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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공포소설 단편작 '홈쇼핑'

개팬더2015.06.09 23:17조회 수 798추천 수 1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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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 바닥은 항상 지저분했다. 식당 전단지와 각종 우편물들이 범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던 종이와 비닐들은 어느새 계단까지 내려와 해옥의 통행을 방해했다.
마치 점점 번져 가는 습진처럼.

위의 두 층만 주거용으로 쓰는 4층짜리 건물에는 우편함이 없었다.
집 주인에게 몇 번이나 건의를 했지만 홀로 사는 젊은 여자의 말이라 그런지 대답이 늘 건성이었다.
어차피 해옥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라고 해 봐야 핸드폰, 인터넷, 신용카드 등의 청구서가 대부분이었다.
괜히 집주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모처럼 저렴한 보증금으로 들어온 월세 집을 나가고 싶진 않았다. 문제는 옆집이었다.

3층은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두 집이 나란히 위치했다. 그중 왼쪽이 해옥의 집이었다. 현
관문 상단에는 유성 매직으로 휘갈겨 쓴 30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집으로 향하던 해옥은 전단지와 우편물들이 계단을 세 칸이나 차지한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발로 전단지를 밀어내고 자신의 집을 지나 4층까지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4층은 전체가 건물 주인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해옥은 팔짱을 꼈다. 가래 끓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뉘쇼? 이 시간에.”

“301호예요.”


찰칵,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앞머리가 훤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아가씨가 시간이 몇 신데. 날 밝을 때 놔두고 왜 매번 이러는지 몰라.”

“날 밝을 땐 항상 밖에 있는걸요. 집세 낼 돈은 벌어야죠.”

집주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해옥도 따라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저씨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보시잖아요. 저 쓰레기들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냥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어두울 때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겁난다고요.”

“이사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보면, 그냥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일 게 뻔하지.
내가 날 밝으면 싹 갖다 버릴 테니까 들어가기 전에 아가씨 거 섞여 있는지 확인해봐. 됐지?”


해옥은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3층으로 몸을 돌렸다. 몇 계단 내려가기도 전에 집 주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참, 구정 지났으니까 다음 달부터는 약속대로 5만 원 오르는 거 알지?”


해옥의 볼이 한순간 씰룩 하고 움직였다.


“네, 알아요.”


집주인은 대답 없이 문을 닫았다. 찰칵,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해옥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아랫입술로 바람을 뿜어 올렸다.
그러고는 물이라도 쏟은 듯 어지러운 3층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우편물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몇 개의 우편물을 건져 낸 후 해옥은 손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해옥은 현관 등부터 켰다. 가방을 벗고 실내등을 켜며 우편물들의 겉봉을 살폈다.
네 개의 우편물 중 세 개는 각각 신용카드, 핸드폰, 인터넷의 요금 청구서였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나머지 한 개를 보았다. 청구서와 같은 크기의 우편물이었다.


‘302호 장석윤 귀하’


장석윤은 옆집 남자의 이름이었다. 즉 이 우편물은 해옥의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몽땅 쓰레기통행일 테니 굳이 밖에 둘 필요도 없겠지.”








그러면서 해옥은 현관 근처의 폐지통 앞으로 다가갔다.
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겉봉을 확인하는 해옥. 이름 밑으로 아래 3분의 1정도가 잘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초특급 할인’


해옥은 ‘할인’이라는 말에 약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갈등에 빠졌다.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도 되나 싶은 죄책감,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그냥 버리든 보고 버리든, 어차피 버리는 것은 똑같으니까. 해옥이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개봉했다.
세 번 접힌 분홍색 A4 용지가 내용물의 전부였다. 그 안에는 안내 사항이 담겨 있었다.


‘초특급 할인! 이번 주는 30 회 특집입니다. 변함없이 오전 두 시 428번에서 만나요.’


그리고 발신인은 <리얼홈쇼핑>이었다.


“홈쇼핑이라는 걸 보니까 428번은 채널인 모양인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아니, 그런데 428번에 방송이 나왔었나?”


해옥이 소파 팔걸이에 올려둔 리모컨을 집었다. 티브이 전원을 켜고 채널을 428번으로 돌렸다.
예상대로 벌들의 향연과도 같은 흑백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나타났다.
생각해 보니 유선 방송의 채널은 기껏해야 95개 정도였고 100번 이상으로 채널을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처음 티브이를 샀을 때 호기심에 나오지도 않는 채널을 마구 돌린 기억은 있으나 428번까지 갔을 리는 만무했다.

이쯤 되자 마약 같은 호기심이 해옥을 자극했다. 요즘 즐겨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초특급 할인’, ‘30회 특집’, ‘오전 두 시’, ‘428번’ 등의 토막 난 문구들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눈꺼풀은 반항했고 안대를 착용하든 양을 세든 허사였다.








