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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10)

익명_6fbbdc2018.09.01 19:38조회 수 20096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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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 대망의 10편.

 

10편을 쓸 줄은 진짜 몰랐는데..

 

8편을 쓰고 나서 저의 친구 한 명이 카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링크를 보내 왔습니다.

 

그런데

 

 

 

헉. 

 

오피스 누나 이야기.txt 엠팍 링크와 함께.

 

"이거. 혹시 너냐. 딱 넌데. 가명 써도 딱 넌데"

 

 

매우 친하고 또 신뢰하는 친구여서 이실직고 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 저자라고. 제말 어디다 이야기 말하달라고 사정사정하여 밥과 술을 진상하는 선에서 막아보나 했는데.

 

이 친구는 지금의 제 현실?을 아는 지라 

 

막 엔딩에 잔소리를 하며 되도 않는 코칭을 하고 자꾸 자기 에피소드도 하나 쓰라는 둥 작가 고유영역에 관여를 시작해서 아주 피곤합니다. (너 보라고 하는거야. )

 

사실 초반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어서 다들 모르나보다. 혹은 내 주변에는 생각보다 엠팍 안하나보다 했는데. 허를 찔리고 나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되네요.

 

더위가 조금 가셨습니다. 지난 여름 내내 저도 이거 쓰느라 참 더웠는데 이제 완결이 진짜 멀지 않았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한 두편 더 쓰고 있는...)

 

휴가였습니다. 업데이트 늦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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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

 

요즘 젊은 사람들은 왠지 잘 안 쓸 거 같은 단어. 

 

하지만 실제로 저 단어가 익숙한 

사람들은 이제 자기 것이 아닌 단어. 

 

데이트.

 

우리는 사귀지는 않아도 서로 특별한 관계로 생각해왔지만 데이트라고 불릴 만한 시간을 갖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사귀'려면 좀 더 같이 하는 시간이 쌓여야 가능한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안책임님의 조카가 이사해 들어오고 몇 주가 지나자 안책임님은 일주일에 한 번은 저녁 시간을 완전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카와 딸아이는 다행히도 합이 잘 맞았고 또 안책임님이 시터 비용을 과외 하는 비용만큼 잘 챙겨 주었기에 조카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적응이 잘 되자 안책임님에게 카드 한 장 받아다가 아예 회사 어린이집에서 직접 아이를 픽업해서 집에 택시 타고 가서 가는 길에 저녁도 사서 먹이게 되자 안책임님은 (돈을 써서) 엄청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유를 같이 공유하며 만끽 할 생각에 설레었습니다.

 

 

아이가 조카와 잘 적응해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 후,

 

 

 

안: ["책임님. 이번 주 수요일 저녁에 같이 시간 보내지 않을래요?"]

 

나: ["드디어. 아이에게서 해방되서 저녁을 즐기시는건가요."]

 

안: ["사실 이야긴 안했는데... 두 주 전 부터 주1회 조카애랑 딸이랑 저녁시간 보내요. 첫 주는 혹시 해서 집 근처 커피집에서 집에서 혹시 전화 안 오나 기다리며 혼자 책읽고 있었고 지난 주엔 아이가 잘 있는 거 같아 나가서 친구 만났어요."]

 

 

앗. 내가 1번 일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

 

하지만 애써 실망 안 한 척.

 

 

 

나: ["뭐하실래요? 뭐하고 싶으세요? 맛있는거 먹을까요?"]

 

안: ["음.. 글쎄요. 뭘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강남역 가서 맛있는거 먹어요"]

 

 

에? 강남역? 

 

전 강남역 별로 안 좋아합니다. 사람만 많고 생각보다 맛집도 없고.

 

 

나: ["하고 싶은거 있으세요? 굳이 복잡한 강남역을.. 종목만 이야기하시면 제가 어디든 맛집 찾아 놓을 수 있는데.."]

