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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고양이즙(2014)

title: 보노보노김스포츠2015.06.20 03:03조회 수 1021추천 수 1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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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날카로운 바람이 살을 에는 아침이다. 

따스한 이불 속에서 단 오분만 더 있기를 삶은 쉽사리 허해주지 않는다.

성필은 얼어붙은 두 손에 입김을 불어 그나마 온기를 더해가며 선착장으로 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고나온 딸의 얼굴이 왠지 더 수척해보였던 것만 같다.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선착장 근처 수협 경매장을 지나가던 그때,


" 캬아옹! "


불쑥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고양이 한 마리에 성필은 하마터면 길바닥에 코를 찧을 뻔 했다.

'에라이 이 놈!'하며 고양이를 쫓아내고서 문득 고양이가 뛰어내린 담벼락을 올려다보니 사람이 뛰어내리기도

어려울만큼 제 덩치에 비해 높은 위치였다. 


'이야…, 저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하단 말야?'


순간 어디선가 들었던 '고양이의 목숨은 아홉 개'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성필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저 믿을 수 없는 활력엔 무언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2.

짙은 해무가 드리운 바다는 삶을 닮았다. 어딘가를 향해 달려야만 한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지루한 항해의 끝은 정하기 나름이고, 끝은 곧 또 다른 시작이다. 존재한다는 건 삶을 항해하는 것이고,

항해한다는 건 멈추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는 일이다. 


" 성필이, 앞에 잘 보게! "


선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린다. 뱃머리에 선 성필은 선장의 말에 더 뻣뻣한 자세로 뱃머리 앞을 살펴댄다.

닻은 이미 진흙을 잔뜩 걸친 채로 뽑혀올라와 있었다. 드르릉, 엔진 소리가 아직 잠결인 어촌의 옆구리를 긁어댄다.

습기찬 바람이 살살 달라붙는다. 어선 갑판의 나무 판자가 삐그덕거리며 갈매기 대신 울고 있다. 

성필의 눈동자는 비로소 조금 여유를 찾는다. 이 배는 고용주인 선장의 재산이다. 실수는 용납될 수 없다.

남의 돈을 빌어먹으려면 죽으라고 했을 때 죽진 못해도 죽는 시늉까진 해줘야 한다. 믿고 일을 맡겼다면 손해란

생각은 안 들게끔 해줘야 한다. 어선원으로서 살아가는 성필의 철학이자, 제법 수완이 괜찮았던 선주였던 성필의

철학이기도 했다. 


소싯적에 성필은 자기 명의로 된 배만 3척으로, 선주인 자신 아래 선장 셋을 부리며 본인은 양식장 관리에만 몰두하던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도시에서 대학까지 나온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하고 부모를 꼭 닮은 귀여운 딸아이를 얻기까지만 

해도 그는 세상에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사람이었으나, 아이가 가지고 태어난 희귀병은 점점 아비의 인생을 반전시켰다.

병명조차 알 수 없는 허약병. 뼈마디가 마르고 살이 붙지 않으며 몹시 기력이 쇠약해지는 딸아이를 보는 부모의 마음은

똑같이 메말라갔다. 10살 이후론 스스로 걷기조차 힘들어져 학교조차 보낼 수 없었다. 양방과 한방을 고루 쓰고,

때론 미신까지 믿어가며 간절히 공들여도 헛걸음. 열여섯 살이 된 지금도 딸은 누워살아야만 했다. 혼자서..

진작에 성필의 마누라는 집을 떠나버렸다. 젊고 예쁜 나이였다고, 내 곁에 붙잡기엔 너무 생생한 꽃잎이었다고,

성필은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그녀의 행복을 바랬지만 어쩌면 그 마음은 그녀를 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향한 세뇌는

아니었던가. 더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버림받은 게 아니라 보내준거라고 자신을 세뇌시키려고.


성필의 마누라도 처음부터 부녀를 버리고 떠난 건 아니었다. 딸아이 하나 일으키는 게 그렇게 어려울 줄 알았을까.

사업을 넓히려고 건조 중이던 배들부터 시작해 양식장을 굴리던 배 3척까지 하나둘씩 팔아넘기고, 넓던 집을 팔고,

가진 땅도 팔고- 마침내 가진 걸 몽땅 길바닥에 뿌려버리고 호주머니 속 먼지 몇 톨만이 남을 줄 알았을까.

