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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쌍둥이

title: 양포켓몬패널부처핸접2015.05.12 10:58조회 수 1053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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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시선

고등학생인 형과 나는 이란성 쌍둥이다.
한 배에서 거의 동시에 났지만 우리는 겉모습부터 성격까지 모든 면에서 다르다.
나는 몸집도 작고, 왜소한데다가 성격까지 소심해 인간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
반면, 형의 외모는 남자답고 날카로웠으며, 큰 키에 덩치까지 좋다.
성격 또한 그와 어울리게 불같고, 포기를 모른다.
게다가 우리 형은 기가 세다.
아주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요새는 형 앞에 서면 형이 상대를 압도하는 흉흉한 어떤 것을 내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형이 싸움을 잘하는 것으로 다른 지역에까지 소문이 퍼져 유명해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몰랐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형에 관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일화가 하나 있다.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미 거물급이 된 형을 꺾기 위해 다른 학교의 여럿이 도전해온 적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형이 아닌 도전자들만 계속 거꾸러지자, 결국 기다리던 남은 세 명의 도전자들은 위기감을 느꼈는지 형에게 한꺼번에 덤볐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 연합군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쫓겨났다는 것이었다.
그 사건 이후 도전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형이 부럽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그 동경의 대상인 형이 나를 끔찍이 아껴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형의 시선

동생 녀석은 나와 달리 허약하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나약하다.
다른 형제들은 많이 다투기도 해서 형이 동생을 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는데,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은 절대 상상할 수 없다.
녀석이 나와 충돌할만한 짓을 안 하는 이유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작고 왜소한 이 녀석을 어떻게 때릴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런 동생을 내가 지켜줘야 하는 사명을 위해 우리 형제가 이렇게 태어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여운 녀석. 언제나 너를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우리에게는 어머니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옛날, 우리를 버리고 떠난 시점부터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족은 내 동생과 나, 그리고 얼마 전 교통사고로 정신이 이상해진 아버지까지 해서 셋이 전부다.
아버지는 사고의 충격 탓인지 알콜중독과 우울증증세를 보여 정신과 의사와 정기적으로 상담 중이다.
말할 것도 없이 아버지의 정신착란이 올 때마다 병원까지 매번 동행해야 하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자주 중얼댄다는 것을 빼면 그리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하루는 문득 그 헛소리가 무슨 말인지 너무 궁금해져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핵심만 대충 말해보자면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형제일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물론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리는 병원에서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란성 쌍생아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알콜중독이 뇌에 문제를 일으켜 그런 말도 안 되는 판단을 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전략을 택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어떻게 보면 비슷했다.
그러나 나약한 것과 미.친 것은 엄연히 다르다.
동생은 내 말을 잘 따르기라도 하지,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다.
쇠고집을 부리며 내 말대로 안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무시하거나 미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생보다 아버지를 더 가여이 여기고, 관심 가지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맏아들이기에 모든 것을 감수하고 우리 가족을 돌봐야 한다.
교통사고로 인한 보험금이 상당해서 당분간 우리 삼부자가 살아가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벌이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그건 바로 내가 될 터였다.
공부에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는 나와 달리 동생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대학까지 졸업시킬 예정이다.

 

동생의 시선

벌써 눈치 챘겠지만 나는 평소 친구 하나 없는 왕따인 것은 물론, 괴롭힘에 구타까지 당하고 있었다.

방과 후, 그날도 어김없이 질 나쁜 아이들이 내게 따라오라고 시킨다.
나는 담임선생님을 따라가며 그들을 피해보려 했지만, 그 중 말 잘하는 하나가 그럴싸한 거짓말을 곁들이자, 선생님은 손쉽게 구원의 손길을 놔버렸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멱살을 잡힌 채, 학교 뒤쪽 으슥한 곳으로 끌려간다.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복날 개 맞듯 사정없이 맞고 있다.

