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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검은 커튼이 쳐진 고시원 3 (털 뱀)

title: 연예인1익명_2c14562014.09.01 09:19조회 수 2788추천 수 2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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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털 뱀

 

태풍이 북상하면서 장마철 아닌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는 형민과 헤어지고 갑자기 쏟아지는 빗방울을 책가방으로 막으며 정신없이 고시원으로 뛰어왔다.
아침에 환기시킨다고 창문을 열어놨던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자칫하다간 책상이며 책꽂이의 책들이 몽땅 젖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동안 학원수업을 필기했던 내용이 잉크가 번져서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옆방에서 내 메모를 봤는지도 궁금했다. 실망스럽게도 내 기대와는 달리 옆 방의 메모지는 그대로 붙어있었다.
정말로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보고도 여봐란 듯이 다시 붙여놓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 위쪽 창을 보니 방에 불이 꺼진 것으로 보아 아무도 없는 듯했다. 어쩌면 어저께부터 들어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일은 정말로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내 방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 책상이나 책들은 젖지 않았다.
두꺼운 커튼이 제대로 우산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막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는데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식 깊숙한 것에서 본능적인 무엇이 ‘움직이지 마’하고 경고를 하고 있었다. 무의식만이 알아채는 위험에 대한 빨간 신호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을려구. 다시 멈추었던 손을 뻗자 ‘햐악-’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너머 주차장 쪽에서 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였다.
 고시원에 처음 온 날 보았던 한 쌍의 고양이가 생각났다. 놈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저렇게 겁을 먹고 있는 것일까.
잠깐. 커튼의 한 가운데가 공 모양으로 살짝 부풀어 있다. 아니, 그냥 표면이 매끈한 공이 아니었다.
가운데 돌출부를 기준으로 양쪽에 움푹하게 꺼져있다. 호흡과 같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커튼은 반구의 포면에 달라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했다.
마치 사람의 얼굴에 천을 씌워놓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의 상상이 멋대로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내가 있는 고시원창문은 2층에 있었다.
사다리라도 타지 않는 이상 이정도 높이에 있는 창문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이 존재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커튼을 젖히면 누군가가 그곳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 저 뒤에는 아무것도 없을거야. 단 1초면 돼. 어서’ 

나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내 숨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막 내 손이 커튼에 닿으려는 순간, 꽈광-! 하는 굉음과 함께 커튼이 바람에 펄럭였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그 순간 나는 똑똑히 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하얀 여자의 얼굴이 잠깐 커튼 뒤에 나타났다 커튼 뒤로 사라지는 것을.
여자의 눈은 하얀 점막에 뒤덮혀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샤악...샤아악...천 같은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복도 쪽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발소리를 죽이느라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걷는 소리겠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체구가 작은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몸은 상당한 중량이 나간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발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다.
그러나 들리는 소리는 그냥 기다란 천을 질질 끌고 가는 것처럼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마찰음뿐이었다.
그동안 몇 번이고 방문을 열어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유독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선가 젖은 흙 비린내가 피어오른다.
 오싹한 냉기가 전류처럼 등줄기를 훑고 지나간다. 탁. 나는 형광펜을 법전 위에 내려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소리는 막 내 방 앞쪽을 지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몸을 낮추었다. 

