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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도방의추억

갠차나여?2015.09.07 18:07조회 수 2289추천 수 1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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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도방'이라고 들어봤어? 
도망? 아니. 
동방? 말고. 
도. 방. 

그게 '도난 방지'인지, '도망 방지'인지는 모르겠어, 
내 경험상으론 '도난 방지'가 맞는 것 같아. 
갑자기 그때 경험이 생각나서 그래. 

그때가 언제냐면…. 햇수도 벌써 가물가물하네, 
대학 졸업하고 한참 빌빌거릴 적 얘기니까…. 
한 3, 4년 전이겠다. 

친구들 하나둘씩 취직하고 빠른 놈은 결혼까지 해버리는데 난 뭐 믿을 구석이라곤 방구석이 다였거든. 
요즘 취업 전선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이 핑계로 어떻게든 버티곤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친구들 취직한 건 그럼 뭐냐고. 
아버지 얘기에 어버버 좀 얼버무렸더니 바로 벼락이 떨어지더라? 
네가 사람 새끼냐고 그러시는 거야. 
방구석에서 돈이나 축낼 바에야 젊은 놈이 고생 한 번 해봐야 한다며 어디로 전화를 한 통 거시는데, 
왠지 모르게 살짝 비릿한 불안감이 비늘처럼 곤두섰었거든, 짐작한 거지. 
날 어디 인신매매단에 넘기실 리는 없지만 '고생'이란 단어가 가지는 무게에 걸맞은 내 반품처가 어디인지. 

딱 들어맞았어, 남해에서 어선 사업하는 삼촌 댁! 
아, 망했다, 바로 협상 시도했지, 그냥 아르바이트하면 안 되느냐고, 
아버지는 말해놨으니 짐이나 싸라고, 
그럼 아르바이트라도 하겠다고, 차라리 공장에서 휴대전화 조립을 해도 배는 못 타겠다고, 포기 안 하고 덤벼봤지, 
그랬더니 갑자기 아버지 마음이 돌아섰나 싶었는데 마음이 돌아선 게 아니라 공구상자가 돌아서더니 
오함마가 딱 나오는데, 이러다 휴대전화를 조립하러 가기 전에 내가 새로 조립 당하겠구나 싶어서 그냥 포기했지. 
우리 아버지 한다면 하시는 분이거든. 
그쯤 되니까 그냥 체념하게 되더라. 
날 그냥 어촌에 보내실 작정이구나. 
내 뒤에서 오함마를 들고 두더지 잡기 놀이를 준비하시는데 덕분에 허리도 못 펴고 눈치 보면서 짐을 꾸역꾸역 쌌어. 
입대 전날에도 눈물이 안 났는데 그 순간만큼은 진짜 눈물이 나더라. 
사도세자가 따로 없더라.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나 아버지와 목욕탕 한 번 다녀오고 차 트렁크에 가방 구겨 넣고, 
아버지는 운전석, 나는 조수석에 앉아 묵묵히 남해로 내려가는데 그 날따라 안개가 참 뿌옇더라. 
군대 이등병 때 병장 새끼가 하던 말이 생각났어. 
왜 있잖아, 

눈 감아봐, 
뭐가 보이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게 네 남은 군 생활이다.

아- 진짜 안개 때문에 안 보이는 건지, 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건지 몰라도 내 인생이 이토록 답 없게 흘러갈 줄이야, 
차라리 군대로 다시 기어들어가고 싶었지. 
묵묵히 운전만 하시던 아버지가 음악을 딱 트시는데, 이박사 노래가 나오더라고. 

'영맨~ 자리에서 일어나라~ 영맨~' 

진짜 일어나서 유리창 깨고 도망가고 싶은데 그래 봤자 최후에 만나는 건 오함마 아니겠냐. 
그냥 착잡한 마음으로 앉아있었지. 안개가 끼고 앞이 안 보여도 시간은 잘만 흐르더라니, 남해대교를 건너버렸어. 
누구는 루비콘 강을 건너고, 나는 남해대교를 건널 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회덮밥 한 그릇 먹자마자 아버지는 곧장 차 타고 돌아가시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분명 올 때는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어느새 위아래 구분이 없는 작업복 하나를 입고 부두에 나와 있더라? 

생선 담긴 상자가 쏟아지면 펄떡펄떡 막 그냥 살아있는 생선들이 바닥에 넘쳐나는데, 
아저씨들 아줌마들 정신없이 얼음 푸고, 생선 푸고, 배는 들어오지, 
생선은 쏟아지지, 어떤 배는 다시 나간다고 줄 떼달라고 난리지, 상륙작전이 이런 건가 싶더만? 
삼촌이 '어데 꺼벙하게 서있노, 코는 서울에서만 베어 가는 줄 아나? 따라온나!' 하시더니 날 끌고 가셨어. 