처음 그들은 때리는 게 재밌는지 웃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계속 묵묵히 참아내자, 그게 못마땅한지 점점 굳어가는 표정으로 훨씬 거세게 나를 내리친다.

나는 몇 번이고 그만하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형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았다.

형처럼 되고 싶었다.
나는 나약한 내 자신을 탈피하고 싶었고, 그들에게 절대 굴복하기 싫었다.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문신처럼 도드라져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쯤, 드디어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우리 형이 온 것이다.

 

형의 시선

주먹도 쓰지 않았는데 단순히 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그들은 질겁하며 도망치기 바쁘다.

*도 아닌 새끼들. 얼굴을 외워놨으니 다음에 만나면 흠씬 두들겨 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생에게 괜찮냐고 묻자, 녀석은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답한다.

하여튼 착해빠진 멍청이….

나는 녀석을 일으키며 괜히 미안한 마음을 느낀다.

우리들은 곧바로 집으로 향한다.

나는 동생에게 파스와 약을 발라주고 멍 자국이 난 곳에 마사지를 해주며 멍을 풀어준다.
얼마나 속상할지 알기에 나는 녀석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그런데, 녀석은 자신이 맞은 것보다도 내가 어떻게 적절히 나타날 수 있었는지가 더 관심 있나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 아버지가 술병을 들고 벌건 얼굴을 한 채 들어온다.
아마 오늘도 아무 하는 것 없이 뜬구름만 잡다가 온 모양이다.
한심하지만 그래도 이해한다.
그 충격이 쉽게 가실 수 있을까. 저번에 의사가 말하는 상담내용을 대강 귀띔으로 들으니, 교통사고의 후유증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라 했다.
벌써 한 달이 지나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시점을 나는 더 길게 보고 있다.

「왜…왜 이래?」

다친 아들의 얼굴이 보이니 아버지는 술이 깼는가, 황급히 묻는다.

「애들한테 맞았어요.」

동생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떤 놈들이 또 이랬어….」

아버지는 옅은 한숨을 쉬며, 깨지고 멍든 동생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다.

「근데 괜찮아요. 형이 그 놈들을 다 내쫓아줬거든요. 얼마나 멋졌는데요!」

녀석은 터진 입술로 나를 칭찬해주기 바쁘다.
그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괜히 뿌듯했다.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다시 술 취한 정신이상자가 되어 거실 소파로 비틀거리며 간다.

 

동생의 시선

이튿날, 우리는 학교수업이 끝난 뒤, 학원에 와있다.
이제 우리도 나이가 나이인 만큼 본격적으로 학업에 매진해야할 때다.

형과 나는 쌍둥이답게 같은 진로를 선택했다.
우리 둘 다 셈하는 것과 공간지각능력이 뛰어나 기하학과 물리 쪽으로 나가리라 생각하고 있다.

공부하는 성향은 같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나는 열심히 코를 박고 집중하는 스타일이지만 형은 강의를 듣는 내내 딴 짓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형은 낙서를 하고, 지우개를 자르기도 하며, 종이를 찢어 갖가지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것조차 질렸는지 주위 다른 친구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형의 소문을 익히 들어온 그들은 우물쭈물 대답하며 형을 피하기 바쁘다.

형은 그런 친구들의 행동이 불편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형의 그런 모습조차 부럽다.
내게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형의 시선

사실 이 학원에 오는 이유는 공부 때문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공부에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다.
단지 내 여자 친구가 이곳에 다니고 있는데, 요새 의도적으로 나를 피하기에 그녀의 감시 때문에 출석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녀가 눈치 못 채게 당분간은 멀리서 관찰만 하기로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다른 놈이 생긴 것이 그 이유라면 현장을 몰래 급습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 둘 다 잡아 족치기 위함이다.

