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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지혜로운바보2017.07.30 10:38조회 수 990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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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이기적인 사랑은 증오보다 더 무섭다




윤철 형의 수첩에서



 



 



 



오랫만에 걸려 온 윤석의 전화였지만 나는

조금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술이

나 한잔 하자는 제의에 난 그저 요즘 공부가

 잘 안 되는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해 버렸다.

 



 



 



사법고시 이차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술 마

셔도 되는 건가 하는 걱정이 설핏 스쳤을 뿐이

 었다.

 



 



 



약속한 신촌의 소주방에 가니 윤석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으레

주고받는 대화를 나누면서 윤석을 찬찬히 살

 펴보았다.

 



 



 



윤석의 얼굴은 매우 지치고 초최해 보였다.

내심 공부에 지쳤을 거라고 판단했으나 윤석

은 담담하게 사법고시를 포기했노라고 털어놓

 아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포기한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윤석이는 대

답을 얼버부리며 술잔만 권했다. 나는 주는 대

로 술을 받아 마시며 윤석이 스스로 입을 열길

 기다렸다.

 



 



“일한아, 우리 형 기억나니?”

 



 



술병이 금세 바닥나 다시 한 병을 시켰을 때

 윤석이 불쑥 물었다.

 



 



기억나니?

 



 



질문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윤석의 형 윤철을 잘 알고 있었다. 올 초에 장

학생으로 미국으로 유학 간 정말로 똑똑한 사

람이었다. 동생 친구들에게도 매우 잘해 줘서,

나 역시 그 형에게 술을 얻어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형 기억나니?

 



 



나는 윤석의 물음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만난 지 1년이 넘었다지만‘기억나

 니?’라는 질문은 어색하게만 다가왔다.

 



 



“물론이지! 윤철이 형 유학 갔잖아? 참, 형

잘 있니? 여름 방학이라 지금쯤 한국에 나와

 있겠네?”

 



 



 



나는 애써 이상한 느낌을 떨궈 버리려 떠오

 르는 대로 물었다.

 



 



“여름 방학 하긴 형 지금 한국에 있긴 있지.”

 



 



“근데 왜? 야, 윤철 형 얘기하니까 갑자기 보

고싶어지는데. 내가 윤철 형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아, 맞다! 너 작년에 사시 1차시

험 보기 전날 엿 주러 갔다가 뵈었었지. 형님

 잘 계시지?”

 



 



 



윤석이는 말없이 소주를 맥주 글라스에 가

득 따르더니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들이

켰다. 그리고는 충혈된 눈빛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떨구더니 혼잣말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자조와 체념이 깃든 음성으로.

 



 



“너 아직도 우리 형이 유학 간 줄 알고 있구

나. 하긴 집안에 정신병자가 있다면 남들이 얼

마나 이상하게 생각하겠니. 그래서 우리 가족

들은 다른 사람들이 형에 대해 물으면 유학 간

걸로 이야기하기로 했어. 후훗! 형은 미쳤어!

 나도 그것 때문에 시험을 포기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윤석의 이

야기는 흘러갔다. 윤석이 잠시 말을 끊고 담배

를 물었다. 나는 충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

려 노력하며 태연히 라이터를 집어 윤석의 담

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윤석은 담배 연기와

함께 긴 한숨을 내쉰 뒤에 내가 평생 잊지 못

 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형은 미쳐도 보통 게 아냐. 너도 알 거

야. 우리 형과 결혼을 약속한 미정이 누나.

 하지만 이건 모를 걸.

 



 



 



미정이 누나 작년 이맘때 교통사고로 죽었어.

그 누나 집이 대구거든. 근데 서울로 올라오

다가 형과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빗길에서 과

속을 한 모양이야. 어떻게 보면 평범한 교통사

 고였지.

 



 



 



참, 너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구나. 너, 아

직도 은영이 생각하고 있니? 아픈데 건드렸다

 면 미안하다.

 



 



 



어쨌든 형의 충격은 대단했어. 남들에게는

평범한 교통사고일지 몰랐도 형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겠지. 하긴 재수할 때부터

 시작해서 군대 3년 자그마치 8년을 사귀었으니까.

 



 



 



형은 한 달 동안 술만 마셨어. 술병을 입에

물고 살았지. 대학원도 안 나가고. 틈만 나면

미정이 누나가 묻힌 천안에 있는 공원묘지에

가곤 했어. 나머지 시간은 주로 방안에 틀어박

 혀서 지냈어. 누나가 준 선물과 사진을 쳐다보면서.

 



 



 



집에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저

러다 폐인이 되는 거나 아닌가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사고 난 지 한달 반쯤 지나자 정상 생

활로 돌아오는 거였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형

 그렇게 나약한 사람은 아니잖아?

 



 



 



하여튼 가족들은 한시름 돌릴 수 있었지. 형

이 예전의 생활을 되찾길래 나도 고시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공부를 시작했어.

