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게시물 단축키 : [F2]유머랜덤 [F4]공포랜덤 [F8]전체랜덤 [F9]찐한짤랜덤

단편

역할놀이

title: 금붕어1현모양초2022.10.23 15:20조회 수 4193추천 수 1댓글 1

    • 글자 크기


잠에서 깨어나니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몽롱하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서그런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크게 하품을 한 번 하고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눈이 떠지질 않아, 그대로 눈을 감


고 평소에 하던 대로 컴퓨터 본체가 있을만한 부근에 슬며시 발가락을 댔다. 술기운 탓인지 평상시와 다르


게 쉽게 본체에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원래 이쯤에 본체 파워버튼이 있는데’



잘못 갖다댔나싶어 발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컴퓨터는커녕 책상에도 발가락이 닿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낌새가 느껴져 눈을 비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곳이었다.



‘여긴 내 방이 아닌데? 어제 친구들이 나를 여관에 옮겨놨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손에는 500원짜리 하나가 잡혔다.


뒷주머니까지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어라? 지갑도 없네.’



불현듯 예전에 9시뉴스에서 보았던 아리랑치기가 떠올랐다. 재빨리 신고를 하기위해 방문을 열고


여관주인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여관의 중앙에는 할아버지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 그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하나가 있었다.



“7번째 사람인가? 이제 한 사람,”



할아버지가 나를 보면서 중얼거린 말이 거슬려서 자세히 들으려했지만,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수염아저씨 때문에 나는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는 누구세요? 나한테 가까이 오지마세요.”



수염아저씨는 내 물음에는 답하지도 않고 다짜고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느 새 수염아저씨는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고, 나는 너무 놀라 수염아저씨의 복부를 발로 찼다.



“저리 꺼져!!”



내 발차기 한방에 나가떨어진 수염아저씨는 배를 움켜지며 나를 노려봤다. 나 역시 물러날 기분이


아니었기에 똑같이 노려보며 면상에 한방 먹여줄 준비를 했다.


순간 할아버지가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보게, 너무 성급하지 않은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가가면 안 돼지, 그리고 젊은이도 어른을 그렇게 발로 차면 쓰나, 우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 진정 좀하게. 그나저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자네의 상의 좀 걷을 수 있을까?”



“무슨 말이죠?”



“자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런 거라네. 이해 좀 해주게”



할아버지의 차분한 말투 때문인지, 금세 진정된 나는 할아버지의 부탁대로 상의를 위로 올렸다. 상의를


걷자 내 가슴팍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심장 쪽에 이상한 기계가 부착되어 있었다.



“자네도 우리랑 같은 처지로군.”



“같은 처지라니? 무슨 처지요?”



“나도 그렇고 저 수염이 난 사내도, 저기 학생도 그리고 젊은이 자네도 모두 이곳에 갇힌 거야. 그 녀석한테, 그 녀석은 우리한테 이상한 걸 요구하지. 우리를 죽일 수도 있어. 저기 복도 끝에 있는 철문이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문으로 보이는데 굳게 닫혀있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 녀석이 누군데요? 그리고 이거 떼어도 상관없죠?”



내가 가슴에 붙어 있는 기계를 떼어내려고 손을 갖다대려하자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안 돼! 젊은이. 억지로 떼려하면 죽을 수도 있어”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 못하고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걸 억지로 떼려하면 그녀석이 아저씨를 죽일 거야”



옆에 가만히 있던 학생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아이고, 학생~ 그녀석이라뇨. 나한테는 조카뻘인데 녀석이라니, 속상하네요.”



어디서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는, 듣기 거북한 변조된 음성이 들려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관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니, 이곳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여관이


아니었다. 나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 궁금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그리고 지금은 뭐하는 상황인거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다만 중요한 건 우리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거지.”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할아버지~ 목숨이 뭐가 위험해요.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그새 까먹으셨나? 아니면 혹시 치매? 이건 그냥 역할놀이일 뿐이에요. 각자 방문 안쪽에 붙어있는 종이에 적힌 것이 바로 자기들이 해야 될 역할이에요. 자세한 건 그 종이에 모두 쓰여 있고요. 할아버지 눈이 안 좋으셔서 못 읽으니까 읽어드려야 하나? 할아버지~ 읽어드려요?”



“아니, 그 종이는 이미 10번도 넘게 읽었어.”