아직까지 별 다른 기색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알 수 있다.
분명 뭔가가 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그러지 않고서야 그녀가 갑자기 내게 이리 차가워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동생의 시선

우리는 학원을 마치고 저녁 늦게 집 근처 중화요리 집으로 향한다.

우리는 일주일에 두 번씩, 그것도 꼭 마감 직전에 그곳에 들러 야식을 먹는다.
주인아저씨는 우리가 단골이기 때문인지 언제나 열렬히 반겨준다.
이곳은 맛도 맛이지만 학생들이 오면 자식 같아 안쓰러운지 다른 곳보다 배나 많은 양을 주기 때문에 배고픈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게다가 서비스 쿠폰도 한몫하고 있다.
서비스 쿠폰이란 이곳에 올 때마다 한 장씩 주는 종이쪼가리를 말하는데, 그것을 총 스무 개 모으면 큰 탕수육이 공짜다.

우리는 벌써 세 번이나 그걸 먹었다.

 

형의 시선

「응, 왔어?」

우리가 문을 열자, 주인아저씨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반겨준다.

「늘 먹던 걸로 주세요.」

「알았어. 그렇게 됐어도 변함없이 와줘서 고마워.」

내가 능숙하게 주문하자, 아저씨는 안타까운 얼굴이 되어 말한다.

그래, 저 아저씨 아들이 나보다 한 살 많댔지….

나는 중얼거리며 내 지갑을 뒤져본다.
쿠폰이 다시 열여덟 장이나 모여 있었다.
오늘 말고 앞으로 한번만 더 오면 탕수육을 공짜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갑을 닫자, 동생이 쿠폰이 몇 장이냐고 물었다.
나는 열여덟 장이라고 알려주었고, 녀석은 이제 곧 탕수육을 얻겠다며 좋아했다.

 

동생의 시선

다음 날, 형이 주말인데도 웬일로 나와 놀아줬다.
우리는 평소에 가지 않던 이곳저곳을 다니다 저녁 7시쯤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외롭지 않은 주말을 보낼 수 있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기뻤다.

그렇지만 집에 들어가자마자, 손에 초록색 병을 든 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축 처진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이자, 그 기분은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형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우리는 차례로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저녁식사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간다.

아버지가 저렇게 변한 이후로 식사준비도 우리 몫이 되었다.

형은 요리를 하고, 나는 밥그릇과 수저, 젓가락을 탁자에 올리고, 밥도 담았으며 냉장고에서 여러 반찬들을 꺼내놓는다.

아버지는 저녁식사에는 관심 없는지 여전히 술병만 기울이고 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같이 저녁 먹자며 아버지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자, 아버지는 못 이긴 척 일어나 테이블로 와 앉는다.
초췌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안쓰러운 감정이 살아나고 있다.

 

형의 시선

「아, 뜨거!」

나는 행주로 오른 손등을 닦고, 입으로 후후 불며 열기를 식혔다.
빨간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동생이 별 소란 없이 아버지를 탁자로 모셔와 앉히자, 생선을 굽던 나는 그 쪽을 힐끔힐끔 보다가 기름이 튀기는 것을 피하지 못한 탓이었다.

괜찮냐고 묻는 동생에게 나는 미소 지으며 손을 휘젓는다.

나는 생선을 굽고 나서 된장찌개에 두부와 호박을 넣어 마무리한다.
심심하게 간이 잘 된 것 같다.
나는 생선과 찌개를 접시에 알맞게 담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먹어.」

나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말을 건네며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식욕이 없는지 젓가락으로 밥이고 반찬이고 깨작거리기만 한다.

나는 아버지의 수저를 들어 밥을 한가득 푸고 그 위에 생선살점을 올리며 나지막이 말한다.

「아버지, 우리 조금만 더 힘내요. 언제나 곁에는 우리들이 있잖아요. 이제 술 끊고, 예전처럼 건강한 아버지로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려면 일단 술부터 끊으셔야 하고요. 당장 끊기 힘드시면 조금씩 줄여 가도록 해요.」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약속해주실 수 있어요?」

아버지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기뻤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강했던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다.