 



 



 



형은 다시 대학원에 나갔어. 미정이 누나와

같이 가기로 했던 유학을 혼자라도 떠나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어.

 



 



 



한 달 가까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유학 갈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지. 그런데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

 



 



 



형의 방에서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

어. 가족들은 형이 악몽을 꾸는 줄로 알고 처

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어. 형에게 나쁜

꿈을 꾸었느냐고 물어보면 그저 고개를 끄덕

 이길래 그런가 보다 했던 거지.

 



 



 



이상한 소리는 매일 밤 들려 왔어. 형은 잠

을 제대로 못 자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형 방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지. 영어 사전이 보이지 않길래 형 방에

있는 사전이라도 쓰려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어.

 



 



 



왜냐고? 그때가 9월 초였지만 더위가 꺾이

지 않아 무척 후덥지근했거든. 그런데 형 방에

들어서니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였어. 마

 치 지하 깊숙히 숨겨져 있는 동굴 속에 들어선 것처럼.

 



 



 



시원함과는 거리가 먼 싸늘함에 소름이 돋

을 정도였어. 으시시한 공포와 알 수 없는 불

안감이 가슴을 옥죄어 왔지. 불안감이 전신에

끈덕지게 달라붙었지만 나는 형이 악몽을 꾸

는 방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거려니 생각하고

 사전을 찾기 시작했어.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

이 오는 거야. 뭔가 자세히 봤더니 미정이 누

나 사진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 사진이 보이

 질 않는 거야.

 



 



 



난 그때까지만 해도 형이 누나를 떠나 보내

기 위해서 떼었나 보다고 쉽게 생각했지. 사전

을 찾다가 발에 뭔가 채이길래 보니 책상 옆에

 까만 쓰레기 봉투가 있는 거야.

 



 



 



슬쩍 열어 보니 거기에 미정이 누나가 준 선

물, 사진, 편지는 물론이고 넥타이, 반지까지

 들어 있었어.

 



 



 



나는 형이 미정이 누나의 체취를 방에서 없

애려는 줄로 알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추

 측은 반밖에 맞질 않았지만

 



 



 



하여튼 나는 그 날 사전을 찾아가지고 형의

방에서 나왔어. 그 뒤로도 몇 번 형의 방을 들

락거렸는데 매번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거

였어. 나중에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

니도 그런 기운을 느꼈다면서 형에게 방을 바

꿔 주려고 의향을 물었더니, 형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는 거야.

 



 



 



당사자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어. 형은 계속해서 야위어 갔

지만 가족들은 미정이 누나를 잃은 슬픔에서

 완전히 못 벗어난 때문이려니 했던 거야.

 



 



 



그러던 9월 말경에 부모님들이 여행을 갔어.

 



 



형은 모임에 가고 해서 나 혼자 집에서 공부하

 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거야.

 



 



처음에는 피곤하기도 한데 잘 됐다 싶더라

고. 침대에 벌렁 누워서 잠을 자려고 했더니

잠이 와야지. 문득, 촛불 아래서 공부하는 것

 도 운치가 있겠다 싶어서 초를 찾아 보았어.

 



 



 



전에 사전을 찾다가 형 방에서 초를 본 기억

이 나는 거야. 벽을 더듬어 형 방으로 갔어. 방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

 에 우뚝 멈춰 섰어.

 



 



 



책상과 벽에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

는 거야. 형 방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곤 했던

 기분 나쁜 싸늘함 기운과 함께.

 



 



 



식은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어. 방문

을 닫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지.

누군가를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입술도 열

리지 않았어. 집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빠르

 게 스쳐갔지.

 



 



 



얼마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푸르스름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시꺼먼 어둠만이 방 안에 가득 차 있었지. 하

지만 두려움만은 여전히 가시질 않았어. 나는

 속으로 되뇌었지.

 



 



 



나는 헛것을 본 지도 모른다고 아니, 헛것을

 본 것이라고.

 



 



 



주문처럼 여러 차례 되뇌고 나서 방으로 조

심스레 들어섰어. 책꽂이 하단을 더듬어 보니

초가 잡히더군.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였어.

어둠 속에서 환한 불빛이 켜지니까 어느 정

도 마음이 안정이 되는 거야. 나는 용기를 내

 서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던 곳을 초로 비춰 보았지.

 



 



 



놀랍게도 그 자리는 바로 미정이 누나의 사

진이 붙어 있던 자리였어. 나는 갑자기 으시시

 해져서 후다닥 형 방을 나왔지.

 



 



 



내 방에 들어와서 방문을 꼭 닫아 걸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다시 불이 들어왔어. 그리고 얼

마 있다가 형이 술에 만취해서 돌아왔지. 난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지.

 



 



 



다음날 난 형을 깨우러 형 방문을 두드렸지.