 

안: ["뭐 먹고 싶은건 없는데... 그냥 강남역 가보고 싶어요. 좀 웃기죠? 말하고 나니까 무슨 평양에서 학교 다니는 강남역 선망하는 대학생 같네요."]

 

 

평양 드립에 풋. 우스워서 강남역 가기로 합니다. 

 

까짓거 가고 싶다는데.

 

 

 

나: ["가요! 수요일 퇴근하고 바로. 지하철 타건 뭘 타건."]

 

안: ["신나네요. 괜히. "]

 

 

 

 

 

수요일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 같이 가게 될 줄 알았는데 뜻 밖에도 강남역에서 만나자 합니다. 회사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 그런가. 가다가 만나는 것도 우스울 텐데..

 

어디 갈지 요즘 핫한데는 어딘지 검색해 놓고 머리속으로 넣으며 강남역의 출구에서 먼저 도착해서 하염없는 인파를 구경하며 기다리는데 저도 괜히 느낌이 다릅니다. 누굴 만나면 약속 장소를 먼저 정하고 거기서 만나곤 했지 이렇게 강남역 출구에서 누굴 기다려 본게 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 아래 출구에서 뛰어 올라오는 안책임님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데.

 

 

눈부시게 나풀거리는 원피스와 네이비색 자켓. 그리고  워커를 신고 총총히 뛰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방금 퇴근한 여자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애기 엄마라고 이야기 하기 힘들 정도로. 젊고 화사하고 밝아 보입니다.

 

 

 

나: "우와.. 안책임님과 같이 다니는게 미안할 정도로 전 그냥 고리타분한 비즈니스 캐주얼 차림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그렇게 입는데.... 워커까지.. "]

 

안: "워커? 하하하. 나 방금 밑에서 하나 샀어요. 강남역 지하에서 신발을 다 사다니. "

 

나: "옷은요? 이러고 출근하셨어요?"

 

안: "밑에서 갈아 입었어요. 좀 주책이다 싶은데.. 회사 다녀온 복장으로 다니기 싫어서 오바좀 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하긴요. 감사하죠. 

이렇게 눈부시게 이쁜 사람과 같이 강남역을 활보하는데.

 

미안할리가.

 

 

나: "뭐 드실래요? 저녁먹어요. 사실 저도 요즘 여기서 모임같고 그래본 적이 없어서 막 검색해 보고 그래야해요."

 

안: "음. 배 많이 고픈거 아니면 좀 둘러봐요. 그러다 맛있어 보이는거 있으면 가요. 그래도 될까요?"

 

 

 

약간 당황...

 

요즘엔 사람들 안그래요. 다 검색해요.

 

 

그러다 검색부터 할 생각하는 내가 참 재미없어 보입니다.

 

 

나: "가죠! 뭐. 강남역에 먹을데 많은데요 뭐"

 

안: "이야 신난다!"

 

 

 

 

신난다. 라니.

 

이십대 대학생 같은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강남역의 화려한 네온 사인들을 보는 안책임님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특이하기도 하고. 특정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을 순간 어지러웠습니다.

 

 

한남대교 방향 출구로 나와 시티극장을 향해 걸어 가는데

 

폴짝폴짝 뛰면서 저에게 얼굴을 돌리고 이야기합니다.

 

 

 

안: "책임님. 책임님. 혹시 옛날에 나이트좀 다녔어요?"

 

나: "어... 글쎄요.. 많이 다닌편은 아닌거 같은데.. 솔직히 잘 못 노는 편이었어요."

 

안: "나도 많이 다니진 않았는데. 단코 알아요? 단코. 여기가 단코 있던 자리인데. 강남역 7번 출구... 아 요즘엔 몇 번이에요? 강남역에 출구가 왜 이렇게 많아.. 세상에.."

 

 

단코? 

7번 출구?  

 

안: "뉴욕 제과 없어진지 오래됐죠? 뉴욕 제과 ㅋㅋㅋ 으악 갑자기 딥하우스 생각난다. 딥하우스는 알아요? 손책임님도 서울서 학교 다녀놓고 왜이렇게 몰라요. "

 

나: "엔비는 압니다. 엔비 아세요? "

 

 

두 살 차이인데.