방문에는 두 개의 환풍구가 있었다. 방충망이 쳐진 위쪽 미닫이 창문과 얇은 나무판자가 가로로 줄지어 쳐져 있는 아래쪽 환풍구였다.
중앙냉방이 중지되는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대에 복도에서 별도로 가동되는 에어컨의 차가운 공기를 방 안으로 전달해 주는 구멍이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바닥에 업드려 아래쪽 환풍구의 나무창살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샤악..샤악..좁고 가로로 퍼진 시야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의 발끝이 나타났다. 퍼런 기운이 감돌정도로 창백한 하얀 발이었다.
뻣뻣하게 경직된 발에는 맹금류의 발톱같은 누렇고 긴 발톱이 자라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깍지 않았을까. 튀틀리고 꼬인 발톱의 끝부분에는 빛바랜 붉은색 매니큐어가 칠해져있었다.
‘말도 안돼, 이럴 순 없어..’ 아무리 발레리나라고 해도 서 있으려면 발가락 끝이라도 바닥에 닿아야 한다.
그러나 그 발은 발톱 끝만으로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공중에 살짝 떠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샤악..다시 천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의 발이 앞으로 전진했다. 내딛는 걸음이 아닌 미끄러지는 듯한 수평이동이었다.
스스슥..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여자의 발을 뒤따라가며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낸다. 천이 끌리는 듯한 소리의 정체는 바로 그것이었다.
 꿀꺽..목구멍으로 침을 삼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어쩌면 저 발의 주인이 나의 시선을 눈치 채고 갑자기 방향을 틀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위의 공기가 젤리처럼 굳어지며 나를 압박하는 느낌.
그저 숨조차도 아껴 쉬며 어서 이 순간이 지나가길 기도할 뿐이었다. 흡. 나는 숨을 삼켰다. 내 문 바로 앞에서 걸음이 몸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얀 발은 마치 수소풍선이 위로 올라가듯이, 천천히..위로 올라갔다. 말도 안돼..
나도 문 너머에 있는 누군가의 움직임을 마음 속으로 쫒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로.,.조금 더 위로..나의 시선은 하얀 페인트를 칠한 방문의 나뭇결을 더듬고 위쪽의 환풍구로 향했다.
마침내 나의 시선이 환풍구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는 보라색 혀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방이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다시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빗소리가 커졌다. 바람에 커튼이 펄럭인다.
 나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두 손으로 고정시키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검은 커튼이 마구 휘날리고 있었다. 고양이의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주차장 한 가운데 커다란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고양이의 코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콘크리트 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고양이가 있던 자리에는 검붉은 핏자국만이 남아있었다.
사체는 상가 관리인이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숙였던 상체를 일으키고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직 아침 7시인데도 부지런히 뜬 태양이 몸을 달구고 있었다. 도대체 고양이를 죽인 것은 어떤 존재였을까.
나는 그 미지의 존재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바닥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러나 나의 눈에 띄는 것은 몇가닥의 길다란 머리카락 뿐이었다. 제기랄, 안이건 밖이건 머리카락투성이군. 

“아저씨, 뭐 잃어버리셨어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7-8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곁에서 말을 붙였다.
청재질로 된 멜빵바지에 빨간 운동화를 신은 귀여운 꼬마였다.
나는 꼬마의 운동화를 보는 순간 전에 복도에서 보았던 기묘한 그림 속의 아이를 떠올렸다. 

“으응, 아니다. 너 혹시 여기에 죽어 있던 고양이 못 봤니?” 

“검둥이요? 걘 어젯밤에 털뱀한테 잡아먹혔어요.” 

“털뱀?” 

털뱀이라니. 물뱀은 들어봤어도 털뱀은 난생 처음 듣는 말이다.
‘털’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듯한 어감 때문일까? 무섭다기 보다 왠지 정감이 갔다. 

“네 털뱀이요. 온몸에 길다란 털이 숭숭 나있는 커다란 뱀이에요. 진짜 어마어마하게 커요.” 

꼬마는 양손을 가능한 한 크게 벌리며 뱀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꼬마의 말에 따르면 털뱀은 최소한 직경 70cm, 길이 30미터 이상의 몸을 가진 괴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뱀이라는 아마존의 비단구렁이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런 괴물이 숨어있을 공간이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킹콩이 63빌딩에 숨어산다면 믿을까. 

“그래, 넌 그 털뱀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니?” 

“그럼요. 친구들이랑 벌써 몇 번이나 봤는걸요. 그 뱀은 낮이나 사람들이 있을 때는 안 나와요. 새벽에 돌아다닌다구요.” 

