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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6)

익명_4952012018.09.01 19:36조회 수 30984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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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트윈터보,라전무]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오자를 찾았습니다.

 

 

 

제가 뭐라고... 이 보잘 것 없는 필부의 글을 기다리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댓글과 피드백 감사드립니다.

 

무리한 소설 요소나 오버스런 미사여구에 대한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쓰다가 제 경험에서 지나친 미화가 들어가면 확실히 글이 재미없어 것을 느낍니다. 제 것이 아니니까요. 

 

4편을 쓰고 나서 제 실수로 통으로 어이없이 날렸었는데 그 편이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갑작스런 인기에 힘이들어가고 부자연스런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날라가길 잘된 셈입니다. 그냥 조곤조곤 쓰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4편을 쓸 때부터 바빠서 쓸 시간이 안나는 바람에 많은 분들 애태워서 죄송합니다. 대충 5일 주기 정도로 쓰겠습니다. (생각보다 글 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네요)

 

 

 

그리고...

 

그냥 힘을 빼고 계속 쓰겠습니다. 

 

잘 써보려고 없는 일 지어내고 감정을 쥐어 짜내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재미없어져도 이해해 달라는 뜻입니다.)

 

--------------

 

 

 

크리스마스는 조용히 지나갔습니다. 제 연애는 희한하게 크리스마스를 비껴가는 경우가 많아서 딱히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는 없었습니다. 이 해의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지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데이트라 하기엔 이상하지만 데이트 이상의 감정을 나눈 일을 겪고 내심 다른 감정으로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했지만 사실 그 주말 이후로 크리스마스를 끼고 연락이 잘 안되긴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머리 속에 한번쯤 그려보기도 하고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내가. 안책임님과 같이 살면 어떨까. 부모님은? 아이는? 나는? 안책임님은?

 

(a) 안책임님과 결혼 합의 -> 부모님의 반대

(b) 부모님의 승락 -> 안책임님의 거절

(c) 그냥 기약 없는 연애?

 

(c) 는 일단 패스.

(a) (b) 둘다 결국 안되기는 마찬가지이긴 해도 (b)는 나만의 망신으로 끝나지만 (a)는 안책임님에게 되도 않는 미래를 약속하는 셈이니 (b)로 이래저래 시뮬레이션 해보기로 했습니다. 

 

 

 

 

 

부모님과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다녀오면서 엄마에게 슬쩍 물어봅니다. 처음부터 애있는 to-be 이혼녀 라고 하면 안되니 돌려돌려 엄마의 속을 떠보았습니다.

 

나: "엄마엄마. 혹시.. 내가 연예인이랑 사귀고 결혼한다고 하면 어쩌실거에요?"

 

엄마: "뭐? 혹시 연희가 연예인한다니? 늦은 나이에 뭐 연기자 한대? 걔가 얼굴은 이뻐도... 서른 넘었..."

 

나: "엄마! 연희랑 헤어진지가 언젠데! 아 그리고 걔 결혼했어요. "

 

엄마: "뭐 걔랑 헤어졌다가 도로 만나던게 뭐 한 두번이냐.. 난 그래서 혹시 걔가 뭐 연예인한다고 그래서 니가 난처해 하나... 그랬지.."

 

나: (아... 대화의 시작이 틀렸다..) "엄마. 그러면.. 혹시. 내가 팔이 하나 없는 여자랑... 그러니까 뭐. 사고로 크게 다친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이고 니가 참도 그런 여자랑 결혼한다고 하겠다... "

 

나: "내가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한번 엄마 머리속으로 그려보라는 거지.."

 

엄마: "너한테 그럴만한 넓고 단단한 마음이 있고 세상의 풍파 이길 신앙이 있다면야 어떤 사랑인들 못하겠냐. 아들..."

 

나: "내가 문제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은 어떻겠냐니까...."

 

질문이 틀렸나. 아니면 묻는 방법이 틀렸나. 왜 내가 원하는 답이 안나오는가..

 

 

 

 

 

나: "엄마. 그럼 혹시 내가 이혼한 여자랑 사귄다고 하면? 막 그 여자가 애도 있고 그런데 내가 결혼한다고 하면?"

 

엄마: "뭐? 이혼한 사람? 그것도 같은 거지. 너한테 그사람과 결혼하면서 생기는 어려움을 넘을만한 신앙과 마음이 있냐의 문제지. 그걸 왜 엄마한테 묻고 있니."

 

나: "아아니~ 내가 마음이 어떻냐가 아니라 엄마가 어떻냐니깐!"

 

엄마: "똑같다니까. 팔이 없건 이혼한 사람이건.."

 

 

 

 

 

 

아.. 이건. 엄마가 저를 진짜 잘 알고 하는 말 첫 번 째. 

그리고 답을 교묘히 회피하는 고단수 두 번 째.

 

엄마에겐 팔이 없는 장애나 애있는 이혼한 사람이나 같다는 건가. 