모두 처음 듣는 소리라 나에게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난 방에서 그런 종이 못 봤는데?”



“너무 빨리 나와서 못 봤나보네. 다시 가봐라 겁쟁이야”



겁쟁이라는 단어에 울컥했지만, 나는 상황을 좀 더 차분하게 생각하기위해 무시하고, 내가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방의 안쪽 문에는 정말로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역할놀이



당신의 역할은 ??? 입니다.



모두를 ??? 해주세요.






규칙도 있습니다.


-제한시간은 4일, 역할놀이에 필요한 인원은 총 8명


-자신의 역할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되도록이면 비밀입니다.


(비밀로 하는 게 본인의 목숨을 위해 좋을 겁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제대로 안하면 가슴에 달린 폭탄이 펑!


-멋대로 폭탄을 뜯어내려 해도 펑!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4일 동안 역할을 멋지게 수행하시면 살려드립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가장 역할놀이를 못하신 분은 역할놀이를 다시하게 됩니다.


-지금부터 시작!



‘뭐야? 이건’



나는 종이를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나니, 아까보다는 진정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방밖으로 나갔다. 마침 내 방의 반대편 방에서 어떤 여자가 나왔다.



“짝!”



그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아버지도 건드리신 적이 없는 나의 싸대기를 후려쳤다.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붉어진 뺨을 손으로 비비면서, 나를 때린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 짓이냐? 이 **새끼야! 지금 장난해? 여긴 어디야?”



내가 이렇게 아무 저항 못하고 있을 때,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다가와서 여자의 팔을 붙잡았다.


모자 쓴 남자의 뒤를 이어, 팔에 문신이 가득한 건장한 남자랑 정장차림의 아줌마가 뒤따라 왔다.



“너희들은 뭐야? 너희도 한 패냐? 니들 콩밥 먹고 싶어?”



여자는 모두에게 소리를 지르고, 팔을 거세게 흔들며 저항했지만, 모자를 쓴 남자의 힘에 꼼짝 못하였다.



“저기요, 저희가 아무래도 같은 처지인 거 같은데, 그만 하시죠.”



모자를 쓴 남자는 침착하게 여자를 타일렀다.



“그래요. 아가씨, 좀 진정하세요.”



얼떨결에 뺨을 맞은 나였지만, 나 역시 그 여자보다는 지금 상황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터라 침착하게


여자를 진정시켰다.



“오호, 드디어 8명이 모두 모였네요.”



스피커에서 역겨운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리고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목소리가 나오는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여러분, 일단 복도 중앙에 넓은 곳으로 나오세요. 그리고 그곳에 있는 원탁에 빙 둘러 앉아서 제 얘기 좀 경청하세요.”



“이건 또 뭐야?”



역시나 그 여자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불쾌한 소리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와 무력에 눌려 순순히 그 녀석의 지시대로 행동했다. 스피커에서 나온 말대로 복도


중앙은 다른 복도와는 달리 공간이 넓었고, 그 가운데에 정확히 여덟 개의 의자가 놓여있는 원탁이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네 귀퉁이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고, 그곳에서는 붉은 불빛이 반짝거렸다.


카메라가 있는 게 분명했다.



“다 모였는데 이제 어떻게?”



할아버지가 먼저 천장의 스피커를 향해 입을 여셨다.



“모두들 자리에 앉으셨군요. 일단 문 앞의 종이는 모두 보셨으리라 믿겠습니다. 제가 정성들여 만든 건데 보셔야죠. 하하하. 우선은 서로 같이 역할극을 할 건데 누가 누군지 알아야겠죠? 자기소개를 하시죠. 서로들 모르잖아요?”



그 녀석의 말을 듣고, 모두들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낯선 장소, 그리고 불쾌한 상황. 이런 상황에서 자기소개라니. 참으로 어이없는 요구다.



‘기분 나쁜 녀석, 네 소개나 하시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녀석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자기소개를 해댔다.



“쑥스러워하시기는, 빨리들 하시지. 그럼 사교성 있는 저부터 할게요. 저는 여러분을 가둬 놓은 납치범이자, 여러분의 몸속에 폭탄을 심어놓은 폭탄테러범이자, 역할극을 꾸민 감독이자, 이제부터 여러분의 역할극을 보게 될 관객이라고 합니다. 하하하”



녀석은 흥에 겨워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을 마치


자랑하듯이 떠벌리는 게 영 못마땅했다.