 



 



아무 소리도 안 나길래 방에 들어갔더니 형이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는 거야. 마치 유령

 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서.

 



 



 



아무래도 이상해서 내가 어제 있었던 일들

은 이야기했더니 형은 조금도 놀라지 않으면

서‘응, 그랬었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였어. 형

도 봤느냐고 내가 물으니까 형은 술이 안 깨

 머리가 아프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회피하는 거였어.

 



 



 



그때부터 형 방에 이상한 심령 관련 서적이

쌓여 가기 시작했어. 형은 대학원도 안 가고

 방에 처박혀서 그런 류의 책만 읽었지.

 



 



 



그래서 하루는 내가 물어 봤어. 죽은 미정이

 누나를 다시 불러내려고 그러느냐고.

 



 



 



형은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하더군. 이 책

들은 석사 논문에 참조하려고 하는 거라고. 그

러니 앞으로 미정이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고,

 자기 방에 함부로 들어오지지도 말라고.

 



 



 



나는 형의 전공이 심리학이어서 그런가 보

 다고 넘어갔어.

 



 



 



그날 이후로 형은 나보고 고시원으로 가서

공부하라는 거야. 부모님에게도 나를 고시원

 에 보내라고 말하고.

 



 



 



나는 보다 못해 형에게 내 일은 신경쓰지 말

고 형 일이나 잘 하라고 쏴 줬어. 그래서 언쟁

이 벌어졌지. 결국 그 문제는 나의 승리로 일

 단락됐으나 형이 전 같지 않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어.

 



 



 



형은 날이 갈수록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고

 야위어 갔지. 집에 안 들어오는 날도 많아졌고.

 



 



그때마다 형은 세미나니 동문회니 하는 핑계를

 댔지만 앞뒤가 안 맞을 때가 비일비재했지.

 



 



 



그러던 차에 부모님이 10박 11일 외국 여행

을 가게 됐어. 나는 시험이 얼마 안 남아 있을

 때라 방에 처박혀 공부하고 있었지.

 



 



밤 2시나 됐을까?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어. 공포에 가득 찬

절규였어. 귀를 기울여 보니 형 방에서 나는

소리 같았지. 내 그래서 형 방으로 가는데 다

 시 형의 외침이 들려 오는 거야.

 



 



 



“미정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보고 어

 떡하라는 거야!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둬!”

 



 



 



나는 형이 또 자다가 악몽을 꾸나 보다 생각

하고 방문을 확 열었어. 침대에 누워 있을 줄

 알았던 형은 예상외로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거였어.

 



 



“나를 좀 놔 줘! 제발.”

 



 



형는 아무도 없는 창문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어.

 



 



“형, 정신 차려! 형!”

 



 



나는 깜짝 놀라 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지.

 



 



형은 돌아보지도 않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

 게 말하는 거였어.

 



 



 



“윤석아, 너도 미정이 보이지? 저기 창문 밖을

봐! 흰옷을 입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잖아!”

형 말대로 창문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

지 않았지. 형은 계속해서 창문을 주시하다가

 긴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말하더군.

 



 



“이제는 사라졌어.“

 



 



나는 다시 창문을 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어둑어둑한 어둠을 보면서 형

이 어떻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데 다시

형이 입을 열었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침착한

 음성으로.

 



 



“너 형이 미쳤다고 생각하니? 하긴 미쳤을

지도 모르지. 너에게는 모두 털어놓으마. 부모

 님께는 절대로 말씀드리지 마라. 약속할 수 있겠니?”

 



 



 



형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

 였지. 형이 다시 말을 이어 나갔어.

 



 



“나 요즘 미정이를 본다. 아마 귀신이나 혼

령이겠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

정이의 그 무언가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

 만은 분명해.”

 



 



형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쫙 끼치는

거야. 시체의 손처럼 싸늘한 기운이 방 안을

떠다니고 있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

지. 형은 내가 느끼는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까보다 한층 편해진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어.

 



 



“처음엔 내가 악몽을 꾸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 다음에는 몸이 허해서 헛것이 보이는 게 아

닌가 하고 의심했지. 그런데 점점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어. 아마도 그

 서약 때문일 거야.”

 



 



“서약? 무슨 서약?”

 



 



“미정이가 사고를 당하기 두 달 전이었어.

미정이가 용하다는 점장이가 있으니 한번 찾

아가 보자고 제의했어. 난 호기심 반, 장난 반

으로 미정이를 따라갔어. 삼선교에 있는 낡은

 집으로 들어가 궁합을 봤지.

 



 



 



점장이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

는데 좀 특이한 점장이더라고. 다른 점장이 같

으면 생년월일을 적은 뒤에 이야기를 하잖아?

