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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14)

익명_86b7722018.09.18 14:58조회 수 18784추천 수 2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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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안 맞는다는 말씀이 많은데...

네 지적이 맞습니다. 제가 처음에 서술할 때 너무 대충 서술했습니다. 연재가 다 끝나고 시간은 정리할게요 ㅜㅜ. 

그리고 처음에 글이 간결하고 재미있는데 중반 회차부터 힘이 들어가고 무슨 작가 흉내 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매우 옳은 지적이십니다. 인기를 끄니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갑니다. 더구나 속도감있게 쭉 써야 글도 술술 써지는데 바빠서 짬내는대로 쓰다보니 글이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고 부분부분 힘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마추어인데 프로흉내를 내다보니.. 그냥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난 번에 마지막에 붙였던 음악은 엔딩 크레딧같은 느낌으로 넣었습니다. 사실 지난 13회의 음악(비야)은 12회에 넣을 음악이었는데 12화를 까먹고 그냥 업로드 하는 바람에 밀려서 넣었습니다. 음악과 엔딩의 느낌이 달라서 넣지 말껄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긴 쿨타임 죄송합니다. 

14화 시작합니다.

---




제법 나이가 먹어서 그런걸까. 
그래도 이불킥 수십 번에 배운 건 있다고 
동요없이 사는 법을 법을 배운 걸까.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는 표현을 할 것도 없이 

원래 매일 만나고 하루에 한시간씩 전화하던 사이도 아니니 그냥 똑같이 살면 밖에서 보기엔 별 변화가 없는 것 같기도.

마치 안책임님을 만나기 전, 만나는 동안, 그리고 지금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그래도 변화라면.

주차장 관리인부터 청소아줌마, 편의점 알바 모두에게 웃고 깍듯하게 인사하던 안책임님을 닮아 나도 어느새 그러고 있던 것.

책 좋아하는 안책임님에게 잘 보이려고 책을 사고 읽기 시작한 것이 버릇이 된 것.

애를 안고 동동거리며 출근하고 또 픽업시간에 쫓겨 뛰어나가는 엄마 아빠 직원들을 보면 마음이 짠한 것.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
....



원래도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마주치기가 힘들긴 했지만 
그 후로 진짜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점심시간에 피트니스에 가도 안책임님이 보이지 않았고 식당에서도 여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후로 소개팅 전선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 수록 상대 여자는 점점 스펙이 좋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얼척없는 어린 여자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저보다 서너살만 어려도 사회에서 제법 꿋꿋하게 잘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티비에 나오는 사람마냥 여리여리하게 마른 여자를 만났는데 목소리가 개미같고 먹는 것도 개미같아 씩씩하고 건강한 안책임님이 생각났고 로스쿨나온 변호사라고 하는 여자도 만났는데 식당의 서버나 알바들에게 뭔가 매정하고 친절하지 않아 또 안책임님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럴 때 빼고는

빠르게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물건을 정리하려 했는데도 딱히 주고 받은게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습니다. 신발 상자 하나를 비워 편지나 받은 소소한 것들을 넣었습니다. 아마 안책임님도 그랬을 겁니다. 흔히 연인들이 주고 받는 선물 하나 제대로 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중학교 교사를 만나 흔히 말하는 썸의 관계로 급히 발전했습니다. 이쁘고 씩씩하고 생각도 바로 박힌 사람이었습니다. 눈이 번쩍하게 이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밝은 사람이라 늘 웃는 얼굴이 좋았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소개해준 아줌마의 전언에 의하면 놀랍게도 서울에 꽤 비싼 동네에 부모님이 옛날에 증여해 준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재건축 연한이 넘어 시세는 천정부지라는 그 아파트.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게도
그리고 챙피하고 속물적인 마음으로

그 점이 마음에 매우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번을 만났고 이삼주가 지나자 왠지 사귀자고 하면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은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결혼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요. 
사귀기 전 단계일 뿐 겉모습으로는 매우 자연스럽고 전형적인 젊은이들의 연애였습니다. 

이토록 연애가 쉬운거였나 싶을정도로 마찰도 벽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습니다.


반대를 저항하는 결혼. 궁핍한 결혼. 
둘만 손 붙잡고 세상과 싸우는 결혼이 아니라 
뭔가 축복받고 넉넉하고 안정적인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결혼해서 알콩달콩 애 없는 자유로운 신혼을 보내고 
아이를 가지면 온 세상의 축복을 받고....



어느 저녁. 

그 교사인 썸녀와 같이 연극을 보러 무라도 자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퇴근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박차고 뛰어나가는 순간


안책임님을

마주쳤습니다.




소녀같이 자른 귀밑머리 단발.
옷소매 속에서 나긋하게 뻗은 하얀 손목.
곧은 허리와 꼿꼿한 목.
그 아래로 도도하게 굴곡지며 선이 떨어지는 여전히 아름다운 가슴.


그리고 또 
샴푸인지 향수인지 복잡하게 
나를 휘감는 향기.



인사로 뭘 해야할지 5초 고민.

그리고

나: "머리 자르셨네요. 엄청 짧게.. 중학생 같아요."


아. 중학생 같다는 말은 하지 말껄.
이건 칭찬도 드립도 아니고 뭐냐.



안: "누군 몽실언니 같다던데. 몽실언니 알아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놓고 왜 또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요.



나: "잘 지내고 있어요? 통 얼굴을 못 보네요. 요즘 운동 안 오세요?"

안: "아. 이번 달은 운동 그냥 쉬려고요. 요즘 점심시간에 조용히 커피 내려놓고 그냥 자리에서 책 읽어요. "

나: "아..."



순간.
분노. 절망. 그리움. 야속함.
이들이 섞인 엄청 복잡한 감정이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전봇대처럼 휙 지나갔습니다.


안: "오늘 차려입었네요. 그 사이 옷도 산 모양이네."

아. 진짜 야속하다. 왜 이리 아무렇지도 않은가. 이 사람은.


나: "아.. 그런가요. 저..."

