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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단편] 악마의 마술도구

익명할거임2020.07.27 08:12조회 수 589추천 수 2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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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은 마을의 축제가 막 열렸다.

약속이라도 한 듯 외지인들과 마을 사람들이 뒤섞여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냈다.

5분 남짓 걷다 보면 어느 새 마을 밖으로 나가는 갈래 길을 마주하겠지만, 분위기만큼 저 멀리 대도시의 극장 주변을 방불케 했다.

물론 이 마을에도 극장은 있다.

푯말을 찾지 못 하면 무심코 지나칠 수 밖에 없어서,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직접 안내를 해야하지만 말이다.

경사가 꽤 높은 오르막길과 고르지 않은 바닥을 이겨내고 나면,

그 번거로움은 잠시일 뿐이다. 나름 구색을 갖춘 외관을 보면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로렌.”


동료 잭이 한 손에 마티니 한 잔을 들고 왔다.

걸음 거리가 꽤 흔들리는 것이, 벌써부터 서너 잔 들이키고 온 모양새였다.

묶고 있던 끈을 더욱 꽉 쥐었다.


“나 술 안 마시는 거 알잖아.”

“알아, 하지만.”


못 다한 말 대신 잭은 한 손으로 마을을 쭉 훑었다.

그 끝을 따라 시선을 둘러보자, 미처 나무들로 가리지 못 한 화려한 축제의 분위기가 유혹해왔다.

나는 잭의 의도를 충분히 눈치챘다.


“좀 즐기자고. 이 한 잔은 약이나 다름없어. 불필요한 긴장을 없애 주니까.”


애써 웃는 그의 콧수염이 들썩거렸다.

살짝 꼬리가 말려 올라간 우스꽝스런 형태를 보고 연신 웃음을 참았건만, 오늘따라 왜 이리 잘 어울리는지 원.

확실히 축제라 그런가, 휘황찬란한 불빛을 안주 삼아 술 한 잔 들이키고 싶어졌다.


“안 돼. 특히 오늘은.”

“새끼, 이름에 먹칠 할까 봐 그래?”

“맞아. 진짜 내 이름 걸고 하니까.”

“퍽이나, 지나가는 똥개도 신경 안 쓰겠다.”

“슬슬 준비하자. 손님 몰려온다.”


옆에 뉘어 있던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극장엔 마을 사람과 짝을 이룬 외지인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마을 유일의 마술사로, 축제는 1년 동안 밥값을 벌 수 있는 기회였으니 마음을 다 잡아야 했다.

잭은 몇 마디 한숨을 내쉬며 남아 있던 마티니를 입에 털고 일어났다.















내 스승은 완벽 주의자였다.

소품의 상태를 매일 점검하며, 자그마한 실수 하나 용납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앞에서 꾸중을 듣는 날은, 곧 바로 짐을 싸고 나갈 준비를 하는게 상책이라고.

내가 보조부터 시작하면서 수 백에 달하는 지원자가 울며 뛰쳐나갔었다.

그만큼 쇼는 퍼펙트를 목적으로, 보는 이 하나 의심을 품어서는 안 됐다.

그렇기에 스승은 멋있는 마술사였다.

동작 하나가 품격 있고, 위트가 서려 있으며 깔끔했다. 절대 불필요한 몸짓을 하지 않았다.

특히 손님을 무대 위로 초청하여 직접 경험하게 하는 건, 보는 나로 하여금 입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술이 다 그렇지 않냐고? 아니. 누구든지 나와 같은 리액션을 취할 것이라 장담한다.

꼴랑 동전 한 닢 움직이면서 손바닥을 그렇게 가려 대는 길거리의 마술사와 같은 취급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커다란 기둥에 꼼짝없이 묶여 있는 손님에게 길다란 레이피어를 들고 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꽂아버리는 모습을 보면 말이지.


“헉……”


같이 지켜보던 보조가 피식- 했다.


“뭘 놀라고 그래, 진짜는 지금부터 인데.”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정확히 여섯 개의 레이피어가 몸을 관통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손님은 여전히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라. 머리와 목에 칼이 찔려 있는데, ‘살아 있음’도 아니고 ‘웃고 있음’인가?

확실히 매료되었다. 무화과를 탐낸 이브마냥, 스승의 검을 대신 만지작거렸다.

소품실에서 검을 들고 마네킹을 찌르면서 그의 마술에 빠진 어느 날, 뜬금없이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스승이었다.