뭔가 세대 차가 엄청 나는 느낌

 

 

안: "아. 저 너머가 타워레코드 자리인데....타워레코드는 너무 나가긴 했네요. 지오다노 생기고 나 저기서 옷도 사봤는데. 타워 레코드를 추억하다니.."

 

 

이러다 동아극장 나오겠습니다.

 

나: "책임님. 무슨 외국생활 이십년 한 사람 같아요. 타워 레코드라니..."

 

안: "나 사실 강남역 몇 년동안 한번도 안 와본건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은 막 신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아.. 나 대학생 때  강남역 사대 나이트가 있었는데 이름이 당최 기억이 안나네.. 아휴..."

 

 

 

전 군대가기 전에는 나이트니 이런건 잘 놀줄도 몰랐고 그저 피시방에서 스타밖에 할 줄 알았던 불쌍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제대하고나서야 클럽도 가보고 했거든요. 연애도 제대로 못하고 겜방에서 스타나 하던 군대가기 전 한심한 시절.

 

 

나: "안책임님은 되게 잘 노는.. 아니 잘 나갔나봐요. 전 옛날에 그런 애들 보면 막 부러웠는데. 전 잘 놀 줄 몰랐던거 같아요. 대학생떄. 그렇다고 공부를 엄청 잘한것도 아니고.."

 

안: (도리도리) "나도 죽순이거나 그런건 아니에요. 많이 간건 아닌데 그때 놀았던게 이상하게 기억에 강하게 남네요.  기껏 몇 번 가봤을까... 그떈 나이트에서 막 춤도 똑같이 추고 그랬는데. 노래가 막 정해져 있어. 쿨 노래 같은걸로 막 믹스해서. " (박장대소하며)

 

 

야. 원래 엄청 놀던 사람인가. 되게 신나하네.

 

 

안: "아니 그걸 왜 몰라. 우리 같은 세대 아니에요?"

 

나: "전 공부만 했그든요..."

 

 

 

머릿 속으로 제 주위에 있던, 잘 놀고 옷도 잘입던 그런 친구들 선배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 친구들과 선배들을 선망하고 부러워하던 저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진짜 아무런 정보없이 걷고 걷다가 아무 이자카야를 대충 들어가서 식사와 맥주를 간단히 하고 커피를 산다음 강남역과 신논현역 사이를 또 한참 걸었습니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사람 구경을 하고 건물과 간판을 보며 옛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강남역에 옛날 모습이 남아 있는것이 무엇 인가 싶을정도로 많이 변했습니다.

 

 

 

아. 진짜 데이트 같았습니다.

 

최근에 여자 친구를 만나거나 썸을 타게 되면

 

어디를 갈지 미리 정하고 서로 동의를 해서 "뭔가 하는 것이 분명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그냥 이렇게 대책없이 그것도 딱히 걷기 좋은 거리라고 하기도 어려운 번화가를 사람구경 해가면서 걸으니 오히려 더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

 

시간이 아홉시가 지나 열시를 향하자.

 

 

저는. 

딴 생각. 

 

아니. 집에 언제 가나. 집에 가기 전에 어디 가면 안되나를.

조금.

 

진짜 조금 생각했습니다.

 

 

나: "아 열시가 되가네.. 오늘 진짜 많이 걸었네요. 안 피곤하세요?"

 

안: "책임님. 미안해요. 아직은 애를 내가 재우긴 해야해서 늦게까지 있기는 어렵네요. "

 

 

 

피곤하다 물어보는데 미안하다 대답하는 거에

 

내가 더 미안하다.

 

 

 

나: "아니에요. 이렇게 같이 이시간에 시간보내는게 신기하네요. 같이 가요. 데려다 드릴게요."

 

안책임님 집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 같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아파트 앞에 내렸습니다.

 

 

 

버스에 내려 잠깐의 침묵과 함께 걷다가 안책임님이 갑자기 멈추고 말했습니다.