오함마가 사라졌으니 도망쳐도 되는 거 아니냐고?
삼촌은 팔뚝 자체가 오함마야, 완전 상남자 마도로스 있잖아. 
좌함마, 우함마, 둘 중의 하나만 맞아도 엄마, 엄마하고 태어날 때 이후로 가장 크게 울어볼 수 있을걸? 
삼촌이 가진 배들을 하나씩 보여주시는데 다양하더라. 

난 어선이 무슨 종류까지 있는 줄은 몰랐거든? 
근데 그게 톤수랑 면허별로 잡을 수 있는 어종하고, 잡는 방법 같은 게 다 다르더라고. 
통발배, 걸그물 배, 양식장 관리선,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면서 한 배 골라보라고, 
앞으로 고생길 열린 줄 알라고 하시는데 갑자기 또 군대 시절이 생각나는 거야, 

막내야, 얘가 잘생겼냐 내가 잘생겼냐, 솔직히 골라라, 
너 둘 중에 누가 고참이야, 생각 똑바로 해, 
야 너 나랑 군 생활 더 오래 하는 거 알지? 생각 똑바로 해, 

으악, 왜 이런 시련이, 
통발이든 걸그물이든 유람선 여행 상품도 아닌데 골라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어차피 어딜 가더라도 반 죽어 나올 거 같은데! 

그때 진짜로 죽은 사람이 왔어.
안 그래도 시끄러운 부두에 아저씨들 고함, 아줌마들 혀 차는 소리가 가득 차더니 
삼촌 선단 (배들 여럿을 묶어서 선단이라고 불러)깃발을 달고 있는 배 한 척이 들어오는 거야. 
근데 아저씨들이 고기는 안 내리고 굳은 표정으로 들것 위에 흰 천으로 덮은 무언가를 먼저 부두에 내려놓았어. 
삼촌이 고함을 지르며 다가가서 흰 천을 거두자 몇 가닥의 흰 머리카락에, 이미 상당히 썩어서 노랗게 뜬 익사체가 
덜컥 얼굴을 내미는데 멀리서 보는데도 비명이 악 나왔어, 삼촌이 천을 다시 살며시 덮고서야 좀 진정이 되더라. 
사람 죽은 걸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서 심장은 계속 터질 듯 뛰고. 

곧 경찰하고, 해양경찰하고, 죽은 선원 가족 같은 사람들이 줄지어 도착했어. 
바닷가 경찰들이야 종종 처리하는 익사체 사건일 테니 무덤덤해 보였는데 죽은 사람의 가족들은 당연히 덤덤할 수 없겠지. 
대성통곡을 하며 선주인 우리 삼촌 멱살에, 같은 배를 타던 선원들 멱살에, 아이고, 아이고, 울음을 토하다 삼키길 
계속하는데 가슴 아파서 지켜보고 있기 힘들더라. 
슬쩍 내 쪽으로 빠져나온 삼촌이 '삼촌 집에 가있그라'하는 바람에 터덜터덜 삼촌 집으로 먼저 갔어. 
점점 부두랑 어판장 쪽에서 멀어져갔는데도 왜 통곡 소리가 줄어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던 걸까? 

삼촌 집에 가니 숙모가 반겨주셨어, 
흐윽, 오함마에 좌우함마의 마수에서 벗어나서 만나는 첫 따뜻한 말 한마디에 울음이 왈칵 나올 뻔했네. 
반나절 만에 비린내로 쩌든 몸을 욕실에 들어가 시원하게 씻어내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휴대전화 연락 통하는 친구들한테 내 생존신고 겸 조난신고를 마치고 나니 삼촌도 '쯧쯧, 그래도 건진 게 다행이지.' 하며 
막 집에 돌아오시는 길이었어. 

'밥 드이소, 상일이 와가 오늘 전복 넣고 삼계탕 끓였어예.' 
숙모 목소리에 삼촌이 '다 됐으모 밥부터 묵지 뭐. 상일아, 밥 묵그로 나온나!' 
하시길래 '예, 갈게요!' 대답하고 부엌으로 나왔지. 

숙모 도와서 상 차리고, 닭죽 한 그릇에 숙모가 잘 발라서 얹어주는 닭고기까지 배가 터져라 먹고 있는데 
그 얘기들을 하시는 거야. 낮에 본 익사체. 

삼촌이 '일도 불안 불안하게 하는기라, 진작에 짤라 삘라 캤는데, 그래도 사람 한 번 거뒀으모 의리가 있어야지, 
함만 더 따라가게 해달라고 해가 태워줬더니만 그때 그래 될 줄 알았긋나.' 
하니까 숙모도 혀를 쯧쯧 차시더니,

'사람 사는 일 그래서 모른단깁니더. 당신도 매번 나가지만 조심하시다.' 
그 대화에 별로 얹을 말이 없어 묵묵히 먹고만 있으려니 자연스레 주제가 내 배 타는 쪽으로 가더라고. 