혹은. 내가 그런 사람과 같이 할만큼 큰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장애는 너무 다른 이야기이니 감히 내가 어떻게 생각도 못하니 넘어간다면 이혼이 그렇게 큰 흠결인가. 왜 엄마는 그걸 나에게 큰 풍파를 비유하는 걸까....

 

이건 허락을 한다는 건가 안한다는 건가.

 

 

 

 

 

 

본전도 못 찾고 답도 못 찾은 채 교회에 다녀와서 부모님 집에서 형네 식구들 그리고 조카들과 밍기적 놀다가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오전에 교회에 가면서 안책임님이게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메리크리스마스. 평화가 있길 바라요' 라고 답이 옵니다.

 

전화를 할 껄 그랬나 싶기도 합니다. 분명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용기를 내어서 손 내밀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말 후에 회사에서 보지도 못했고 크리스마스를 그냥 보냈고 그리고 휴가를 쓰고 하면서 긴 시간 못 보고 일주일여가 그냥 가버렸습니다.

 

 

 

도대체 뭔가. 

왜 늘. 

관계가 이런건가.

 

 

이제 내가 더 다가가야지.  뭔가 의지를 갖어야지. 하는 마음이 안책임님과 연락이 잘 안되고 얼굴을 못보자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도 부끄럽긴 했습니다. 그냥 보고 싶은 마음. 이런 일차원이고 초보적인 감정으로 또 돌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종무식이 있는 날입니다. 세상이 변했는지 강당에 모여서 사장및 임원이 하는 아침조회 훈화같은 건 없어지고 오후 셔터 내리고 간단히 팀단위로 파티를 한다고 합니다. 

 

 

 이러저러 수고했네. 내년엔 잘 해보세.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서 와인을 따고 있는데 안책임님에게서 메세지가 왔습니다.

 

 

 

 

 

 

안: [[책임님. 오늘 출근하셨나요? 휴가세요? ]]

 

나: [[회사인데요. 나오셨어요? 어젠 휴가이신거 같던데..]]

 

안: [[일주일간 회사 하루 나왔어요. 오늘 종무식인 것도 모르고 나왔네요... 좀 갑작스럽긴 한데요....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아.. 항상 갑작스럽다. 우리의 관계는 뭔가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그런건 없나.

 

 

 

 

 

나: [[아.. 딱히 특별한건 없어요. ]] 

 

라고는 했지만 사실 오늘 저녁에 대학에 입학할 친척 조카들을 만나 밥을 사주기로 했습니다. 외가쪽 조카들인데 젊은 당숙(?)이라고 따르는 애들이라 흔쾌히 밥 한번 산다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 

 

안: [[연말이어서 약속있을까 싶었는데 다행이네요. 오늘 혹시 저희집에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저녁밥 해드릴게요.]]

 

 

 

 

 

 

 

집? 

집!!!!!

 

 

 

 

 

 

 

나: !!!!!!!! [[오늘이요? 오. 좋죠. 근데 집. 괜찮으세요? 아이는요? 제가 막 가도 괜찮은거에요? 요리 안하셔도 되는데. 시켜 먹어도 되어요. 아니. 제가 뭐 사갈까요? ]]

 

예상은.. 했지만 진짜 오라는 말에 놀라서 메세지 하나에 질문을 밀물처럼 밀어 넣었습니다. 

 

안: [[ ㅎㅎ 걱정말고 오세요. 초대할만하니까 초대하는 거에요.  제가 지금 퇴근하긴 하는데 장도 봐야하고 해서.. 약간 늦게 괜찮으세요? 한 일곱시 반즈음..]]

 

나: [[아이구 열시도 괜찮습니다. ]]

 

안: [[못 드시는 거 혹시 있으세요? ]]

 

나: [[철금속류와 플라스틱은 못 먹습니다. (농담 ㅋ) ]]

 

 

 

전 가끔 우리의 관계가 어떤지 몰라서 농담의 정도와 수위를 잘 조절 못하겠습니다.

 

 

 

 

안: (농담은 씹힘) [[그럼 주소 따로 찍어 드릴게요. 이따 뵈어요. 갑자기 초대해서 미안해요. ]]

 

 

전화기를 내려놓고.

 

하나둘씩 생각해봅니다.

 

 

 

 

자. 이제 머리를 돌려 하나씩 풀어보자.

조카들은. 회사 앞에서 보기로 했으니 좀 빨리 보고 주문을 후루룩 하고 미리 계산하고 나간다. 아니면 카드라 주던가. 난 꼰대가 아니므로 너희에게 딱히 할 말이 없다... 놀아라. 노는게 남는거.

 

 

조카들에게 7시 약속을 6시반으로 땡기자고 하자 모두들 콜!  간단히 해결.

 

 

 

 

그럼. 초대는 뭐지? 우리 사이가 가까워진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인가. 그럼 이제사 연락한건 뭐지. 하긴 근데 나도 연락을 안하긴 했다. 

 

 

일단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백화점으로 향했습니다. 선물을 사가야지. 선물을. 그래. 딸램 장난감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애한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만 엄마에게 점수따는 것도 없지..

