에 있거나 해서.... 어.... 손책임님밖에 없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나: "아니요 전... 좋았습니다. 전화해주셔서..  늦게 와서 죄송해요. 아이는..... 혼자 계시네요?"

 

안: "저기... 그게.... 음...."

 

 

평소와는 정말 다릅니다..

안책임님은 말을 저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 저기.. 그게... 이런 말 잘 안하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이 지금 말 마다 매우 주저합니다.

 

 

안: "아이는 친정에 있고.."

 

이야기가 길어 질것 같아 전 맞은 편에 앉았습니다. 

 

안: "여기에 일이 있어 왔는데.. 일은 다 봤는데 집에는 가기 싫고 근데 너무 마음이 힘들고...."

 

나: "... 무슨 일.. 있으세요?"

 

 

안책임님은 점원에게 뜨거운 커피를 더 부어달라고 부탁을 하더니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

 

 

안: "이른 아침에 남편과 통화를 했어요. 그리고.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방금 변호사를 만났어요. 친한 친구가 소개해준 변호사인데.."

 

안: (한숨) "원래... 이혼 이야기는 한참 전에 나왔지만. 사실.. 안 하길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마음을 못 정하고... 그러다 오늘 갑자기 변호사를 만났어요. 토요일에 연락했는데 사무실에 나와주고. 고마운 분..."

 

안: "남편이랑 통화하고 뭔가 희망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도 내가 매듭을 풀 수 있다고 믿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져 버렸어요. "

 

나: "아... 변호사를 만나신거면.. 소송하고 그러시는건가요?"

 

안: "소송은 안하지 싶긴한데... 재산 다툼이 있고 그러진 않아서... 아니 거기까지 사실 생각도 못하고 있어요. 변호사는 소송 안할 수 있으면 하지 말라고도 하고.."

 

 

점원이 안책임님께 리필된 커피를 주며 저에게도 메뉴를 주며 주문을 권합니다. 그 앞에서 메뉴보고 고르고 있는 것도 웃기고 마시고 싶은 것도 딱히 없어 그냥 아메리카노...

 

 

안: "남편 전화를 기다리다가 결국 새벽이나 되서 통화를 했고 아침되서도 못잤어요. 따로 산지도 좀 되었고 이혼에 대해서 머리속으로 충분히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남편과 말로 주고 받으며 변호사 이야기 나오고 그러니 너무 힘들어요... 미안해요. 손책임님앞에서 이런 이야기 늘어 놓아서..."

 

손: "아니에요. 얘기 해주셔서 고마워요. 전.. 진짜... "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안책임님의 남편은 미국에 있었고 밤에 통화하기로 해 놓고 새벽이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안책임님은 한숨에 또 커피.. 

 

눈과 얼굴은 잠 한숨 못잔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었지만 카페인만 교감신경을 자극하고 있겠죠. 피곤한데 잠은 안오는.. 

 

아침도 점심도 안 먹었을게 뻔하고 지금은 오후 2시를 넘었고.

커피만 몇잔을 먹고 있는지 모르겠고.

 

 

 

커피숍에서 커피만 마시며 이야기를 들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안책임님도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지 계속 앉아 이야기하기는 힘들어 할 것 같았습니다. 

 

나: "배 안고프세요? 뭐 드실래요?"

 

안: "배는 안 고픈데... 어딜 가나요. 나 정말 오늘 뭐 할지 잘. 모르겠어요."

 

나: "일단 나가요. 우리. 요 옆에 저 아는 작은 일식집에 우동 맛있는데 우동 드실래요"

 

안: "우동.. 음.. 아무튼 나가요. 그런데..."

 

 

 

라고 말하는 순간 커피가 나왔습니다.

 

나가자고 말까지 해 놨는데... 오늘은 시켜놓고 못 먹는 날이구나. 라면도 커피도.

 

 

나: "아.. 저기 커피는... 버리긴 아까우니까" (한 모금 후루룩 마시고) "빨리 나가요."

 

 

커피를 딱히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해서 재빨리 계산하고 나왔습니다. 가려는 우동집은 멀지는 않아서 추워도 빨리 걸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뜨거운 국물.. 봐서 우동말고 나베나 그런거 시켜 먹으면 속이 좀 풀리겠지. 지금 빈속에 들이킨 커피부터 좀 어떻게 해줘야겠다...