솔직히 배 탈 자신도 없고, 
지금 삼촌이랑 숙모가 '뱃일은 위험하다'고 맞장구치는 이때가 유일한 기회다 싶어서 감정 연기를 펼치며 호소했지.

'삼촌, 솔직히 진짜 배 타는 건 위험한 거 같아요. 자신도 없고…. 배 멀미도 걱정되고, 아버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데, 군대도 다녀왔고 이제 힘든 게 뭔지는 알잖아요, 근데 배는 군대랑은 차원이 틀린 거 같거든요.' 

그 말에 숙모는 안쓰럽게 쳐다보고, 삼촌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시는 거야, 
앗싸, 통했다, 

'부두나 어판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주시면 열심히 할게요, 네?' 
'그라모 니, 도방 해볼래?' 
'그게 뭔데요?' 
'조업 철 지난 배들, 사정상 못 나가는 배들, 밤 되면 들어오는 배들 저 어항에 닻 놓은 거 봤제. 
이 남해에도 도둑 새끼들이 있어가 배 올라와서 부품도 떼가고 그물도 가져가고 더러운 수를 둔단 말이다, 
그거 막으려고 대놓은 배 여러 척 묶어서 사람을 올리가 경비 개념으로 시키는 거라. 그게 도방이다.' 
'배 지키는 거란 말씀이시죠?' 
'하모. 그기 안 낫긋나. 대신에 니 야매로 서지말고 근무 똑띠 서라.' 
'삼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저 그거 할게요.' 

앗싸! 배 안 탄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 아냐, 그렇지? 
그 익사한 아저씨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나한테는 배를 피할 기회가 되어주신 셈이지. 
오함마도 피하고, 배도 피하고, 백수생활 하다가 끌려오던 첫 기분과는 다르게 상당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니냐. 
그래서 그 날 밤은 잠도 푹 잘 잤어, 

남해에서의 첫날 밤을 보내고 일어나 아침 일찍 삼촌 따라 부두로 갔더니, 
머리숱이 아주 시원하게 모자란 아저씨가 '사장님 어서 오시다, 오늘 온다는 친구가 저 친구입니꺼?' 하시는 거야. 
'아아, 맞네. 일은 생전 처음 해보는 건데 박씨가 잘 가르쳐주시다.'하는 삼촌 말에 대머리 아저씨가 박 씨인 줄 알았지. 
가진 배가 많아 군청이며 수협이며 들릴 일이 많은 삼촌은 먼저 가시고, 나는 박 씨 아저씨와 남겨졌어. 

'도방 일 별거 없다, 그냥 바다에 안 빠질 조심만 하면 만고 땡이다, 내 하는 거 딱 봐놔라.' 

부둣가에 작은 배 한 척을 매어놨는데 그 위에 올라타고 내가 박 씨 아저씨 하라는 대로 매어놓은 줄을 풀었어, 
아저씨가 선외기라고 부르는 작은 엔진의 시동을 걸더니 배가 움직이더라, 엔진 이름을 따서 '선외기'라고 부르는 
작은 배를 타고 우리는 이 배에서 저 배를 옮겨 다녔어. 

'이건 삼중망이란건데, 말 그대로 그물이 세 겹이라 고기를 어미고 얼라고 상관없이 다 잡아삔다고, 
그래가 이건 불법이야. 혹시 해경 보이거들랑 이건 잽싸게 가리주야 된다. 이기 다 요령이다.' 

박 씨 아저씨의 도방학 개론을 들어주고 있자니 지루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일이라고 생각하니 잠은 안 오더라. 
나도 영 잉여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리고 마침내 방파제 넘어 닻을 놓고 있는 양식장 관리선들 근처에 선외기가 도착했어. 

아저씨가 먼저 올라서고 내가 따라 올라갔지. 
선외기랑 별반 차이가 없던 자그마한 그물 배들과 비교하면 이 관리선들은 규모가 상당했어. 

꽤 넓은 갑판, 유리창이 설치되어있는 조타실, 조타실 밑으론 작은 침실에, 칸막이 문을 여닫는 화장실까지. 
다른 어선 중에는 그냥 난간 붙잡고 바다에 직접 폭격을 가해야 하는 배도 많았는데 이 정도면 호텔이지. 
하지만 감탄은 곧 깨졌어. 

'이게 제일 상태 좋은 배다, 니캉 내캉 이제 밤에 여기서 묵고 자고 함시로 도방 서면 된다. 알긋제.' 

아, 망할, 호텔 취소, 

막상 산다고 생각하고 두루 살펴보니 상태가 아주 메롱이더라고. 
냉장고엔 봉지라면, 쉬어빠진 김치, 쌀 한 봉지, 믹스커피, 뭐 이거야 삼촌이 채워주시리라 믿고 침실로 향했더니 
침대 매트리스엔 엔진을 고치다 그대로 잤는지 얼룩덜룩한 기름때에, 빨래 한 번 안 했는지 곰팡냄새가 꿉꿉한 
이불, 불을 켜도 어두운 방 안의 분위기까지…. 