“짜증나.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두어 번을 더 뒤척였지만 잠은 저 멀리로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시계는 12시 30분. 해옥은 다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심드렁한 얼굴로 리모콘을 조작하다가 문득 428번으로 채널을 맞추었다. 화면은 여전히 흑백. 해옥은 앞의 채널로 돌아왔다. 영화 채널들은 일제히 연소자 관람 불가의 영화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해옥은 그중 하나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미남 배우들이 금지된 사랑에 빠져 파국을 맞는 동성애 영화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결국 서로를 찾아 탐닉하고야 마는 주인공들. 그들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장이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이딴 영화를 보고 있는 거야. 나도 이러면 안 되는데. 양키들은 왜 대머리어도 멋있을까.”

1시 15분. 시간은 지독하게 안 갔다. 해옥은 핸드폰을 잡아 주소록을 천천히 살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연락처가 보였다. 저장된 이름은 여전히 ‘여보’였다. 순간 홍삼처럼 얼굴이 벌게진 해옥이 전화번호 삭제를 눌렀다가 ‘정말 삭제하겠습니까?’라는 문구가 나오자 ‘아니요’를 선택했다. 대신 이름을 바꾸었다.

주소록을 다시 열었다. 전화번호가 이렇게나 많은데 연락하는 사람은 10명 안팎이었다. 나머지는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문자한 뒤 감감무소식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옥은 자주 연락하는 10명 중 하나를 골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덟 번의 신호음 끝에 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쓰! 자고 있었어?”
“너…… 지금 몇 시야.”

해옥이 시계를 봤다.

“1시 30분 조금 안 됐네. 자고 있었구나. 미안해. 나는 네가 밤일하니까 지금쯤 깨어 있을 줄 알고….”
“작년에 그만뒀거든? 6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아, 진짜.”
“야, 나도 6시에 일어나야 돼. 피곤한 척은 혼자 다하네, 기지배가.”


“그럼 자빠져 잘 것이지. 왜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죽을래?”
“야야. 집주인 그 늙은이가 집세를 5만 원이나 올린단다. 짜증나 죽겠어.”
“죽지 말고 이사 가.”
“그래도 다른 데 비교하면 싼 편이야. 요즘 보증금 500에 들어갈 수 있는 데가 흔한 줄 아냐?”
“그럼 그냥 살아, 이년아!”

마침 티브이에서는 남자들의 격렬한 베드신이 시작되었다. 해옥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야야. 그런데 너 혹시 리얼홈쇼핑이라고 들어 봤냐?”
“몰라. 홈쇼핑에 관심 없어.”
“오늘 2시에 428번에서 30회 특집으로 방영한대. 초특급 할인이래.”
“뭐 파는데?”
“그거야 봐야 알지.”
“너 지금 그거 기다린다고 깨어 있는 거냐? 남자 빤쓰 팔면 가관이겠다.”
“30회 특집인데 속옷을 팔겠냐? 생각 좀 해라.”
“생각은 너나 실컷 하고 이제 끊자. 제발, 응?”

베드신이 절정에 달할 때 화면 속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자가 들이닥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오른손에는 팔뚝의 반쯤 되는 길이의 과도가 있었다.

“야, 428번 한번 틀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밑지면 손해지, 어떻게 본전이야, 멍청아. 우리 집 테레비는 100번까지밖에 안 나와. 나 이제 끊는다. 안녕.”
“야, 기다려 봐. 야…”

통화가 끊겼다. 해옥은 성깔 더러운 년이라고 구시렁거리며 시계를 쳐다봤다. 1시45분. 이래저래 시간은 흘렀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였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밑으로 힘 빠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남자들이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올 때 시각이 1시 58분이었다. 해옥은 지체 없이 428번으로 채널을 돌렸다. 여전히 흑백 화면. 해옥은 소리를 줄이고 냉장고에서 350ml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꼭지를 따고 한 모금을 막 목에 적실 무렵, 티브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지지직거리던 소음이 뚝 끊겼다. 해옥은 볼륨을 원상태로 돌렸다. 곧 있어 합창 교향곡의 후렴과 함께 90년대 초가 연상되는 알록달록한 프로그램명이 나타났다. 리얼홈쇼핑.

“내가 파워포인트로 만들어도 저거보단 낫겠다.”

해옥이 중얼거렸다. 1분여의 오프닝이 끝나고 광고 없이 진행자가 나타났다. 이런 게릴라 식 프로그램에 광고가 붙는 게 더 웃기겠다고 생각하며 해옥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진행자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으로 정장 차림의 깔끔한 모습이었다. 둘 다 미남, 미녀는 아니었지만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호감 가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얼홈쇼핑 진행을 맡은 손영호.”
“황경은입니다.”

진행자 뒤편에는 새하얀 천으로 덮어 놓은 길쭉한 탁자가 있었고, 그 옆에는 역시 하얀 천으로 덮어 놓은 세로로 길쭉한 물체가 있었다. 길쭉한 물체는 어쩐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바로 리얼홈쇼핑이 30회를 맞은 날입니다! 매회 완판 신화를 이룩하던 리얼홈쇼핑, 이 모든 게 회원 여러분의 덕입니다.”