꼬마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밤중에 털뱀을 구경한다는 것은 꼬마들 사이에서 일종의 담력시험인 것 같았다.
원래 꼬마 때는 꿈과 환상을 잘 구분 못하는 법이다. 자신이 머릿속에서 상상한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그대로 믿어버린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기꺼이 꼬마의 말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럼 그 커다란 뱀이 낮에는 어디 숨어있지? 아저씨가 보기에 이 근처엔 숨을 만한 곳이 없는 것 같은데.” 

“저쪽에요.” 

꼬마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은 옥수수가 자라고 있는 주차장 텃밭이었다. 

“저쪽에 가면 털뱀이 남긴 털들이 많이 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꼬마가 앞장서서 뛰어갔다. 통 통 튀는 듯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빨간 운동화에서 삑 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요.” 

꼬마는 한 웅큼의 털을 내게 내밀었다. 

“하지만 이건..”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난처했다. 사탕가게의 위그든씨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옥수수털이잖니.” 

꼬마가 내민 것은 옥수수껍데기에 붙어있는 털들이었다. 그 텃밭에 있는 옥수수들은 유난히 털이 길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작은 사람의 머리통이 달린 것처럼 털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아니에요. 그건 털뱀이 밤마다 묻히고 가는 거에요. 여기 털뱀의 굴이 있어요. 밤만 되면 커다란 구멍이 슈우욱 하고 열린다니까요.” 

또다시 꼬마가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꼬마에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하는 허탈감에 어깨가 늘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뱀이 즐겨먹는 풀이에요.” 

꼬마가 넓은 입사귀가 갈고리처럼 갈라진 식물을 가르키며 말했다. 언젠가 총무실에서 보았던 ‘아키실론’이라는 식물이었다. 

“그럼 이풀은 이름이 뭐지? 혹시 알고 있니?” 

나는 꼬마가 그것의 이름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건..” 

꼬마가 내 눈치를 보며 망설였다. 말 못할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너도 모르니? 이거 아저씨는 실망인데.” 

내가 약을 올리자 꼬마가 발끈했다. 

“알아요! 우리들은 이걸 ‘노예풀’이라고 불러요. 입사귀를 태워서 냄새를 맡으면 말 안 듣던 얘들도 노예처럼 고분고분해져요.
막 이상한 것들도 보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 같다는 얘들도 있어요. 이거 어른들이 알면 안 되는데..” 

꼬마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전형적인 환각효과다.
나는 식물의 줄기를 꺽어 진액을 코에 가져다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시원에 감도는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물씬 풍겨졌다. 

 

 

 

9월이 되었다. 한 여름 내내 그토록 사람들 삶아 대던 열기도 잠시 주춤했고 아침 저녁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내년 2월이 시험이라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는 편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늘어지려는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 

“야 나 먼저 좀 갈게.” 

나는 점심만 먹고 가방을 쌌다. 

“어딜 가? 오후 수업 안 들을거야?” 

같은 학원에 다니는 동현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몸이 좀 안 좋아.” 

“하긴 오늘따라 안색이 좀 안 좋네. 어디가 아프냐?” 

“허리. 저번 달도 그러더니 요새 이상하게 자꾸 허리가 아파.” 

나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콩팥 있는 부위가 돌이 얹혀있는 것처럼 묵직하다. 전에는 전혀 이상이 없던 곳이었다. 

“야, 너 생리 하냐?” 

동현이 내 등 뒤에서 질 낮은 농담을 하고 킥킥거렸다. 

 

 

 