 

 

 

 

 

설레는 분위기로는 연말의 백화점이 최강일 거라 생각합니다. 크리스마스 배경 영화도 다 백화점에서 선물사고 그런걸로 시작하지 않던가요. 

 

상기된 표정 연인들 부부들 애들 노인들을 지나쳐 장난감 매장에서 인형 놀이 세트를 매장 직원에 강권에 샀습니다. 

 

여자애면 인형이죠! 딴 거 없어요~ 네네. 포장해 주세요. 들고 갈 수 있는거죠? 차 없으세요? 아.. 그래도 들고 가실 수 있을거에요... 무겁진 않으니까요. 대신 쇼핑백은 크고 단단한걸로 드릴게요. 

 

인형 놀이 세트를 결재하고 아.. 너무 일찍 샀다.. 이걸 어떻게 들고 다니지. 무겁진 않은데 부피가 보통이 아닙니다. 포장을 다 뜯어내고 안에 인형과 부속만 꺼내서 쇼핑백에 다 넣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연락이 왔습니다.

 

 

 

 

 

 

안: [[책임님. 닭요리 괜찮으세요? 알러지 같은거 없으시죠?]]

 

나: [[아이구. 없어 못 먹죠. 근데 그럼 치킨 먹나요? 맥주사갈까요?]]

 

안: [[ 좋을대로 하세요. ㅎㅎ 일곱시반 약간 넘겨서 오세요. 제가 생각보다 좀 늦었어요. 주소 받으셨죠? 이따 뵈어요. ]]

 

 

치킨?  진짜 치킨인가?  집에서 닭 튀기고 있는 안책임님을 상상하려니 잘 안되었습니다. 요즘 바깥닭이 얼마나 맛있는데.. 치킨이 왠말. 

 

아. 그럼 치킨이 아닌가보다.. (치킨이 닭인데..)  라조기같은거인가. 치킨 브래스트 샐러드? 로티세리 치킨? 

 

머릿속으로 장난감을 안고 백화점 소파에 앉아 조카들을 만날 여섯시반까지 뭐하지... 미적거리고 있는데. 또 다른 메세지.

 

안: [[ 아참. 딸애는 친정 가 있어요. ]]

 

 

 

 

 

 

 

!!!!!!!

 

집에 혼자 있대!

 

 

 

 

 

 

 

 

아아. 여자가 집에 혼자 남자를 초대한다.

 

이걸 다섯글자로 하면. 그린라이트. 한글로 초록불.

건너 오십시오.

 

 

 

혼자 흥분해서 아 어쩌지 뭘 해야하 하면서 당황해 하기 시작합니다.

 

나 오늘 뭐 입고 왔지. 아재팬티 아닌가. 뭐 입었는지 생각이 안나네. 화장실 가서 보고 올까.

아 속옷 매장 가서 멋있는거 사서 입을까. 또 입던 팬티 하나 버려야겠네.

아침에 늦어도 샤워하길 잘했지. 아 뭐 좋은거 뿌리고 올껄. 

 

 

 

이 장난감. 이 크다란거. 이거 환불하던가 하고 와인 그래 와인 한 병 사가자. 닭요리엔 와인이지. 암. 분위기에도 와인이지. 이왕이면 두병 사가자. 

 

 

 

 

 

 

 

혼자 생각에 취했다가 순간 어떤 아이가 뛰어가다 제 다리를 치는 바람에 퍼뜩 깼습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나무라며 죄송하다고 하며 갔고 전 그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일단. 장난감 선물은 무슨일이 있어도 들고 가자. 내가 온전히 정신 차릴 수 있게 만들 수 있겠지. 와인은?  아.. 진짜 치킨이면 어쩌지. 아 몰라. 그래도 맥주는 아니다. 와인이다. 그냥 한병 만 좋은걸로..

 

맨날 코스트코 와인만 사다가 백화점 지하 식품 매장에서 평생 사본 와인 중 가장 비싼걸 질렀습니다. 캘리포니아 나파 와인이라는데 뭐 좋겠죠. 라벨 검색 미리 하고 안책임님 앞에서 마치 와인 좀 아는 척 좀 할까 하다가 늘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라 망신당할거 같아 참았습니다.

 

 

 

 

백화점 1층 화장품 매장에서 향수 하나 얻어 뿌리고.

한손에는 와인백. 한손에는 인형놀이 장난감.

회사 근처 이탈리안 식당에 나타난 아저씨에게 조카들은 선물이냐면서 고딩스럽게 이게 뭐얔ㅋㅋㅋㅋㅋ 거렸고 전 너네꺼 아니니까 닥치고 음식이나 시키라고 했습니다.

 

 

 

 

 

편의상 삼촌이라 부르는 얘들은 이미 수시에 붙어 한참 놀고 있다 합니다. 전공도 좀 다르고 뭐 해줄말도 딱히 없어서 열심히 연애하고 놀라는 꼰대아닌 꼰대 소리만 하며 용돈 좀 쥐어주고 난 바빠서 이만- 입학해서 또 보자- 하고 계산하고 뛰쳐 나왔습니다.