여기서 어떻게 지내야 하나 싶더라. 

' 뭐 앞서 가르쳐준 게 도방 일 전부다, 아무것도 없다, 고마 배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 ' 
' 아저씨, 심심할 땐 어떻게 버텨요? 배에 뭐 TV도 안 나오고. ' 
' 요새 얼라들은 스마트폰인가 나발인가 노상 뚜들기더만, 니는 없나? ' 

다행히 배에는 작은 발전기가 달려있어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겠더라고.

뭐 그만하면 됐지. 
아저씨랑 선외기 타고 다시 뭍으로 돌아와서 어촌계 사람들한테 한 분 한 분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삼촌 조카라니까 다들 아이고 그렇구나 하면서 반겨주는데, 역시 삼촌 꽤 영향력이 있으시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도방 일 끝나고 나면 열심히 살아봐야겠단 생각이 들더라. 사람은 성공하고 볼 일이야. 

해 저물 무렵에 연안어업을 하는 배들은 하나둘씩 들어오고, 
배는 위치를 표시하는 빨간 등 하나씩만을 놔둔 채 까만 밤에 숨어버렸어. 
고된 일을 마친 어부들에겐 휴식의 시간이지만 도방을 맡은 박 아저씨와 나에겐 지금부터가 임무 시작이었지,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방파제 한 바퀴 돌아보고, 순찰하던 해양경찰 아저씨 만나서 인사하고, 
그러다 선외기를 타고 아까의 관리선에 도착했어. 

' 피곤할긴데 피곤하면 자라, 내는 밤낮이 바뀌가 꼴딱 새고 내일 아침에 자는기 습관인데, 
니는 아직 몸이 적응을 안 해가 지금 많이 피곤할 거다. ' 

박 아저씨는 머리숱은 모자라도 인정은 넘치는 사람이더라고, 
도방에 계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니 그냥 아저씨께 양해 구하고 선실에 들어와서 몸을 뉘었어. 
기름때 매트리스라고 불평했는데 막상 피곤하니까 잠이 쏟아지더라. 
아저씨가 밤낚시 할 거라고 분주히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도방 첫 근무를 잠으로 대신했어. 

춥소, 
얼어 죽을 것 같소, 
귀에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어. 

'너무 추워서 죽을 것 같소' 
잠결에 여기가 서울 집인지, 남해 삼촌 집인지 가늠하다 도방 첫 근무란 걸 간신히 떠올려냈어. 
여긴… 박 아저씨와 나, 둘… 아. 박 아저씨구나. 왜 저러시지.. 

저 아저씨가 왜 저래, 밤낚시가 심심하면 잠이나 같이 주무실 것이지, 
자는 사람 잔다고 억울해할 거면 애초에 말이나 꺼내지 말던가, 
결국 잠기운 대신 짜증이 솟구치는데, '아저씨!'하고 창문을 쳐다보니 

갑판에 켜놓은 전구 불빛이 새어 들어와 자세히 볼 수가 없었어, 
흰머리가 언뜻 풍성하게 보였어. 뭘까, 눈이 아파서 제대로 못 보겠더라고, 
눈을 비비고 조금 적응됐다 싶어서 다시 창문을 쳐다보니 이젠 또 아무도 없어. 
이건 뭐 갑판에서 날 깨울 사람은 아저씨밖에 없잖아, 

밤낚시 하다말고 고약한 장난을 치시네,
바로 선실을 뛰쳐나갔지. 

'박 씨 아저씨!' 
'아, 깜짝아! 식겁했다이가! 와 그라노?' 
'자는데 왜 깨우셨어요?' 
'뭐라카노? 선실 근처에도 안 갔구만! 낚싯대 던지놓은 거 안 보이나!' 
'아까 유리창 밖에서 춥다고 막 하셨잖아요!' 
'술 쳐묵읏나, 더워죽겠구만 뭔 헛소리고? 니가 더위 묵은 거 아이가?' 
'진짜 아니에요?' 
'아니라고 안 카나! 잘라면 곱게 디비자라!' 

아저씨의 당당한 태도에 덩달아 흥분해서 말로 투닥거리다가 다시 기억을 돌이켜보니 
빛이 들어오는 창문 밖으로 흰머리가 보였던 기억이 점차 선명해졌어. 눈으로 본 거니까 헛것은 아닐 테고, 
빛이 들어오는 걸 흰머리로 잘못 볼 리도 없잖아, 아저씨는 저렇게 아니라고 몇 번이고 말씀하시는데 
맞으면 맞다고 하면 그만이지 사람 둘 있는 곳에서 누구한테 덮어씌우겠어, 

아저씨 민머리를 보니까 확실히 아닌 것 같더라고. 