안: "미안. 저 빨리 올라가서 챙겨서 나와야 해요. 애 데리고 어디 갈데가 있어서. 책임님도 어디 가려고 한거죠? 그럼 가세요-"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후다닥 뛰어 들어갑니다.

서둘러 가던 마음이 다소 맥이 빠져 걸음이 늦어 집니다. 이러면 밥먹고 연극은 못보는데. 아 그냥 대충 암거나 먹고 보자고 해야겠다. 

안부라도 묻고 빈말이라도 한번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난 차였는데. 
그렇다고 내가 보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마음이 좋지 않아서인지 데이트는 딱히 좋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는 대충 햄버거를 먹었고 본 연극은 유치했습니다. 같이 본 여자도 음식도 별로 연극도 별로인 눈치였습니다. 하지막 딱히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아 괜히 좀 고마웠습니다.

와인이나 맥주 한잔 먹고 헤어지려 했는데 내일 수업이 이른 아침부터여서 좀 티난다고 와인은 다음에 하자고 합니다. 아 이거 먹으면 손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았는데. 나 역시 손잡는거 좀 미루기로..


데이트 시간으로 따져서 안책임님과 보냈던 두 달 분량을 이 아가씨와 두 주만에 채워가던 어느날.


일전에 만나 민폐를 끼쳤던 여자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친구는 컨설팅 회사에 있는데 우리 회사가 클라이언트가 되었다며 가서 거의 상주해 있을 테니 밥좀 같이 먹어 달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대뜸 꺼내는 말.

친구: "너 연애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 "어? 나? 내가 뭘 너한테 이야기했지?"

친구: "너 뭐 연상 만난다고 근데 뭐 헤어진다고 뭐 헛소리 하다가 이야기가 끊겼어. 그거 잘 안된거야?"

나: "야. 그걸 지금 이야기 해야해? 대낮에 너한테 연애 이야기 해야하냐."


이따 통화해 그럼- 하더니 밤에 진짜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 "너 이야기 하고 싶지. 그렇지. 빨리 이야기 해. "

나: "노처녀에게 연애 상담을 하다니.. 아 진짜.."

사실 상담이라면 지금 썸을 타고 있는 선생님 이야기를 해야 맞는데 저는 안책임님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여자 사람 친구니까 더 이야기 할 수 있었는지도...



진지하게 듣던 친구는 정리를 한답시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그 여자분에게 빙의해서 설명한다면서 여자의 심리라며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전 계속 되물었고 그 친구는 급기야 

친구: "어휴. 그냥 이게 너의 장점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하고 그래라."

나: "헤어졌다니까.."


순수하긴 뭐가 순수하니.
강남에 재건축 아파트 있는 여자에게 넘어갔다니까. 나 지금.

여사친에게 실패한 연애를 털어놓았지만 그다지 위로는 받지 못하고 지금 연애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거리도 없었습니다.

화제 전환해서 회사 이야기 좀 하다 끊었습니다.


누구에게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건 처음이었고

이야기하면 딱히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전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시간이 가려나보다.


깨끗이 털어 낸 것도 아니고 
바닥에 닿은 것도 아니고


뭘 해도
마음도 상황도 

그대로.






글로벌이니 프론티어 뭐시기 하면서 이름이 엄청 거창했던, 신나게 출장다니라고 만든 반 년짜리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갑니다. 6개월동안 다니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져 8개월여를 했고 스케줄상 이제 두 번 만 더 가면 끝입니다.


출장 간다며 이것저것 부탁하라고 하자 이 아가씨는 해맑게 면세점에 쇼핑가자고 했고 출장 전 주말에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쇼핑까지 했는데 부모님 것도 골라주는 센스에 조금 놀랐습니다. 처음엔 제가 부모님은 뭐 사오는 거 안 좋아하신다고 그랬지만 썸녀 아가씨는 막무가내로 선물싫어하는 어른이 어딨냐며 어머니 아버지 것을 하나씩 골랐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간 즉흥적으로 하나 두개 샀을 뿐 뭐 하나 제대로 사드린 적이 없어 하나 사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자기 카드로 계산하려던걸 겨우 말려서 제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나 한테 잘 보이려고 하나. 왜 우리 부모님 것을 자기가 사려고 하지...

이 밝디 밝은 아가씨는 외국 가는게 그리 부러운 모양입니다.


썸녀: "아우 우리는 뭐 일로 외국 나갈 일이 없으니 답답해요."

나: "일로 나가는게 뭐 좋은가요. 놀러가야 제일 좋지."

썸녀: "그래도 난 시골처녀 기질이 있는지 비행기 타면 괜히 신나요."

나: "방학 때 여행가시면 되잖아요."

썸녀: "그러게요. 근데 뭐 연수받고 그러다보면 막상 갈라해도 잘 못가요. 그리고 나이 먹으니까 갈 사람도 없고... 혼자가긴 심심하고 그러네요."



네. 다음에 같이 가요. 하고 싶었는데 바로 말이 안 떨어져 웃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기억이 날듯 안날듯...




이번 출장은 미국이었는데 회사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전시회였다가 갑자기 뭔가 부스 전시에 신경을 쓰기로 급선회 했는지 저 말고 제법 가는 사람이 생긴 모양입니다. 몇 주 전부터 메일링 리스트가 생기고 바쁘게 메일이 오갔습니다.


그에 따라 저도 이러저러 일을 좀 떠 맡았고 준비도 하느라 출장 전에 제법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몇 명 안가는 줄 알았는데 임원도 몇 명 간다 해서 신경 쓸 것이 많아 졌습니다.


출장 전 날. 회사의 출장 예약담당이 실수를 저질러서 제 예약을 캔슬하고 다시 예약하는 바람에 제 좌석을 잃게 되어 직항을 못타고 저만 홀로 경유편을 타게 되었습니다. 

같이 갈 뻔한 사람들은 모두 저보고 갈아타고 오느라 수고하라고 위로의 말을 했지만 저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임원도 동석 안하고 혼자 가고 원래는 아침 비행기였는데 오후 비행기로 바뀌어 시간도 훨씬 여유있었습니다. 