 

 

 

택시를 타고 안책임님 동네에 도착. 일곱시 이십분.

조금 늦게 오는 것이 좋다고 했으니 십분 정도 더 있다 올라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혼자 아파트와 놀이터를 뱅뱅도는데 또 생각이 머리를 괴롭힙니다.

 

 

 

 

 

그린라이트면. 

진짜 그린라이트면 어쩔건가.

 

 

뭐라도 준비하는 것이 낫지 않나.

아니라면 뭐 실망밖에 더하나. 

그럼 뭘 준비하나. 

 

 

 

아.. 저 멀리 편의점.

 

 

 

 

아 이 미친 색희.. 

아니아니 이건 오히려 배려하고 신경쓰는거 아닌가? 진짜 자게 되었을때 저거 없으면 난처한건 여자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하는 새에.

이미 편의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전 장성한 성인이므로 당당하게 딱 콘돔 한갑을 사서 젊은 알바에게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아.. 차마 통신사 할인 바코드는 못 꺼내겠습니다... ㅠㅠ

 

그리고 나와서 곽은 버리고 콘돔 두개를 카드 지갑에 구겨 넣었습니다... 불룩해진 지갑이 보기가 좀 그래서 하나는 지갑에 넣고 다른 하나는 점퍼 안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아.. 모르겠다. 쓰면 쓰는거고 아니면 아닌거고!

 

 

 

 

 

 

떨리는 마음에 현관에서 세대 호출을 누릅니다.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그리고 안책임님 집 초인종을 다시 누릅니다. 

 

진짜 오고 말았습니다.

 

 

 

문을 열어주며 반겨준 안책임님은 무릎까지 오는 레깅스에 박스티를 입고 있었습니다. 피트니스에서 본 것 빼고는 가장 자유롭고 가장 몸매가 드러나 보입니다. 아아 당신은 진짜 절 혼미하게 만드시는군요.

 

 

집은 참 단정했습니다. 요즘 뭐 북유럽풍이네 하는 실용주의가 무색한 고가 가구가 흔하디 흔한데 안책임님 집은 이케아로 보이는 가구와 함께 그야말로 단아하고 말끔했습니다. 

 

 

주부의 힘. 그리고 엄마의 힘.

 

 

혼자 사는 여친의 오피스텔에도 가보고 가족과 사는 여친의 공주방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런 곳과는 완전히 다른 냄새와 분위기. 

 

'나'만이 아니라 '내 가족'을 위해서 쓸고 닦고 정리한 흔적이 보이는 공간.

 

 

 

 

 

제 점퍼를 받아준 안책임님이 혹시 안 주머니의 지갑이나 콘돔을 볼까봐 도로 점퍼를 빼앗으려다 뭔가 숨기는게 더 이상해서 점퍼를 내주었습니다. 

 

지갑은 꺼내놓을까. 혹시 써야할 일이 생기면 점퍼를 찾는 것도 웃기는 일 아닌가.... 생각을 했지만 자꾸 머리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면 할 수록 내 자신이 미친사람 같아 겨우 생각을 진정시킵니다.  

 

장난감은 딸애 선물이라고 하자 안책임님은 아이구 애 것까지 뭘 사와요. 하면서도 우리애가 진짜 좋아하겠다. 집에 손님이 왔는데 선물까지 사왔으니... 라면서 화색이 됩니다.

 

 

 

 

 

나: "아이가 없어서 아쉽네요. 선물을 직접 줬으면 진짜 좋았을텐데... 영수증 같이 있으니까 바꾸셔도 됩니다." 

(아쉽긴 뭐가 아쉬워. 없어서 다행이지!)

 

안: "그런가요. 아이가 있으면 초대 못했을지도... 애 한테 물어보고 딴거 같고 싶다고 하면 바꿔도 되겠지요? 사실 우리애는 여자애 치고 인형은 별로 안 좋아해서.. 바꾸게 되어도 이건 손책임님이 사준 거라고 꼭 일러 둘게요."

 

나: "와인도 한병 샀어요. 근데 오늘 메뉴 뭐에요? 진짜 후라이드 치킨 같은거 먹나요?"

 

안: "하하하. 후라이드 치킨이래. ㅋㅋㅋ"

 

 

 

이렇게 박장대소하는 안책임님 오랜만에 봅니다.

 

 

안: "삼계탕 했어요. 진짜... 밥 해주고 싶어서. "

 

 

 

 

 

 

삼계탕이라는 말에 이건 완전히 다른 분위기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방송에 많이 나오던거 있잖아요. 프랑스 가정식이라는 코코뱅도 있고 무슨 치킨 파마산이니 하는 레스토랑 가면 나오는 그런 음식.. 그러니까 데이트에 걸맞는. 와인 한잔 하면서 예쁜 접시에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그런거..

 

그런게 아니라 삼계탕이라니.

 

진짜.

 

진짜 밥을 해주고 싶은거였구나...