그렇게 도망갈 수 없는 두 사람만이 남아버렸다. 걷지도 못 하는 딸과, 딸 밖에 남지 않은 아비. 

명절에 찾아오는 친척 없이, 휴일에 찾아주는 친구 없이 어제는 오늘을 닮고 내일은 오늘을 따를 비루한 삶.

그것이 끝내 남겨진 지금일줄은.



3.

새벽부터 시작한 형망선 작업이 점심을 넘기고, 오후 잔업까지 하고 나니 평소보다 입항이 늦었다.

선장은 성필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했다고 조개를 한가득 봉지에 담아주었다.


" 성필이, 이거 가져가서 찬이나 하게. 잘 챙겨 먹고 다녀. 딸도 잘 먹이고… "


" 감사합니다, 형님. 그나저나 요 선착장 오기 전에 경매장 있잖습니까. 거기 담이 꽤 높은데 고양이가

뛰어내리는 겁니다.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 털 끝 하나 안 다친 거 있죠. 그거 희한하데요.. 참 영물입니다. "


" 하하. 그렇지? 우리 마을 사람들 함부로 고양이 안 쫓는 이유도 다 그런 거 아니겠나. 꼭 눈빛이 사람 말귀를

다 알아듣는 것처럼 해가지고.. 밤에 보면 깜짝 놀란다니까. 목숨도 자네 말마따나 보통 질긴 게 아니야. 

뭐.. 그래도 생물은 생물인지라 누구는 고양이 소주인가, 나비탕인가 푹 고아서 먹더라마는… "


성필은 선장의 마지막 혼잣말에 마음이 혹했다. 

마치 잊고 지내다가 아직 풀지 않은 선물상자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동자에 기대가 차올랐다.


' 고양이라고…! 그래, 목숨이 아홉 개인 영물을 진액 내어 마신다라… 이거다, 이거 믿어보자. 딱 한 번만 더…!

시팔, 까짓거! 뱃놈이 배를 팔고 가장이 집을 파는데 고양이가 뭐라고 못 달여 마실까. '


폴짝거리며 담을 넘던 고양이의 모습이 성필의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곧 상상은 허벅지 살이 건강하게 차오른 딸이 뛰어와 자신에게 안기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고양이, 고양이즙…!



4.

야아옹 야옹


" 야옹아~ "


야옹- 


온종일 할 수 있는 자세라곤 누워있기와 앉아있기가 고작인 미소에게 낮동안에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는 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창가를 지나가는 고양이들뿐이었다. 미소가 야옹아, 하고 부를 적이면 미소를 얼마간 쳐다보다

가는데, 아무리 라디오가 따뜻한 사연을 하루종일 읽어준다한들 미소에게 진정 살아있는 것과 교감하는 느낌을 주는 건

아버지와 있는 저녁을 제외하곤 그 순간만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미소에게 고양이는 소중한 친구인 셈이다.


" 휴우… "


' 나, 일어날 수 있을까… 아냐, 약한 생각해선 안 돼. 아빠가 날 위해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기운 차려서 일어나야해. 건강한 모습으로 엄마도 찾아갈거고, 고양이들도 데려올거야. 같이 산책도 하고… '


유난히 자신을 따르던 한 고양이를 방에서 키우고 싶다고 미소는 언젠가 말해보았지만 성필은 들어주지 않았다.

허약한 미소에게 혹여 야생의 병이라도 옮길까 싶어 그리 한 것이지만 미소에겐 무척 쓸쓸한 일이었다.

하루에 다 해봐야 십 분 남짓한 그 만남만이 미소의 유일한 사교 생활이었다.

멀리서 고양이가 야옹, 한 번 더 크게 울었다. 왠지 자기도 쓸쓸한 미소의 마음을 아는 듯이 구슬프게.



5.

" 이 새끼, 어딜 도망쳐…. "


벽에 몰린 채 잔뜩 울부짖는 고양이의 정수리를 성필이 휘두른 삽이 내려쳤다.

고양이가 비명을 지르기 무섭게 두번째 삽이 목에 꽂혔다.

바르르, 떨리던 팔다리가 마지막에 세게 꿈틀거리곤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양이 목숨이 아홉 개라는 건 명이 끊어진 채 다신 움직이지 않는 것만 봐도 미신인 게 분명했지만

한 번 맹신에 빠진 사람의 눈에 고양이가 살아나거나 그러지 못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잡아서 끓인다, 그뿐.