최근에 계속 불편하게 임원 동승에 오전 비행기여서 정신이 없었는데 모처럼 여유있게 공항에 갈 수 있게 생겼습니다.



출장 당일.

아침에 여유있게 일어나서 공항에 출발까지 세시간을 넘게 남기고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면세점도 구경하고 커피도 여유있게 한잔 먹고 책도 좀 읽고 공항에서 사진도 찍고 인스타에도 올리고... 생각에 출장길이 이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그리고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카운터에 여권을 내밀고 짐을 올려 놓자 항공사 직원은 수속을 시작합니다.

직원: "샌프란시스코 거쳐서 엘에이 가십니까?"

나: "네."

직원: "일행 분이 있으신가요?"

나: "없습니다. 혼자에요."




그러자
엄청난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직원: "오늘 이코노미석이 만석인데요. 프레스티지 석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네? 정말요? 왜요? 와. 진짜!"




좌석 업그레이드라니.




헐.






샌프란시스코행은 늘 사람이 많아서 맨날 괴롭게 다녔는데 이런 횡재라니..

좌석을 고르고 제 짐에는 자랑스럽게 비즈니스석 태그가 붙어 갑니다. 네. 저 짐은 이코노미석의 짐보다 먼저 나오게 되겠지요. 아. 자랑스럽다.


출장 다니면서 일본 갈 때 한번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되고 그 후로는 한번도 행운을 얻지 못했는데 무려 미주 노선에 대횡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 급히 예약하고 발권하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높은 클래스 티켓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업그레이드가 쉽게 된 모양입니다.



썸녀에게 비즈니스석 타게 되었다고 나도 모르게 촌스런 티를 내며 메세지를 보내었습니다. 오빠 축하해요 ㅋㅋㅋ 답이 날아왔고 꼭 라면 시켜 먹어 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삼만 피트 상공에서 먹는.
북어 넣고 끓였다는 그 라면. 


비행기 수십번 탔지만 이렇게 긴 비즈니스석 체험은 처음이라 좀 신났습니다.


후딱 탑승 구역으로 들어가서 면세품을 광속으로 찾고 라운지로 갔습니다. 원래 업그레이드 좌석은 라운지 못들어간다고 했지만 이럴 줄 알고 라운지 들어가는 신용카드도 만들어 두었지요.

난 비즈니스석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티를 내고 싶어 여권에 보딩패스를 살짝 보이게 껴 두고 테이블에 올려 놓고 와인이나 온갖 먹을 거리들을 신나게 먹었습니다. 게걸스럽게 먹으면 비즈니스석 타는 사람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런건 상관 안하기로 했습니다.


게이트로 이동하면서 면세점에 또 들러서 썸녀에게 줄 선물을 따로 샀습니다. 가방같이 확 쎈걸 사서 사귀자고 할 때 써먹을까 하다가 여자 취향을 잘 못 맞춘다는 것을 깨닫고 적당히 고급지고 소소한 카드 지갑 하나 샀습니다. 


숄더백만 메고 게이트를 서성거리다가 탑승을 알리는 파이널 콜을 듣고 게이트를 향해 일어섭니다. 왜냐하면 프레스티지석은 이코노미석보다 먼저 타니까요. (사실 모닝캄 회원이라 원래 먼저 타긴 하지만 남들 앞에서 보딩패스를 티내야하므로..)



귀에 꼽은 이어폰을 빼고 게이트 앞으로 이동해서 줄을 서려던 순간.


저 멀리.

바삐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안책임님을 발견했습니다.




왜 여길?

왜?

왜 여기서 안책임님이 나와?




황당함에 줄에서 이탈해서 나와 이쪽으로 오는 안책임님을 가만히 보았습니다. 혹시... 출장가나?

안책임님은 어둡고 굳은 표정으로 수트케이스를 돌돌돌 끌고 급한 걸음으로 옵니다. 수트케이스 손잡이에 달려있는 목베게가 처연해 보입니다. 칠부 면바지 차림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어 옷은 밝게 입었는데 표정은 너무 어둡고 말 붙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꽤 가까이에 왔는데도 저를 발견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이트를 찾으며 시선을 멀리두다가 보딩패스를 다시 확인하고 게이트 표식을 보며 제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서서야 절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안: (화들짝 놀라며) "어머 깜짝이야."

나: "어디 가세요? 혹시 출장? LA?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가세요?"

안: "LA요. 여기 왠일이에요?"

나: "출장가니까 여기 있죠.. 설마 안책임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타세요?"

안: "네.. 같은 비행기인 모양이네요. 그럼 **전시회 가세요?"

나: "저야 옛날에 가기로 되어 있던건데... 안책임님은 무슨 일로? 가는 팀 명단에서 이름 못 봤는데.."

안: "어찌어찌 하다가 급히 가게 됐어요. 근데 만석이라고 해서 직항이 없다데요.."



근데 표정이 여전히 어둡고 말하는게 힘겨워 보입니다. 이러고 비행기를 탈 수 있나. 어디 아픈가.


나: "어디 아프세요? 표정이 진짜 안 좋은데. "

안: "그러게요 상태가 정말 안 좋네요."


말문이 막힙니다.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사실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보아하니 공항에 늦게 온 것 같고 짐 부치는 시간도 놓치고 겨우 체크인만 해서 헐레벌떡 그냥 게이트로 온 것 같습니다. 매사 준비를 잘하는 사람인데 의외였습니다.

한 손에 바리바리 든 면세점 쇼핑백들이 왠지 모르게 순간 나혼자 부끄러워 뒤로 숨기듯 했지만 안책임님은 신경도 안 쓰는 듯 했습니다. 