 

 

안: "사실."

 

나: "사실?"

 

안: "아까.. 강남역에서 회사 사람 만나면 어쩌나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나: "아... 저도 그랬는데 뭐 어떻게 해야할까요. 도망가나."

 

안: "도망가면 더 웃기지 않나요. 하하하"

 

나: "아니면. 도리어 그 사람에게 우리 사귀는거 모르셨어요? 하면서 오히려 더 붙어야 하나?"

 

 

 

하면서.

 

저는 안책임님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순간.

안책임님의 웃음.

 

다른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는 모습이

신입생이 처음 연애하는 모습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마흔을 눈 앞에 두고 있는데 말입니다.

 

 

 

안: "사람 많은데서는 손 안잡길래 신경쓰나. 싶었어요. 그러다가도 아니면 손잡는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라고 혼자 생각했네요."

 

나: "사실. 오늘 만난 강남역 출구에서 지금까지 언제 손 잡아야하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안: (웃음) "귀엽네요. 손잡을 생각만 하다니. 하하하"

 

 

 

안책임님을 아파트 현관으로 보내고 아뿔싸. 키스 하고 헤어졌어야 하나 싶었지만 오늘 손잡은걸로 이렇게 연인처럼 아니 연인으로 데이트 한 것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한번에 시작한 느낌이었습니다.

 

 

결혼을 생각하면 여전히 어떻게 해야할지 마음 한켠에 해결되지 못한 애써 꺼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마음 한구석이 있었지만. 그냥 묻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고 좋은데. 그냥 이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은 데이트를 할 수 있을거라는 부푼 꿈이 있었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다음 데이트는 한 주를 거르고 그 다음 주에나 할 수 있었고 그 다음 데이트는 무려 한달이 지나서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회사일로 더 데이트가 힘들게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름에 야심차게 시작한 과제가 심사도 못받고 좌초되었지만 안책임님덕분에 큰 좌절안하고 오히려 더 의욕적이게 밝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쟤 일주일동안 건드리면 안돼. 당분간 그냥 놀게 해. 그냥. 이러던 부서장도 얼레. 괜찮네? 하면서 다시 업무 복귀를 지시했고 생각보다 일상으로 잘 돌아왔습니다.

 

확 엎을까. 하기 직전에 위로를 받고 전략팀과 그 나책임에게 오히려 도와주겠다고 쓴 메일이 엉뚱하게 작용이 되어 저는 회사에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회가 오게되었습니다.

 

 

그 기회란 것이..

 

 

 

전략팀에서는 뭔가 미안한 상황이 되었는데 제가 선뜻 일을 좋은 쪽으로 마무리 해버리자 뭔가 보상을 해야겠다 했는지 저를 추천해 주어 반년간 신나게 놀러다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란 건 세계의 유명 모바일, 전자,통신 관련 전시회를 다니며 동향 보고서 쓰고 사람 만나서 명함 받아서 관계 맺고 이메일 쓰는.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책임질 일 없고 회사 돈으로 신나게 비행기만 타고 다니면 되는 회사에서 제일 편하고 즐거운 일을 반년간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최고 고과를 몇년간 연속으로 받아야만 선택된다는 프로그램인데 저는 얼떨결에 되고 말았으니 뒷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안책임님과 시간을 보내는데 자꾸 문제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안책임님은 꿀이 좔좔 흐르는 출장아니냐며 이런걸 왜 안하냐고 했고 저도 굳이 당신과 데이트 해야해요! 하면서 마다하는 것도 웃기고 또 한 달에 한두번만 가는 것이었기에 전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첫 출장.

 

샌프란시스코.

 

 

회사에서 출장은 그래도 일년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는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꿀출장은 처음입니다.  출장 전날 저녁에 퇴근 전 잠시 만난 안책임님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자신을 위해 사와야 할 것을 단단히 알려주며 작은 꾸러미와 봉투를 줍니다.

 

나: "어. 이거 뭐에요?"