고시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약국에 들러 진통제를 샀다. 요즘 들어 뭔가 이상하다. 매달 같은 시기에 느껴지는 요통.
 내가 여자라면 이 통증의 원인은 자명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었다.
 요즘 내 주위에는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벽지만 해도 그렇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낡은 가구들과 묘한 위화감을 이루던 새 벽지.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처음 보는 낙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어서 ‘시간표나 붙어놓을까’했던 자리에 깨알같은 글씨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답답해‘ ’어서 날 꺼내줘‘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어‘등등..내 글씨체는 아니었다. 꼭꼭 눌러쓴 여자의 글씨체였다.
내가 낮에 방을 비우는 사이 누군가 몰래 들어오는가 싶어 문틈에 살짝 종이 조각을 끼우고 나갔지만 내가 돌아왔을 때도 그것은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벽에는 또다시 새로운 낙서가 되어있었다. 새로운 내용도 없었다. 답답하다, 자기를 꺼내어달라,
누군가를 죽여버리고싶다는 지극히 단순한 메시지가 주문처럼 반복되어 빼곡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밤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면 잠귀가 밝은 내가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창문으로? 2층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도 그리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방에 있는 누군가가 한 짓이다. 그 누군가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단 한사람 밖에 없다. 바로 나. 

그날 밤 나는 자기 전에 내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히고 잤다.
만일 나에게 몽유병이 있어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낙서를 한 것이라면 틀림없이 다음날 아침 내 필기구 중 하나에서도 같은 잉크가 발견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귀신의 소행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이부자리에 잉크가 묻을 까봐 손을 밖에 내놓은 채 안 오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다음날 아침 알람소리에 눈을 뜬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토해내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굵고 큰 낙서였다.
‘답답해’ ‘죽여버릴거야’ ‘꺼내줘 꺼내줘’하는 낙서가 온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마구 휘갈겨 쓴 글씨는 그 자체가 절규를 하는 것 같이 광기가 서려 있었다.
물론 내 손과 옷도 잉크 투성이였다. 이건 도대체...나는 검은 피로 범벅이 된 것 같은 벽지를 살짝 뜯어보았다.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벽지 속에 있는 예전 벽지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빼곡히 적혀있었던 것이다.
찌이이익..벽지를 더 뜯어보았다. 사람의 피부같이 질긴 벽지가 비명을 지르며 뜯겨진다.
그 속에는 작고 빽빽한 글씨가 옷감패턴같이 기계적이고 균일한 크기로 온 벽과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방 전체가 똑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찌이이익..찌이이익..두려움에 휩싸인 나는 정신없이 벽지를 찢어발겼다.
피처럼 붉은 글씨로 씌여진 똑같은 메시지가 나타난다. 그 속에 있는 벽지에도, 또 그 속에 있는 벽지에도... 

 


약국에서 신경안정제를 사고 나와서 막 식당가 골목을 꺽는 순간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연극무대 위에서 갑자기 조명이 바뀐 듯한 느낌.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매일 오가던 길이지만 느낌이 달랐다
. 마치 아주 오래전에 이곳을 거닐던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가? 공부하기 힘들지? 우리 잠깐 떡복이 먹으러 갈래? 

갑자기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밝은 표정의 20대 초반의 여자가 나를 향해 말을 거는 장면이 나의 뇌를 점령한다.
주위의 풍경은 동일하지만 뭔가 촌스럽고 빛바랜 듯한 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옛날 영화의 필름을 핀셋으로 집어서 나의 뇌 속에 삽입한 것 같았다. 

-저기, 우리 친구하지 않을래? 나도 시험 준비하고 있어. 우리 같이 열심히 해보자 

젊은 여자가 희고 길죽한 손을 짝 펴고 내민다. 환하게 웃는 미소. 양 볼의 보조개가 귀엽게 들어간다.
누구지? 복장은 촌스러웠지만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은 얼굴이다. 

-와 너 머릿결 되게 좋다. 시험 합격해도 자르지 마. 알았지? 

밀려오는 행복감. 뭐지..뭐냐 이 느낌은.. 

“학생 괜찮아?” 

마침 길 가던 아주머니 한분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부축해 주었다.
간질병 환자 정도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괜찮다고 하고 일어나서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발이 납덩이 처럼 무거웠다. 요즘 살이 찌지 않았는데도 항상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처럼 몸이 무겁다.
누군가 자라나고 있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나의 몸과 의식을 점차 점령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시원 입구에 들어오면서 나는 습관처럼 좁은 창문을 통해 총무실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총무실엔 아무도 없었다. 책상위에 여전히 놓여있는 검은 가죽표지의 성경책만이 보였다.
 어쩌면 그것은 성경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듯이 검고 두툼한 책의 옆면에 금분이 발라져 있다고 모두 성경책이라고 할 수 는 없다.
그것은 선입견에 따른 인지적 조건반사에 불과하다.
수납창구를 통해서 얼핏 보니 검은 표지 위에는 ‘The Book of Raguel'이라는 영문이 금박으로 박혀있었다. 