“아, 마침 정리하는 김에 연습 좀……”


허둥지둥 치우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이윽고 나가버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훔쳐간 건 없으니 도둑은 아니고, 어쨌든 다음 날 한 소리 듣겠다고 궁시렁궁시렁 댔지만,


“……여러분, 보조 마술사 로렌을 소개합니다.”


갑작스레 올라가느라 몇 번 발을 헛디뎠다. 킥킥대는 소리가 무대 앞 뒤로 들렸다.


“제 쇼의 하이라이트, 기대하고 계십니까?”


갑자기 박수와 환호가 뒤섞여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파도를 홀로 마주한 심정일까.

그 것을 온 몸으로 받아내니, 심장박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라 비틀어진 침샘을 끝끝내 쥐어짜냈다.


“오늘은 저 대신 여기 로렌이 선보입니다!”


미친 소리였다. 제정신인가 싶기도 했다.

그가 건넨 레이피어 한 자루에 당황한 내 얼굴이 드러났다.


‘대체 왜죠? 저 아직 아무 것도 몰라요!’

‘걱정 마, 날 믿고 그냥 찌르면 돼.’

‘예?’

‘이 검은 가짜라고 생각해. 곧 알게 될 거지만.’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뛰쳐나가야 할 지 고민하는 사이, 세팅이 완료됐다.

아무 것도 모르고 웃고 있는 젊은 남자는 쓸 데 없이 해맑았다.


‘어이, 이게 장난 같아? 니 마지막 웃음 일지도 모르는데?’


몇 발자국 다가가 다시 멈춰 섰다. 스승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처음이라 낯설 뿐이야, 로렌.’


그는 내 손과 검을 살며시 위로 들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찔러.’


푹- 하고 속을 파헤치는 느낌이 났다.

아뿔싸, 낯선 두려움에 눈을 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의 두개골과 뇌일 것이다. 조준 점은 애석하게도 그의 관자놀이였다.

뇌수 같은 게 서서히 양 손을 적셨다. 시뻘겋고 희멀건 것 들이 마구 엉겨 붙었다.


‘속지 말고.’


소매로 눈을 비비자, 여전히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이게 마지막 가르침 이야. 이제 혼자 해 봐.’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내 이름을 건 마술 쇼를 상상해보며, 두 번째 검을 높게 들었다.

이번엔 나 홀로, 아무 도움 없이.


‘왕국 최고의 마술사 로렌의 단독 쇼, 어때? 근사해?’


순간 눈깔이 확 돌아갔다.

그의 목을 관통했을 때, 손 맛이 나름 익숙해졌다.

남자의 웃음소리가 엔도르핀으로 바뀌어 내 혈관에 투여 됐다.

세 번째로 찌른 건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네 번, 다섯 번, 그리고 그의 발목에 마지막 검을 우겨 넣자, 비로소 내게 집중된 시선들이 보였다.















모집은 대 성공이었다. 운영비 등의 이유로 좌석을 줄이자는 잭의 의견은 훌륭했지만, 나의 고집을 꺾지 못 했다.

대도시의 마술 쇼를 지겹도록 보고, 무대 뒤 편에서 자존심이 닳도록 꿇었다.

작은 마을에서 독학으로 마술을 개발한다는 건, 개구리가 우물에서 만족하며 사는 꼴이었으니까.

올해 축제 까지만 기다려 보자고 잭을 설득했었다.

그 결과로 오늘, 앉지도 못 하고 서서 구경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잭은 내게 신호를 주며 씩- 웃었다. 엄지까지 치켜 세우고.


“자 여러분, 식사는 하고 오셨습니까? 이 작은 촌구석까지 찾아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헛된 발걸음은 아닐 겁니다.”


잭은 목에 걸린 넥타이를 다듬었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우아하게 손을 휘저었다.

클래식 선율에 몸을 맡긴 지휘자가 따로 없었다. 마치 교향곡의 2악장처럼 은은하게 리듬을 탔다.


“바로 저기에, 최고의 자리를 물려 받은 로렌이 있기 때문이죠!”


두 대의 조명이 내 길을 비추고, 곧 따라 움직였다.

작년에 스승과 함께 선보인 마술과, 그의 홍보를 통해 찾아온 관객이 대부분일거라, 긴장이 풀릴 틈이 없었다.

그들의 눈높이는 정해져 있으니 내가 이 자리서 스승을 뛰어넘어야 했다.

금새 3악장으로 넘어간 듯 요란한 박수갈채를 반기며, 괜스레 침을 삼켰다.


‘야, 로렌!’


잭이 물 좀 마시라는 제스처를 보냈지만 눈치 채지 못 했다.