그런데 그 점장이는 이상하게 생긴 트럼프를

만지작거리더니 한 장씩 뽑아 보라는 거야. 그

래서 미정이와 내가 한 장씩 뽑았더니 기분 나

쁜 미소를 흘리면서 우리들의 불운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거야. 상징을 써서

이야기를 하는데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어.”

 



 



 



“상징? 예를 들면 어떤 건데?”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거였어.

천랑성이 붉은 구름에 가리니 피가 검은 도로

를 가득 적시리라. 도로 위에는 누워 있는 자

와 서 있는 자가 있으니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라. 서 있는 자가 맨발로 걸어가나

발바닥에 먼지 하나 묻지 아니 하도다.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눈물이 작은 강을 하나

가득 메우나 떠난 자의 옷자라락을 조금도 적

 시지 못하노라.”

 



 



 



“으시시하네.”

 



 



 



“난 더 그랬어. 박쥐처럼 생긴 점장이는 재

수없는 말을 하면서도 마치 기뻐 죽겠다는 듯

이 웃기까지 하는 거였어. 정말로 악마 같은

점장이였지. 나는 매우 기분이 나빴어. 한시라

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을 언제 하면 좋

겠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우리는 절대로 결혼

을 할 수 없다는 거야. 결혼을 약속한 사람들

 에게 그토록 잔인한 저주가 어디 있겠어?

 



 



난 화가 치밀어서 주먹으로 한 대 내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지. 복채도 안 주고

나오려 일어서니까 미정이가 붙잡는 거야. 미

 정이가 애원하듯이 잡아서 다시 주저앉았지.

 



 



미정이는 그 기분 나쁜 점장이에게 필사적으

 로 부탁했어.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그 점장이는 예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면

서 미정이와 나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느냐고

묻는 거야. 미정이도 나도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다는 거야. 죽음조차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는 서약이. 그런데

그 서약은 피로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다시 묻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앉아 있다가는 바보 천치가 될

것만 같아서 말도 안 하고 일어나서 방을 나왔

어. 미정이가 따라 나오더니 내 팔을 붙잡고

애원하는 거야. 제발 다시 들어가자고. 재미삼

아 아니 기분 전환삼아 점장이가 시키는 대

로 한번 해 보자고. 미정이의 간절한 애원에

 나는 지고 말았어. 그때 하지 말았어야 하는거였는데.

 




 



방으로 다시 들어가니 점장이는 우리가 돌

아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리한 칼과 구릿

빛 종이를 준비해 놓고 있었어. 우린 점장이가

시키는 대로 했어. 점장이는 칼로 나와 미정이

의 팔목을 살짝 그었지. 피가 흐르자 팔목을

 서로 맞대게 했어.

 



 



 



마치 고대 바이킹의 결혼 풍습을 연상시키

는 의식이었어.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고대

바이킹들은 결혼식을 할 때 신부와 신랑의 피

 를 섞는다는 구절이 떠올랐지.

 



 



 



손목을 맞대고 있으니 피가 바닥으로 떨어

지기 시작했어. 점장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구

릿빛 종이에 핏방울을 받았지. 구릿빛 종이는

핏방울을 머금어 금세 붉은 색으로 변했어. 점

장이는 요상한 주문을 빠르게 외더니 종이를

태웠지. 종이가 다 타고 나자 그 재를 우리의

 팔목에 뿌렸어.

 



 



 



그랬더니 우연인지 정말로 그 재의 효과 때

문인지 모르겠지만 피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 거였어. 의식이 끝나자 점장이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지. 미정이 또한 만족해 하는 것

같았지만 난 웬지 찝찝하기만 했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몰래 저지른 것처럼.

 



 



 



점장이에게 의식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그

냥 결혼서약으로 알고 있으라는 거야. 나는 기

분이 몹시 나빴지만 미정이의 기분을 깨고 싶

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지. 어서 빨리 이 사이비

 점장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일어서면서 복채를 내려 했더니 손을 저으

면서 안 받겠다는 거야. 이 자식이 복채를 받

기 위해서 쇼를 해 놓고는 웬일인가 싶더라고.

내 그래서 안 받으면 효과가 없으니 받으라고

 했지. 그랬더니 점장이는 예의 기분 나쁜 웃

 



 



 



음을 흘리면서 자기는 이미 받았다는 거야. 우

리들의 믿음과 믿음 속에 감추어진 그 무었을.

복채를 주고 나면 홀가분할 것 같은데 복채

를 안 받으니까 다시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더

라고. 어쨌든 간에 돈 굳었다 하고 돌아서서

 나오는데 뒤에서 점장이가 중얼거리는 거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하면서.

 



 



 



내가 낡은 집을 나서면서 기분 상했다고 투

덜거렸더니 미정이가 이러는 거야. 그 사람 용

하기로 소문 난 사람이니까 헛걸음한 건 분명

아니라고. 나는 그 뒤로 그 일을 잊어버렸지.