" 흐흐흐… "


이미 쌀포대 하나가 제법 묵직해져 있었다. 

묶여있던 주둥이를 풀고 젖히니 통통하게 살찐 노란 고양이 하나가 먼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어가 있었다. 

그 위에 줄무늬 고양이 하나가 얹혀졌다. 

성필은 다시 쌀포대 주둥이를 꽉 묶어진 후 전리품으로 황금을 받아든 영웅이라도 된 마냥 성큼성큼 집을 향해 걸었다.


성필의 걸음에 맞춰 흔들거리는 쌀포대 밑이 고양이로부터 새어나온 핏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좁은 공간 안에서 두 살덩이가 비비적, 비비적, 새빨간 피와 노란 지방으로 범벅이 되어가고 있다.

일격에 죽을 줄로만 알았던 노란 고양이는 목숨이 굉장히 질겼다. 살이 찢기고 뼈가 튀어나와도 달려들어

숨이 멎는 순간까지 반항했다. 아무리 성필이 힘에서 밀릴 이유가 없다한들 그 처절한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고양이가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구걸했더라면

성필의 동정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끝까지 싸우길 택했고, 죽을 때까지 발톱을 숨기지 않았다.

그 모습이 성필의 두려움을 점점 걷어내고 그에게 잔혹한 맹신을 가져다주었다.

고양이가 가진 효험을 믿게 해버렸다. 두번째 줄무늬 고양이를 죽일 땐 일말의 여지도 없이 일격이 녀석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목숨을 거두는 것에 익숙해진 인간은 그 어떤 맹수보다도 무서운 존재다.


… 해가 저물고, 집집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에 성필은 부엌에서 무언가를 푹 끓이고 있다.

야수와도 같던 눈은 언제 그랬냐는듯 누그러져 흔한 아버지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맹수의 사냥도 자기 새끼를

살리고자 행할 때가 있는 법. 피투성이 앞에서 잇몸을 보이던 그 남자가 맞는지 의아해 할 일이다.

수증기가 폴폴 피어오르는 솥엔 고양이 두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있다.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육수로 인해 팔과 다리, 머리와 꼬리가 흔들리며 이승을 향한 원망의 춤을 춘다.


" … "


시간이 지나고, 덮어두었던 뚜껑을 마침내 열자 고깃국물에 노란 거품이 둥둥 떠 있었다.

거품과 털을 뜰채로 걷어내며, 성필은 뽀얗게 우려진 국물에 감탄을 연발했다.


" 이거야…! "


가늘게 떨리는 혼잣말과 함께 괴상한 고깃국 냄새가 집안을 맴돌며 흐느적거렸다.



6.

" 점심 왜 먹다말고 남겼어. 꼭꼭 씹어서 다 먹어야지. "


미닫이문을 열고 성필이 저녁 밥상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 밥은 좀 남겨도 반찬 많이 먹었어. "


" 밥도 다 먹어, 아빠 일 나갔을 때 배고프면 어쩌려고. 그렇다고 또 과자 같은 거 먹으면 안 돼.

미소야, 이거 먼저 마셔. 밥보다 이게 보약이야. "


" 이거 뭐야? 어우… 냄새! "


" 약일수록 쓰다고 그러잖아, 코 막고 마셔. "


" 윽, 안 먹을래. 토 할 것 같애. "


" 약이라니까? 너 안 일어날 거야? 평생 누워지낼거야? 아빠 죽고나면 그땐 어쩌려고. "


" 일어날 거야, 왜 안 일어나. 아빠는 또 그 얘기야. 그냥 먹기 싫다고 했잖아. "


" 이거 마셔야 낫는데 도움이 된단 말이야. 좋은 거 달인거야, 나쁜 거면 아빠가 왜 마시라 그래. "


" 아빠 마음은 알겠는데 냄새 때문에 진짜 못 먹겠어… 안 먹으면 안 돼? "


" 약이라서 그런거라니깐. "


성필의 끈질긴 권유에 미소도 더 이상 마다할 수가 없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도, 재산도, 사람들도 잃어버렸는데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남의 배에서 품을 팔아가며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아빠인데, 그 고생에 비하면 이런 국물 하나 마시는 게 무슨 별 거라고…

몸에 좋다니까 마셔보는거야. 아빠를 위해서 참는 거라고 생각하자.