쇼는 이미 출발했고, 몸 담은 채 흐름을 이어가야 했다.

처음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내 마술을 선보였다.

준비한 손수건을 휘 젓고 숨겨둔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맨 앞의 여자에게 내밀었다.


“어머, 로맨틱 해라. 고마워요.”

“별 말씀을. 마음껏 즐겨주십시오.”


뒤돌아 계단을 오르는 내게 왠 돌이 날라왔다.


"근데 그건 언제 해요?"


그 돌덩이는 양쪽 어깨에 꽉 눌러앉았다.

은화 하나를 금화 열 닢으로 바꿔, 입으로 마구 뱉어낼 때는 나름 기대했다.

세상에 돈 좋아하는 사람 나와보라고 한다면, 없는 꼬리 대신 꼬리뼈라도 마구 흔들 것이니까.

그걸 노려 개발한 내 마술이고, 일종의 아부가 포함된 이벤트였다.

입에서 떨어진 금화 한 닢이 데굴데굴 굴러 한 객석 앞에 도착했다.

그 자리에 앉은 꼬마는 줍는 시늉조차 안 하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아무리 재미 없어도 그렇지, 그거 하나가 내 하루 밥 값보다 비싸다고.‘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하하, 이 정도 돈이면 마을을 통째로 살 수 있겠네요!”


잭이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용을 썼다.

애써 나온 쥐 좆만한 웃음소리가 더욱 신경을 긁었다.

씨발.

니들이 보고 싶은 게 뭔지 잘 알아 나도.

잠깐의 쉬는 시간에 잭이 다급하게 불렀다.


“로렌, 내가 좌석 줄이고 문 닫 자는 거 말린 사람이 너야. 알지? 성공하고 싶어서 도시로 올라간 거 아냐? 우리 이거 죽는 한이 있어도 크게 벌려야 해!”


준비해 둔 상자를 꺼냈다.

곁눈질로 확인한 잭은 황급히 무대로 올라갔다.


“드디어 여러분께서 기다리시던 그 마술이 시작됩니다!”


극장 안의 기류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 것은 곧 함성으로 변했다.

내가 애써 준비한 마술은 애피타이저도 안 됐는지, 메인 디시를 내놓으라 소리치는 꼴과 다름 없는데.

그 걸 모르는 잭은 더욱 더 배를 내밀었다.

나 또한 레이피어 6자루를 들고 거만하게 올라섰다.

자, 보아라. 니 들을 여기까지 끌고 온 진짜 악마의 힘을.

눈깔을 크게 뜨며 환호하는 아까 그 꼬마 애새끼가 보였다. 입을 더 찢어 주려다 말았던.


“앞의 여자분, 나와 주실 수 있나요?”


장미꽃을 선물했던 그 여자였다.

내 마술엔 콧방귀를 뀌던 것이 신이 나서 폴짝폴짝 올라섰다.

참으로 경박스럽긴.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잭과 보조가 여자를 밧줄로 묶었다. 끝났다는 신호에 맞춰, 눈을 감고 검을 여자의 머리까지 올렸다.

잔잔한 웃음소리가 신경을 마구 긁었다. 그 때,


‘찔러.’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을 힘 주어 밀자, 그 때의 느낌이 되살아났다.

두 번째로 목을 관통할 때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쉽지?’


세 번째 검을 여자의 갈비뼈 사이로 꽂자, 선혈이 주르륵 흘러 나와 손을 적셨다.


“으악! 씨발!”

‘로렌! 갑자기 왜 그래?’


잭이 황급히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양손을 쫙 폈다.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았다.

눈 앞의 여자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멱살을 잡은 잭의 손아귀 힘이 더욱 강해졌다.


‘나 너 하나 믿고 여기까지 돈 퍼 부었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구걸이나 할래? 쥐새끼 보면서 입 맛 다시고 싶어?’

‘아, 아니야. 미안해. 계속하자.’

‘그래. 하던 대로 해. 우리 이거 실패하면 끝이야.’


나머지 3개의 검은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다.

흡사 바비큐가 된 여자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의 마술을 완벽하게 이어 받은 내게 환호성을 질렀다.

어쨌든 쇼는 성공했다. 중요한 걸 깨달았으니.

더 이상 고집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침 흘리며 돈다발을 세고 있는 잭이 옅게 미소를 보여줬다.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씁쓸한 뒷맛이 목에서부터 올라왔다.

입이 마르도록 나를 추켜세우는 그를 뒤로한 채, 내 마술에 필요한 것들을 싹 다 불태워버렸다.

이제 쓸 일이 없을 거 같아서 말이다.