‘라구엘의 서? 이건 뭐지? 성경의 외전인가?’. 

한때 판타지 소설에 빠지면서 미카엘이니 우리엘이니 하는 천사의 족보를 달달 외우고 다닌적도 있다.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진 상위천사 중에서도 라구엘은 천사이면서 악마에 가까운 특이한 존재였다. 왠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고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푯말이 걸린 총무실로 들어갔다. 

 


내 예상대로 그것은 성경책이 아니었다. 표지를 넘기는 순간 십자가 문양이 나타났다.
그러나 평범하게 볼 수 있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십자가의 네 끝이 갈고리처럼 옆으로 꺽여 있어서 마치 세로로 길게 잡아늘린 불교의 ‘卍’자나 나치의 문양이 연상되는 독특한 형상이었다.
 갈고리의 끝은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왔다. 그러고 보니 전에 원장의 손가락에서도 같은 문양을 본 적이 있다.
좀 더 책장을 넘겨보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라틴어인가? 아니면 그리스어? 상형 문자 같은 꼬불꼬불한 글자와 태양, 달, 목성 등의 그림이 섞여있는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문자였다. 

“거기서 뭐하세요?” 

무뚝뚝한 총무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총무가 문가에 서서 표정 없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 여쭤볼게 있었는데 그냥 아무도 안 계시길래..” 

나는 입에서 나오는 데로 둘러댔다. 제길, 딱 걸렸구나. 

“여긴 출입금지입니다. 푯말 안보이세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총무실을 나오는데 뒷통수에 총무의 따가운 눈총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 참, 준영씨!” 

“네?” 

심장이 벌렁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하수도 공사 때문에 오늘저녁부터 낼 아침까지 이 일대가 정전이랍니다. 알아두세요.” 

“아..네 알았습니다.” 

나는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났다. 총무의 몸에서는 역겨운 아키실론냄새가 났다. 

 


“잘 지냈어?” 

형민을 만난 곳은 예전의 그 감자탕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민은 얼굴이 밝아져 있었다. 

“뭐 좋은 일 있냐? 얼굴에서 아주 빛이 나는 구나.” 

“응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지. 어머니가 어제 퇴원하셨어.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데.” 

“뭐? 정말? 말기암이라서 힘들다고 하시지 않았어?” 

“응, 의사도 불가사의하데. 이런 게 바로 기적이라고. 아마 돌아가신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밝아진 형민의 얼굴을 보자 나도 안심이 되었다.
식사가 나오자 나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머리카락..고시원을 감도는 이상한 향 냄새..창문에 보이던 여자의 얼굴..내 방을 가득 메우 낙서들, 라구엘의 서..등등 내가 고시원에 들어갔을 때 일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온갖 기이한 일들을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식사가 다 식어있었다. 

“자꾸 너한테 나타난다는 그 귀신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에 말한 그 여자하고 관련이 있는 것 같아.” 

김치를 한 조각 집어먹으며 형민이 말했다.
저번에 맛본 이후로 어지간히 김치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늘상 하던 식사기도도 빼먹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지만 그건 25년 전 이야기잖아? 더구나 고시원도 다르고.” 