 

안: "상비약. 그리고. 음. 비행기에서 풀러봐요."

 

나: "돈이에요? 나 돈 많은데."

 

안: "으이그.. 아무튼 비행기에서 뜯어요. 미리 뜯으면 안됨!" 

 

그러면서 첨언.

 

안: "그리고 립글로즈 하나만 사다주세요. 면세점에서 십오불 정도 할거에요. 메시지로 보낼게요"

 

나: "엥? 십오불이요? 좀더 비싼거 사도 되는데."

 

그러자 절 안아줍니다.

 

안: "아니에요. 그거 갖고 싶은거에요. 잘 다녀와요. 건강하게 몸 조심. "

 

가슴의 따뜻함과 편안함. 풍성함을 느끼며.

이렇게 진부한 말이 정말 진심이 담긴 힘이 있는 말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출장 당일이 되어 신나게 공항으로 가서 일행과 만나 부랴부랴 게이트로 들어갔더니 일행들은 면세품부터 찾으러 가느라 난리입니다. 

 

전 미리 산게 없어 면세점에서 안책임님이 진지하게 이것 하나만 사라고 부탁한 립글로즈를 샀더니 이만원이 채 안 되어  다른 색깔로 두개를 샀습니다.

 

아. 이리 검소한 사람이었나.

 

일행들이 찾아온 면세점 쇼핑백이 한아름인데 보아하니 태반은 화장품이나 가방같은 것입니다.

 

뭐라도 사주고 싶은데 취향을 몰라 직원에게 부탁하여 수분크림 좋은 걸로 골라 달라 하여 하나를 사고 계산을 하고 나서 엄마 생각이나서 황급히 하나를 더 샀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비행기에 탑승하였습니다. 출장 갈 때마다 가서 할 미팅과 성과에 마음이 무겁고 부담되어 왔는데 이런 출장이 다 나에게 오다니. 이게 다 안책임님 덕이야. 하면서 행복에 젖어 이륙하자마자 맥주부터 따고 영화 뭐 있나 리모콘 또각또각 누르고 있는데.

 

 

봉투가 생각났고 

아니나 다를까 편지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냥 삼공 스프링 노트에 가지런히 쓴 편지. 

 

여대생의 데굴데굴 굴러가는 귀여운 글씨가 아닌 흡사 컴퓨터 폰트에 가까운 정갈하고 미려하나 과하게 꾸미지 않은 만년필로 쓴 편지가 있었습니다.

 

 

[[손책임님. 지금 비행기에 있겠죠? 비행기 뜨기 전에 뜯어본거 아니죠?  지금 애기 막 재우고 났는데 노트가 보여 편지가 좀 쓰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잉크를 채워 넣습니다. 편지를 쓴 적이 너무 오래되어 마지막이 언제인지 생각이 잘 안나는데 오늘따라 무척 쓰고 싶네요. 당신도 이런 종이 편지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네. 정말 좋아합니다.

정말로요.

그리고 '당신'이라니. 

 

이 말이 정말 좋네요.

 

 

[[나에게 지난 5년은 정말 힘든 나날들이었어요. 손책임님에게 이야기 안한게 하나 있는데 나 우울증 약을 잠깐 먹었었어요. 하지만 손책임님 같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어 내 인생의 바닥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니 당신이 나를 끌어내었겠죠. 회사에서 전력으로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으려 살아온 시간들 동안 나는 적잖게 안으로 더 상하고 있었던거 같아요 그런데 책임님을 만나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은 좋아졌고 약은 먹지 않아요.  난 당신이 너무 편하고 좋다는 말 이렇게 하고 싶어요. ]]

 

 

 

사실. 

 

편지글의 내용의 세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안책임님이 이야기하지 않았던 작은 사실들과 저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행복하지만 이 행복이 나에게 합당한 것인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나를 좋아하지?