남자에 이어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조금 특별한 물건을 가져왔어요. 금방 소진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주저하지 말고 전화주세요.”

스튜디오 환경은 별로였다. 중앙 조명 하나에 사이드 조명 넷, 홈쇼핑 로고도 없었고, 외벽이나 바닥도 오래된 건물의 흔적이 역력했다. 화면 하단에 나타난 전화번호는 대표 번호가 아닌 일반 번호였는데 지역 번호로 볼 때 서울이었다.




그 밖에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막은 일절 없었다. 방송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데 좋은 물건이 나올까? 해옥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부터 물건을 공개하겠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탁자의 양 끝에 서서 천을 붙잡았다. 카메라를 주시하며 잠시 빙긋 웃던 둘은 “짜자잔!”을 외치며 손을 움직였다.

“뭐야, 저게!”

해옥이 소리를 질렀다. 탁자 위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곰인형이었다. 양손을 나란히 했을 때와 비슷한 크기에, ‘푸우’를 따라한 게 분명한 빨간색 배꼽티를 입은 모습이었다. 해옥은 당장이라도 티브이를 꺼 버릴 심산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요청이 쇄도한 상품이지만 워낙 고가라 엄두를 못 냈던 바로 그 상품입니다. 루마니아 현지에서 저희 담당자가 극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자그마치 50프로나 할인된 가격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가 인형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 오늘의 상품은 바로 저주의 인형입니다.”

해옥이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런 조악한 인형을 루마니아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것도 이해 불가였는데, ‘저주의 인형’이라는 이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조금 있자 전화번호 옆으로 6자리의 숫자가 떴는데 아무래도 인형의 가격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일시백천만십만백만… 미친, 250만 원?!”





해옥은 혹시 0을 하나 더 세진 않았나, 다시 한 번 헤아려 봤다. 25만 원이라 해도 도둑놈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두 번, 세 번 헤아려도 마찬가지였다. 자막 실수가 아니라면 저 인형의 가격은 250만 원이 분명했다. 해옥의 두 달치 월급에 육박하는 액수였다.

“그 돈이면 루이비통을 사고 말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인형을 사나. 진짜 막장이네. 아, 시간 아까워.”

해옥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진행자는 떳떳이 상품을 설명했다.

“이 인형의 최대 장점은 바로 저주의 인형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명한 캐릭터 디자이너를 납치해서 개발에 참여시켰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외형적인 퀄리티를 높였는데요, 너무 흉측하게 생겨서 집에서만 쓸 수 있던 기존 저주의 인형들과는 확실히 차별성이 있습니다. 누가 이 인형을 보고 저주의 인형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곰돌이 푸우구나, 하지. 안 그렇습니까, 경은 씨?”
“맞습니다. 그리고 디자인의 우수성뿐만이 아닙니다. 기존 저주의 인형과 비교했을 때 성능에도 확실한 차이가 나는데요. 목숨까지 빼앗으려면 워낙 고가이고, 그렇다고 싸구려 인형을 사자니 이건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미미한 효과만 내고. 하지만 이 인형은 다릅니다. 가격은 보급형 수준으로 내리고 성능은 거의 최고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해옥은 도무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형의 기능적인 측면을 자꾸 강조하는 걸로 보아 아동용은 아닌 듯했다.

“자, 이 놀라운 성능을 한번 보실까요? 벌써부터 주문 전화가 오고 있네요. 잠시 후부터 주문 폭주가 예상되오니 갈등은 안드로메다에 잠시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호 씨 어서 벗겨 볼까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옆의 물건으로 다가갔다. “짜자잔” 하며 천을 벗겨 내자, 놀랍게도 의자가 하나 나타났다. 정확히는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더 정확히는 그 사람이 재갈을 물고 묶여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때부터 해옥의 표정이 굳기 시작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24회 때 민폐를 끼쳤던 곽태동 회원입니다.”

진행자들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반면 포박당한 남자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질려 버린 표정이었다. 얼굴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눈과 뺨에 붓기가 있었으며, 옷 여기저기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제 발로 걸어온 손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인형과 대상이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해집니다. 이 정도면 지하철에서 서로 마주보는 거리 정도는 될 텐데요. 차근차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자 진행자가 네 발자국 정도 뒷걸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고는 인형이 있던 선반 밑에 손을 넣어 포스트잇 같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우선 저주가 걸린 종이에 정보를 넣어야겠죠? 아, 안심하세요. 오늘 주문하시는 고객님들 전원에게 저주의 종이 두 세트를 무료로 드리고 있습니다. 한 세트에 10장이니까 한동안은 걱정 없겠죠? 신상 정보를 넣으실 때 포인트는 최대한 상세히 기록해야 위력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냥 이름만 쓰면 동명이인들 모두에게 저주가 분산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력이 약하죠. 기왕이면 겹치는 사람이 없도록 이름, 생년월일, 핸드폰 번호, 집 주소 등등 아는 범위 내에서 상세하게 적어 주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곽태동…공일공칠일일…서울시 노원구 상계동…천구백칠십구년…… 자, 이정도만 적어도 저주가 분산될 일은 없겠죠? 이제 붙이는 일만 남았는데요. 포스트잇처럼 접착 처리가 되어 있으니 그냥 툭, 떼서 붙여 주시면 됩니다. 여기서 또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의 장점이 드러나는데요.”