 

생각에 우동집에 들어섰는데. 아직 안 열었습니다. 원래 토요일 점심에 쉬는데인가? 하필이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아 어쩌지...  하며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안: "저 배 안고파요. 괜찮아요. 우동 안먹어도. 책임님이 배고프실거 같은데... 다른거 먹으러 갈까요."

 

나: "아니. 저도 지금 식당 찾으라 길거리 헤멜정도로 배고프진 않아요. (사실 배고파요.) 저기 그럼... 음. 영화나 연극보실래요?"

 

안: "나 저녁까진 못있어요. 애 데리러 가야해요.. " 

 

아.. 또 딸래미.. ㅜㅜ

 

나: "영화보다 연극 좋겠다. 연극은 오후에도 있어요. 지금 빨리 가면.. 연극 괜찮죠?"

 

 

제가 보기엔 뭐 선택하고 그럴 정신이 있는 안책임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냥 제안을 하고 그것이 안책임님을 위로해주거나 마음이 좀 나아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롯데월드 어드벤쳐 가서 놀면 기분 전환되지 않을까 했는데 오늘같은 날은 줄만 서다 저녁이 올 것만 같았습니다.

 

어디가서 재우면 좋겠는데. 잘데 없다고 부른 것도 아닐테고..

 

지금 뭘 해야 좋겠다는 결정은 마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도 같았습니다.

 

 

 

안: "연극이요? 아. 연극... "

 

역시 예상대로. 오늘 뭐 선택을 하려는 의지와 판단력이 완전히 상실된 상태.

 

나: "일단 가요. 대학로 가요. 빨리"

 

택시를 잡아 타긴 했는데.. 연말에 토요일에 이 시간에 한남대교를 건너 장충동쪽으로 가는 것이 괜찮은가... 이미 택시는 탔습니다. 아 모르겠다. 또 기적을 바랄뿐.

 

 

택시안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표를 예매했습니다. 옆에 앉은 안책임님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로 그냥 창밖의 강만 가만히 바라봅니다. 

 

옆에 어깨에 좀 기대도 될텐데. 오늘 같은날은... 

 

 

 

택시는 남산 1호터널을 지나쳐서 남산길을 돌아 장충동의 국립극장 앞을 지나고 동대문을 거쳐 혜화동에 도착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한기가 엄습하여 빨리 어디든 실내에 들어가고 싶어졌는데 연극 시간까지는 삼사십분 남짓 남았습니다.

 

나: "어디 들어가서 뭐라도 좀 드실래요?"

 

안: "네.. 그래요. "

 

나: "식사로 하기엔 시간이 좀 그렇고.. 뭐 드시고 싶은거 없으신가요?"

 

안: "....."

 

 

오늘은 물어봐도 답을 제대로 얻을 수 없는 날이라는 걸 생각했습니다. 그냥 제가 적당히 정하며 데리고 다녀야 겠다고.. 우울해 하며 힘든 사람 옆에서 같이 심각해지면 안될거 같아서 아무 말이나 막합니다.

 

나: "이야 개그 콘서트를 아직도 하네. 요즘에도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대학로 공연 하겠죠? 마로니에 공원에서 헌팅해보셨어요? ㅋㅋ 십년도 더 된.. 아아 십년이 뭐야. 월드컵 하기도 전인데.."

 

안: (희미한 웃음) "..........."

 

나: "캠브리지 아세요? 모듬안주! 4번출구 맞나? 아닌가? 아무튼 성대 가는길 입구에 있는 캠브리지. ㅋㅋ 거기서 미팅많이 했는데.."

 

 

왜 아재 추억을 늘어 놓기 시작하는거니....

 

 

안: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억지웃음) "............"

 

 

우리는 어이없지만 딱히 창의적인 선택도 하지 못한채 핫도그집에서 큼지막한 핫도그를 두개 시켜 먹기 시작했습니다. 못 먹고 나온 라면 한 그릇이 계속 아른거리며 배고팠던 저는 핫도그를 순식간에 흡입했으나 안책임님은 한입 먹더니 위로 가기전에 입에서 다 녹아 없어지도록 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겨우 한 입 먹고 핫도그만 마냥 들고 있는 안책임님에게 

 

 

 

나: "저기.. 맛 없으세요? 딴거 먹을까요?"

 

안: "아니에요. 그냥 안 먹히네요. 미안해요... "

 

나: "엇.. 그럼. 제가 먹어도 되요?"