결심과 함께 미소는 국물을 조금씩 들이켰다.

이 약도 결국 자신을 일으켜주진 못 할 지라도 아빠의 좋아하는 표정 하나면 충분하지 않냐고.


" 우읍- "


고깃국물의 맛은 몹시 역했다. 기름이 두껍게 깔린 국물 속에 텁텁한 털 몇 가닥이 섞여들어와

식도에 달라붙었다. 국물을 삼키고도 누린내가 도저히 떠나가질 않았다. 금새 구토가 올라왔지만

이불을 더럽힐까 싶어 미소는 억지로 참았다.


" 미소야, 약발이 드나 보다. 조금만 참고 매일 마시자, 아빠가 노력해서 얻은 귀한 약이야… "


" 응…. "


성필이 반찬 뚜껑을 열다 말고 벽에 기대려는 미소 허리에 베개를 다시 받쳐주었다.

곧 조촐한 반찬 몇 개를 앞에 두고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가 조용히 두 사람이 있는 방안을 메웠다.


" 이것도 좀 먹구. "


" 응. "


성필과 미소, 부녀의 저녁 식사 소리가 그 날 하루도 지나가고 있단 걸 말해줬다.

지난 세월 하루 하루가 모두 그처럼 소리 없이 치열한 전쟁이었다.



7.

야옹


" 야옹아- 야옹아-? "


평소 같았으면 미소와 눈을 마주쳐줬을 고양이가 웬일인지 미소를 쳐다보지 않고 나타난 순간부터

사라질 때까지 온통 주위를 경계해댔다. 요즘 따라 고양이들이 뜸하더니 태도마저 미지근해졌다.

의지하던 친구들과 서먹해진 탓에 미소는 조금 시무룩했지만 한편으론 좋은 일 또한 더불어 찾아왔다.

그 생각을 하자 미소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성필이 달여온 '약'을 지속해서 마시니 기적처럼 살이 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뭘 얼마나 먹어도 힘이 나질 않고 팔다리가 젓가락처럼 앙상했건만 이젠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마신 것도 아닌데 약의 효능이 우수한건지 종아리부터 손목까지 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아빠의 도움이 있어야 일상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미소가 언제부턴가 제법 솜씨좋게 스스로 몸을 가누고 있게 된 것은

앞선 변화 덕분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였다.


" 헤헤… "


희망이란 건 있어, 미소는 주전자에 담긴 '약'을 국사발에 한가득 따랐다.

'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젤리처럼 끈적해졌는데, 이제 그 고약한 맛과 향을 크게 거부하지 않았다.

희망의 맛이란 게 이런 거라면 즐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 우윽, 우으. "


미간을 찌푸리며 끝내 한 사발을 해치운 미소가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얼른 나아서 아빠한테도 잘 하고 고양이들과도 다시 친해질거야.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이토록 분명했던 적은 없었다.



8.

"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어촌에 고양이 발길이 뚝 끊겼으니 불길한 일 아닙니까? "

" 거 뭐 고양이 하나 없다고 흉조일라고. 오히려 툭하면 차에 치여죽어서 골치였지. 고양이똥 밟을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안 그래요들? "


마을에 고양이가 뜸해졌다. 수협 경매장과 횟집, 생선 말리는 가정집이 즐비한 이 어촌 마을에 고양이가 없다니.

마을 사람들의 호불호가 갈렸고, 저마다 주장은 조금씩 달랐지만 분명 모두 이 일에 대해 분명한 자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고양이가 있는게 좋다, 없는게 좋다의 얘기일 뿐. 왜 고양이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관심은 아무도 가져주지 않았다. 단 한 사람만이 고양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죄다 사라져버리면 어떡하지, 바로 그 걱정. 성필이 그 사람이었다.


' 아직까진 안심할 수 있어. 앞으로 더 바쁘게 움직여야겠다. '


성필의 집 냉동고와 냉장고가 미어터지도록 고양이가 들어차 있었기에,

아직까진 괜찮았다.



9.

약 구하기가 힘들어져서 발품을 파느라 요 며칠간 뱃일도 따라가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을 위해 하루를 살아내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미소는 마음이 먹먹했다. 고양이들이 완전히 발길을 끊은 요즘 미소가 의지하는 건 오로지 

아버지 하나뿐이었다. 오늘도 자신을 위해 부엌 뜨거운 불 앞에 서서 약을 달이는 아빠 생각을 하며 미소는 문득

큰 결심을 했다.