 

 

안: "국물 색깔이 좀 희한하죠... 인삼이 없어가지고 집에 애기 먹는 홍삼즙을 넣었어요. 향은 똑같긴 한데.. 그렇게 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큰 국대접 두 개에 국물을 넣고 찹쌀을 뜨고 그리고 닭을 통채로 올려 줍니다. 찬이 없다면서 김치와 나물 한 가지. 그리고 작은 종지에 소금을 담고 그 위에 깨를 솜솜히 뿌립니다. 

 

엄마같다. 아니 엄마네. 아.. 엄마 맞지..

 

 

 

우리는 뭔가 데이트와는 거리가 있는 풍경으로 둘이 마주앉아 삼계탕을 먹기 시작합니다. 

 

가운데에 뼈 그릇을 놓고 신나게 닭뼈를 발라내고 소금이 찍어 먹고 진한 국물을 후루룩 떠 먹으며 별 대화도 없이, 하지만 특별하게 대화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우리는 진지하게 집중하며 삼계탕을 먹었습니다.

 

먹고난 뼈를 수북히 같은 그릇에 쌓으며 별 것도 아닌 것에 가족같은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고 연인같은 유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안 이래로 가장 대화가 없었지만 가장 연인 같았던 때가 아닌가도 합니다. 마치 우리에겐 앞으로 시간이 많다. 라고 하는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게걸스레 식사를 마치고 제가 물티슈로 식탁을 닦자 안책임님이 칭찬을 해줍니다.

 

안: "시키지도 않았는데 와... 누가 이런걸 가르쳐 줬데요?"

 

나: "저희 어머니가 맨날 시킨 것도 있고.. 혼자 사니까요.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

 

안: "부부가 싸우는 건 다 이런거래요. 진짜 사소한걸로 쌓아 놓고 시작하는 거.."

 

 

 

'부부'라는 단어를 제 앞에서,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꺼내니 좀 생경합니다.

 

나: "와인 안 드실래요? 저거 좋은거라던데.. 아니면 두었다 따로 드셔도 되어요.."

 

안: "아니에요. 지금 먹어요. 근데 뭐랑 먹어야 하죠. 애 먹을거나 있지 딱히 어른 먹을 게 생각이 안나네요...아! 치즈!"

 

 

그러더니 저에게 와인을 열기를 부탁하고 안책임님은 냉장고에서 무려 어린이 치즈를 꺼내서 돌돌 말고 그걸 칼로 썰어 냅니다. 나름 있어 보입니다. 센스있는 여자구나.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다행히 와인잔은 있어서 치즈를 플레이팅 하고 잔을 세팅하니 아까보다는 훨씬 데이트 느낌이 납니다. 와인을 보자 삼계탕을 먹는 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콘돔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나: "아이가 오늘은 친정에 있나봐요? 이렇게 저녁에 혼자 집에 계실 수 있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안: "그러네요. 집에 혼자 있는거. 진짜 분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 분기가 뭐야... 언젠가는 집에 너무 있고 싶어서 점심만 먹고 집에서 밍기적거리려고 반차내고 퇴근했다가 저녁에 애 데리러 도로 회사 간적도 있어요. 어이없게도 집에서 빨래만 했지만..."

 

나: "크리스마스때는 뭐하셨어요? 요 근래에는 사실 회사에서도 안보이고 회사 시스템보니까 연차라고 뜨기도 하던데...."

 

안: "나.. 사실 좀 아팠어요. 많이.. 우리 그때 만나고 친정집에 갔는데 너무 늦어서 그냥 자고 가기로 했거든요. 근데 그날 새벽부터 열이 엄청나게 오르고.. 어지럽고 토하고.."

 

 

겨울에 밖에 끌고 다니고 만화방. 라면.. 뭔가 내가 잘 못 한거 같아 마음이 순간 불편해졌습니다.

 

 

 

 

 

 

안: "밤새 버티고 버티다가 급기야 응급실에 갔는데 뇌수막염이 의심된다면서 척수액 검사를 한다는 거에요. 너무 무서워서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달려와줘서는 뭐 이러저러 수치를 보더니 좀 있어보자고 하고 위험한 건 아니라고 해서 병원에 누워있다 왔어요"

 

나: "헥... 왜 안 알리셨어요. 정말 까맣게 몰랐네요.. 서운하기도 하고..."

 

안: "친정에 누워있는데 연락을 해서 뭐 해달랄 것도 없고... 암튼 며칠 아프다 보니 친정에서는 일년 내 참다가 연말에 몸이 급기야 고장나는 모양이라고 아이를 계속 봐주셨어요. 회사는 연차내고...."

 

 

 

 

 

역시... 연인이라기엔 멀다. 이리 아파도 나에게 손 내밀지 않았으니..

 

 

안: "오늘은 회사 간다면서 나오긴 했는데 막내 이모가 친정에 와 계세요. 엄마 혼자는 애 못 보시거든요.  아이는 막내 이모네 조카랑 어디 놀러가고 오늘도 외할머니집에서 잔대요. 그래서 급히 이렇게... " (웃음)

 

나: "아... 지금은 괜찮으세요?"

 

안: (대답 대신에 끄덕끄덕) "와 이 와인 엄청 맛있네요! 라벨 찍어 두었다가 담에 사 먹어야 겠다."