 

 

한번도 연애하면서 이 정도의 마음씀을 만나본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무엇이기에 이 사람에게 이렇게 의미가 된 것일까요. 너무 신기해서 비행기가 북태평양을 날아가는 내내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내 힘으로 잘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잘 살아내야 겠다 굳은 마음도 먹었습니다.

 

 

 

 

날이 추워지며 11월이 되었고 우리는 또 한 살을 먹을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는 이러다 노총각 금방 된다고 좋을 때 장가가라고 성화였고 전 그냥 지금이 좋다고 둘러대며 현실을 애써 회피했습니다. 

 

 

여기저기 들어오는 소개자리를 겨우겨우 쳐내며 초겨울을 맞이하고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었지만 생각보다 자주, 그리고 여유있게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가끔 결정적인 순간 '아! 저 딸래내미 쫌!' 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안책임님에게 딸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또 저도 그 아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책임님 앞에서 아무리 시간이 아쉬워도 딸아이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11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올해의 잡힌 마지막 출장.

 

너무 그간 못만났다면서 혼자가는 출장이면 공항에 따라 나오겠다 해서 우리는 함께 공항버스를 탔습니다. 쉽게 못 쓰는 친정 찬스까지 쓰는 걸 보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나란히 공항 버스에 타며 애처럼 좋아하는 안책임님과 붙어서 앉아 초겨울의 볕을 받으며 올림픽대로와 공항 고속도로를 달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나: "아 여길 출장이 아니라 여행으로 와야하는데. 우리 올 수 있겠죠? "

 

안: "그러게요...."

 

저 말줄임은 '셋이라도 올 수 있으면 좋겠네요.'

일지도.

 

 

 

체크인을 하고 짐을 던져넣자 시간이 약간 남았습니다.

 

어차피 면세점 쇼핑은 안할거니 터미널을 좀 걷기로 했습니다.

 

나: "이번에도 립글로즈 하나 살까요? 아니면 크림이라도?"

 

안: "아니에요. 그거 사면 오래 써요. 담에 뭐 필요하면 부탁할게요. 지금은 없어도 되어요."

 

나: "주위에서 보면 면세점에서 다들 화장품이네 뭐네 부탁하느라 난리인데."

 

안: (웃음) "앞으로 계속 사줄거잖아요. 그건 그렇고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편지를 못썼어요. 매번 써 주는 것이 목표였는데. 아. 게으르다."

 

나: "아이구. 게으르긴요. 아니에요. 무슨 말을 그리.. 우리 사진 하나 찍을까요? 우리 사진 찍은 적 거의 없는거 같은데."

 

안: "아.. 그런가? 정말 그런거 같기도 하네요. 나이 먹으니 사진 찍자는 말도 안나오는 거 같아.."

 

 

 

인천 공항 출국층은 빛이 좋아 어디서 찍어도 사진이 잘 나옵니다.

 

어디서 찍을까 마지막 카운터 너머 한적한 터미널 끝을 둘러보고 있는데..

 

 

나: "보고 싶어서 어쩌죠? 사진찍고 사진이라도 봐야겠다."

 

안: "아! 사진.. 사진도 좋은데..."

 

 

곰곰히 생각하더니

 

안: "책임님. 전화기에 녹음기좀 켜서 줘봐요."

 

나: "응? 왜요? 녹음?"

 

안: "내 목소리 녹음해 두게. 보고 싶으면 이거 들으라고 하려고. 그리고 책임님 목소리도 내꺼에 좀 녹음해 두려고.."

 

 

 

목소리 녹음?

 

 

 

 

아. 이 사람 삐삐 세대구나!

 

 

 

조금 한적한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건네받은 안책임님은 돌아가는 길에 읽으려고 갖고 왔다는 하루키의 책 '무라카미 라디오'의 한 편을 읽기 시작합니다.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문장. 문장.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래. 당신의 매력이 목소리였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의 얼굴만 몸매만 가슴만 보일지도 모르지.

 

난 당신의 마음과 슬기로움과 목소리를 알고 있다.