 

안: "제가 한 입 먹은건데..."

 

나: "제가 먹을게요! 주세요! "

 

 

머뭇하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핫도그를 빼서. 일부러. 안책임님이 먹은 부분부터 크게 베어 물었습니다. 당신이 쓰고 있던 수저도 난 쓸 수 있고 물고 있던 빨대도 쓸 수 있다. 우리는 입을 맞추었는데 무엇이.. 무엇이 신경 쓰이겠나..

 

핫도그 두개를 뚝딱 먹고 저는 포만감에 젖었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이 사람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지. 두 끼 안먹었다고 쓰러질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아무거나 잘먹고 회사 식당 밥을 늘 맛있게 먹던 사람이 다른 모습을 보이니 아픈거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연극 공연장으로 발을 옮기고 있는 와중에 연극을 보는게 안 좋은 선택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은 많이 웃게 되고 신나는 작품이라는데 전 웃으며 기분 전환 할 수 있을까 싶어 골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무대와 관객들이 박장대소 하는 가운데 우리 둘만 굳은 표정으로 좌석에 앉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쉽게 결정을 못내리고 공연장 앞까지 걸어온 저는 안책임님의 표정을 보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 "안책임님.. 우리.. 연극 보는거 말고.. 다른거 해요."

 

안: "....왜요? 보고 싶은거 아니었어요?"

 

나: "안책임님도 연극을 보고 싶은건 아니었죠? 저도 사실.. 그래요. 그냥 기분 전환 하려고 보는건데. "

 

안: "사실.. 연극이 보고 싶은건 아닌데. 다른 걸 하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리고 사실.. 좀 추워요.."

 

 

(빨리. 어디든 가야한다. 지금 다시 그럼. 그냥 연극봐요..는 안돼.. 절대 안돼! 꼭 어디든 가야해. 또 커피 먹나. 아.. 뭐든 빨리 생각해 내라 얼른..)

 

 

그때. 저 멀리 골목에서. 만화방 간판이 보였습니다. 

 

만화방. 따뜻하고 편한 의자가 있는 곳. 

 

아 그래. 저 곳이 나를 살리는 구나.

 

 

나: "만화방 가요! 최근에 만화방 가보셨어요? 완전 좋아요. 옛날처럼 담배에 찌들고 그런데 아니에요"

 

안: "가본지 이십년은 된거 같은데... 그래요. 그럼. 어... 그러면 연극표는 어떻게 해요?"

 

나: "취소하면 되죠! 얼른 가요. 저도 너무 추워요. 아 춥다!"

 

이미 연극표 취소 가능 시간은 아까 지나버렸고.. 오늘은 어차피 라면이나 커피나 다 안되는 날이구나. 아까워 말자...

 

 

 

우유부단이라면 어디서든 1등하는 저는 일부러 대담한 척, 결단력 있는 척 합니다. 아. 모르겠다. 그래. 연극 보러 갔다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나오는 것도 힘들어..

 

그런데.. 만화방이 있는 빌딩에 다다랐을 때 순간 자리가 없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망하는 거다. 

그래서 다시 또 수분을 영하의 추운날씨를 걸어 연극을 보러 갔는데

이미 막을 올려서 못들어간다며 막고

 

우리는 갈데가 없고

 

난.. 너무 추우니 어디 모텔이라도 잠시 들어가서 몸을 녹일까요? 라고 물었다가 

 

안책임님은 화내며 가버리고 우리의 관계는 끝난다...

 

 

 

10초도 안되는 시간에 별 미친 상상을 하다가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만화방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에서는 "커플석 이용하실 건가요? 지금..." 하며 말을 흐리다가

 

크. 정말. 정말 감사하게도 교복입은 여고생 둘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야아. 정말. 하늘이 날 돕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교회 잘 나갈게요. 십일조도 진짜 할게요. 

 

 

마음속으로 감사함이 분수처럼 솟아오르면서 카운터 알바와 이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야. 너희들 진짜 이쁘다. 얼마 나왔다구? 야 이 오빠가 내줄게. 라면이랑 커피? 과자도 먹었어? 아저씨 얘네 먹은거 계산하지 말고 제 앞으로 달아 놓으세요. 야아 너네 또 먹고 싶니. 핫바 하나씩 들고 나갈래....)