 

나: "...저 근데... 제가 막 이렇게 와도 되는 건가요?  "

 

불편한 질문. 하지만 하고 싶은 질문. 듣고 싶은 대답을 돌려돌려 묻는 물음의 시작.

 

 

 

안: "아... 글쎄요. 지금 이 타이밍에 오면 안되는 사람은... 남편인가. 지금 미국에 있어요. 어떻게 연말이 되어도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오질 않으니..."

 

나: "저기. 남편 이야기좀 해주세요. 궁금해요. "

 

안: (와인잔을 비우면서) "일단 한 모금 먹고.. 아 이거 너무 좋네.."

 

 

 

 

 

 

 

안책임님의 남편은 MBA유학 준비를 하면서 스터디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같은 학교 출신이었고  똑똑함에 끌렸다고 합니다. 전에 졸업할 때 즈음에 학교에서 동갑내기 밴드 기타리스트를 사귀었는데 홍대를 전전하는 남친을 뒷바라지하다가 무능력함에 학을 떼며 헤어지고 나서 완전 반대성향의 남자를 만난 셈이지요. 

 

금방 가까워져서 시험을 보고 한참 미국 학교에 지원을 하면서 유학을 가기 전에 결혼을 하네 가서 일년 후 하네 어쩌네 이야기하고 있는데 안책임님의 어머니께서 폐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수술이 잘 되긴 했는데 홀엄마가 건강할 때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딸은  남친을 조르고 조른 끝에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짧은 신혼생활 후 유학은 남편 혼자 떠나게 되었고 안책임님은 엄마가 혼자 있는 게 불안해서 못 떠나고 원거리 연애도 아닌 원거리 부부를 결혼과 동시에 시작하게 됩니다. 휴가를 모두 소진해가며 미국과 한국을 드나들었고 아이를 갖고 출산 휴가를 이용해서 미국에 머물렀다 합니다.

 

남편은 MBA자부심이 찌를 듯 하고 미국을 정말 사랑하며 야망이 큰 사람이라 합니다. 안책임님이 임신까지 한 몸에 미국을 드나드는 동안 한국에 한 번을 오지 않았습니다. 졸업을 하고는 미국 취직을 하느라 역시 한국에 오지 않았지요.  아이를 낳고 미국에서 키우기 시작했지만 남편에게는 골프와 네트워킹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남편은 결국 좋은 회사에 취직에 성공했지만 바깥일에 집중하느라 아이를 돌보지 않았고 안책임님은 한국에 있는 엄마도 걱정이 되어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복직을하고 지금까지 악전고투를 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엄마는 육아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남편과 멀어지니 시댁에 아이를 의탁할 수도 없었다 합니다. 남편은 그 몇 년 동안 비자를 바꾸러 한국에 단 한번 온 것이 전부.

 

 

 

 

 

 

 

안: "그리도 시댁은 좋은 분들이에요. 아이도 너무 이뻐하시고. 이 아파트도 결혼할 때 해주시고. 이혼하면 나가라 할까 걱정이 되긴 하는데 무엇보다 당신 아들이 잘못해서 나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시댁 생각하면 마음이 힘들거나 그러진 않아요. "

 

미혼 입장에서 시댁 이야기에 공감은 잘 안가지만 뭔가 이해가는 표정만 지울 뿐.

 

 

나: "와인 더 드실래요? 근데 생각해보니 술 드시는거 처음 보네요."

 

 

안: "나 생각해보니 올해 처음 먹는건가 싶네요. 근 일년을 한번도 안 먹다니... "

 

 

 

 

딱히 맞장구를 치기도. 그리고 욕을 해주기도 뭐하여 그냥 근근히 듣고 빈 잔을 채워주기만 했습니다. 

 

안책임님 얼굴이 조금 빨개지는걸 보자 저는 또.. 머리가 혼미해집니다. 자꾸 가슴에 눈이 가고 얼굴이 갑자기 화끈거립니다. 동영상에서 본 것도 생각나고 레깅스에 어렴풋이 보이는 속옷 라인까지 절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안: "땀을 많이 흘리시네요.. 술 되게 센 줄 알았는데. 이걸로 좀 닦아요."

 

 

 

 

 

애기가 쓰는 가재 손수건을 건내주면서 

 

바로 그 때...

 

 

 

 

 

 

 

 

 

 

안: "옷.. 위에라도 좀 편한거 갈아 입으실래요? 남편 옷이 좀 있을텐데... 와서 골라보세요."

 

나: "네? 옷이요? 여기서요?"

 

 

 

(전... 전. 천성이 음란한지 자꾸 이상하게 들립니다. 안책임님. 그러지 마세요.. 아니 그러세요. 아니. 내가 뭐라는거야... )

 

 

 

전 대답도 못하고 목과 등에 땀이 흥건한 채로 줄래줄래 옷방으로 따라갑니다. (안방으로 갈 줄 알았는데...) [아빠 1]라고 써 있는 정리용 큰 박스서랍을 열더니 반팔 티와 가디건을 꺼냅니다. 아.. 셔츠와 가벼운 가디건을 같이 꺼내주는 센스. 