서로 좌석 확인하며 같이 가자고 말하긴 어색한 사이이니 좌석 확인은 못합니다. 흘끗 보딩패스를 보니 이코노미입니다. 이코노미석 탑승은 이미 시작되었고 줄이 길어졌습니다. 비즈니스석 승객은 아까 다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어색한 사이라 해서 또 일부러 먼저 가라고 할수도 없어서 그냥 나란히 섰습니다. 줄이 여전히 깁니다. 이코노미 만석이라더니 평소와 같이 아마 가축수송 느낌이겠지요. 대학교 방학이 시작하는 때인지 대학생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젊고 떠들고 소란스러운 애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안책임님은 적잖게 피곤한 모습, 아니 그보다 진짜 아픈 사람같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옛날 양재역의 가정법원 앞에서 보고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핸드폰만 보고 있었고 안책임님은 가만히 서서 줄어드는 줄에 맞추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습니다. 힐끗 안책임님의 눈치를 살피며 아픈 것은 확실한데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 고민에 고민끝에 안책임님에게 잠깐만 뭐좀 물어보러 간다고 하고 줄에서 이탈하여 포디움으로 갔습니다. 



나: "저 뭐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직원: "네 말씀하십시오."

나: "제가 프레스티지석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 좌석을 양보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이코노미 좌석과 바꿀 수 있나요?"

직원: "아.. 이코노미석을 가진 일행 분과 바꾸시겠다는 거지요?"

나: "네. "

직원: "네. 가능합니다. 근데 탑승 수속은 본인이 하시고 비행기 탑승하실 때 바꾸시면 됩니다."

나: "아 그럼 승무원에게 따로 알려줘야 하나요?"

직원: "두 분이 좌석 찍혀 있는 티켓만 바꾸시면 상관없습니다. 다만. 이코노미석에 계신 분이 프레스티지석으로 이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나: "아.. 한번 바꾸면 비행 중에는 못 바꾼다는 뜻이지요?"

직원: "네. 맞습니다."

나: "네. 감사합니다."




줄로 돌아왔지만 안책임님은 여전히 무표정.

지상요원에게 여권과 보딩패스를 보여주고 비행기로 이동합니다. 여행 가방이라도 대신 끌어줄까 하다가 괜히 실랑이 할까 싶어 그대로 비행기 문 앞까지 왔습니다. 

프레스티지석과 일반석이 나뉘기 직전.





제 티켓을 보면서 좌석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물었습니다.

나: "책임님 좌석 어디에요?"

안: "아.. 어디더라. 잠깐만요 삼십 몇번 이었는데.."

여권에서 사이에 낀 티켓을 살펴보는 순간 

제가 보딩패스를 낚아 챘습니다.


나: "A열이면. 아이구 창가자리네. 나 창가 자리 좋아하는데."

하면서 제 티켓을 안책임님 여권사이에 막 끼워 넣었습니다.


안: "뭐에요! 왜그래요!"

나: "맛있는거 저 대신 많이 드세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뵈어요. 씨유쑨!"


뒤도 안 돌아보고 이코노미석 문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여기까지 쫓아 들어와서 도로 자기꺼 내놓으라고 안하겠지? 생각하며 좌석을 찾아 갔더니 어느 중국 국적으로 보이는 부부가 중간과 복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었지만 익스큐즈미- 하면서 부부를 일으켜서 창가자리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래 이번 여행은 바깥 구경이나 하자. 구름 사진도 찍고.

밤에 라면 꼭 시켜 드세요! 라고 메시지를 달랑 안책임님에게 보내고 얼른 비행기 모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도로 바꿔요. 고마워요. 필요없어요. 저한테 안그러셔도 돼요...
뭐가 되었든 이런 식의 어떤 답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었던 
나를 알아보아 주었던
나를 이 세상에서 의미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과 

같이 보냈던 시간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선물




LA로 갔으면 에어버스 380을 처음 타보는 건데 대신 지난 반년간 신나게 탔던 보잉 777 비행기는 택싱을 하여 활주로로 나가 저의 충만한 마음을 안고 초여름 하늘을 날아 올랐습니다. 

아아. 이렇게 아름답고 부드러운 이륙이라니.

기계과 출신이 아니더라도 항공 역학의 아버지라는 조지 케일리가 만들어낸 최대 양력을 위한 날개 설계의 개념을 이번 이륙으로 이해해내었어요. 




디스플레이에는 북쪽을 향해 가는 항로를 표시했는데 비행기는 동쪽으로 계속 갑니다. 날이 맑아 한강과 저 아래 올림픽 주경기장, 설악산이 다 보입니다. 


오랜만에 창가 자리 좋네.


중국인 (으로 보이는) 부부는 처음에는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륙하고 한시간도 안되어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어깨가 넓은 아저씨 덕에 그리 편하진 않았지만 창쪽으로 몸을 기대니 그렇게 좁진 않았습니다.


다음 출장은 중국이니 
이렇게 긴 비행은 출장으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에 관련된 자료를 좀 보다가 그냥 접어 넣어 놓고 긴 출장 비행으로는 거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인 이 비행을 좀 차분하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책을 펴고 미리 오프라인으로 받아 두었던 옥상달빛을 틀었습니다.


안책임님을 마주친 일이 
설레거나 당황스럽거나 분노가 나거나 하지 않고

좌석을 선물로 준 것에 

마음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비즈니스석 와인이라 상상하며 테이블 와인같은 이코노미석 와인을 들이키고 

마음속 불편해서 못내 돌아보지 않던 응어리를 풀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동쪽을 향해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을 역으로 날아가던 비행기는 빠르게 밤을 맞이했고 저는 창을 아래로 내리고 이어폰을 꼽고 책을 테이블에 올려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정도면

잘 헤어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이제
들었습니다.




(계속.....)




시간이 안 맞는다는 말씀이 많은데...

네 지적이 맞습니다. 제가 처음에 서술할 때 너무 대충 서술했습니다. 연재가 다 끝나고 시간은 정리할게요 ㅜㅜ. 