그냥 고약한 꿈을 꾼 거구나, 진짜 같은 꿈을 꿔서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어. 
아저씨께 착각한 것 같다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니까 그냥 사람 좋게 웃어넘기시더라고, 
흰머리…. 이야기를 해봤자 괜히 더 바보 될까봐 입은 거기서 다물었는데 왠지 잠이 더 안 오더라. 
낚싯대 하나 더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하셔서 그냥 옆에서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렸어. 

한 마리, 두 마리, 해산물이 지천인 남해라 그런지 밤낚시 미끼를 무는 고기들이 많더라. 
둘이 먹기에 꽤 되는 양을 잡았어. 곧장 아저씨가 솜씨 좋게 회를 치고, 냉장고 안에 있던 라면을 써서 
간단한 매운탕도 끓여서 소주 한 잔씩 기울였어. 도방 안 했느냐고? 뭐 사람이 보여야 도방을 하지. 
근데 배탈인지, 술똥인지 몰라도 배가 아프네? 다행히 화장실이 있는 배라서 갑판에서 누다가 빠져 죽진 않겠다고 
생각하며 화장실로 달려갔지. 

밀어내기 한판! 
아, 대박, 한 삼 킬로그램 싼 것 같아. 설사더라. 
룰루랄라, 휴지를 손으로 풀어.. 뜨악, 휴지가 두 칸에서 끝나버렸어. 
아씨, 망할, 설사라서 이대로 걸어나갔다간 허벅지에 뜨뜻한 무언가의 흐름을 느끼며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잖아, 
아저씨- 하고 크게 부르면 들릴까 하던 와중에 쏴아, 세면대에서 물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라, 
아저씨인가, 인기척도 없어서 있는 줄도 몰랐네 싶었지.

'아저씨! 휴지 좀 주세요!' 

앉은 자세 그대로 외쳤어. 
물이 멈추더니, 곧장 눈앞으로 손이 내려오더라고,
다행히 밖에 휴지가 있었나 봐, 제법 많이도 주셨더라. 
'고맙습니다!' 하고 닦을 때까진 좋았어, 
근데 일어서서 닦다가 천천히 다시 천장을 쳐다봤거든, 
위에서 손이 내려오긴 힘든 구조였어.. 

왜, 가끔 화장실들 보면 있잖아. 
칸막이 위에 천장과의 틈이 없거나 적은 거. 
어선 자체가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천장이 낮았거든, 천장하고 화장실 문 윗틈이 한 뼘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 
보통 이러면 휴지를 아랫틈으로 전달해주지 않나? 
굳이 위로 줄 이유도 없을뿐더러 한 뼘 같으면 내 경우는 팔뚝도 안 들어가, 이상하잖아. 
근데 어떻게 윗틈으로 휴지를 주면서 내 눈앞으로 휴지를 전달해줄 수 있었던 거지? 
생각이 그쯤에 이르자 다시금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어. 
아저씨하고 불렀으면 대답 한 번이라도 해줄 만하잖아. 
무뚝뚝한 성격도 아니셨거든. 

아씨, 뭐지, 뒤를 닦다 말고 멍청히 서 있는데 갑자기 이번엔 밑에서 휴지가 쑥 들어오더라? 

'으악! 씨바! 깜짝이야!' 
'휴지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용케 갑판에서 듣고 왔더니 뭘 놀래고 그라노?' 
'아까 휴지 주셨잖아요?' 
'니 참말로 더위 묵읏나? 갑판에서 쥐새끼만한 니 목소리 들리길래 왔다안카나.' 
'아까 세면대 쓰시다가 제가 달라고 하니까 바로 휴지 주셨잖아요, 저 다 닦았어요.' 
'이 새끼 양치기 소년 늑대고기 잡순 소리 하네, 야 이 자슥아, 어른 데리고 장난치나?' 
'그게 아니라, 휴지를 주셨잖아요? 이 위로 휴지 주셨잖아요, 제가 그걸로 닦았는데….' 

'위는 무슨 위? 손도 안 들어가는데 우째 휴지를 위로 건네주노 인마! 귀신 씌었나?' 

귀.. 귀신?

툴툴거리며 나가는 박 아저씨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곱씹어보니 갑자기 그제야 무서워지는 거야, 
창문에 언뜻 보이던 흰머리의 남자, 한여름에 '추워죽겠다'던 그 남자의 실루엣이 떠오르더니, 
내 귀로 똑똑히 들은 세면대 소리, 눈으로 똑똑히 본 위에서 내려온 손, 귀신? 혹시? 
'으악~'하면서 바지도 덜 입은 채로 팔짝팔짝 뛰어서 갑판으로 올라왔어. 
그 소리에 다시 달려오던 아저씨와 부딪쳐 한바탕 굴렀다가 다시 욕만 한 바가지 얻어먹고. 

'몸이 허약하면 보약이라도 지어 무라! 오데 젊은 놈이 헛것을 보고 게거품을 무노, 귀신이 어데 있노?' 