나는 김치, 깍두기 같은 다른 반찬들도 아버지의 밥그릇에 놓으며 힘을 돋우는 말들을 자꾸 건넨다.
동생 녀석도 간간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변함없이 침묵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들과 함께 식사를 끝내고, 동생이 설거지를, 내가 탁자를 치운다.
아버지는 술기운 탓에 피곤했는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우리도 양치질을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같이 눕는다.
우리는 지금껏 방을 따로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과연 내일도 아버지가 똑같을까 하는 걱정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인다.
그러자, 잠든 줄 알았던 동생도 나와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던지 염려하는 말을 건넨다.
나는 애써 나의 생각을 감추고 좋은 말을 골라 녀석을 안심시켜준다.

 

동생의 시선

일요일인 다음날, 나는 불현듯 몰아치는 불안감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 불안이란 바로 아버지의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어제 오고갔던 대화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똑같은 모습이다.

아침부터 비워져 방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소주병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거의 폐인처럼 이렇게 술을 들이부으니, 정신착란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가 제일 허무하고, 더 이상 아버지는 돌아올 가망이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든다.

속으로만 앓고 있는 나와 달리 형은 그 꼴을 보고 성큼성큼 걸어가서 아버지의 세 번째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형의 시선

「무슨 짓이야?」

아버지가 흐릿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한다.

「아버지, 어제 저랑 약속했잖아요.」

「무슨 약속을 해?」

「어제 저녁 먹으면서 했던 그 얘기들, 벌써 또 까먹은 거예요?」

아버지는 긴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고는 내게서 술병을 빼앗아 다시 들이킨다.
아버지의 날숨에서 강한 술 냄새가 풍겨온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어깨를 잡고 내 쪽으로 돌리며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눈을 자꾸만 피하고 있다.

「언제까지 계속 이럴 수는 없잖아요. 이제 돌아오실 때도 되지 않았어요? 부탁드려요 제발….」

「아들아.」

아버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 애비가 할 말이다.
너야말로 돌아와야 해. 너는…. 너희는-」

「또 그 소리에요?」

나는 아버지의 말을 얼른 끊으며 내뱉었다.

「도대체 왜 말 같지도 않는 말로 계속 우리를 괴롭히시는 건데요?」

내가 약간 언성을 높였지만 아버지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중얼댈 뿐이었다.

「이게 왜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니…. 인정할 줄도 알아야해. 겁나더라도 맞설 때가 필요하단 말이다….」

「아니, 그런 헛소리 이제 난 용납 못해요. 다시는 이해하기도 싫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말 입 밖에 내지 마세요.」

내가 차갑게 말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았다…. 알았어….」

 

동생의 시선

형이 화가 나서 방으로 거칠게 들어가 버리자, 원래 말을 잘 못하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따라 들어 가야했다.

우리는 한동안 우리 사이에 침묵이 감돌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내가 차라리 아버지한테 먼저 병원으로 모시겠다고 말해보는 게 어떤지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형은 짜증난 듯 이불을 뒤집어쓴다.
그 의미는 이미 수차례 그래봤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부정적인 몸짓이었다.

나는 형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납득했다.
내가 존경하고 정말 좋아하는 내 형이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나 또한 에라이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철퍼덕 눕는다.

그런데 그때,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버지가 우리 방문을 막 열고 있었다.

 

형의 시선

아버지는 휘청거리는 몸을 하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병원 가자.」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깐 멈칫 했다.
아버지가 먼저 병원가자고 권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잘 됐다고 생각했던 나는 곧 못이기는 척 어슬렁거리며 침대를 나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해 하던 동생도 내 모습을 보고 따라한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 선 채, 술병을 들어 연신 벌컥대면서 우리의 채비를 지켜보고 있다.
아마 빨리 준비하라는 무언의 재촉인 것 같아, 나는 그 요구대로 해주고 서둘러 현관을 나선다.