 

그런데 셔츠가 남편이 나왔다는 미국에 명문 사립대 비즈니스 스쿨 이름이 크게 박혀 있습니다.

 

 

안: "남편은 진짜 학교를 엄청 사랑하는데. 정작 이 옷은 놓고 가더라고요. 이혼하면 걸레로 써버릴까 생각도 해요. 흐흣. 여긴 난방을 하지 않아 좀 추우니까.. 바로 옆에 여기 방에서 갈아입으세요."

 

나: "안방에서요? 앗. 저기.."

 

 

머뭇하는 사이 절 안방에 밀어 넣었습니다. 

 

....

침실. 침대위에 이불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고 화장대는 생각보다 단촐함. 침실에서 책을 읽는지 읽다만 책이 침대 옆 협탁에 있고 노트도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으며 침실에 홀로 있자 저는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혹시 자꾸 신호를 보내는데. 내가 못 알아채는건가. 어느 여자가 외간 남자에게 옷 갈아 입으라 옷을 주며 침실을 내어줄 수 있는 걸까. 

 

 

 

 

 

안책임님은 이래저래 돌려말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자자는 말을 덜컥 할 수는 없는거니까.. 내가 끌어 볼까. 현명한 사람이니까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주겠지. 난 그럼 쿨하게 사과하면 되는거다.... 아. 점퍼에 있는 콘돔은 어쩌지. 마루에 나가서 점퍼 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 바지 주머니에 넣고. 그다음에 침실을 다시 구경시켜 달라고 하고.. 이러면 되나.

 

 

전 진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이없게도 상대에 대한 믿음이, 이 사람은 현명하니까 아니면 아닐거라고 말해 줄거라는 믿음이 이상한 용기를 만들었습니다. 화장대를 보며 콧털 삐져나온거 없나 보고 닭고기가 이에 낀거 없나 봅니다. 아.. 나란 인간은 진짜..

 

 

그리고 성큼 문을 열고 나가서 소파 옆에 걸려 있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전화기를 찾는 척 콘돔을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심지어.. 심지어. 나중에 뜯기 편하라고 조금 뜯어두기도 했습니다. 아.. 내가 싫다..

 

식탁의 노란 불빛에 비치는 레깅스 안의 탄탄한 하체와 얇은 셔츠 너머의 가슴선이 절 흥분시킵니다. 뒤로 묶은 머리에 뒷 목덜미가 그렇게 예쁠수가 없습니다. 네. 감히 이런 말 쓰기 그렇지만.. 섹시했습니다. 

 

심박수가 러닝머신 최대 속도로 뛴 것같이 한껏 올라가 있을 때...

 

 

 

정적을 깨는

안책임님에게 걸려온 전화.

 

 

아이 인가 봅니다. 

 

"응 엄마야. 이모랑 뭐했쪄? 재미 있었어? 엄마 방금 밥 먹었어. 응? 아 그랬어? 아 우리 딸 잘했어~"

 

 

흥분이 조금 가라 앉습니다. 

역시 애 엄마. 여자이지만. 엄마다.. 엄마.

 

 

안책임님은 입모양으로  (잠깐만요. 미안.) 했고 저역시 (괜찮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통화 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집안을 둘러봅니다.

 

 

책장에 꽃혀 있는 책들. 단정하게 개여 있는 빨래들. 

약 먹기. 뭐 사기. 관리비 이체 통장 바꾸기.등등 써서 냉장고에 붙여 포스트잇.

남편과 아이와 찍은 사진들. 

가지런히 쌓아놓은 어린이 책들.

책상위 펼쳐 있는 스크래치 패드에 써 있는 성경 구절. 

그리고 힘내자! 라고 힘주어 써 놓은 낙서들.

 

 

 

지금 우리 집 거실에는 플스가 널부러져 있고 커피테이블에는 보다만 잡지와 듀얼 샥과 티비 리모콘이 던져져 있으며 침대 이불은 돌돌 말려 있을 것인데...

 

 

 

 

 

 

 

 

 

부엌에서 안책임님은 아이랑 통화하면서 냉장고에서 큼지막한 사과 두개를 꺼내 서걱서걱 깎기 시작합니다. 

 

더없이 아름다운 뒷태이지만 지금 여기서는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집에서는 안될거 같습니다.

 

아빠는 없지만 가정의 향기가 나는.  

엄마의 손과 노력이 묻어 있는 이 집에서는.

 

안될거 같습니다.

 

 

 

아니 이 집이 문제가 아니라. 

 

전 그때 현실을 마주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이 사람과 결혼 할 수 있나. 책임질 수 있나.

연애 말고 지금 이 가정을 내가 품을 수 있나.

 

그냥 연애만 하다가 난 적당한 때에 젊은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하게 되는 시나리오가 되는거 아닐까. 엄마 말대로 나에게 용기와 사랑이 있나..