굳이 축제 기간이 아니더라도 마을의 극장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돈 맛을 본 잭의 홍보와 내 명성은 줄곧 도시로 퍼졌고, 황실까지 들어간 건 시간문제였다.

곧 황제 폐하의 방문 일자가 잡혔다.

마을 사람들보다 더 분주해진 나와 잭은 서둘러 쇼를 준비했다.


“그니까, 이게 제일 중요한 거야.”


레이피어 6자루가 들어있는 상자를 꺼냈다.

그 동안 벌어들인 돈의 액수를 짐작할 수 있도록, 금과 보석이 잔뜩 치장된 상태였다.

잭은 콧수염 끝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알지. 날 구원해 줄 천사들이 잠 들어있는데.”

“천사? 그건 나고!”


잔뜩 거만하게 내질렀다. 그럼에도 잭은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내가 없는 이 극장은 불 보듯 뻔하니까. 아니, 이 마을 자체가 누구 땜에 성장했는데?


“너, 명심해. 극장 문 닫으려고 할 때 누가 말렸지? 지금 누가 널 먹여 살릴까? 말마따나 쥐새끼라도 먹으면서 살고 싶어?”

“아아...... 맞아! 내가 말 실수 했네. 진심으로 사과할 게.”


잭의 허리가 한층 굽어졌다.


“농담이야, 농담. 오늘 잘 부탁한다."

“아냐, 내가 더 부탁할 게. 로렌.”


그의 정수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주인에게 충성을 맹세한 개새끼는 절대 짖지 않았다.

박스를 한 쪽 구석에 놓고 객석 의자에 몸을 뉘였다. 슬금슬금 잠이 쏟아졌다.


“황제 폐하 오시면 나 좀 깨워줘.”


그 동안 너무 피곤 했어. 최고의 마술사 제자답게,

아니다. 최고의 마술사답게 바쁜 나날들이었지. 언제쯤 내 마술을 선보일까?

후회 안 할 만큼만 벌고, 그때 시작해도 늦지 않아.

일단 유명해지자, 내가 똥을 싸도 박수를 쳐 줄 것이다. 존나 기가 막힌 명언이네.


“로렌!”


얼마나 잠 들었을까, 눈을 간신히 뜬 내 앞에 잭의 다급한 얼굴이 나타났다.


“왜 그래?”

“폐하께서 오셨어!”


서둘러 손을 휘저어 상자를 쥐었다. 빈 공기의 감촉 만 느껴졌다.


“이런 씹……”


좆 됐다. 상자가 없어졌다.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누웠던 자리 주변을 마구 파헤쳤다.

의자 하나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잭! 여기 있던 상자 못 봤어?”

“아, 그거 내가 정리 좀 한다고 여기 옆에다 놨는데?”


몸을 던져 잭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 반동으로 인해 잭이 넘어졌다. 손이 불 속에 담근 것 마냥 타올랐다.

넘어진 잭의 얼굴 표정까지 마찬가지로.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미안한 감정보다, 안도감이 먼저 결승선에 도달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입구에 들어선 호위 기사를 맞이했다.


“황제 폐하 납셨다! 예를 갖춰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살짝 옆을 보자, 아무런 감정 없이 눈을 감고 있는 잭이 보였다.















황제는 참으로 자비로운 분이셨다. 잭의 말 한 마디, 손짓 하나에 큰 소리로 웃고는 박수를 마구 쳤다.

마치 갓난아이처럼, 모든 것이 즐거워 보였다. 내가 등장할 때는 어찌나 큰 소리로 옹알이하던지.

덕분에 자칫 딱딱하게 될 수 있었던 쇼는, 더욱 성공가도를 향해 박차를 가했다.

모든 이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분위기, 황제 폐하의 저 해맑은 웃음을!

대가리를 잔뜩 치켜 올렸다. 도박 수를 둘 때는 바로 지금이다.


“폐하. 감히 실례를 무릅쓰고 요청 하건대, 제 마술을 직접 경험 해 보시는 것 어떻습니까?"

“무례하다!”


사냥개들이 꼴사납게 짖어 댔다.

목줄을 쥔 황제의 손이 슬쩍 올라갔다. 그 신호는 잘 알고 있으리라.

술렁거리는 장 내가 조용해졌다. 황제는 담담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네의 제자라면, 믿을 수 있겠지.”

“그럼요.”


옆에 앉아 있던 스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망토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왕관은 조명을 받아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보조의 눈깔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사시나무같은 그에게 다급히 수신호를 보냈다.