미정이가 사고를 당하고 나서도 한참 뒤에 나

 는 비로소 그 점장이를 떠올렸어.”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던 형은 갑자

기 술 생각이 났는지 이야기를 끊고서 침대 밑

에서 양주병을 꺼냈어. 내가 부엌으로 가서 술

잔과 안주거리를 가지고 오자 형은 맥주 글라

스에다 양주를 반 남짓 따라 한잔 마시고는 이

 야기를 계속했어.

 



 



 



“미정이가 사고난 날 밤이었어. 난 미정이를

만나러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미정이가 두 시

간이 지나도 안 오길래 집으로 일단 돌아왔어.

도착하는 대로 전화가 올 걸라고 생각했지. 전

화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다가 깜짝 잠이 들

었어. 그러다 누군가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에

잠이 깼지. 눈을 뜨니 미정이가 침대에 앉아

 훌쩍이며 울고 있는 거야.

 



 



 



언제 왔느냐고, 왜 우느냐고 묻으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지.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

 는데 미정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거야.

 



 



 



그 순간, 갑자기 내 얼굴로 싸늘한 기운이 확

하고 밀려오는 거야.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

났지. 너무도 생생해서 꿈 같지 않았어. 아마

 도 꿈은 아니었을 거야.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지. 미

정이를 병원으로 옮겼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

려서 죽었다는 소식이었어. 그날 밤 일은 미정

 의 죽음이라는 충격에 가려 쉽게 잊혀졌지.

 



 



 



미정이의 죽음은 나에겐 너무도 커다란 아

픔이었어. 한 사람의 죽음이 세상을 온통 뒤바

꿔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

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빛으로 가득 찬 세상

이었는데 온통 시꺼먼 암흑으로 변하고 만 거

야. 난 미정이를 따라가고 싶은 충동에 몸서리

쳐야 했어. 몇 번의 자살 유혹을 이기고 나서

나는 점차 내 자리로 돌아왔어. 미정이가 없는

 나의 자리로.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어. 정

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방이 추운

거야. 마치 음습한 땅속처럼 한기가 방안에서

느껴지곤 했지. 그것뿐이 아냐. 잠을 자도 악

몽에 시달려야 했어.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꿈에서 깨어나면 무슨 종류의 악몽에 시달렸

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거야. 어렴풋이나마

 무시무시한 악몽을 꿨다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야.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어둠 속에서 멍

하니 누워 있었지. 그런데 하루는 눈앞에 뭔가

가 보이는 거야. 유심히 보니 책상 위쪽에 붙

어 있는 미정이 사진이 불이 꺼져 있는 데도

 또렷히 보이는 거야.

 



 



 



처음에는 달빛의 반사려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어. 원래 사진 속의 미정의

표정은 웃고 있었는데 내가 보는 사진 속의 미

정은 무표정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는 거야. 눈

 을 감아도 미정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어.

 



 



 



난 그때 깨달았어. 미정이가 나를 못 잊어

내 방에 머물고 있다고. 나는 미정이가 너무도

보고 싶어서 미정이를 찾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어. 밤을 새워 가면서 미정의 사진을 보고

얘기도 해 보고, 영혼을 불러낸다는 애들 장난

 도 해 보았지만 미정이는 볼 수가 없었어.

 



 



 



그러던 어느날 밤 난 꿈 속에서 미정이를 만

난 거야. 난 너무도 반가웠지. 너무도 보고 싶

 었다고 했더니 미정이가 내 손을 꼭 잡았어.

 



 



 



그리곤 나를 어디론가 끌고가는 거야. 내가 어

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미정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만 재촉했어.

 



 



 



나는 웬지 겁이 덜컥 났어. 자꾸만 이렇게

끌려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거야.

나는 안 끌려가려 하고 미정이는 자꾸 끌고가

려고 했지. 둘이서 실강이를 하다가 나도 모르

게 미정이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어. 그때 미정

이가 얼굴을 들어서 난 두 눈을 볼 수 있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두 눈을. 원망과 안타까움

 으로 가득 찬.

 



 



 



미정이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난 잠에

서 깨어났지.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었어. 난

그때 중요한 사실을 알았어. 미정이는 내 곁에

머무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를 자기 곁으로

 데려가고 싶어한다는 걸.

 



 



 



그 꿈을 꾸고 나니 미정이가 무서워졌어. 나

는 내 방에 있는, 미정이에 관련된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한 거야. 미정이가 남기고 간 추

억이 배어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나 자

신이 비굴하게 느껴졌어. 그토록 사랑하던 여

자였다면 기꺼이 그녀를 따라가야 하는 것 아

니냐고, 죽음이 뭐가 그리 무서워서 애인이 남

기고 간 흔적마저 없애려 하느냐고 스스로 자

 책하기도 했어.