“저 새끼 말투가, 아주 넌 잡히면 뒤져 그냥! 쥐새끼 같은 놈!”



팔에 가득한 문신, 쩍 벌어진 어깨, 딱 조폭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본인 소개나 하시죠, 괜히 도발하지 마시고. 일단은 저 분의 말을 따릅시다. 당신들이 일어나기 전에 저도 몇 번이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저 분하고는 대화가 안 돼요. 우선, 저분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저분도 우리를 밖으로 보내주겠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안경을 고쳐 쓰며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아주머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미묘하게


떨리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게 아마도 이 낯선 상황에 꽤 적응된 것으로


보였다. 거칠게 말하던 아저씨도 아주머니의 말씀에 조금 기가 눌린듯했다.



“아유, 저 새끼 때문에 흥분해서 죄송했습니다, 아주머니. 그럼 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뭐냐,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에 있는 강남에서 아주 잘나가는 조직, 빡구파의 고위간부 쌍용이라고 합니다. 이상용”



상용 아저씨는 자신의 셔츠를 걷어서 양쪽팔뚝에서 승천하는 용두마리, 쌍용을 보여주며 말했다.


꽤나 힘을 과시하는 타입으로 보였다. 아니, 확실히 남에게 힘을 과시하는 타입이다.



“그 다음은 제가 소개할게요. 저는 대학생으로,”



“대학 어디? 무슨 대학?”



상용 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들며 질문했다.



“네, 서울대 다니고 있습니다.”



모자 쓴 남자는 상용 아저씨에게 의미를 알 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이, 지금 확인 못한다고 둘러대긴”



상용 아저씨는 모자 쓴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상용 아저씨의 시비에도 모자 쓴 남자는


표정변화 없이 침착함을 유지했다. 내 생각에 둘 중하나일 것이다. 상용 아저씨한테 겁먹었거나, 진짜로


서울대가 아니거나. 모자 쓴 남자의 소개가 끝나고, 5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대로 놔두면 침묵이


길어질 거 같아서 내가 소개를 하려고 입을 떼려는데, 그동안 조용히, 말 한마디 없던 학생이 손을 들었


다.“그 다음은 제가 소개해도 될까요?”



학생의 비브라토 섞인,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모두들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예, 저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이고요. 이름은, 이름은, 이름은 꼭 말해야 하나요? 모르는 사람들인데,”



가방끈을 양손으로 꼭 붙잡은 채, 주눅 들어 자기 소개하는 걸 보니, 내가 다 안쓰러웠다. 게다가


학생의 이름은 이미 명찰보고 알고 있었다. 안세형. 근데 그렇게 굳어 있는 세형학생에게 상용 아저씨는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야, 넌 남자새끼가 어깨 좀 피고, 너 이 새끼 학교에서 맞고 다니지? 내가 학교 다닐 때, 너 같이 기생오라비 같은 애들이 제일 싫었는데”



상용 아저씨의 질책에 세형학생은 울먹였다.



“상용씨, 제가 써준 역할대로 행동하세요. 나대지 말고!”



스피커에서 처음으로 옳은 소리가 나왔다. 스피커의 소리는 빡구파의 쌍용이라는 닉네임에 쫄아서


한마디도 못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상용 아저씨도 갑작스런 지적에 당황해하다가 이내,


천장의 스피커를 향해 욕을 해댔다.



“뭐라고? 이 새끼야! 거기 숨어서 쪼개지 말고 나와!”



“상용씨, 역할대로 행동하시죠? 마지막 경고입니다.”



좀 더 냉랭해진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모두가 목소리의 분위기가 바뀐 걸 눈치 챘지만


상용 아저씨만은 더욱 흥분해 소리치기 바빴다.



“나오라고!! 새끼야! 숨져볼래?”



“펑!”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상용 아저씨의 입에서 육두문자대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사방에 흩어졌다. 입에서 피를 토해내던 상용 아저씨는 그의 육중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꺄악!!!”



“으아!!”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핏방울이 튀기자 비명을 질러댔고, 세형학생은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역할을 제대로 했어야지. 서울대를 나왔다는 모자 쓰신 분, 힘들겠지만 상용씨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종이를 꺼내 그의 역할이 뭔지 확인해주세요. 그가 얼마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는지 모두가 알아야하니까요!”