 

 

 

 

네 페이지를 차분히 읽더니 녹음된걸 들어보고는 

 

안: "아.. 진즉 해 줄껄. 주위가 시끄럽네. 나중에 스튜디오라도 빌려서 녹음하고 싶다."

 

하더니 저에게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더니 저에게 읽어 달라 합니다.

 

주저하면서 저도 읽기는 읽는데 자꾸 발음이 새고 꼬입니다. 한글책을 소리 내어 또박또박 읽는 것이 쉽지많은 않았습니다. 

 

안: "난. 손책임님 목소리가 좋아요. 사실. 내 목소리 녹음해 주려는 것도 있는데 손책임님 목소리 녹음해 두고 싶은 것도 있어요."

 

나: "네? 제 목소리요? 그런 소리 별로 들어본 적 없는데.."

 

안:  "난 손책임님 목소리 좋은데. 그래서 사실 문자 쓰는거보다 일부러 목소리 들으려 전화한 적도 많아요."

 

 

아..

난 문자 쓰기 귀찮아서 전화한 적도 있는데..

 

 

 

그것보다.

 

내 목소리가 좋다니. 그래서 녹음까지 해두려는 사람은 처음입니다. 동영상으로 누구에게 생일 축하를 보낸 적은 있는데 진짜 순수하게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녹음을 하다니.

 

 

잠깐 동안.

혹시 커플 동영상을 찍는 심리가 이런건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다가 그런 생각을 안책임님과 엮는 것 조차 싫어서 애써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냅니다.

 

 

안: "잉. 싫어요? 왜 갑자기 도리도리를.."

 

나: "아. 아니에요. 머리가 갑자기 아파서."

 

안: "비행기 타는 사람이 머리가 아프면 어떡해요. 아유... 타이레놀이라도 하나 먹고 타야하나..."

 

나: "아니에요! 아니아니. 그런거 아니에요.  아. 이제 타러 가야겠다. 게이트 쪽으로 가요."

 

 

포르노 동영상을 떠올린 것이 무안해서 애써 자리를 일어섰습니다.

 

게이트를 앞에 두고 포옹. 그리고 짧은 입맞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니

가끔 믿기지 않습니다. 생경함이 아직도 있습니다.

 

 

 

 

 

안: "더 안아주고 싶지만 보내줄게요. "

 

나: "다녀오겠습니다. 공항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같이 비행기 탈 날 그리고 있을게요. "

 

안: (웃음)

 

 

 

설레임이 가득한 공항의 분위기.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의 상기된 표정들.

 

게이트로 바삐 가방을 끌며 여권을 들고 귀국길을 재촉하는 외국인들.

 

저 활주로 멀리 뉘엿뉘엿 너머가는 초겨울의 석양.

 

이 공항의 풍경들 속에서 안책임님과 같이 있는 이 짧은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름다운 이 시간이 손에 잡힐 것 같았습니다. 아니 계속 잡고 내것으로 삼아 살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게이트 앞에서 공항 직원에게 여권과 보딩패스 검사를 받아 보안 구역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돌아보니 안책임님이 서서 제가 돌아 본 것을 알고 손을 흔듭니다.

 

나: "손좀 계속 흔들어 주세요!"

 

안: "네? 이렇게?" (바이바이)

 

 

얼른 카메라를 켜고 그 모습을 담았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드는 모습. 

 

 

 

 

 

좀 더 가까이에서 찍었으면 좋았을 것을. 

 

내 얼굴도 같이 찍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냥 도로 뛰어 가서 같이 웃고

 

그녀의 어깨를 안고 같이 셀프샷을 찍을 것을.

 

 

 

 

후회.

 

 

 

 

열걸음 떨어진 곳에서 웃으며

공항의 유리천장으로 쏟아지는 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모습의 그 사진을 보고

 

그리고 안책임님이 읽어준 무라카미 라디오 수필집의 한 편을 끝도 없이 들으며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맥주 두캔을 후루룩 마시고

 

잠을 청했습니다.

 

 

 

(계속...) 

 

 



익명_6fbbdc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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