남자가 인형의 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렇게 남들 눈에 안 띄게 붙일 수가 있습니다. 인형에 옷을 입힌 이유가 이것 때문이거든요.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은 고객님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하네요.”
“와, 정말 감쪽같네요. 누가 저주의 종이를 인형에 붙였다고 생각하겠어요.”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그 순간 옆에 있던 포박당한 남자가 온몸을 흔들면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카악, 칵칵.” 하는 비명 아닌 비명이 흘러나왔다. 진행자들의 웃는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자, 움직여 볼까요?”

여자가 남자 진행자를 향해 말했다. 남자 진행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의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포박된 남자의 얼굴 또한 거의 동시에 돌아갔다. 이번엔 인형의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포박된 남자의 고개 또한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해옥의 머릿속에 ‘설마’ 두 글자가 풍선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남자 진행자가 인형의 머리를 마구 돌렸다. 포박된 남자가 정신없이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반응 속도 보이시죠? 실제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위력이 느껴지십니까? 저가의 인형들은 상상도 못할 움직임이죠. 자, 이번엔 못을 박아 보겠습니다.”

남자 진행자가 눈짓을 하자 여자가 탁자 밑에 손을 넣어 못과 망치를 꺼냈다. 건네면서 여자가 말했다.

“저주의 인형 전용 미니 망치와 미니 못입니다. 상품 가격에 1만원 만 추가하시면 직접 보내드리고 있고요. 시중보다 절반 정도 저렴한 가격이니까 필요하신 분들은 함께 주문하셔서 더 큰 할인 혜택 누리시면 어떨까요. 못은 열 개 한 세트로 준비했습니다.”

남자가 망치와 못을 받았다. 그리고 인형의 어깨 부근에 못을 대고 망치질을 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소리가 끝나자 포박된 남자의 신음이 이어졌다. 어깨에는 전에 없던 검은 구멍이 하나 보였다. 그 구멍은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얼마 안 있어 폭죽 같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해옥의 머릿속에 둥둥 떠 있던 풍선이 펑, 하고 터지는 순간이었다.

“허억!”

숨을 들이쉬며 양손으로 입을 막는 해옥. 얼굴에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 사이 남자 진행자는 다음 망치질을 시작했다. 반대편 어깨였다. 핏줄기가 멎기도 전에 포박된 남자의 다른 쪽 어깨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여자는 포박된 남자의 뒤편에 서서 화사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망치질은 멈추지 않고 인형의 양다리를 향했다. 포박된 남자의 다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해옥은 티브이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소파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어찌나 손을 떠는지 핸드폰을 세 번이나 떨어뜨린 끝에 겨우 잡아 올릴 수 있었다. 주소록을 열 필요도 없었다. 숫자 세 개와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그런데 남자 진행자는 다리를 끝으로 더 이상 망치질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별다른 멘트조차 없었다. 포박된 남자가 신음이라도 내지 않았으면 정지 화면으로 착각할 만큼 적막한 화면이었다.

“경찰서죠? 지금…”

숨이 덜컥 막혀 말을 멈춘 해옥. 진행자들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미간에 주름이 진 것으로 보아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시선은 카메라 정면. 해옥과 브라운관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치고 있는 셈이었다. 핏물이 튀고 사방에 비명이 울려 퍼져도 사람 좋은 인상을 잃지 않았던 진행자들이 급변하자 해옥은 당혹스러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이 신고하는 타이밍에.

“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생방송인 것 같은데 티브이에서 살인이 일어나고 있어요. 아니에요. 홈쇼핑 채널이에요. 네? 제가 처음 신고한 게 중요한가요? 틀어 보시면 알 거 아니에요. 몇 번이냐면…”

해옥이 말을 멈췄다. 진행자들이 정면을 주시하며 점점 다가오는 탓이었다. 해옥은 이대로 저들이 앞으로 나와 티브이를 뚫고 자신의 앞에 설 것만 같았다. 29인치 화면이 본인들의 얼굴로 꽉 차자 진행자들은 멈췄다. 해옥은 어서 신고를 접수하고 티브이를 끄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428번이요. 28번이 아니고 428이요. 잘 안 들리세요? 사, 백, 이, 십, 팔 번이요. 네? 채널이 거기까지 안 넘어간다고요? 티브이가 후졌네. 다른 걸로 해…….”

그 때 남자 진행자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감정이 전혀 안 느껴지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해옥이 또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자 진행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민폐를 끼친 회원이 나타났군요. 다른 날도 아니고 30회 특집인데 정말 화가 납니다. 서약서를 쓰고 특별 회원제로 운영을 하는데도 불량 회원은 반드시 생기더라고요. 방송은 이쯤에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친 회원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여 줘야겠죠?”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탁자 쪽으로 돌아갔다. 여자가 인형을 눕혀 고정시키고 남자는 아까보다 훨씬 강도 높은 망치질을 시작했다. 정확히 인형의 이마 한 가운데였다.