막상 말은 그렇게 해도 아저씨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셨던 모양이야.
회 먹고 나서 치운 낚싯대를 다시 꺼내오셔서 던져놓고, 어디 가지 말고 자기 옆에 딱 붙어있으라고 하시더라. 
갑판 위에 서로 말없이 앉아있었어. 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아저씨는 먼 밤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안 불던 바람이 불어와 분위기는 더욱 스산해졌어. 

묶어놓은 배들이 살살 움직이고 나무 갑판이 삐걱대는 소리가 
멀리서 가까이서 빠득- 빠드윽, 들려왔어. 괜히 신경 쓰여서 억지로 재밌는 영상이라도 찾아보려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휘 젓는 거야, 
두 눈은 부릅떠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어, 입은 멍하니 벌린 채.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잖아. 

'아저씨 왜 그러세요! 놀랬잖아요!' 하니까, 
'상일아, 저거 내 손이 비치는기가? 아이제? 저거 내 손 아이제? 와 내가 이렇게 흔드는데 저건 저렇게 흔드노?' 
무슨 소리야, 아저씨가 흔드는 건 알겠는데 흔들리는 '저건' 뭐야? 

아저씨가 놀라서 쳐다보는 쪽을 돌아봤지. 

바람을 타고 맞은 편 가까이 살살 밀려온 다른 어선 조타실이 우리 정면을 향하고 있었어. 
그 조타실 창문에 하얀 손이 이쪽을 향해 팔딱팔딱 미친 듯이 손짓을 하고 있었어. 
아저씨 그림자? 아니! 아니야! 아저씨는 팔을 좌우로 벌렸다 내렸다 하면서 생쇼를 하고 있는데, 
저 손은 손바닥 그대로 마치 우리를 부르듯이 앞뒤로 팔딱팔딱, 흰 손바닥만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으아악! 씨발, 귀신이다!' 

당연히 기겁했지, 진짜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 진짜 귀신이라고, 
그 순간부터 나도 완전히 반실성하고, 아저씨는 좌우로 팔만 벌려대고, 
하얀 손은 그 자리 그대로 우리를 부르듯이 펄럭거리고, 
그 아수라장이 계속되다가 내가 아저씨를 먼저 붙잡았어. 

' 아저씨! 도망가요! 선외기 타고 돌아가요! ' 

근데 아저씨는 생각이 달라졌나 봐, 
아저씨를 붙잡고 있는 내 손을 통해 아저씨도 작게나마 떨고 있다는 건 느꼈는데, 
아저씨는 남의 돈 받고 하는 도방 일이다 보니 정신을 차리고 다른 쪽으로 생각하셨던 거야. 

' 야 인마, 니는 가만히 있어, 저거 도둑 새끼네. 도방 하는 일이 뭐시고? 도둑 잡는 거 아이가? 
귀신이 세상에 오데 있노? 저거 도둑놈 잡아서 넘기그로 해경에 연락이나 치놔라.
점마 어데 못 간다. ' 

아저씨는 귀신일 리 없다, 저건 분명히 사람 짓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거야. 
나도 그런가 싶었는데, 이러나저러나 몸이 벌벌 떨리더라, 만약 칼이라도 들고 있어봐, 
아저씨는 용감하게 배랑 육지, 배랑 배를 묶는 홋줄이란 걸 던져서 앞에 있는 관리선 줄 묶는 기둥에 고리를 정확히 걸었어, 
그리곤 당기니까 바람 속에서 그 배가 점차 가까워지더라. 손은 이제 보이다, 말다, 보이다, 말다, 
계속 그쪽 조타실 창문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어, 

' 이 새끼 딱 걸렸어, 도둑놈 새끼! ' 

아저씨는 허세인지, 용기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그 배로 올라탔어, 

' 상일아, 감시 잘해라! ' 

그리곤 기둥에 걸린 줄을 풀어서 다시 우리 배 쪽으로 던져버리는 거야, 
난 벌벌 떨면서 해양경찰 출장소에 전화를 걸었지, 다행히 바로 받더라고. 
도둑이 든 것 같다고 신고했지. 지금 박 씨 아저씨가 잡으러 갔다고 하니까 바로 온다고 하시길래 
나는 전화를 끊고 멍하니 조타실로 들어가는 박 씨 아저씨를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어. 
근데, 

' 으아악~! ' 
' 훠, 훠이! 귀신아 물렀거라! 저, 저리 가! 물러가라고! ' 

아저씨 비명에 이어 완전히 겁에 질린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귀신, 귀신? 귀신은 없다더니, 아저씨 입에서 나온 단어는 분명 '귀신'이 맞았어. 

' 으악~! 살려줘, 사람 살려! 사람 살리도! ' 

어떡하지, 어떡하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 있기도 힘들었어.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지, 나도 홋줄을 들고 던져봤지만 숙련된 일꾼인 박 씨 아저씨와 달리 
내가 던진 홋줄은 힘없이 바다로 떨어지더라. 
바람은 불지, 바다에 떨어져 바닷물을 먹은 홋줄은 더 무거워지지, 
몇 번을 줄을 사려서 다시 던져봐도 헛방이었어. 
그 와중에도 아저씨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어. 