 

 

이 풍경의 대비가 지금 어쩌면 안책임님과 저와의 간극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 까닭에 우리의 관계는 회사에서만 이루어지고 거기서 나오면 간극이 한없이 벌어졌던 것이 겠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한껏 흥분했던 아랫도리가 가라 앉았고.

 

 

 

 

 

그 후로 안책임님과 식탁에 앉아 사과 두개를 까먹고 홍차 티백 하나를 나눠 마시며

 

야구 이야기와 영화 이야기 따위를 하다가 

 

안책임님 친정에서 전화가 한번 더 오고 짧은 통화가 끝나자 저는 결국 시간이 늦었다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안: "옷 두고 가세요. 제가 빨아서 드릴게요. "

 

나: "무슨 말씀을. 막 남자 옷이 나오고 그러면 좀 그렇지 않겠어요?"

 

안: "나오긴 뭘 나와요. 집 세탁기와 건조기 돌리는데."

 

나: "지금 입고 있는거 제가 들고가서 빨게요. "

 

안: "혹시. 마음에 드시면 가지셔도 되어요. 남편이 와서 찾을거 같진 않네요. 있는지 기억도 못할거고. 제가 버렸다 해도 할말도 없을텐데.."

 

나: "옷은 좋은데 제가 갖기엔 좀... 아무튼. 오늘 잘 먹었습니다. 뭔가 진짜 누나가 해주는 밥 같았어요."

 

 

 

순간. 이거 실수한건가. 아닌가. 헛갈립니다.

그래. 당신은 오피스 시스터. 우리는 오피스 남매 아닌가. 

 

 

술마시고 모텔가고 그러는 오피스 어페어가 아니라

집에 불러다가 밥해주는 오피스 시스터.

 

 

 

나: "나오지 마세요. 추운데..."

 

안: "요 앞까지만 바래다 드릴게요."

 

 

 

패딩을 황급히 찾아 챙겨입고 둘이 현관을 나섭니다. 엘리베이터에 이웃이 타서 안책임님과 눈인사를 나누었지만 안책임님은 딱히 신경쓰지 않는 눈치입니다.

 

 

안: "찬공기에 와인 기운이 확 깨네요. 차 가지고 오셨어요? 와인 조금 드셨잖아요."

 

나: "아니요. 지하철 타고 갈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오늘 밤은 모처럼 혼자 주무시겠네요.."

 

의미심장한 말을 던져봅니다.

 

 

 

안: "아. 그런가.. 영화라도 하나 결재해서 볼까. 오늘 무척 아까운 날이네요. 진짜."

 

 

나: (네. 아까운 날입니다. 근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얼른 들어가세요. 내년에나 뵙겠네요."

 

 

안: "네. 올해 수고하셨어요. 자서전을 쓰면 올해 쓸 꺼리가 많을 것 같네요."

 

나: "저도요. " (안책임님에 대해서 저도 꼭 쓰러고요)

 

 

안책임님이 손을 내밀었고 저는 가볍게 손을 잡았습니다.

 

 

순간의 정적.

 

 

 

 

 

 

 

 

 

안: "저기... 음... 미안해요.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정도네요. "

 

원래 뭘 해주시려고 한건데요.. 라고 묻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아내고.

 

 

나: "아니요. 저야말로.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거 밖에 없네요."

 

하고 잡은 손으로 악수를 했습니다.

 

 

그러자.

 

안책임님이 몸을 기울여 

 

절 가볍게 안았습니다.

 

 

 

 

아아. 또 그 샴푸냄새.

 

영하 5도의 겨울이 갑자기 봄으로 바뀌던 순간..

 

 

 

 

 

안: "용기가 없어 미안합니다."

 

 

 

 

 

 

 

 

 

왜.

왜.

당신이 용기가 없는건데요. 

 

내가 없는거지.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는건데요.

 

 

 

 

내가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안책임님이 아파트 현관 너머 엘리베이터에 타는걸 보고 전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아까 들렀던 편의점에 물 하나와 담배 한 갑 그리고 라이터를 샀습니다. 알바는.. 알바는 아까 콘돔 산 아저씨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역시 무심하게 계산합니다. 이번에는 통신사 할인을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 두 개비를 피고 

물을 마시고

 

주머니에 있던 반쯤 찢은 부끄러운 콘돔을 

페트병과 함께 버렸습니다. 나머지 담배도 안 필거 같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에가서.

 

피시를 켜서 비디오 폴더에 들어가서.

 

 

 

아오이 츠카사 폴더를 지웠습니다.

 

 

조금 닮은 그 나신을 부끄러워서 볼 수가 없었고

다른 남자와 있는 건 더 볼 수 없었고

해괴한 동작과 괴로움과 기모찌가 섞인 신음은 더더욱 볼 수 가 없었습니다.

 

 

깨끗하게 지우고. 휴지통까지 비우고.

 

 

 

 

잠이 오지 않아 

위닝일레븐 두어 판을 한 뒤

 

소파에서 안책임님네서 얻어 입은 티셔츠를 그대로 입은채 쓰러져 잤습니다.

 

 

 

 

(계속...)

 



익명_495201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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