 



 



 



후훗! 정말이지 공포에 질린 사람은 한없이

잔인해지더구나. 나는 미정이의 물건들을 그

냥 버린 게 아니라 불에 태워 버렸어. 뜨겁다

고 아수성치는 미정이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를 앙다물고 불길 속에 미정

 이에 관련된 모든 물건들을 던져 넣었지.

 



 



 



윤석아, 나 경멸해도 좋아. 하지만 그때는

너무 무서웠어. 난 미정이에 관한 물건들을 모

두 없애 버리면 끝나는 줄 알았거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거라고 믿었거든. 그런데 아

니었어. 그 사실을 미정이의 물건을 태우고 난

 그날 밤에 인정해야 했지.

 



 



 



어둠 속에서 자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

고 고개를 돌리니 미정이의 얼굴이 아른거리

는 거야. 자세히 바라보니 미정이의 사진이 붙

어 있던 자리에 파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지. 미정이 얼굴을 한.

 



 



 



미정이는 나를 포기하지 않은 거야. 내가 미

정이를 떨궈 버리려고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미정이는 더욱 더 적극적으로 나에게 달라붙

었어. 방에서만 맴돌던 미정은 내가 어딜 가든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떤 때는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어. 혼자 있을 때면 슬그머니 나

 타나서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거야.

 



 



 



나를 놓아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 대꾸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니까 정말로 미치

겠더라고. 그녀는 나의 생활 전반에 걸쳐서 모

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어. 더러는 낮에도 나타

나는 거였어. 뒤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

 져 돌아보면 그녀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거야.

 



 



 



난 위기 의식을 느꼈어. 뭔가 새로운 해결책

을 찾아내지 못하면 미정이에게 끌려가고 말

것만 같았지. 그래서 심령학에 관련된 책을 닥

치는 대로 읽고 나와 있는 대로 해 보기도 했

 지만 아무 소용이 소용없더구나.

 



 



 



그러던 어느날 불쑥 그 이상한 점장이가 떠

올랐어. 그 점장이라면 나를 구해 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 난 삼선교에 위

치한 그 점장이 집을 가까스로 찾아갔지. 점장

이는 대뜸 나를 보더니 왜 서약을 어기려 하느

 냐면서 기뿐 나쁘게 웃는 거야.

 



 



 



난 그 점장이에게 무릎 끓고 애원했어. 나를

살려 달라고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제발

나를 좀 살려 달라고. 그러자 점장이가 큰 소

리로 웃으면서 자기는 벌써 두 사람의 목숨을

받았으니 돈은 필요없다는 거야. 아무리 애원

 해도 소용없었지.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어.

집에 와서 머리를 싸매고 다른 방도를 궁리해

봤어. 궁리를 하면 할수록 그 점장이가 아니면

아무도 미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

 에 이르렀지.

 



 



 



난 일주일 뒤에 가슴에 칼을 숨키고 점장이

집을 찾아갔어. 만약 내 부탁을 거절한다면 협

박을 아니 정말로 죽여 버려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말야. 문을 두드렸더니 아무런 대답도 없

었어. 나는 그 점장이가 내가 온 줄 알고 일부

 러 문을 열어 주지 않나 보다 해서 담을 넘어갔어.

 



 



 



그런데 놀랍게도 완전히 폐허가 된 빈 집인

거야. 일주일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 있나 의

아할 정도로. 나는 하도 이상해서 이웃 사람들

에게 물어 봤더니 삼 년 전부터 저렇게 방치되

어 있었다는 거야. 누구에게 물어봐도 한결 같

은 대답이었어. 젊은 부부가 연탄가스에 중독

되어 죽은 이후부터 친지가 나타나지 않아 저

 렇게 폐허가 되어 버렸다고.

 



 



 



윤석아, 너 형이 미쳤다고 생각되니? 이 형

은 멀쩡해. 비록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지만

 아직은 아냐. 난 안 미쳤어.”

 



 



 



이야기를 마친 형은 몹시도 피로해 보였어.

괜한 이야기를 했다고 후회하는 건지도 모르

지. 형은 양주를 한 잔 들이키더니 침대에 누

 웠어. 그리곤 이내 잠이 들었지.

 



 



 



난 형이 걱정돼서 이불을 가져와 형 옆에서

잤어. 나는 형이 미정이 누나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망상에 빠져 있다고 판단한 거야.

 다음날 나는 형과 함께 신경정신과를 찾았어.

 



 



 



만약 나랑 같이 가지 않는다면 부모님에게 모

 든 것을 말해 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그런데 진찰 결과는 의외였어. 의사는 형이

정상이라는 거야. 히스테리컬한 증상이 조금

보이긴 하지만 수재들의 경우엔 종종 나타나

곤 한다는 거야. 병원을 나서면서 형은 그것

 보라는 듯이 의기양양해 했지.

 



 



 



하지만 난 의사의 진단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어. 그래서 난 공부를 당분간 중단하고 형

과 같이 생활해 보기로 했지. 형은 처음에는

펄쩍 뛰었지만 내심 혼자 생활하는 게 두려웠

 는지 금세 승락했어.