스피커는 지시를 했고, 스피커의 지시에 따라 모자를 쓴 남자는 천천히 상용 아저씨의 시체에 다가가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는 구겨진 종이가 나왔고, 모자를 쓴 남자는 그 종이를 펼쳐서 보더니


나에게 건넸다. 나는 당황한 와중에 종이를 건네받았고,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겁쟁이’입니다.


모든 것들을 두려워해주세요.







애초에 상용 아저씨가 소화하기에는 불안한 역할로 보였다.



‘저런 건달한테 겁쟁이라니’



이윽고 사람들이 상용 아저씨의 종이를 돌려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상용씨의 역할은 ‘겁쟁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겁쟁이처럼 행동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여러분들도 공감할겁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역할극이라도 좋으니 사회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이 겁먹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이제 다들 자기가 맡은 역할의 중요성은 알겠죠? 뭐, 역할의 중요성은 상용씨 하나로 깨우쳤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절반 이상이 패닉상태인 채로 고개만 끄덕거렸다. 모자를 쓴 사내는 고개를 숙여, 피가 번지고 있는


바닥을 응시한 채 멍하니 있었고, 옆에 여자는 엎드린 채, 울고 있다.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는 황급히


상용 아저씨의 시체가 나뒹구는 자리를 떠났고, 수염 아저씨는 학생이 걱정되는지 학생의 방문을


두드렸다. 모두들 진짜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깨달았다.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은 중요하다고. 이제부턴 목숨을 걸고,


역할극을 해야 한다고. 나 또한 그렇다. 이제부터 내가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상용 아저씨가 본보기로 죽은 후,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 역시 문을 잠그고


혼자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변조된 목소리로 나를 괴롭히던 천장위의 스피커 역시


상용 아저씨가 죽은 후로 잠잠했다. 그 녀석은 상용 아저씨를 죽일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이유 또한 별것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 때문에.


두려움과 분노에 몸이 떨려서, 억지로 잠들려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악몽을 꿨네.’



이러고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서 평소처럼 대충 아침 겸 점심으로 계란 하나 ‘탁’ 깨뜨려 넣은 라면


하나 끓여서 먹고, 남은 국물은 찬밥에 말아 먹은 다음.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밤에 모여서 소주 한잔하면 좋으련만.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종이에는 제한시간이 4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4일 후, 역할을 잘하면 집에 보내 주려나?’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졸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정도 됐겠지’라고 생각하며 손목시계를 보니,


8시였다. 졸았던 게 아니라 마음 놓고 푹 잔 거였다. 난 정말 대단하다.



“똑똑똑”



계속되는 노크소리에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고리를 쥔 순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문의 옆의 벽에 기대어 말했다.



“누구세요?”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 저는 어제 서울대 다닌다고 소개한 사람입니다.”



“근데, 무슨 일로?”



“할아버지 기억나시죠?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다들 불렀거든요. 지금 모두 모이고 그쪽만 남았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정도로 문을 조금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모자를 쓴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머쓱해서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 통로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할아버지는 내게 복도의 중앙에 번져있는 피를 눈으로 가리키며 대충 눈치를 줬다. 순간적으로 중앙복도


에 상용 아저씨의 시체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체가 있는 곳에서 대화를 하기에는 다


들 심장이 너무 약한 모양이었다.



“하실 말씀이 도대체 뭐죠?”



모자를 쓴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흠”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주위를 둘러보곤 말을 이으셨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여기로 잡혀온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헴”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시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셨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정말 용기를 내서 하


신 말씀일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신뢰하고,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


나름인지라.



“서로의 무엇을 알자는 거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에, 그러니까, 뭐 자세한 건 아니라도,”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비협조적인 말투에 당황하셨는지, 말을 더듬으셨다.



“최재희라고 합니다. 어제 말했다시피 대학생이고요. 그리고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역할까지는 무리더라도”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흠,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꽤 멋있게 말했다.


역할의 비공개 또한 좋은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규칙에 쓰여 있던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종이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함부로 말할 리가 없었다. 재희씨는 말을 마치고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제가 먼저 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저는 권태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게 편하니까, 에헴.”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김수정 이예요. 그리고 아저씨, 저번에 때린 건 미안해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여자는 불쑥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이내 나를 보며 저번에 나의 따귀를


때린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건성으로 사과를 한 것인지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보고


아저씨라니,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저는 우소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아닙니다.”