“네, 네? 지, 지, 지금 엄청난…”

해옥이 말을 더듬었다. 포박된 남자의 이마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리고 길고 긴 절규가 이어졌다. 핏줄기가 약해질수록 남자의 소리도 작아졌다. 여자의 한쪽 뺨으로 반죽처럼 들러붙은 핏덩이가 목덜미로 흘렀다.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던 여자가 화면 가까이로 다가오며 말했다.

“민폐의 끝은 사망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계신 서약서에 분명히 적혀 있어요. 자, 그럼 오늘의 민폐 회원 정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해옥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여보세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백칠십삼 다시 사십육.”

해옥의 동공이 팽창했다. 지금 여자가 읊는 주소는……

“송양빌딩”



해옥이 사는 곳이었다.

“302호. 장석윤.”

해옥이 거친 숨을 뱉어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호흡이 가빴다. 해옥의 집은 301호, 302호는 바로 옆집이었다.

“회원 여러분 모두 협조하셔서 빠른 시일 안에 방송이 재개되길 염원합니다. 오늘 상품 저주의 인형은 현재 시간까지 주문한 고객에 한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와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자 서서히 화면이 어두워졌다. 잠시 후 소음과 함께 늘 그랬듯 흑백 화면으로 돌아갔다. 핸드폰 액정 위로 통화 종료 문구가 네온 사인처럼 껌뻑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2시 20분. 겨우 2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해옥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잠이 들면 처음 보는 장소에서 꽁꽁 묶인 채 깨어날 것 같았다. 1분이 참 길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10초가 참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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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몇 초간 천장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묶인 곳은 없었다. 잠들었던 곳은 소파 위, 장소도 변하지 않았다. 알람을 끄고 시계를 확인했다. 6시 1분. 머리는 지끈거리고 팔다리에 힘이 없었다. 잠시 멍하니 앉아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 전원을 켰다. 어제 일이 꿈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음과 함께 화면이 송출됐다. 상단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연두색 숫자, 428. 그 숫자가 사라지기 전에 티브이를 꺼 버렸다. 마음에 갈등이 일었지만 오후에 잠들었던 이성이 깨어나 이내 감성을 누르고 만다. 해옥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해옥이 정문을 나섰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용변이 급한 사람처럼 문을 잠갔다.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하는데 하얀 연기가 얼굴에 닿아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불이라도 난 거 아닌가, 아래를 보니 웬 처음 보는 남자 셋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찬 해옥이 코와 입을 막고 계단을 내려갔다. 방역 가스 같은 연기를 뚫고 2층 계단으로 향할 때쯤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저기요” 하고 해옥을 불렀다.


“말씀 좀 물읍시다.”

해옥은 대꾸 없이 걸음만 멈췄다.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옆집 양반 언제쯤 들어오는지 아시나요?”

순간, 어제의 방송이 떠오른 해옥이 말을 더듬었다.

“여, 옆집 남자 말씀이신가요?”
“네, 그 사람이요.”

해옥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 글쎄요. 제가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마주치는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한 번도 없었습니까?”
“평일에는 정말 한 번도 없었고요. 주말에는 가끔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통 보이질 않네요. 4층이 집주인 사는 데니까 한번 물어보시겠어요? 저는 늦어서 이만.”

해옥이 다시 코와 입을 감싸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쉽게 잠잠해질 것 같지 않았다. 건물 정문을 나섰다. 입구 앞을 막아 놓은 불법 주차 차량들을 피해 본격적인 출근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제까지의 출근길과는 확실히 달랐다. 음침하고 추레한 사람들이 전봇대 근처 혹은 주차장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는데 해옥을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시선을 모았다. 거미줄처럼 질긴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고 해옥은 뭐라도 훔친 사람처럼 불안한 표정이었다.

“분명히 남자라고 했어. 사진이랑도 많이 다르잖아.”
“얼굴도 길쭉한 게 아니라 동그란 편이네.”

해옥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 옆집 남자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민폐’의 죗값을 묻기 위해서. 해옥은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지뢰밭을 빠져나온 군인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옥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를 묻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우선 저들에게 잡히면 훈계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다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저들이 노리는 사람은 옆집 남자가 분명했다. 진행자가 마지막으로 알려 준 주소와 이름도 옆집 남자의 것이었다. 비회원인 해옥이 티브이를 시청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행동하면 된다. 해옥이 숨을 골랐다.







해옥은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 옆집 남자를 찾으러 온 것이다. 아마도 ‘민폐’의 죗값을 묻기 위해서. 해옥은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지뢰밭을 빠져나온 군인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옥은 자리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를 묻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우선 저들에게 잡히면 훈계 정도로 끝나지 않으리라. 다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볼 때 저들이 노리는 사람은 옆집 남자가 분명했다. 진행자가 마지막으로 알려 준 주소와 이름도 옆집 남자의 것이었다. 비회원인 해옥이 티브이를 시청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태연하게 행동하면 된다. 해옥이 숨을 골랐다.