 

 

마음속으로만 계산해주고 알바생의 안내에 따라 커플석에 앉았습니다.

 

 

야...

 

이건. 커플석이 아니라 커플방이네.

 

생각보다 소파가 푹신하고 적당히 아늑하게 가려져 있어 마음이 좀 편안합니다. 일단 따뜻하고 조용하고. 신발도 슬리퍼로 갈아신어 발도 편하고..

 

아 잘 골랐다. 다행이다. 정말..

 

 

안책임님도 좀 편안해 하는 눈치입니다. 전 카이지를 골랐고 안책임님께 뭐 골라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20세기 소년을 한 아름 책장에서 빼고 있었습니다. 

 

 

 

안: "나 이거 젊을 때 봤는데 완결을 봤는지 기억이 안나요. 못 본거 같아.."

 

나: (완결이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안 보셔도 되는데...) "아. 저도 좋아해요. 그 만화."

 

 

 

음료가 기본이라 해서 주스 하나 콜라 하나 시켜서 푹신한 소파에 앉아 다리를 스툴에 올리고 만화를 보기 시작합니다. 안책임님은 중간 부터 보다가 그 다음 책을 봤다가 왔다갔다 하는걸 보니 어디부터 안 본건지 잘 기억이 안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핸드폰을 보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하다가 두 발을 소파 위로 올려 옆으로 앉고 무릎에 덮었던 담요를 허리까지 덮더니...

 

 

 

안: "책임님"

 

나: "네. 만화 재미없어요? 뭐 추천해 드릴까요?"

 

안: "아니요. 저기...  어깨좀 빌려주실래요. 저좀 기댈께요."

 

나: "!!!!!!! ......네........."

 

 

 

그리고 안책임님은.

 

자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다.

 

 

 

내가 필요하다 했고

 

내 옆에 기대어 있다.

 

 

 

 

처음 안책임님의 손을 잡아 주었던 것이 생각 나고

 

안책임님이 나를 안아주었던 것이 생각 났습니다.

 

 

 

어깨를 안아주려 손을 올렸는데 어깨에서 안책임님의 목과 상체가 떨어져 아래로 스르르 내려가더니 이젠 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습니다. 

 

오늘. 괴롭고 힘들었던 사람. 

 

적어도 지금 이 짧은 시간이라도 곤히 잘 수 있다면 이 세상을 괴로워 하지 않는 이 동안을 감사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리고 들숨과 날숨에 따라 가슴이 오르내립니다. 만화방의 조명은 책을 읽으라고 해 놓으니 제법 밝아 눈꺼풀을 지나 이 빛이 눈을 어지럽히면 깊이 못잘텐데 생각에 손바닥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다른 한손에 있던 만화책을 내려놓고 머리를 스다듬다 가만히 얹고 기도아닌 기도를 했습니다.

 

 

 

겨울밤을 꼬박 새고 불안한 마음으로 영하의 날씨에 애를 깨우고 맡기고 이혼이란 단어를 두고 변호사를 만나 마음이 힘들어 나를 찾은 이에게 평화를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

 

깊이. 편안하게 자길.

 

지금 이순간 전력을 다해 뛰고 일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긴장하며 허리를 펴고 걸으며 몸과 마음에 단 한순간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으려 짧은 시간에도 운동으로 몸을 혹사하는 당신..

 

지금 애 생각도 잊고.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논리나 사유나 개념도 없는 그런 평온함이 당신에게 허락되면 좋겠다.

 

 

 

정말로

 

간절히

 

 

 

 

거의 세시간을 곤히 자던 안책임님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도는 것도 같습니다. 옆 좌석에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서 조금 소란스러 지자 부시시 일어납니다.

 

나: "더 주무세요."

 

안: "나 얼마나 잤어요. 아 벌써 시간이... 어떡하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메시지를 한참 씁니다. 그리고 깊은 한숨.

아마도 친정집이 아니었을까.

 

 

안책임님은 슬리퍼를 주섬주섬 신더니 카운터로 갑니다. 

 

안: "음식은 어떻게 시키면 되나요?"

 

알바: "좌석 카드 주시고 나가실때 한꺼번에 정산하시면 됩니다."

 

안: (나에게) "책임님. 카드 좀 주세요." 

 

나: "어- 뭐 드시려고요?"

 

안: "나 뭐좀 먹을게요." (알바에게) "치즈라면 하나 끓여주시겠어요." 