그리고 처음에 글이 간결하고 재미있는데 중반 회차부터 힘이 들어가고 무슨 작가 흉내 낸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매우 옳은 지적이십니다. 인기를 끄니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갑니다. 더구나 속도감있게 쭉 써야 글도 술술 써지는데 바빠서 짬내는대로 쓰다보니 글이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고 부분부분 힘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마추어인데 프로흉내를 내다보니.. 그냥 이해 부탁드립니다. 

지난 번에 마지막에 붙였던 음악은 엔딩 크레딧같은 느낌으로 넣었습니다. 사실 지난 13회의 음악(비야)은 12회에 넣을 음악이었는데 12화를 까먹고 그냥 업로드 하는 바람에 밀려서 넣었습니다. 음악과 엔딩의 느낌이 달라서 넣지 말껄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긴 쿨타임 죄송합니다. 

14화 시작합니다.

---




제법 나이가 먹어서 그런걸까. 
그래도 이불킥 수십 번에 배운 건 있다고 
동요없이 사는 법을 법을 배운 걸까.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왔다는 표현을 할 것도 없이 

원래 매일 만나고 하루에 한시간씩 전화하던 사이도 아니니 그냥 똑같이 살면 밖에서 보기엔 별 변화가 없는 것 같기도.

마치 안책임님을 만나기 전, 만나는 동안, 그리고 지금

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그래도 변화라면.

주차장 관리인부터 청소아줌마, 편의점 알바 모두에게 웃고 깍듯하게 인사하던 안책임님을 닮아 나도 어느새 그러고 있던 것.

책 좋아하는 안책임님에게 잘 보이려고 책을 사고 읽기 시작한 것이 버릇이 된 것.

애를 안고 동동거리며 출근하고 또 픽업시간에 쫓겨 뛰어나가는 엄마 아빠 직원들을 보면 마음이 짠한 것.


그것이 변화라면 변화.
....



원래도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마주치기가 힘들긴 했지만 
그 후로 진짜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점심시간에 피트니스에 가도 안책임님이 보이지 않았고 식당에서도 여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후로 소개팅 전선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 수록 상대 여자는 점점 스펙이 좋아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물론 얼척없는 어린 여자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저보다 서너살만 어려도 사회에서 제법 꿋꿋하게 잘 살아나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티비에 나오는 사람마냥 여리여리하게 마른 여자를 만났는데 목소리가 개미같고 먹는 것도 개미같아 씩씩하고 건강한 안책임님이 생각났고 로스쿨나온 변호사라고 하는 여자도 만났는데 식당의 서버나 알바들에게 뭔가 매정하고 친절하지 않아 또 안책임님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럴 때 빼고는

빠르게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물건을 정리하려 했는데도 딱히 주고 받은게 많지 않아 정리할 것도 없었습니다. 신발 상자 하나를 비워 편지나 받은 소소한 것들을 넣었습니다. 아마 안책임님도 그랬을 겁니다. 흔히 연인들이 주고 받는 선물 하나 제대로 준 것이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중학교 교사를 만나 흔히 말하는 썸의 관계로 급히 발전했습니다. 이쁘고 씩씩하고 생각도 바로 박힌 사람이었습니다. 눈이 번쩍하게 이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밝은 사람이라 늘 웃는 얼굴이 좋았습니다.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소개해준 아줌마의 전언에 의하면 놀랍게도 서울에 꽤 비싼 동네에 부모님이 옛날에 증여해 준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재건축 연한이 넘어 시세는 천정부지라는 그 아파트.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고 현실적이게도
그리고 챙피하고 속물적인 마음으로

그 점이 마음에 매우 들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번을 만났고 이삼주가 지나자 왠지 사귀자고 하면 사귈 수도 있을 것 같은 단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결혼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요. 
사귀기 전 단계일 뿐 겉모습으로는 매우 자연스럽고 전형적인 젊은이들의 연애였습니다. 

이토록 연애가 쉬운거였나 싶을정도로 마찰도 벽도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습니다.


반대를 저항하는 결혼. 궁핍한 결혼. 
둘만 손 붙잡고 세상과 싸우는 결혼이 아니라 
뭔가 축복받고 넉넉하고 안정적인 결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결혼해서 알콩달콩 애 없는 자유로운 신혼을 보내고 
아이를 가지면 온 세상의 축복을 받고....



어느 저녁. 

그 교사인 썸녀와 같이 연극을 보러 무라도 자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롭기 그지없는 칼퇴근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박차고 뛰어나가는 순간


안책임님을

마주쳤습니다.




소녀같이 자른 귀밑머리 단발.
옷소매 속에서 나긋하게 뻗은 하얀 손목.
곧은 허리와 꼿꼿한 목.
그 아래로 도도하게 굴곡지며 선이 떨어지는 여전히 아름다운 가슴.


그리고 또 
샴푸인지 향수인지 복잡하게 
나를 휘감는 향기.



인사로 뭘 해야할지 5초 고민.

그리고

나: "머리 자르셨네요. 엄청 짧게.. 중학생 같아요."


아. 중학생 같다는 말은 하지 말껄.
이건 칭찬도 드립도 아니고 뭐냐.



안: "누군 몽실언니 같다던데. 몽실언니 알아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놓고 왜 또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요.



나: "잘 지내고 있어요? 통 얼굴을 못 보네요. 요즘 운동 안 오세요?"

안: "아. 이번 달은 운동 그냥 쉬려고요. 요즘 점심시간에 조용히 커피 내려놓고 그냥 자리에서 책 읽어요. "

나: "아..."



순간.
분노. 절망. 그리움. 야속함.
이들이 섞인 엄청 복잡한 감정이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전봇대처럼 휙 지나갔습니다.


안: "오늘 차려입었네요. 그 사이 옷도 산 모양이네."

아. 진짜 야속하다. 왜 이리 아무렇지도 않은가. 이 사람은.


나: "아.. 그런가요. 저..."

안: "미안. 저 빨리 올라가서 챙겨서 나와야 해요. 애 데리고 어디 갈데가 있어서. 책임님도 어디 가려고 한거죠? 그럼 가세요-"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후다닥 뛰어 들어갑니다.