 



 



 



난 형의 기를 보충해 주려고 보신탕도 같이

먹으러 다니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

악귀나 유령을 쫓는 부적을 사서 형이 보는 곳

 에 붙여 놓기도 했어. 하지만 소용없었어.

 



 



 



형은 내가 옆에 있는 데도 미정이 누나가 보

인다는 거야. 닷새를 함께 보내고 나니 슬슬

형이 무서워지더군. 형 곁에서 멀어지고 싶었

지만 부모님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시려면 아

 직도 며칠 남아 있고 해서 같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내가 볼 때 형의 증상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어. 처음에는 열어놓은 창문 너머나 벽 귀

퉁이에서 미정이 누나가 보인다고 하더니 나

중에는 샤워 중에도 미정이 누나가 보인다는

거야.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계속해

 서 보인다고 하니 정말 사람 미치겠대.

 



 



 



지옥같은 하루하루가 흘렀지. 마침내 부모

님이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날 밤이 되었어. 형

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

였지. 내일이면 악몽 같은 생활도 끝이라는 생

각에 긴장이 풀어져 있었어. 난 너무도 피곤해

 서 형 옆에서 잠이 들었어.

 



 



 



잠결에 뭔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듣고

눈을 떴지. 가위에 눌렸는지 도저히 몸을 일으

킬 수가 없는 거야. 형은 침대 곁에 서 있는 게

보였어. 형의 목소리가 들려 왔어. 이번에는

예전처럼 신경질적인 외침이 아니라 가라앉은

 차분한 음성이었어.

 



 



 



“좋아! 그럼 거기서 만나기로 하자. 미정아

네가 이겼어. 하지만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이

것이 진정한 사랑은 아니라는 것을. 휴우 어

쩌다 우리가 이렇게 됐을까. 지금의 너는 내가

사랑했던 미정이가 아니야. 지금의 나 역시 네

가 사랑했던 내가 아니겠지만. 네가 너무 이기

적이던지, 내가 너무 위선적이던지 둘 중의 하

나겠지.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냐. 이것으로 다

 끝난다면. 내가 너를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나즈막한 형의 음성이 너무도 또렷하게 귓

속으로 파고들었어. 그 순간, 내 눈에도 형 앞

 에 무표정하게 서 있는 미정이 누나가 보였어.

 



 



 



너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니? 아냐! 나도

형을 그런 쪽으로 생각했지만 난 그 순간 확연

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외에도 또 다른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그래! 내가 본 미정이 누나의 모습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야. 이승의 것이라고

는 믿어지지 않는 한기가 나의 전신을 찍너 눌

 렀지. 난 솔직히 숨쉬는 것조차 버거웠어.

 



 



 



형의 이야기가 끝나자 순식간에 허물어 내

리듯 스르르 사라져 버렸지. 나는 그제서야 숨

통이 트였고 손발을 움직일 수 있었어. 나는

책상에 앉아서 담뱃불을 붙이는 형에게 미정

 이 누나를 봤다고 말했지.

 



 



 



“다 끝났어. 이제 다시는 미정이가 나타나지

 않을 거야. 내가 미정이를 설득했으니.”

 



 



 



담배연기를 뿜어 올리는 형의 표정은 무척

이나 홀가분해 보였어.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

 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나는 형 말을 믿었어. 아니, 그대로 믿고 싶

었는지도 몰라. 난 형이 미정이 누나에게 어떤

약속을 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굳이 물어 보지 않았어. 그 문제를 가지고 형

 을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 않았으니까.

 



 



 



형 말처럼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왔지. 부

모님도 여행에서 돌아오시고, 형 방을 감싸고

돌던 싸늘한 기운도 말끔히 사라져 버렸어. 형

또한 비록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일상적인 생

 활로 돌아왔어. 학교도 나가고 했으니까.

 



 



 



난 모처럼 말할 수 없는 평화로움을 맛보았

지. 일상적인 생활이라는 게 이토록 커다란

 축복이라는 걸 절실히 느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 같던 평화는

일주일만에 깨지고 말았어. 형이 집에 안 들어

와 걱정하고 있는데 속초 경찰서에서 전화가

온 거야. 형이 속초 연금정에서 혼수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형 옆에 농약병이 놓여 있는 걸

 로 봐서 자살을 기도한 걸로 추정된다는.

 



 



 



부모님과 나는 깜짝 놀라서 부랴부랴 속초

의 병원으로 달려갔어. 다행히도 형은 살아 있

었어. 담당 의사의 말로는 일찍 발견되어서 목

숨은 건질 수 있었다고 하더군. 이야기 끝에

의사가 메모지를 내밀더군. 환자의 품안에서

나왔다며. 메모지에는 단 한 줄만이 쓰여져 있

 었지.