퇴근길. 해옥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일을 겪고 말았다. 이번엔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다. 핸드폰 주소록을 보다가 ‘바보똥개’라는 이름에 무심코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어제 이름을 바꾼 남자친구의 번호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것도 여보세요, 가 나온 후에. 벙어리 상태로 일관하며 해옥은 결국 전화를 끊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문자가 왔다.

[스토커처럼 굴지 마라. 짜증나니까.]

해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해옥.

“야, 조인희. 어디서 뭐하냐.”
“이년이 여보세요, 도 안 하고. 예의 없는 년.”
“너 내 여보 아니잖아. 어디서 뭐하냐고.”
“그러면 나는 여보가 대체 몇 명이냐? 집이야.”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니네 집 가는 길에 잠들겠다. 아서라.”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제발.”
“조를 걸 , 이년아. 내일이 휴일도 아니고, 우리가 가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아, 진짜 심각해서 그래.”





“전 남자친구한테 이상한 얘기라도 들었냐? 왜 자꾸 진지드립이야.”
“어, 맞아. 걔가 나보고 스토커래. 그런데 그거 말고 더 심각한 이야기야.”
“뭐, 어제 본 홈쇼핑에서 남자 빤스보다 쇼킹한 거라도 팔디?”
“어, 맞아. 그거 때문이야.”
“얘가 날 점쟁이로 만드네. 아무튼 주말에 만나서 얘기하든지 하자.”
“야, 그러지 말고 제발.”
“그럼 네가 우리 집으로 오든가. 왜 멀쩡히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을 오라 마라야!”
“야, 거기서 우리 회사까지 얼마나 먼지 알잖아. 나 어제도 거의 밤 샜단 말이야!”
“그럼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쳐 자, 이년아!”
“이 매정한 년, 진짜 이럴래?”
“우리 집으로 오라했는데 분명히 네가 싫다 했어. ‘꿇어라, 동해야’ 봐야 되니까 이제 끊는다. 끊어라, 이년아.”
“야, 조인희. 야! 야! 너, 진짜…”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한 숨을 쉬는 해옥. 그때 마침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집 앞에서 잠깐 보자 아까 문자는 미안]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헤어진 남자친구를 다시 보는 거북함보다 지켜 줄 사람이 생긴다는 든든함이 더 컸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해옥은 주변을 살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다. 대로변을 지나 삼거리에서 자신의 집이 있는 샛길로 방향을 틀었다. 아침에 봤던 사람들이 그대로 있었다. 태연한 척 걸어가며 해옥은 귀를 쫑긋 세웠다.

“장석윤은 어디 가고 저 여자만 보여.”
“잡아서 족쳐 볼까?”
“슬슬 짜증나는데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고 싶어.”

아침보다 훨씬 과격해진 그들의 대화에 해옥은 소름이 끼쳤다. 역시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김해옥!”

집 앞에 다다르자 누군가 해옥을 불렀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상우야.”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상우라고 불린 남자는 해옥의 전 남자친구였다. 머리카락이 짧고 목과 다리가 굵어 강한 인상을 자아냈는데 면도를 걸렀는지 수염까지 삐죽빼죽 솟아 영락없는 산적 두목이었다. 해옥이 침을 삼키며 감정을 추스르는 사이 상우가 말했다.

“여전히 늦게 끝나네. 일은 좀 어때?”

투박한 말투였지만 해옥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당황하던 상우가 해옥의 어깨를 감싸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 어제 엄청난 걸 보고 말았어.”

해옥이 상우의 품에서 벗어나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뭐냐고 상우가 묻자 해옥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들어가서 얘기하겠다고 말했다. 해옥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상우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 곳곳으로 담배 꽁초들이 보였다. 2층 계단부터는 스멀스멀 연기까지 다가왔다. 지켜 줄 사람도 있겠다, 해옥은 이번에야말로 으름장을 놓겠다고 생각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같이 가자는 상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얼마 안 있어 연기의 원흉들이 나타났다.

“이봐요, 당신들……”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가 해옥의 말을 끊었다.




“장석윤 씨 이사 갔다대요? 2주가 넘었다는데. 아가씨 모르고 있었어요?”

해옥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어, 어, 하고 말을 흘렸다. 그때 상우가 해옥의 옆으로 다가왔다. 힘을 얻은 해옥이 참아 왔던 말을 퍼부었다.

“그런 건 모르겠고요.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요. 하다못해 창문 열고 환기라도 시키든가, 꽁초랑 재는 바닥에 다 버리고. 지금…”
“여전히 코빼기도 안 보여?”

상우가 해옥의 말을 끊고 말했다. 말 상대는 해옥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던 남자였다. 남자가 대답했다.