서둘러 가던 마음이 다소 맥이 빠져 걸음이 늦어 집니다. 이러면 밥먹고 연극은 못보는데. 아 그냥 대충 암거나 먹고 보자고 해야겠다. 

안부라도 묻고 빈말이라도 한번 보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난 차였는데. 
그렇다고 내가 보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마음이 좋지 않아서인지 데이트는 딱히 좋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는 대충 햄버거를 먹었고 본 연극은 유치했습니다. 같이 본 여자도 음식도 별로 연극도 별로인 눈치였습니다. 하지막 딱히 짜증을 내거나 하지 않아 괜히 좀 고마웠습니다.

와인이나 맥주 한잔 먹고 헤어지려 했는데 내일 수업이 이른 아침부터여서 좀 티난다고 와인은 다음에 하자고 합니다. 아 이거 먹으면 손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았는데. 나 역시 손잡는거 좀 미루기로..


데이트 시간으로 따져서 안책임님과 보냈던 두 달 분량을 이 아가씨와 두 주만에 채워가던 어느날.


일전에 만나 민폐를 끼쳤던 여자 동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 친구는 컨설팅 회사에 있는데 우리 회사가 클라이언트가 되었다며 가서 거의 상주해 있을 테니 밥좀 같이 먹어 달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대뜸 꺼내는 말.

친구: "너 연애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 "어? 나? 내가 뭘 너한테 이야기했지?"

친구: "너 뭐 연상 만난다고 근데 뭐 헤어진다고 뭐 헛소리 하다가 이야기가 끊겼어. 그거 잘 안된거야?"

나: "야. 그걸 지금 이야기 해야해? 대낮에 너한테 연애 이야기 해야하냐."


이따 통화해 그럼- 하더니 밤에 진짜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 "너 이야기 하고 싶지. 그렇지. 빨리 이야기 해. "

나: "노처녀에게 연애 상담을 하다니.. 아 진짜.."

사실 상담이라면 지금 썸을 타고 있는 선생님 이야기를 해야 맞는데 저는 안책임님 이야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마. 여자 사람 친구니까 더 이야기 할 수 있었는지도...



진지하게 듣던 친구는 정리를 한답시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는 그 여자분에게 빙의해서 설명한다면서 여자의 심리라며 이야기를 해주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전 계속 되물었고 그 친구는 급기야 

친구: "어휴. 그냥 이게 너의 장점인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순수하게 좋아하고 그래라."

나: "헤어졌다니까.."


순수하긴 뭐가 순수하니.
강남에 재건축 아파트 있는 여자에게 넘어갔다니까. 나 지금.

여사친에게 실패한 연애를 털어놓았지만 그다지 위로는 받지 못하고 지금 연애는 딱히 이야기를 나눌 거리도 없었습니다.

화제 전환해서 회사 이야기 좀 하다 끊었습니다.


누구에게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한건 처음이었고

이야기하면 딱히 아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전보다 나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시간이 가려나보다.


깨끗이 털어 낸 것도 아니고 
바닥에 닿은 것도 아니고


뭘 해도
마음도 상황도 

그대로.






글로벌이니 프론티어 뭐시기 하면서 이름이 엄청 거창했던, 신나게 출장다니라고 만든 반 년짜리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갑니다. 6개월동안 다니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어져 8개월여를 했고 스케줄상 이제 두 번 만 더 가면 끝입니다.


출장 간다며 이것저것 부탁하라고 하자 이 아가씨는 해맑게 면세점에 쇼핑가자고 했고 출장 전 주말에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쇼핑까지 했는데 부모님 것도 골라주는 센스에 조금 놀랐습니다. 처음엔 제가 부모님은 뭐 사오는 거 안 좋아하신다고 그랬지만 썸녀 아가씨는 막무가내로 선물싫어하는 어른이 어딨냐며 어머니 아버지 것을 하나씩 골랐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간 즉흥적으로 하나 두개 샀을 뿐 뭐 하나 제대로 사드린 적이 없어 하나 사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자기 카드로 계산하려던걸 겨우 말려서 제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나 한테 잘 보이려고 하나. 왜 우리 부모님 것을 자기가 사려고 하지...

이 밝디 밝은 아가씨는 외국 가는게 그리 부러운 모양입니다.


썸녀: "아우 우리는 뭐 일로 외국 나갈 일이 없으니 답답해요."

나: "일로 나가는게 뭐 좋은가요. 놀러가야 제일 좋지."

썸녀: "그래도 난 시골처녀 기질이 있는지 비행기 타면 괜히 신나요."

나: "방학 때 여행가시면 되잖아요."

썸녀: "그러게요. 근데 뭐 연수받고 그러다보면 막상 갈라해도 잘 못가요. 그리고 나이 먹으니까 갈 사람도 없고... 혼자가긴 심심하고 그러네요."



네. 다음에 같이 가요. 하고 싶었는데 바로 말이 안 떨어져 웃고 말았습니다.

어디선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기억이 날듯 안날듯...




이번 출장은 미국이었는데 회사에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전시회였다가 갑자기 뭔가 부스 전시에 신경을 쓰기로 급선회 했는지 저 말고 제법 가는 사람이 생긴 모양입니다. 몇 주 전부터 메일링 리스트가 생기고 바쁘게 메일이 오갔습니다.


그에 따라 저도 이러저러 일을 좀 떠 맡았고 준비도 하느라 출장 전에 제법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몇 명 안가는 줄 알았는데 임원도 몇 명 간다 해서 신경 쓸 것이 많아 졌습니다.


출장 전 날. 회사의 출장 예약담당이 실수를 저질러서 제 예약을 캔슬하고 다시 예약하는 바람에 제 좌석을 잃게 되어 직항을 못타고 저만 홀로 경유편을 타게 되었습니다. 

같이 갈 뻔한 사람들은 모두 저보고 갈아타고 오느라 수고하라고 위로의 말을 했지만 저는 쾌재를 불렀습니다. 임원도 동석 안하고 혼자 가고 원래는 아침 비행기였는데 오후 비행기로 바뀌어 시간도 훨씬 여유있었습니다. 