' 지금이라면 왠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아. 해보자. '


성필의 손을 잡고 벽을 짚으면 엉성하긴 해도 두 발로 서있을 순 있게 된 요즘,

비록 서투른 자세가 우스꽝스러워 성필과 함께 한참을 웃긴 했지만 열 살 이후로 처음 일어섰다는 걸 자각한 순간

얼마나 눈물이 흘렀던지. 이제 스스로 일어나겠다는 용기를 낼 때가 되었다.


" 흐윽…. "


벽을 짚자마자 팔꿈치가 부들거리며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을 것만 같다.

다리로 가까스로 지탱한다. 원래라면 이 단계에서 다리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넘어지기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한 두 군데가 부러지거나 상처를 입어 병원 신세를 져야 했기에 고작 일어나는 일인데도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 으윽- "


사용하지 않던 관절과 근육이 비명을 지르지만 미소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몸이 올라간다, 천천히 중력을 이겨내고 있다.


" 하앗! 하아!… "


왼쪽, 오른쪽, 오로지 일어서겠단 일념으로 고통을 끈질기게 참아내자 어느새 눈높이가 무척 높아져있었다.


" …… "


두 손을 살며시 벽에서 떼어본다.

땀이 비 오듯 흐르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기대지 않고 두 발로 버티고 서있다는 걸 안 순간,


" 압…! "


반사적으로 '아빠!'하고 성필을 부르려던 외침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거렸다. 기뻐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 몰래 다가가서 놀라게 해드려야지, 아…! 내가 일어서다니! '


한 발짝을 내딛는다. 역시 다리가 시큰거린다. 사용하지 않던 관절과 근육이 몹시 경직되어 있다.

하지만 걷기가 영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무리하고 있는 건 맞지만 차라리 오늘 무리해서 열흘을 앓더라도

오늘 이 모습을 꼭 보여드리고 싶었다. 미소의 몸에서 식은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또 다시 한 발짝.

6년이다, 6년 만에 자신의 힘으로 방 밖으로 향하고 있다.

살짝 열린 미닫이문 사이로 미소가 몸을 내미는 데까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지난 6년에 비하면 그건 찰나일뿐.



10.

고양이들이 부패하고 있다.

고깃국물은 잘 보관하지 않으면 금새 먹지 못할만큼 쉬어버렸고, 고양이들은 저장 기간이 길어질수록 썩어갔다.

새로 잡으려고 마을을 나서봐도 이젠 찾기조차 힘들었다. 

똑똑한 녀석들은 마을로부터 멀리 떠나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결국 마을에 고양이 씨가 마른지라 하루를 꼬박 찾아도 한 마리 잡기가 힘들었다.

뱃일은 뒷전이고 오로지 고양이 구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하루하루였다.

그나마 온전한 몇 마리가 한 솥에 끓고 있었다. 

한 번에 엑기스를 내서, 냉동으로 보관해야 봄까지 먹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 탓이다.

봄까지만 버티면 자연스레 어촌 냄새를 맡고 돌아올 녀석들을 다시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볼에 살집이 오르자 제법 여자 태가 나는 딸을 생각하면 이깟 고생쯤은 견딜 수 있었다.

딸이 사람 구실을 하고, 시집 간다고 사위 하나 척 데려와준다면… 후후후,

그럴 수만 있다면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 새끼라도 잡아다 못 끓여주겠냐고 속으로 키득거렸다.

성필의 황홀한 백일몽을 깨운 건 그 순간 들려온 비명소리.


" 꺄아악! "


놀란 성필이 국자를 놓친 탓에 부엌에 한바탕 챙그랑 소리가 지난 후 정적이 흘렀다.


" …… "


" …… "


미소가 일어서있어…?

성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고양이가… 고양이가…!

미소는 솥이며 반 틈 열린 냉장고며 고양이가 뒹구는 부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 어떻게… "


둘의 말이 겹치자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성필의 마음 속엔 그간의 고생을 모두 녹여주는 벅찬 감정이 차올랐지만

미소의 마음 속엔 배신감이 부르는 분노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솥 안에 고양이 몇 마리가 곤죽이 된 채로 뻐끔뻐끔 진득한 국물이 끓고 있었다.