“자세한 내막은 나도 잘 몰라. 일단 이야기를 다 들어봐. 저번에 내가 말한 그 여자 고시생 있지? 이름도 기억났어. ‘
이수미’라는 여잔데 당시 27살이었데. 그때 이야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그 여자한텐 좀 특이한 징크스가 있었어.
머리를 자르지 않고 계속 길렀던 거야.
 합격할 때까지 자르지 않겠다고 스스로 한 맹세였다나봐.
 어쨌든 매년 낙방이 계속 되면서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서 거의 종아리부근까지 내려올 정도가 되었지.
아마 그런 모습으로 흰 옷이라도 입고 밤 중에 돌아다니면 아무리 담 센 사람이라도 기겁을 했을걸? 아마 예쁜 얼굴을 하고도 친구가 없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을 거야.” 

“하지만 내가 본 여자의 머리카락은 그 정도가 아니었어. 바닥에 질질 끌리고도 남을 정도였다구.” 

“나도 백프로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야. 아무튼 시험날짜가 코앞에 다가오고 그 여자도 이번에는 붙을 자신이 있었나 봐.
노트에 각 과목에 대한 요점 정리도 완벽하게 했고. 그런데 같은 고시원에 있던 다른 여자가 그녀의 노트에 눈독을 들였던거야.” 

식사를 하는 동안 형민의 말은 장황하게 계속 이어졌다. 간단하게 간추리면 이렇다.
이웃 방 여자는 수미가 없는 사이 그녀의의 노트를 몰래 훔치려다 마침 돌아온 수미에게 들키게 된다.
둘은 노트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이웃 여자가 수미를 목 졸라 죽였다.
그것도 손이 아니라 길게 자라난 수미의 머리카락으로. 여자는 죽은 수미를 천장에 매달아서 자살로 위장했다.
노트 덕분이었는지 그 해 시험에서 여자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한을 품고 죽은 수미는 고시원 주변을 맴도는 커다란 뱀이 되어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다니는 고시생들을 잡아먹고 산다고 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후련함 보다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저 학원가에 떠도는 흔하디 흔한 괴담 중 하나였다. 더구나 원혼이 뱀이 되었다니.
요즘 세상에는 세살박이 아이도 믿지 못할 만큼 유치했다. 가만, 뱀? 뱀이라..저번에 주차장텃밭에서 만난 꼬마의 말이 떠올랐다.
그 아이도 같은 말을 했었다. 고시원 주위를 맴돌며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거대한 털뱀. 이것은 우연일까?
 그 후로도 몇 번 꼬마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지만 요새는 통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고시원에선 하루 빨리 나와. 당장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에 당분간 있어도 괜찮구..” 

“고시원 비는 어떡하구? 할인혜택 때문에 반년치를 한꺼번에 냈는데 아직도 많이 남았단 말야.” 

“참 내, 지금 그깟 돈이 문제냐? 나 같으면 짐도 내버려두고 도망갈 판인데.” 

“그 문제는 좀 더 생각해 볼게. 어쨌든 니 공부하기도 바쁠 텐데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일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해. 친구 좋다는게 뭐냐” 

“알았다. 임마.” 

나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아줌마한테 김치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아예 김치를 한 봉지 싸주었다. 

“사양하지 말고 가져가서 먹어요. 반찬가게에서 사먹는 거 보단 훨씬 나을테니.
예전에 요 옆에 고시원이 H고시원이었을 땐 여학생들이 제 집처럼 들락거리며 가져다 먹었다우.” 

“네?” 

“학생, 몰랐어? 15년 전엔 거기가 여자고시원이었던 거. 그 후로 뭔 일이 있었는지 잠깐 문을 닫았다가 남자전용으로 바뀌었지 뭐야.” 

그 다음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형민이 부르는 소리도 뒤로 하고 고시원으로 뛰어갔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요?” 

총무가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래요. 매일 밤마다 긴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를 찾아와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내 방에선 나온 머리카락들, 이상한 소리가 담긴 레코드판, 옆방에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벽을 두드려대지 않나,
정말 미치겠단 말입니다! 더 이상은 필요없어요. 어서 남은 금액이라도 돌려주세요.” 