“어. 주인 말로는 이사 간 지 2주가 넘었다던데? 열쇠도 반납했고 물건들도 싹 뺐대. 문 앞에 우편물 쌓인 것 봐. 그 잡기 힘들 것 같은데.”

태연하게 남자와 대화하는 상우의 모습을 보며 해옥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 여기는 내 여자 친구야. 안 그래도 어제 주소 보다가 깜짝 놀랐어.”
급기야 상우는 해옥을 남자들에게 소개시켜 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첫 인사가 “오랜만이네” 혹은 “여긴 어쩐 일이야”로 시작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우연히 만난 지인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친구는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들이야. 해옥아, 인사해.”

상우가 해옥에게 말했다. 해옥이 멍한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남자들도 인사를 했다. 그다지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해옥은 숨 쉬기가 곤란하다는 듯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상우와 남자의 대화 소리가 담배 연기처럼 해옥의 뒤를 따라왔다. 카세트테이프를 감을 때처럼 위잉, 하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해옥이 문을 열자 그제야 상우는 계단을 뛰어올랐다. 해옥으로서는 선택의 기로였다. 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한다면 아예 이실직고하는 꼴이라는 생각에 해옥은 상우를 집으로 들였다.



“담배 때문에 그랬어?”

상우가 신발을 벗으며 물었다. 그러자 먼저 들어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은 해옥이 대답했다.

“난 화생방 훈련은 받아 본 적이 없거든.”

상우가 어깨를 으쓱하며 거실로 들어왔다.

“이제 얘기해 봐. 어제 봤다는 게 뭐야?”
“너부터 얘기해 봐. 왜 갑자기 만나자고 한 거야? 커피? 녹차?”

상우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커피. 그냥 잘살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 나를 못 잊었나 싶기도 하고, 뭐, 그래서 그냥.”

해옥은 잠시 말없이 커피를 타는 데 집중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은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중이었다. 불편하니까 이만 나가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랑은 무슨 관계야?”

상우가 소파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야. 옳지, 찾았다.”
“같이 일을 한다고? 글은 이제 안 쓰기로 한 거야?”
“써야지, 왜 안 써. 그런데 글만 써서 먹고 살기가 쉽지 않더라고.”

상우의 손이 자신의 정면을 향했다. 손 바깥으로 시커멓고 길쭉한 물체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옥의 눈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해옥이 들고 있던 티스푼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티브이에서 딸칵, 하는 효과음이 났다. 해옥은 뛰었다. 개구리처럼 펄쩍 펄쩍. 상우는 그런 해옥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고장 나서 시끄럽단 말이야.”

채널 숫자가 송출되기 전에 해옥은 전원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낙하하는 롤러코스터 안에서 억지로 입을 가린 여자처럼 티브이는 짧은 비명을 내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옥은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비록 마음뿐이지만.

“예민한 건 여전하네.”

심드렁하게 말을 던지고 상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식탁으로 다가가 해옥이 타 놓은 커피 한 잔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해옥은 상우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식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무슨 일하는데?”

해옥이 상우 앞에 앉아 커피 잔을 들었다.

“수전증 있었어? 커피 쏟겠다. 그냥 뭐, 쇼핑몰 같은 거. 야, 진짜 쏟겠다.”

상우가 손을 뻗어 해옥의 커피 잔을 잡았다. 해옥은 억지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상우의 손을 빌려 잔을 내려놓았다. 머릿속이 수많은 파편들로 핑핑 돌았는데 대부분 어떻게 하면 이 자식을 내보낼까 하는 것들이었다.

“무, 무슨 쇼핑몰인데?”
“그냥 조금 마니악한 물건들 파는 덴데 깊게 알 필요 없어.”

상우가 해옥의 눈을 피했다.

“넌 꼭 그러더라. 새벽 두 시에 노래방 가서 여자 끼고 술 먹은 것도 내가 알 필요 없는 거였겠지.”





“그 얘기를 왜 지금…”

해옥이 손바닥으로 식탁을 치며 일어났다.

“됐어. 너랑 길게 얘기해 봐야 좋을 거 없을 것 같다. 이만 가 줬으면 하는데.”
“항상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여자 끼고 놀았던 건 내 친구들이었다고 몇 번을 얘기해?”
“그래, 새벽 두 시에 노래방 간 건 잘한 거지.”

상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해옥은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커피 잔을 들고 등을 돌렸다. 속으로는 잘 풀려 간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성격 하나는 진짜 뭣 같다. 헤어지길 잘했지.”

상우의 빈정거림에도 해옥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꾸했다.

“그래 다음엔 뭣 같지 않은 년 만나길 빌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확히 말하면 상우의 짧은 한숨이 서너 번 흘렀다. 이윽고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고 해옥은 곁눈질로 뒤를 보았다.

“하나만 물어보자. 전화는 왜 걸었어?”

해옥이 뒤로 돌아 팔짱을 꼈다.

“삭제하려다가 잘못 누른 거야.”

상우가 표정 없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대단한데? 너 조금 생뚱맞은 거 알아? 아무튼 갈게. 나중에 얘기하자.”