다행히 '상일아! 무슨 일이고!'하면서 멀리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어, 
어촌계장님하고 해경 출장소장님, 의경 대원 한 명이 계장님 선외기를 타고 이리로 오고 있었어. 

' 계장님! 소장님! 도둑이 아니라 귀신이에요 귀신! ' 
' 뭐라카노? ' 

좀 믿어줘, 한 놈도 아니고 두 놈이 봤다잖아, 따지고 싶었지만 입으론 안 튀어나오더라. 
선외기에서 던져진 작은 홋줄이 단번에 관리선 기둥에 걸리고, 차례차례 사람들이 올라갔어. 

' 내는 봤다아!- 내는 봤다고-! ' 
' 거참, 박 씨 왜 이라노! 미치려면 곱게 미치던가! 나온나, 나온나! ' 
' 계장님요, 지가 봤십니더, 딱 제대로 봤어요, 참말입니더. 믿어주시다! '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결국 세 사람이 반강제로 계장님 선외기에 실어서 데려가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시달렸는지 박 아저씨가 실려 가고 나니 멀찍이서 해가 고개를 쏙 내밀더라니깐. 
나 혼자 있는데 저 배에서 다시 하얀 손이 펄쩍거릴까 봐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침실에 있으면 유리창 너머로 흰 머리카락의 남자가 나타날까 봐 눕지도 못하고, 
화장실에 숨으면 문 너머로 세면대에서 거울을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 그러지도 못하고, 
자고 있을 삼촌한테 전화를 걸어서 삼촌이 욕을 하든 말든 데리러 와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 
좀 별꼴인가? 근데 그땐 그것 말곤 진짜 방법이 없더라. 내가 본 게 있고, 그것 때문에 박 아저씨가 실려 갔는데 
내가 무슨 정의의 용사라고 도방 출근 첫날 주제에 귀신하고 싸워 이기겠냐? 삼촌 차가 결국 멀리서 다가오는데 
진짜 울 뻔했어. 나이를 스물 중반 먹고 말이야. 근데 삼촌 선외기는 나랑 박 아저씨가 끌고 와서 관리선 
옆에 매어놨잖아. 결국 삼촌 뗏목 저어왔어. 뭐, 좌함마 우함마로 한 번씩 저으면 삼촌한테는 일도 아니긴 해. 
집에 가서 숙모가 차려준 아침 식사 상 앞에서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삼촌이 그러시는 거야. 

'상일이 니 어제 부두에 실려 온 사람 봤제. 바다에서 죽어서 온 사람. 그 사람이 흰 머리였는데…. 
니도 언뜻 봤을긴데. 그 사람이 머리가 온통 백발이었다이가. 나이도 지긋하고. 원래 배 타던 사람도 아닌데 
배를 타는 사연이 구구절절했던 사람이었는데. 하도 일을 못 해서 태우다가 이러다가 사고 난다고 
안 태울라는 거를 본인이 무릎 꿇고 통사정을 하길래 다시 태웠거든.. 근데 딱 그 날에 사고를 당했다이가.. 
그물에 딸려들어가가 바다로 들어가삔기라. 조업이고 나발이고 사람부터 살리야 될 거 아이가. 
그물 포기하고 찾으려고 수를 다 써봐도 이게 운명은 좌지우지할 수가 없는기다. 결국 못 찾아서 해경에 신고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시체라도 찾겠다고 노력했는데 바다가 어데 상하좌우로 요동을 치는데 쉽게 찾아질기가, 
거의 반 포기해가는 시점에 그래도 가족들한테 돌아갈 거라고 그게 다른 배 그물에 척 걸려 올라오더라 안 카나. 
노랗게 떠서 처음엔 죽은 고래인가 싶었는데 머리를 보니 백발이 붙은 게 그 배 선장이 기겁을 해가 연락을 줘서 
우리가 챙겨왔지. 시체라도 찾아줄 기라고. 내가 그거 보면서, 살아보겠다고 용 쓰다가 영영 가버린 걸 보면서 
우째 니를 배에 올리긋노? 안 그렇나? 희한한 일이다.. 
성불을 못 하고 우째 우리 선단 배 조타실에서 박 씨하고 니한테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단 말 아이가.. 
니한테 그러드나? 춥다고? 바다에 빠지면 사람이 여름이고 밤이고 저체온증으로 죽는기 제일 크단 말이다…. 
한여름에 춥다고 하는 이유가 그렇게 치면 이해가 된다이가. 이게 참…. 귀신이란 게 있는 긴지 
물귀신은 얼마나 서럽고 슬프긋노. 누가 그래 죽고 싶겠노…. 누가 그래 춥고 싶겠노….' 