최근에 계속 불편하게 임원 동승에 오전 비행기여서 정신이 없었는데 모처럼 여유있게 공항에 갈 수 있게 생겼습니다.



출장 당일.

아침에 여유있게 일어나서 공항에 출발까지 세시간을 넘게 남기고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면세점도 구경하고 커피도 여유있게 한잔 먹고 책도 좀 읽고 공항에서 사진도 찍고 인스타에도 올리고... 생각에 출장길이 이렇게 마음이 가벼울 수가.


그리고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카운터에 여권을 내밀고 짐을 올려 놓자 항공사 직원은 수속을 시작합니다.

직원: "샌프란시스코 거쳐서 엘에이 가십니까?"

나: "네."

직원: "일행 분이 있으신가요?"

나: "없습니다. 혼자에요."




그러자
엄청난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었습니다.


직원: "오늘 이코노미석이 만석인데요. 프레스티지 석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나: "네? 정말요? 왜요? 와. 진짜!"




좌석 업그레이드라니.




헐.






샌프란시스코행은 늘 사람이 많아서 맨날 괴롭게 다녔는데 이런 횡재라니..

좌석을 고르고 제 짐에는 자랑스럽게 비즈니스석 태그가 붙어 갑니다. 네. 저 짐은 이코노미석의 짐보다 먼저 나오게 되겠지요. 아. 자랑스럽다.


출장 다니면서 일본 갈 때 한번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되고 그 후로는 한번도 행운을 얻지 못했는데 무려 미주 노선에 대횡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 급히 예약하고 발권하면서 상대적으로 비싼 높은 클래스 티켓을 사게 되었고 그래서 업그레이드가 쉽게 된 모양입니다.



썸녀에게 비즈니스석 타게 되었다고 나도 모르게 촌스런 티를 내며 메세지를 보내었습니다. 오빠 축하해요 ㅋㅋㅋ 답이 날아왔고 꼭 라면 시켜 먹어 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삼만 피트 상공에서 먹는.
북어 넣고 끓였다는 그 라면. 


비행기 수십번 탔지만 이렇게 긴 비즈니스석 체험은 처음이라 좀 신났습니다.


후딱 탑승 구역으로 들어가서 면세품을 광속으로 찾고 라운지로 갔습니다. 원래 업그레이드 좌석은 라운지 못들어간다고 했지만 이럴 줄 알고 라운지 들어가는 신용카드도 만들어 두었지요.

난 비즈니스석 타고 가는 사람입니다. 티를 내고 싶어 여권에 보딩패스를 살짝 보이게 껴 두고 테이블에 올려 놓고 와인이나 온갖 먹을 거리들을 신나게 먹었습니다. 게걸스럽게 먹으면 비즈니스석 타는 사람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런건 상관 안하기로 했습니다.


게이트로 이동하면서 면세점에 또 들러서 썸녀에게 줄 선물을 따로 샀습니다. 가방같이 확 쎈걸 사서 사귀자고 할 때 써먹을까 하다가 여자 취향을 잘 못 맞춘다는 것을 깨닫고 적당히 고급지고 소소한 카드 지갑 하나 샀습니다. 


숄더백만 메고 게이트를 서성거리다가 탑승을 알리는 파이널 콜을 듣고 게이트를 향해 일어섭니다. 왜냐하면 프레스티지석은 이코노미석보다 먼저 타니까요. (사실 모닝캄 회원이라 원래 먼저 타긴 하지만 남들 앞에서 보딩패스를 티내야하므로..)



귀에 꼽은 이어폰을 빼고 게이트 앞으로 이동해서 줄을 서려던 순간.


저 멀리.

바삐 움직이는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안책임님을 발견했습니다.




왜 여길?

왜?

왜 여기서 안책임님이 나와?




황당함에 줄에서 이탈해서 나와 이쪽으로 오는 안책임님을 가만히 보았습니다. 혹시... 출장가나?

안책임님은 어둡고 굳은 표정으로 수트케이스를 돌돌돌 끌고 급한 걸음으로 옵니다. 수트케이스 손잡이에 달려있는 목베게가 처연해 보입니다. 칠부 면바지 차림에 반팔 와이셔츠를 입어 옷은 밝게 입었는데 표정은 너무 어둡고 말 붙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꽤 가까이에 왔는데도 저를 발견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이트를 찾으며 시선을 멀리두다가 보딩패스를 다시 확인하고 게이트 표식을 보며 제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서서야 절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안: (화들짝 놀라며) "어머 깜짝이야."

나: "어디 가세요? 혹시 출장? LA? 아니면 샌프란시스코 가세요?"

안: "LA요. 여기 왠일이에요?"

나: "출장가니까 여기 있죠.. 설마 안책임님도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타세요?"

안: "네.. 같은 비행기인 모양이네요. 그럼 **전시회 가세요?"

나: "저야 옛날에 가기로 되어 있던건데... 안책임님은 무슨 일로? 가는 팀 명단에서 이름 못 봤는데.."

안: "어찌어찌 하다가 급히 가게 됐어요. 근데 만석이라고 해서 직항이 없다데요.."



근데 표정이 여전히 어둡고 말하는게 힘겨워 보입니다. 이러고 비행기를 탈 수 있나. 어디 아픈가.


나: "어디 아프세요? 표정이 진짜 안 좋은데. "

안: "그러게요 상태가 정말 안 좋네요."


말문이 막힙니다. 말을 많이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고 사실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보아하니 공항에 늦게 온 것 같고 짐 부치는 시간도 놓치고 겨우 체크인만 해서 헐레벌떡 그냥 게이트로 온 것 같습니다. 매사 준비를 잘하는 사람인데 의외였습니다.

한 손에 바리바리 든 면세점 쇼핑백들이 왠지 모르게 순간 나혼자 부끄러워 뒤로 숨기듯 했지만 안책임님은 신경도 안 쓰는 듯 했습니다. 