‘정신차려! 묶지 말고 그냥 부축만 해 드려!’


분명히 그의 개들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황제의 이런 돌발 행동이 못 미더운 지, 우락부락하게 서 있으니. 적당한 선을 지켜야했다.

잭에게 상자를 가져오라고 눈빛을 흘겼다.

그도 이 상황이 즐거운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돈 냄새가 사람의 감정을 쥐락펴락 하는 건 참 불변의 진리다.

상자를 열고 첫 번째 레이피어를 쥐어 잡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검을 높게 들었다. 그 끝을 따라, 스승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언뜻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탈을 썼지만 사실 악마다.

커다란 뿔 세 개를 내민 그 것은 내게 거래를 제안했고, 막대한 부를 약속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의 마술을 멀리 퍼뜨려라, 그러면 상상도 못 할 명예와 부를 안겨주겠다고.


‘그 거래는 오늘로써 끝날 것이야.’


황제께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마술을 성공적으로 선보인다면 말이지.

가만히 눈을 감고 천천히 검을 찔러 넣었다.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다.

적막이 에워싼 무대 위는 꽤 쌀쌀한 기류가 흘렀다.

이어서 두 번째 검을 잡았다. 손 잡이에 매달린 독사 문양이 먹잇감의 목덜미를 보고 쉬이 낼름거렸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폐하.

사육사에게 이빨 다 뽑혀서 애완용으로 길러진 장난감에 불과할 뿐입니다.

세 번째 검을 들고 갈비뼈 사이를 찔렀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내 손은 이미 피범벅이 됐다.

네 번째는 허리, 다섯번 째는 양쪽 허벅지, 마지막은 그의 양 발목을 관통했다.

고귀한 황제의 옥체는 6개의 꼬챙이가 달린 채 무대 위에 전시됐다.


“자, 여러분. 보십시오! 황제폐하는 놀랍 게도 살아 계십니다!”


귀를 아무리 기울여봐도 환호성이 들리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 날아온 것은 왠 올가미 하나였다.


“황제 폐하를 암살한 자다!”

“진정하십시오! 마술입니다! 진짜가 아니에요!”

“닥치고 엎드려!”


중무장한 호위대의 밧줄이 몸에 꽂혔다.

뭐라 변명할 틈도 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수 많은 칼이 이젠 나를 향해있다.


“폐하!”


몸을 돌려 보조를 쳐다봤다. 그는 나와 같이 포박되어 있었다.

근데 저 새끼 옷에 묻은 빨간 건 뭐야? 너도 같이 찔리기라도 했냐?


“폐하! 뭐라 말씀 좀 해보십……”


황제가 쓰러져 있는 자리 주위에 피 웅덩이가 맺혔다.

레이피어 6자루의 끝에서 6갈래의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전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이 딴 환각은 나만 보이는 거잖아, 왜 난리 들이야 대체?

폐하,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어서 일어나서 저의 결백을 증명해 주셔야죠!

근데 잭, 저 새낀 아까부터 뭐 하고 있어?


“이런 씨발! 잭!”


잭은 똑같은 레이피어 6자루를 들고 내게 흔들었다.

저 병신, 내가 자고 있을 때 바꿔 치기 했구나. 어쩐지 상자 가져올 때 실실 쪼개더라.


“곧 먹게 되겠네, 쥐새끼. 얼마 못 먹고 뒈지겠지만.”

“스승님! 살려주세요!”


멀찍이 서 있는 스승을 향해 소리쳤다. 왠지 그의 커다란 뿔이 점점 사라져갔다.


“살려줘! 약속 했잖아! 아직 부족해. 더, 더, 퍼뜨려야 해! 제발!”


대신 갸우뚱하는 제스처가 돌아왔다.

내가 왜 널 구해야 하지? 하듯.

마지막으로 그의 양 손은 교차되어 x자를 만들었다.


‘거래 끝. 수고했다.’















다시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끝낼 무렵, 나지막이 속삭였던 악마 놈의 말이 머릿속을 멤 돌았다.


‘잃어버리지 마. 다시 만들기 귀찮으니까.’


말 그대로 귀찮을 뿐, 그 것은 얼마든지 필요한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막 버려진 도구 하나가 말 없이 밧줄에 묶인 채 무대 밖으로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그니까, 이게 제일 중요한 거야”


잭은 콧수염 끝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알지, 날 구원해 줄 천사들이 잠 들어있는데”


지랄하네.

악마가 만든 건데 천사라니.

웃음이 터졌다.

새로운 도구는 스승의 옆에 서서, 신기한 듯 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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