그 얘기 듣고 밥이 넘어가겠냐.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지. 엄마한테서 마침 전화가 오더라. 
펑펑 놀다가 뱃일하러 끌려간 아들 걱정이 드신 모양이야. 난 사실 집에 돌아가고 싶다 그런 생각은 접고 
그냥 박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앞으로 도방은 나 혼자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생각없이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 다 얘기했지. 
부두에 실려 온 익사체, 도방하다가 본 여러 현상, 마침내 실려 간 박 아저씨,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듣더니 어머니가 삼촌 바꿔달라고 난리인 거야, 
삼촌이 예 형수님 하고 전화를 받더니 쩔쩔매더라. 
그리곤 아버지가 날 바꿔달라고 하셨는지 삼촌이 다시 나한테 '느그 아부지다' 하고 전화를 바꿔주는데, 
전화 소리 너머로 어머니가 '빨리 오라고 해요! 빨리!' 소리를 지르시니 아버지도 이길 재간이 없으셨는지, 
'상일아, 집에 돌아와라.' 하시더라.. 

아버지.. 어머니한테 완전 잡혀 사시거든. 오함마보다 무섭다는 앞치마 여사. 

그렇게 하루 만에 도방 일은 끝나버렸어. 뭘 더 하고 말고도 없이 흐지부지되다시피. 
싸온 가방은 풀지도 않았어. 

숙모가 빨아놓은 셔츠랑 청바지 다시 입고, 스마트폰이랑 충전기 챙기니까 
나머지 짐은 가져왔던 그대로 들고가면 되겠더라. 

집에 가기 전에 하루였지만 정든 박 아저씨 건강이 염려되어서 남해읍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갔어. 
어차피 차표는 저녁 시간대로 끊어놓았고, 터미널에서 병원이 그렇게 멀리 있지도 않았거든. 
박 아저씨는 일반 병실에 계셨는데 날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하시더라고. 
다행이다, 상당히 진정되신 게 건강에는 이상이 없어 보였어. 

'아저씨 저 그냥 집에 가기로 됐어요. 하루였지만 잘 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쉽게 됐다. 둘이 근무하모 심심치도 않고 좋겠더만.' 
'저.. 그 날 이후로 다른 별일은 없었죠? 그때 혹시 뭘 보셨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 말에 웃던 표정에 보일 듯 말 듯한 어두운 구석이 끼어들더니, 

'... 밤에, 밤에만 보인다.' 
'네?' 
'혹시 지금…. 몇 시고?' 
'지금 오후 여섯 시 사십 분요. 좀 있으면 해 지겠네요. 

그랬더니 그냥 홱 돌아누워 버리시는 거야. 

'그러면 늦기 전에 빨리 가라. 밤에 보인다. 밤에..' 

그 뒤론 아저씨, 아저씨, 몇 번을 불러도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아무 대답도 안 하시길래 
그냥 가져간 주스 상자만 드시라고 놔둔 채 터미널로 돌아갔지. 
짧았던 남해에서의 이박 삼일이 그렇게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선 새 인생 살았어. 
그래서 지금 먹고 살만 해졌잖아. 

비록 아버지 뜻대로 못 했더라도 아버지가 바랬던 것 이상으로 내 인생에선 전환점이 되었던 일화거든. 
나 옛날에 백수였을 줄 상상이나 했냐? 지금 와선 그때도 추억이지. 
백수 시절엔 나름의 낭만이 있잖아. 
작은 것 하나에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쁨을 느끼고…. 
참 구질구질한 행복이 있었어. 
그래서…. 도방도 추억이야.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가끔 생각나는 추억. 

그래서 이렇게 얘기도 하잖아. 
지루했으면 미안. 뭐 나한테만 추억이라면 별수 없는 거고. 

아…. 박 아저씨는 그 뒤에 어떻게 됐느냐고? 
사실 마지막 작별을 그렇게 했으니까 나도 궁금했지. 

그 뒤에 삼촌하고 연락할 때 근황을 물어봤었거든. 

그냥 멀쩡하게 잘 사신다고 하더라. 대신에 사람이 영 달라졌대. 
좋아하던 술도 끊으시고, 담배도 안 피우시고 절에 자주 다니신다더라,
남해 금산에 큰 절이 있다나 봐, 거기 자주 가서 불공도 드리고 한다고 삼촌이 그랬거든. 
사람이 뭔가 욕심이 줄고 말도 줄고, 대신 됨됨이는 훨씬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더라~ 

그래서 추억이라고 말하는 거야, 좋게좋게.
나는 정신 차리고 살아서 취직하고, 아저씨도 잘사신다고 하니까, 
아버지 어머니 무탈하시고 삼촌 사업 잘 나가니까, 
좋게 끝났으니까. 

그래서…. 도방의 추억이야. 
넌 어때? 넌 이런 경험 없어? 
얘기 좀 해줘 봐~ 너무 나만 얘기했지? 


ㅡ 도방의 추억,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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