나는 흥분해서 횡설수설했다. 이곳이 15년전 H고시원이었다면 그동안 거듭되었던 이상한 현상들도 이제 설명이 되었다.
이곳에는 억울하게 죽은 수미의 원혼이 깃들어있다.
가끔 꿈속에 나타나는 긴 머리카락의 여자. 내 방을 가득 메운 기괴한 낙서들. 더 이상 나는 속편하게 이성을 찾고 있을 수 없었다. 

“고시원 규정상 개인적인 사정에 의한 건 환불불가에요.
제가 주인이 아니니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도 아니구요. 그러기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첨부터 그 방엔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게 지금 제 잘못이라는 겁니까? 그럼 15년전에 죽은 여자 귀신이 나오는 방에 계속 살라구요?”


나는 필요하다면 멱살잡이도 불사할 생각이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귀신은 무슨 귀신이에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준영씨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요.
고시생 중엔 종종 그런 경우가 있거든요.
혹시 고시원이 맘에 안 들어서 옮기시려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씀하세요” 

이건 순전히 내가 환불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는 투였다. 

“그딴 소린 하지 말아요! 제가 분명히 봤다구요, 커튼 뒤 나타난 그 여자를요!” 

“그래요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요, 준영씨 말에서 한 가지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어요.” 

“말이 안 되다니요?” 

“옆방에서 자꾸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그러셨죠?” 

“네! 그것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구요. 믿기지 않으시면 하루라도 방을 바꿔서 써 보시던가요.”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 방엔 사람이 살지 않거든요.” 

“..네?” 

어안이 벙벙했다. 단어 하나하나는 이해가 되어도 전체적으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으신 내용 그대로예요. 247호실에 사시던 분은 근 한 달 간 행방불명상태에요.

그러니까...정확히 준영씨가 입실하시던 날부터네요. 연관성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준영씨가 의심스러운데요?” 

총무가 출석카드를 뒤적이며 나에게 미심쩍은 눈초리를 던졌다. 형민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원한을 품고 죽은 여자의 영혼은 뱀이 되었다. 그리고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고시생을... 

“그런..그건,,말도 안 돼요. 그럼 내가 매일 밤 듣는 그 소리는 뭐죠? 사람 목소리도 들린다구요!” 

“신경정신과병원에 가셔서 상담을 하시거나 종교를 통해서 마음의 안식을 얻으시는 편이 좋겠어요.
너무 그렇게 공부에 스트레스 받으실 것 없어요. 커피나 한잔 하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세요." 

총무가 일어서서 더러운 컵을 집어 들었다. 

“됐어요, 환불해 주지 않으면 그냥이라도 나갈 테니까 내버려 두세요” 

화가 난 내가 방문을 닫고 나가버리자 총무가 다급하게 따라 나오며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내일 원장님께서 오시니까 한번 원장님하고 말씀해 보세요.” 

 


그날 밤이 그 고시원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원장의 허락이 있든 없든 이미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총무를 비롯해서 고시원에 사는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모두 한통속이 되어서 짜고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책과 짐을 대충 정리하고 자리에 누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천장의 불이 꺼졌다.
정전인가. 낮에 총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어둠 속에 누워서 지금까지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새로운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옆방의 남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내가 본 여자는 나만의 환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언어로 씌여진 총무의 책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묘한 모양의 갈고리 십자가 목걸이는? 지금 이수미라는 여자가 어떤 여자였을까 등등. 한참을 뒤척이며 생각했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주차장 쪽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갖난 아기의 피 먹은 울음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저번에 커튼 틈으로 보았던 끔찍한 여자가 생각났다.
순식간의 주의의 공기가 식어간다. 또다시 어디선가 풍겨오는 비릿한 흙냄새.. 

‘웃기지 마 이것은 환각일 뿐이야. 그래, 나가자. 한번만 더 두려움에 직면해 보자.’ 