그러면서 상우가 몸을 돌렸다. 해옥은 말없이 상우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진동 장치 스위치라도 올라간 듯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상우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발 끈을 묶던 상우가 문득 옆의 수납 통을 바라보며 동작을 멈추더니 손을 뻗어 낚싯바늘이 생선 올리듯 종이 한 장을 꺼내 올렸다. 분홍색 종이였다. 동시에 해옥은 팔짱을 풀었다. 상우는 되감기를 하듯 종이를 수납 통에 넣고 신발 끈을 풀었다. 해옥의 입에서는 이가 부딪치며 타자기 소리를 내었다. 상우가 신발을 벗다 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답신 메시지를 작성하며 상우가 나직이 말했다.

“장석윤 일주일 전 자살.”

‘살’ 소리와 핸드폰 폴더가 닫히는 ‘탁’ 소리가 겹쳤다. 해옥은 상우가 손을 넣었던 수납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온갖 자책과 후회와 절규가 머릿속을 휘감았고 한편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상우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고개만 돌려 해옥을 쳐다봤다. 아무 표정도 없이.

“너였냐?”

-

“얘는 불도 켜 놓고 어딜 간 거야.”

트레이닝복 차림의 인희가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갔다. 다음 날 입고 갈 평상복과 핸드폰 충전기 등이 담긴 쇼핑백을 소파 위에 던져두고,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었다. 냉장고를 열어 마실 음료를 찾던 인희가 중얼거렸다.

“물 아니면 맥주네. 먹다 남았으면 좀 버릴 것이지, 하여튼 궁상맞은 년.”

캔 맥주를 꺼내들고 식탁 앞에 앉은 인희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자 ‘해옥이년’ 으로 도배된 최근 통화 목록이 나타났다. 가장 위의 ‘해옥이년’을 선택하고 핸드폰을 귀




로 가져갔다. 어깨를 이용해 핸드폰을 귀에 고정시키고 양손으로 맥주 캔을 땄다. 한 모금으로 가글하듯 입안 전체를 차갑게 식힌 다음 목구멍으로 넘겼다. “카아.” 하고 탄성을 낸 후 인희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당장 뒤질 것처럼 닦달해서 왔더니. 썩을 년, 진짜.”

당장 전화 안 하면 죽인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인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맥주 몇 모금을 더 마셨다. 시계 바늘은 둘 다 ‘12’에 가까웠다. 문이라도 열려 있던 게 어디냐는 생각을 하며 인희는 소파에 발을 뻗었다. 발에 부딪혀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리모컨이었다. 재빨리 리모컨을 집은 인희가 티브이의 전원을 올렸다.

“기존의 인형들이 찌르고 베는 위주였다면, 이번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은 타격용으로도 쓸 만합니다. 감쪽같다는 얘기죠. 어릴 때, 친구 머리 때리고 시치미 뚝 뗐던 경험 다들 한 번씩은 있으실 겁니다.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은 이런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는 기능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점은, 친구가 아닌 누구에게라도 할 수 있다는 점이죠.”

티브이에서는 웬 남자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코미디 프론가? 근데 뭐야. 428번? 어제 해옥이 년이 얘기했던 그건가.”

인희가 중얼거리며 티브이 볼륨을 올렸다. 그러자 남자 소리 외의 주변 잡음이 귀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는 흐느낌이었다. 여자의 흐느낌.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가고 이번엔 검은색 정장 차림의 여자가 화면에 잡혔다.

“특별 편성으로 함께하고 있는 리얼홈쇼핑. 아무래도 시간대가 좋지 않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방송을 마쳐야 할 것 같은데요. 앞으로 15분만 더 주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30회 특집 루마니아 저주의 인형! 구매하신 모든 분들께 저주의 종이 두 세트를 무료로 드리고 있습니다.”




여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면이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랍어 보컬이 섞인 기묘한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동안 남자와 여자는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흔들고, 때리고, 던지고, 밟고, 찔렀다. 음악 중간 중간 박자를 무시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오히려 인형의 움직임과 박자가 맞았다. 심장 박동기의 화면처럼 흔들리던 카메라가 남자와 여자를 떠나 새로운 사람을 잡았다. 의자에 앉은 그 사람은 온몸에 봉선화 물을 들인 것처럼 빨겠다.

인희는 리모컨을 떨어뜨렸다. 화면이 흔들렸지만,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신체가 훼손됐지만, 목걸이와 신발 정도로도 누군지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그저 입만 벌어질 뿐, 이름을 부를 정신도 없었다. 인형이 움직일 때마다 친구의 몸도 따라 움직였다. 피와 살점이 뻥튀기처럼 튀어 올랐다. 인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았다. 번호를 누르고 귀에 가져갔다. 신호음이 울리자 춤추던 티브이 화면이 정지했다. 몇 번 더 울리자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달라졌고, 통화가 시작되니 화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인희가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때 남자의 입이 열렸다.

“주소는 어제와 같습니다.”

티브이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었다. 현관 너머가 시끄러웠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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