아버지가 음주상태라 우리는 도로가로 가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는 아버지가 내뿜고 있는 술 냄새 때문인지 코를 연신 벌렁거리며 얼굴을 찡그린다.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아버지가 우물거리며 병원의 위치를 설명했고, 기사는 창문을 조금 연 뒤, 액셀을 밟아 출발했다.

 

동생의 시선

우리 삼부자는 서로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택시기사는 말이 많았다.
그는 정치얘기부터 경제얘기, 자신의 집안얘기까지 정말 전형적인 택시 안에서의 대화주제를 꺼내며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말 걸었다.

아버지는 뚱하게 반응하면서도 기사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고 꼬박꼬박 답변해주었다.

30분 정도 달리다 보니, 10층은 족히 넘어 보이는 새하얀 벽돌의 병원이 눈에 들어온다.
자주 오는 곳이었지만 올 때마다 생소하다.
연중무휴를 내걸어야 될 정도로 큰 종합병원이라 당연히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래서인지 정을 붙이기 어려운 게 그 이유였다.

우리는 입구에서 내린 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자동문을 통과해 하얀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딛는다.

아버지는 카운터에 앉아있던 여직원과 짧게 대화한 후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에 금세 화가 풀렸던지 형은 그 모습을 보고 얼른 달려가 아버지를 부축한다.

 

형의 시선

어디로 가야하는지 이제 외워질 만도 하건만 나는 올 때마다 까먹어 버린다.

「어디로 가야했죠?」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대답 없이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아버지? 힘든데 엘리베이터를 타요.」

「술 깨야 돼.」

아버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고 이미 계단에 발을 딛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한쪽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부축하며 같이 오른다.

몇 층인지는 몰랐지만 10분이나 계단을 올라가서야 아버지는 됐다고 손을 저었다.

술 취한 이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며 올라오니 옷이 땀으로 흠뻑 젖어왔다.

 

동생의 시선

아버지는 흐릿한 눈과 휘청거리는 걸음에도 불구하고 목적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듯 머뭇거림 없이 걸어간다.

아마 그곳은 의사가 앉아있는 상담실일 것이다.
의사의 잔소리를 듣고 나면 당분간 아버지의 술버릇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아버지는 드디어 어느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의사 대신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환자가 누워있었다.

나는 그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어리둥절해 형을 쳐다보았다.
형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그쪽으로 걸어갔고, 잠시 내려다보다가 병상 옆 의자에 앉아, 환자의 손을 잡고 가여운 눈이 되어 그 사람을 훑고 있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분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아버지는 일부러 소리 죽여 울었지만 그래서인지 그 울음은 더욱 서럽게 들렸다.
다시 몇 분간 그렇게 오열 아닌 오열을 하던 아버지는 드디어 숙였던 상체를 꼿꼿이 펴고, 이제는 뭐라 뭐라 중얼대기 시작한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을 수가 없다.
나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마침내 아버지가 온전히 미쳐버린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용기가 나지 않아 형에게 대신 들어 봐달라는 몸짓을 취해본다.

형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의 시선

비켜봐.

나는 동생을 슬쩍 밀어내고 아버지 쪽으로 걸어가 귀를 기울인다.

울음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아버지의 말을 부분 부분은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나왔….」

나는 더 정확히 듣기 위해 한걸음 가까이 간다.

「얼른 일어나. 아들을 생각해서라도….」

 

동생의 시선

형이 손짓한다.
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어보라는 것 같다.
나도 용기를 내어 귀를 기울인다.

「여보, 고개 좀 들어봐….」

여보?

아버지가 또 헛소리를 하고 있다.
어머니는 그 옛날 이미 우리를 떠났는데 여보라니?

형, 아버지가 새장가 들었던 적이 있어?