서로 좌석 확인하며 같이 가자고 말하긴 어색한 사이이니 좌석 확인은 못합니다. 흘끗 보딩패스를 보니 이코노미입니다. 이코노미석 탑승은 이미 시작되었고 줄이 길어졌습니다. 비즈니스석 승객은 아까 다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어색한 사이라 해서 또 일부러 먼저 가라고 할수도 없어서 그냥 나란히 섰습니다. 줄이 여전히 깁니다. 이코노미 만석이라더니 평소와 같이 아마 가축수송 느낌이겠지요. 대학교 방학이 시작하는 때인지 대학생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젊고 떠들고 소란스러운 애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안책임님은 적잖게 피곤한 모습, 아니 그보다 진짜 아픈 사람같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옛날 양재역의 가정법원 앞에서 보고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핸드폰만 보고 있었고 안책임님은 가만히 서서 줄어드는 줄에 맞추어 발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습니다. 힐끗 안책임님의 눈치를 살피며 아픈 것은 확실한데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 고민에 고민끝에 안책임님에게 잠깐만 뭐좀 물어보러 간다고 하고 줄에서 이탈하여 포디움으로 갔습니다. 



나: "저 뭐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직원: "네 말씀하십시오."

나: "제가 프레스티지석 티켓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 좌석을 양보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이코노미 좌석과 바꿀 수 있나요?"

직원: "아.. 이코노미석을 가진 일행 분과 바꾸시겠다는 거지요?"

나: "네. "

직원: "네. 가능합니다. 근데 탑승 수속은 본인이 하시고 비행기 탑승하실 때 바꾸시면 됩니다."

나: "아 그럼 승무원에게 따로 알려줘야 하나요?"

직원: "두 분이 좌석 찍혀 있는 티켓만 바꾸시면 상관없습니다. 다만. 이코노미석에 계신 분이 프레스티지석으로 이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이동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나: "아.. 한번 바꾸면 비행 중에는 못 바꾼다는 뜻이지요?"

직원: "네. 맞습니다."

나: "네. 감사합니다."




줄로 돌아왔지만 안책임님은 여전히 무표정.

지상요원에게 여권과 보딩패스를 보여주고 비행기로 이동합니다. 여행 가방이라도 대신 끌어줄까 하다가 괜히 실랑이 할까 싶어 그대로 비행기 문 앞까지 왔습니다. 

프레스티지석과 일반석이 나뉘기 직전.





제 티켓을 보면서 좌석을 확인하는 척하면서 물었습니다.

나: "책임님 좌석 어디에요?"

안: "아.. 어디더라. 잠깐만요 삼십 몇번 이었는데.."

여권에서 사이에 낀 티켓을 살펴보는 순간 

제가 보딩패스를 낚아 챘습니다.


나: "A열이면. 아이구 창가자리네. 나 창가 자리 좋아하는데."

하면서 제 티켓을 안책임님 여권사이에 막 끼워 넣었습니다.


안: "뭐에요! 왜그래요!"

나: "맛있는거 저 대신 많이 드세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뵈어요. 씨유쑨!"


뒤도 안 돌아보고 이코노미석 문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여기까지 쫓아 들어와서 도로 자기꺼 내놓으라고 안하겠지? 생각하며 좌석을 찾아 갔더니 어느 중국 국적으로 보이는 부부가 중간과 복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었지만 익스큐즈미- 하면서 부부를 일으켜서 창가자리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래 이번 여행은 바깥 구경이나 하자. 구름 사진도 찍고.

밤에 라면 꼭 시켜 드세요! 라고 메시지를 달랑 안책임님에게 보내고 얼른 비행기 모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도로 바꿔요. 고마워요. 필요없어요. 저한테 안그러셔도 돼요...
뭐가 되었든 이런 식의 어떤 답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해주었던 
나를 알아보아 주었던
나를 이 세상에서 의미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과 

같이 보냈던 시간에게 보내는 

나의 마지막 선물




LA로 갔으면 에어버스 380을 처음 타보는 건데 대신 지난 반년간 신나게 탔던 보잉 777 비행기는 택싱을 하여 활주로로 나가 저의 충만한 마음을 안고 초여름 하늘을 날아 올랐습니다. 

아아. 이렇게 아름답고 부드러운 이륙이라니.

기계과 출신이 아니더라도 항공 역학의 아버지라는 조지 케일리가 만들어낸 최대 양력을 위한 날개 설계의 개념을 이번 이륙으로 이해해내었어요. 




디스플레이에는 북쪽을 향해 가는 항로를 표시했는데 비행기는 동쪽으로 계속 갑니다. 날이 맑아 한강과 저 아래 올림픽 주경기장, 설악산이 다 보입니다. 


오랜만에 창가 자리 좋네.


중국인 (으로 보이는) 부부는 처음에는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륙하고 한시간도 안되어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어깨가 넓은 아저씨 덕에 그리 편하진 않았지만 창쪽으로 몸을 기대니 그렇게 좁진 않았습니다.


다음 출장은 중국이니 
이렇게 긴 비행은 출장으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에 관련된 자료를 좀 보다가 그냥 접어 넣어 놓고 긴 출장 비행으로는 거의 마지막이나 마찬가지인 이 비행을 좀 차분하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책을 펴고 미리 오프라인으로 받아 두었던 옥상달빛을 틀었습니다.


안책임님을 마주친 일이 
설레거나 당황스럽거나 분노가 나거나 하지 않고

좌석을 선물로 준 것에 

마음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비즈니스석 와인이라 상상하며 테이블 와인같은 이코노미석 와인을 들이키고 

마음속 불편해서 못내 돌아보지 않던 응어리를 풀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졌습니다.

동쪽을 향해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을 역으로 날아가던 비행기는 빠르게 밤을 맞이했고 저는 창을 아래로 내리고 이어폰을 꼽고 책을 테이블에 올려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이 정도면

잘 헤어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이제
들었습니다.




(계속.....)






익명_86b772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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