그리곤 발견했다. 미소를 아끼고 따르던 고양이, 미소가 가장 귀엽게 여기던 얼룩고양이가 그 안에 있다.


" 미소야, 일어났구나…! "


미소를 향해 성필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다가갔다.

그런 성필에게 미소도 몸을 날려 안기는가 싶더니 가까스로 짜낸 힘은 엉뚱하게도 성필의 뺨을 때렸다.


" 너… 왜…? "


" 왜 그랬어! 왜 말 안 했어! 어떻게 고양이를 나한테 먹일 수가 있냐고! "


성필은 믿을 수 없었다. 

아빠, 저 드디어 일어섰어요, 감사해요, 꿈에도 그리던 딸의 웃음 대신 육 년 만에 일어선 딸이 자신에게 준 것이 

따귀와 분노라니, 난 저것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도 이 순간을 위해 남은 육신마저 바쳤는데,

어떻게 저 년이 나한테! 아빠한테!


" 너 일어선 거 보면 몰라! "


" 저거 당장 버려, 다 버려! 아, 빨리 버리라고! "


미소가 고양이가 끓는 솥을 싱크대로 밀어넣으려 들자 성필이 도리어 미소를 힘껏 밀었다.

육 년 만에 일어선 미소에겐 그 힘을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바닥에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 너 봄까지 마실 건데 왜 버려, 이제 고양이도 없단 말야! "


" 봄? 봄이라고? 미쳤어? 고양이인 거 왜 말 안 했냐고! 왜 나한테 고양이 먹였냐고! "


" 너 일어서게 하려고! 왜! 걸어다니니까 너도 좋잖아! 자, 빨리 마셔, 이거 냉장고에 넣어야 된단 말야,

방금 끓인게 가장 약발 좋은거야. 한 그릇 떠줄게. "


" 절대 안 먹어! 미친 새끼! 아빠는 미쳤어, 아빠가 주는 건 아무 것도 안 먹을거야! "


성필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 미소야… 아빠 화낸다? 너 낫게 하려고 고생해서 잡은거야, 너 지금 일어선 것도 다 아빠 덕분이야. 알지? "


하지만 미소 또한 자신의 친구를 몽땅 잃은 데다 그 친구를 기쁜 마음으로 꿀꺽대며 삼켰다는 충격에

아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사함은 온데간데없이 증오만이 남아있었다.


" 지랄하네! 약? 고양이가 약이었어? 앞으로 6년이 아니라 60년을 누워있어도 그거 쳐먹곤 안 일어나! "


그 순간 성필의 마음에서 인간의 이성이 달아나버리고,

고양이를 죽일 때와 똑같은 짐승의 눈이 번뜩였다.


" 이 씨팔년이! "


성필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미소의 목덜미가 금새 붉게 달아올랐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고통 보다는 말로 할 수 없는 슬픔이 더 아려왔다.

의지하던 친구는 어디에도 없고, 사랑하던 아빠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

바닥에 쓰러진 채 성필의 구타를 받아내던 중에 성필의 정강이가 눈에 들어왔다.


" 이이익! "


미소는 온 힘을 다해 성필의 발을 붙잡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턱과 치아.

유일하게 6년간 매일 사용해온 턱근육만큼은 정상인과 비교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아드득!

고양이즙을 마실 때처럼 눈을 질끈 감은 채 미소는 성필의 발목을 씹었다.


" 끄아악! 씨발! "


성필 역시 바닥에 쓰러졌다. 살점이 한움큼 떨어져나간 발목에선 피가 쏟아져 나왔다.

발목이 너덜해질 때까지 미소는 몇 번이고 깨물었다. 아찔한 고통이 성필의 뇌를 지배했다.

이러다간 죽는다, 살기 위해선…!

마침내 죽이진 않으려던 최소한의 이성이 멎고, 성필은 살고자 발악하는 짐승이 되었다.

고통을 잠시 잊은 채 번뜩이던 성필의 눈동자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국자를 집어 들었다.


" 뒤져버려, 뒤져버려라, 은혜도 모르는 개 같은 년! "


" 으윽! 어억! "


성필의 발목살을 한가득 머금은 채 피칠갑이 된 미소의 얼굴에 국자가 날아들었다.

고양이를 인정사정없이 때려죽이던 그 날처럼 성필의 일격은 비정했다.