모든 것은 내 상상이 빚어낸 환상이다. 수험공부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잠시 인지능력이 문제가 생겼을 뿐이다.
 이 두려움에 정면으로 도전해 이겨내야 한다. 자신의 상상이 만들어 낸 괴물조차 직면하지 못하는 녀석이 무슨 놈의 시험이냐.
설혹 시험에 합격한다 하더라도 위험을 피해가며 한심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 뻔하다.
평생 비겁자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라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밖은 어두웠다. 낮부터 낮게 드리운 구름이 달빛과 별빛을 모두 막고 있었다.
때마침 정전으로 몇몇 건물에서 촛불이 보일뿐 먹종이를 뚫고 나아가는 듯한 어둠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암흑이 있었던가. 나는 라이터를 켜고 그 불빛에 의지해 주차장 뒤쪽으로 향했다.
그 미약한 불빛이라도 없으면 이 두려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룩무늬 고양이는 주차장 한복판에 서서 고슴도치처럼 털을 세우고 울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보고 겁에 잔뜩 질려있었다. 고양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은 옥수수가 심어진 주차장 텃밭이었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진다.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경련을 일으킬 것처럼 광기에 가까운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때였다. 옥수수밭 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아스팔트를 잡아먹고 피어났다. 그림자는 타원형으로 변하더니 곧 길죽하게 늘어졌다.
 뱀처럼 변한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고양이를 향해 접근했다. ‘말도 안돼!’ 나는 재빨리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차장내에 그림자를 만들어 낼만한 길죽한 물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봇대조차도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림자는 점 점 고양이를 향해 다가왔다.
고양이는 뱀의 마력에 거린 개구리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고 발악을 하다가 마침내 그림자가 앞발에 닿자 총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튕겨 올라 그대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잠시 멈칫하던 그림자는 고양이의 몸을 휘어 감고 그대로 고시원 쪽을 향해 나아갔다. 

‘도대체 저건 뭐지?’ 

주차장을 가로질러 고시원 건물까지 도달한 길죽한 그림자는 괴물이 수면에서 고개를 쳐 들 듯 천천히 바닥에서 입체적으로 튀어 올랐다.
반구형으로 변한 검은 그림자 밑으로 살짝 드러나는 하얀 부분. 그것을 따라 검고 가는 가닥들이 같이 딸려 올라간다. 

‘설마..’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마에 이어 콧날과 얼굴 전체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거짓말처럼 솟아나왔다.
목 아래부분은 절단되서 없었다. 흡사 코브라가 고개를 세우듯 죽은 여자의 얼굴이 길디 긴 머리카락을 이끌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은 바닥에 닿고도 텃밭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공중에 떠오른 여자의 얼굴은 소리도 없이 천천히 2층 고시원의 검은 커튼으로 향했다. 

-온몸에 길다란 털이 숭숭 나있는 커다란 뱀이에요. 진짜 어마어마하게 커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나는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라이터가 견딜 수 없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나는 잠깐 불을 껐다가 식기를 기다려 다시 켰다. 괴물은 여자의 얼굴을 머리로 하고 검고 긴 머리카락을 몸통으로 하는 거대한 뱀의 모습이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냄새에 오장육부가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뜨겁다. 또 다시 라이터가 달아오른다.
들고 있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고시원 창문에 도달한 여자의 얼굴은 창문을 천천히 점검하였다.
마치 냄새를 맡 듯 유리창에 코가 닿을 듯이 접근하며 신중하게 방 하나 하나를 살폈다.
마침내 내 방 위치에 도달한 괴물은 잠시 창문 이곳 저곳을 살피며 코를 벌름 거리더니 입에서 가늘고 검은 것을 주욱 늘어뜨렸다.
검은 혀였다. 혀는 여자의 턱 부근까지 길게 늘어졌다. 혀는 살아있는 환형통물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을 위아래로 핥았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피를 받아먹듯 아주 천천히. 

떨그렁!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내가 라이터을 떨어뜨렸다. 휙! 그 소리에 여자의 얼굴이 내쪽을 돌아보았다.
여자의 부패된 하얀 눈과 마주친다. 나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어 라이터를 찾았다.
찰칵..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불이 켜지지 않는다. 찰칵..찰칵..마침내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시 불을 켰을 때,
슈아아악-여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훅-라이터 불꽃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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