 



 



 



이기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단 한 줄의 글귀였지만 난 형이 말하려고 하

는 의미를 알 것 같았어. 단 한 줄 속에 함축되

 어 있는 커다란 의미를.

 



 



형이 왜 연금정을 갔느냐고?

 



 



연금정은 형이 미정이 누나와 결혼을 약속

한 장소야. 바위에서 서서 수평선 위로 치솟는

일출을 바라보면 결혼을 약속했던 곳이지. 여

행에서 돌아왔을 때 두 사람은 너무도 행복해

보였었어. 지상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처럼.

 



 



 



의사는 삼사일이 지나면 깨어날 거라고 했

지만 형은 좀처럼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

았지. 저러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까 조마조

마 하고 있는데 형은 열흘 만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어.

 



 



 



하지만 형은 이미 이전의 형이 아니었어. 총

기 있던 눈은 얼빠진 듯이 멍해져 있었고, 말

도 완전히 잃어버린 거야. 형을 치료하기 위해

 유명한 병원을 전전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의사들의 공통된 의견은 결코 농약의 후유

증이나 자살로 인한 충격으로 빚어진 증상은

아니라는 거야. 아직은 뇌파가 일정하게 움직

이고 있고 심장도 정상적으로 뛰고 있으니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지켜보재.

 



 



 



형은 그렇게 산 송장이 되고 말았지. 그게

벌써 6개월 전의 일이야. 형은 지금도 정신 병

원에 있어. 지금쯤 침대에 멍하니 누워 있을

거야. 아니, 간호원이나 조무사가 앉혀 주었다

면 침대에 앉아 있겠지. 누가 다시 눕혀 주러

오기 전까지 같은 자세로 창 밖으로 내리는 어

 둠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겠지.

 



 



 



형은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진짜로 그 서약 때문이었을까? 그 기뿐 나쁜

 점장이의 저주가 깃든.

 



 



 



아니면 미정이 누나의 이기적인 사랑 때문

 이었을까?

 



 



그도저도 아니라면 사랑하는 애인을 혼자

보내 버린 형의 죄책감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

 끈 것일까?

 



 



 



난 솔직히 모르겠어. 신이 있다면 그나 혹

 알까.

 



 



윤석은 이야기를 마쳤는지 빈 술잔을 만지

작거렸다. 나는 그의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주었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이 세

상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외에 또다른 세

계가 존재한다는 거야. 사후의 세계? 아니, 그

 냥 영혼의 세계라고 해 두자.”

 



 



 



윤석이는 잔을 들고 유리창 저편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짙은 어둠이 네온사인

 이 켜진 거리를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는 윤석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지런히

술잔을 비웠는데도 술이 완전히 깨어 있었다. 나

 는 은영의 영혼을 위해 다시 한 잔을 들었다.

 



 



 



“참, 나 말이지 요즘 심령학 공부하고 있어.

말릴 생각 하지 마. 일시적인 충동 때문에 이

러는 거 아니니까. 법이 이편의 세계를 다룬

거라고 하면 심령학은 저편의 세계에 대한 탐

구라고 할 수 있지. 그 동안 이편의 세계에 대

해서는 지겹게 공부했으니 이번에는 저편의

 세계를 공부해 보고 싶어.

 



 



 



나, 형 너무 사랑해. 형을 저대로 놔 둘 수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편의 세계에서 형

 을 데려오고 싶어. 이대로 형을 잃고 싶진 않아.”

 



 



 



둘이서 술집을 나섰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취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마셨지

 만 술은 취하지 않고 대신 한기가 몰려 왔다.

 



 



 



윤석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어

둠 속을 들여다보았다. 어둠 속에 은영과, 윤

석의 형 윤철과 미정이 누나가 있을 것만 같았

다. 그날 밤 나는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어지러운 상념에 시달려야만 했다...

 



 



 



윤석이는 자기 말대로 심령학에 심취했다.

 



 



 



사법고시 붙을 만큼 똑똑했던 놈이어서 심령

학에서도 금방 조예가 깊어졌다. 그 자식은 아

직도 가끔 만나서 기괴한 얘기를 들려주곤 한

다. 심령학 전문가가 친구로 있어 나는 남들이

 듣기 힘든 해괴한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내가 다시 윤철이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석달 뒤였다. 윤석은 형이 병원

에서 삶을 끝마쳤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윤석으로부터 형의 죽

 음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윤철이 형은 결국 병원에서 그 삶을 종결지

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윤철이형은 목을 메

 달아 미정이 누나 곁으로 갔다.

끌려간건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앉지도 못하는 윤

철이 형이 어떻게 화장실까지 가서 목을 매달

 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것은 죽은 윤철이 형의

 몸에서는 외상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도, 형이



목 매단 바닥에는 피로 쓰여진 있는 글자가 발

 견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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