 

형의 시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미쳐버린 거야. 아버지는 지금 술 취해서 모르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한손으로는 아버지의 어깨를 감싸 쥐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등을 토닥이며 말을 건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그러나 아버지는 내 말은 깡그리 무시한 채 여전히 흐느끼며 중얼대고 있다.

「여보, 여보 나왔다니까….」

나는 억지로 가라앉혔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 대체 모르는 사람 붙잡고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해가 안 돼요. 이 사람이 누구라고 매번 그래요. 어머니가 나랑 불쌍한 내 동생 버리고 떠난 거 알면서 그러세요?」

그러자 아버지는 고개를 홱 돌려 벌개진 눈으로 내게 고함친다.

「야이 자식아!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이럴 거냐. 어? 언제까지 나를 미.친놈 만들 작정이야?」

아버지는 발악하듯 소리쳤고, 갑작스러운 그 질책에 나는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어! 이제 인정 좀 하고 제발 현실로 돌아오렴. 응? 제발, 제발….」

아버지의 어조는 거세게 시작되었다가 애원조로 바뀌었다.

「무슨 말이에요?」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아버지의 시선

둘째아들은 한 달 전, 제 엄마와 형의 교통사고 충격의 여파로 정신착란이 왔다.
원래부터 정신적으로 허약한 녀석이었는데, 이번 사고로 결국 약도 쓸 수 없는 심각한 상황까지 되어 버렸다.
속상하다.

나는 내게 되묻는 아들이 답답해 녀석에게 다시 크게 소리친다.

「이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교통사고를 당한 네 엄마잖아!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 엄마가 널 버리고 왜 떠나?」

나는 산소 호흡기를 낀 환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동생의 시선

형. 아버지가 아까부터 자꾸 뭐라는 거야?

 

형의 시선

나도 몰라. 정말 미쳤나봐.

 

아버지의 시선

「아니다.
아니야. 아빠가 미안하다.

나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울먹인다.

「힘들지만 산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야지. 나도 더 노력할 테니, 정신 차리고 마음 굳게 먹었으면 좋겠구나. 이제 일주일 뒤면 벌써 네 형 49제야…. 이제 네 형을 놔줘야해. 현실로 돌아와 제발. 그리고 우리 다시 예전처럼 행복하게 지내자.」

 

나의 시선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형이 이제 없다고?

갑자기 과거의 기억들이 재조정되고 있다.

교통사고 여파로 한동안 충격에 빠질 것이라는 의사의 얘기는 아버지가 아닌 나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잃고, 와이프는 기약 없는 혼수상태에 들어섰으며, 둘째아들이 정신병까지 오자, 상심을 견디지 못하고 일도 관둔 채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렸다.

학교에서 구타당할 때, 눈을 까뒤집고 목소리와 얼굴 표정까지 형의 모습으로 바꿔버린 나를 보고 친구들이 사이코패스에,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도망가고 있다.

나는 형의 여자 친구에게 계속 연락을 한다.
그렇지만 답장은 없다.

내 지갑 속에는 중국집 쿠폰이 열아홉 개 있다.
이제 한 번만 더 그곳을 방문하면 탕수육을 무료로 먹을 수 있다.

나는 내 오른 손등을 본다.
기름 튄 벌건 화상자국이 있다.
나는 혼자 밥상을 차렸고, 아버지와 둘이 식사를 했으며 아버지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렸고, 혼자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끝냈다.

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내가 아버지를 부축하고 계단을 올라 이곳까지 올라왔다.

내 머릿속에 진실이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

형을 떠나보내라고? 아니! 그럴 수 없다.

무슨 소리에요. 아버지. 형은 언제나 내 안에 나와 같이 있다구요. 나를 평생 지켜준다 했거든요. 절대 나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형도 영원히 내 안에서 지내는 게 편할 걸요. 

그러니 제발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출처 : 오유 마지굿



자연보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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