한 대, 두 대,

코뼈가 부러지고 쌍코피가 터져나왔다.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미소는 힘겹게 국자를 부여잡았다. 국자를 들고 있던 성필의 손에 미소의 손이 겹쳤다.

부녀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라기엔 너무도 잔혹했다.

성필은 국자를 빼앗으려는 움직임을 간파하곤 다른 손으로 미소의 손가락을 거꾸로 꺾었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고양이 소리처럼 앙칼진 비명이 울렸다.

성필은 웃고 있었다, 내가 뺏길 줄 아냐, 고양이 포획에 성공했을 때와 같은 표정을 한 채

국자로 다시 미소의 정수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불과 오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 좋던 부녀였단 사실이 무색했다.

지난 16년간 서로를 의지했던 세월이 거짓말 같았다.

부녀? 부성애? 효심? 그따위 허울 좋은 말은 이 부엌 안에 남아있지 않다.

죽고 싶지 않으면 죽여라, 처절한 생존법칙만이 존재했다.


코뼈가 부러지고 입술이 터진 채 여기저기 찢긴 얼굴에서 피가 울컥울컥 흐르고 있는 미소,

아빠가 가끔 연애운이나 재물운 손금을 봐주던 가녀린 손을 벌벌 떨며 성필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생명선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라도 봐달란 것일까- 그러나 손가락은 이내 기진맥진해있는

성필의 팔을 힘껏 꼬집었다. 욱씬거리는 발목 통증에 잠시 미소를 내버려두던 성필은 그 고통에

남은 기력을 짜내어 국자로 미소의 정수리를 힘껏 찍어버렸다.

상처에 다시 일격이 가해지자 상처가 더욱 벌어지며 뜨거운 피가 새로 솟구쳤다.

더 흐를 피가 남아있지 않을만큼 출혈이 심했는데도, 미소의 눈앞이 뜨끈하게 가려졌다.

끝이었다.

한 삶의 완전한 끝.

그녀를 살리기 위해 몰두한 성필의 삶은 언제부턴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녀를 죽여온 삶으로 변해있었다.

성필은 그녀를 죽였고, 자신은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남은 삶 또한 길진 않을 것 같았다.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기력이 점점 쇠해갔다.


아빠ㅡ! 아빠ㅡ!

명랑한 표정으로 학교를 다녀오던 어릴 적 딸의 얼굴이,

자신의 앞에 피범벅이 되어 죽어있는 딸의 얼굴에 겹쳤다.


" 미소야… 아빠야… "


성필의 흐리멍덩한 눈빛. 

그도 점점 의식을 잃어간다…


…………


………


……




11.

성필이 일하던 형망 배 선장 인태는 요 며칠간 조업에 계속 빠지는 성필이 염려되어,

한 손에 반찬거리를 가득 들고 성필의 집을 찾아왔다.

사람이 반겨주는 대신 성필의 집 뒷문으로 뭔가 새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 저 문은 부엌과 연결되는 뒷문인데. '


인태는 조심스레 뒷문으로 다가갔다.


' 이게 뭐야…? 피…? 아닌데…? '


새빨간 액과 누런 액이 한데 뒤섞여 닫힌 문틈으로 비죽비죽 나오고 있었다.

비릿하면서 노린내가 심한게 도무지 참기 힘들 정도였다.


" 아니, 사람 사는 집이 왜 이래…! 성필이! 이봐! 대답하게! 집에 있나? "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집에선 대답이 없고, 액체는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 뭘 끓이고 있는 거 같은데 어딜 간거야, 성필이! 성필…!? "


인태가 문을 열어젖히자 액체가 콸콸 쏟아져나오고,

동시에 인태의 눈엔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 으아아악! 씨발, 씨발! "


그 광경에 미친듯이 도망가면서도 인태는 자신의 눈이 무엇을 본 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간다해도 그런 지옥도가 있을까,


팔팔 끓는 솥에서 알 수 없는 국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는데,

온 몸이 피로 시뻘겋게 물든 여자의 몸 위로 노란 국물이 따라흐르고 있었고,

발목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성필이 쓰러진 채로 바닥에 흐르는 반은 빨갛고 반은 노란 국물을 힘없이 할짝거리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살아남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아귀 같은 모습으로.




ㅡ 고양이즙 (2014) 끝. [환상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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