나는 소개를 하면서, 내가 정말 소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저씨가 아니라는 말은 수정이라는


여자를 보며 해댔으니.



“저는, 저는 안세형입니다. 고등학생이고요.”



특유의 비브라토 섞인 소리로 세형학생이 소개를 했다. 뭐,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진정이 됐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덜하다. 이제 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둘. 차분한 아주머니와


말 한마디 없는 수염 아저씨. 모두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자 아주머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숙이라고 합니다. 그냥 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정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모두 수염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염 아저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X자 표시를 하며 입에 댔다. 그러고 보니, 저 수염


아저씨가 말하는 걸 못 봤다.



“말을 못하시나?”



재희씨가 떠보듯이 말하자, 수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러댔다.



“여기, 수화 할 줄 아는 분 있나요? 저 아저씨가 수화로 말하시는데 통역 좀 해주세요.”



재희씨는 수염 아저씨의 수화를 알아보려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르는데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수화를 할 줄 안다. 대학교 다닐 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덕분에 간단한 의사소통은 다 할 줄 안다. 하지만 내가 수화를 해봤자, 수염 아저씨는 못 알아 볼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저 아저씨가 하고 있는 손짓은 모두 엉터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저씨는


실제로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역할은 ***일 테지.


당분간 이 사실은 나만 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거기 가방에 필기구 있지?”



“네,”



“그러면 그걸로 의사소통하면 되겠다.”



세형학생은 재희씨의 말대로 종이와 펜을 꺼냈고, 재희씨는 그것을 수염 아저씨에게 주었다.


수염 아저씨는 펜을 가지고, 무언가를 썼다.



- 박만도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



그렇게 각자의 소개가 마무리 지어졌다. 대충 뭔가 마무리 지어지니, 잊고있던 허기가 느껴져 배가


고파졌다. 여기 온 후로 물도 못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여기서 가장


친절해 보이는 재희씨에게 슬며시 물었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물은 어디에 있죠?”



나의 분위기를 확 깨는 질문에 재희씨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귓속말로 말해주었다.



“방에 보면 구석에 냉장고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음식들이 있는데 역할극이 끝나는 4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재희씨의 역할은 혹시 천사일까? 남자한테까지 친절한 남자는 보기드믄데 정말 존경스러웠다. 재희씨의


말을 듣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반대편 방을 쓰는 수정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소형씨라고 했죠.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서 굶어야하나요?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죠?”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들 닫고 냉장고를 찾았다. 방의 구석에는 재희씨의 말대로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이랑, 식빵, 그리고 초콜릿 등이 있었다. 나는 빵과 물을 집어서 침대에 앉아서 먹었다.


간소했지만 배고픈 내 배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는 대충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놀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역할은 ???, 그리고 수염 아저씨, 아니 만도 아저씨의 역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


나와 만도 아저씨가 맡은 역할을 봤을 때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그들의 역할을


모르겠지만 세형학생, 재희씨, 수정씨, 할아버지, 정 선생님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세형학생은 겁이 많은 거 같고, 재희씨는 착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정 선생님은 말하는 게 좀


깐깐하지만 뭐 위험해 보이지는 않고, 수정씨는 좀 위험하지만 뭐 여자니까,


우리를 가둬 놓은 녀석의 말대로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그렇게까지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가자, 방의 반대편에 수정씨가 빵을 손가락으로 뜯어


먹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가 겁나 그냥 무시하고, 재희씨와 할아버지 그리고


정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셋은 모여서 뭔가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이 꽤 따뜻한데도 아직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정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덥지 않으세요? 전 더워서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데”



“제 마음이에요,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날카로운 반응에 움찔했다. 뭐, 어느 정도 깐깐한 건 알았지만. 같이 대화를 하던 할아버지와


재희씨도 정 선생님의 갑작스런 정색에 꽤 놀란 눈치였다.



“전 이만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민망함에 눈치를 보다가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괜히 짜증이나 내고, 잠이나 자야지.’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생각했던 거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지는 몰라도 첫날보다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이틀 째, 오늘은 그 녀석의 목소리도 하루종일 안 들렸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잘 왔다.

 

 

출처: 오늘의유머 인중없는아이 님



    • 글자 크기
역할놀이 -2 (by 현모양초) 씨.발.년 (2) (by 현모양초)
댓글 1

댓글 달기


이전 1 2 3 4 5 6 7 8 9 10 ... 37다음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