 

 

아. 다행이다. 음식이 먹고 싶다는 건 사람이 살아났다는 증거.

 

 

안: (알바에게) "저기.. 언니 혹시. 머리 묶을 만한거 있어요? 그냥 고무줄 같은거라도.."

 

알바: "아.. 그냥 고무줄은 없고 제가 쓰는거긴 한데 하나 드릴게요. 이거 쓰세요."

 

안: "정말 고마워요. "

 

 

 

선한 사람. 세상에는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마음을 데워주는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책임님은 라면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갔고 저는 카운터로 가서 알바에게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나: "저기... 머리끈 고마워요."

 

알바: "뭘요. 몇 백원도 안할텐데. "

 

나: "혹시 뭐 드실래요. 저녁은 드셨어요? 뭐 좀 드세요. 음료라도.. 제 앞으로 달아 놓고."

 

알바: "아니에요. 여기 사장님 제가 먹는거 뭐라 안하셔서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데.."

 

 

 

착한 사람. 이따 나갈때 알바에게 꼭 사례를 해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당신의 젊음에 밝은 날이 많이 있기를. 

 

머리를 묶은 안책임님은 아까 낮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마침 라면이 끓여져 나왔고 왼손에 숟가락을 오른손에 젓가락을 들고 조용조용 천천히 먹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비었고 뱃속도 비어 축축한 위안이 필요할때.

면의 기름이 국물로 스며져 나와 녹은 치즈와 매운 스프와 강하게 결합하여 빈 창자와 마음을 위로합니다.

 

덴마크의 공주가 라면을 먹었으면 이렇게 먹었을까...

 

절제된 젓가락질로 절제된 양의 라면을 입 안에 넣고 면을 이로 끊는 일 없이 능숙하게 면발에 마지막까지 입에 넣고는 국물을 한숟갈 떠서 천천히. 소리내지 않고 먹습니다.

 

 

라면을 먹고난 안책임님은 휴지로 입을 꾹꾹 닦더니 이제 가야겠다고 합니다.

 

여전히 말은 없지만. 

 

여전히 표정은 굳어 있지만.

 

그래도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저도 밤에 잠을 못자고 일어나 반나절을 굶은 사람을 조금이나마 재우고 밥을 먹인거 같아 조금 마음이 편합니다.

 

 

 

안: "아이 데리러 친정에 가야겠어요. 갑자기 맡기고 나와서 마음이 많이 불편하네요. 잘 안 맡기는데..."

 

나: "어디에요? 같이 가 드릴게요. "

 

안: "그냥 오늘은 좀 폐를 끼칠게요. "

 

 

 

전 대답 대신에 대로에 나가서 택시를 잡았습니다. 안 잡힐까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리는 사람을 발견하고 택시를 붙잡았습니다.

 

책임님의 친정은 다시 강을 건너 내려가야 했습니다.

 

 

택시는 이번에는 동호대교를 건넙니다. 라디오에서는 연말을 알리는 노래들이 나오고 디제이들은 평소보다 한톤 높게 들뜬 분위기를 전합니다. 크리스마스 전 마지막 토요일.

 

아까의 택시에선 겨울의 한강을 혼자 가만히 바라보더니

 

지금은 제 어깨에 기대었습니다.  전 팔을 빼내서 어깨를 안아줄까 고민하는 새에 택시는 안책임님의 친정 동네에 도착해버렸습니다. 

 

그냥 안아 줄껄. 왜 고민했을까.

 

 

안: "오늘 고마웠어요. 아니 고마운 정도가 아니라...  정말 고마워요.."

 

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화주셔서 고마웠어요.."

 

안: ".... " (머뭇머뭇하다가) "들어갈께요. 일요일 잘 쉬세요."

 

나: "저기..." (역시 머뭇...) "연락 주세요...."

 

 

 

 

뭔가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

하면 안되는 말.

해도 의미 없을 말.

 

모두 엉켜서 대화의 마지막을 머뭇거림으로 희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집에 가는길.

 

어제보다 더 추운 겨울날.

 

손을 일부러 주머니에 넣지 않고 주먹을 쥐고 걸으며 

 

어제의 비틀거림과는 다르게

두 발로 딛는 단단한 보도블럭을 느끼며

 

나의 감정과 나의 의지와 

 

그리고 용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익명_f04716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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