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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화분언니(2015)

title: 양포켓몬패널부처핸접2015.08.22 05:52조회 수 879추천 수 1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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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름은 젊음의 꽃이라고 누가 말했을까요, 거울 앞에 서있는 민지는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군요.
여드름이 또 생겨버렸거든요. 저것 좀 보세요, 하나, 둘, 어라? 세 개씩이나.
요즘 부쩍 많이 생겼어요, 사랑에 빠진 것도 아닌데요. 뭐-, 그런 낭만적인 원인은 아닐 거에요.
그렇다고 안 씻는 건 아니에요. 그런 현실적인 이유도 아니에요. 원인불명, 그렇게 해둘게요.
하지만 민지는 살짝 뱉으려던 불평을 입안으로 감춰넣었어요.
뒤에 언니가 있으니까.

온 몸에 흰 크림을 케잌처럼 덕지덕지 바른 언니가 끙끙 앓고 있어요.
민지는 여드름을 이리저리 건드려보던 손을 슬며시 내렸어요.
그녀의 언니 앞에서 여드름 몇 개쯤은 작은 고민, 음, 행복에 겨운 고민에 불과할지도 몰라요.

" 민지야-. 언니 신경 쓰지말고 거울 봐.. 여드름 놔두다가 흉지면 어떡해. "

언니도 알고 있었군요, 민지가 여드름을 성가셔하고 있다는 걸.
민지는 조금 머쓱해졌겠죠.

" 아냐. 언니 뭐 도와줄 거 없어? 많이 아파? "

" 괜찮아, 괜찮아. 등에 손이 잘 안 닿네, 등에 크림 좀 발라줄래? 미안해. 더러운데.. 만지기 싫지? "

" 무슨 소리야. 그런 말 하지마. 내 등이나 언니 등이나 똑같은 등인데, 등이 뭐라고. "

" 우리 동생 다 컸네. "

하나부터 열까지 민지를 배려해주는 언니, 민지는 그런 언니가 고마웠지만 가끔 그 배려가 그녀를 슬프게 했어요.
민지의 친구들이 놀러올 때면 멀쩡히 컴퓨터를 하다가도 '아, 왜 이렇게 졸리지.'하곤 방으로 들어가버려요.
변기를 쓰고 나올 때면 알콜에 적신 솜으로 자신이 닿은 부위는 모두 닦고 나와요.
하다못해 가족사진에도 나온 적이 없어요. 
지나치게 자신을 홀대하면서까지 배려해주는 그녀의 모습,
정작 민지는 언니를 꺼리는 마음이 없는데도 말이죠.

어쩌면,
그렇게 자신을 지워야만, 세상에 원래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살아야만,
자신과 세상이 똑바로 마주하는 걸 막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군요.

" 언니, 오늘 비 온다더라. 오면서 보니까 먹구름 꼈어. "

" 그래? 정말? 나도 기상예보는 봤는데-.. "

썩은 나무? 두꺼비 가죽? 아차, 언니의 등이에요. 그녀의 이름은 민혜입니다.
민지는 민혜의 푸석푸석한 등에 보습 크림을 듬뿍 바르고 있어요.
매일 봐온 언니의 등이지만 오늘도 민지는 침울해졌어요.
한 번도 징그럽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이 등을 본다면 어떨까요, 뻔하겠죠.
민혜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러니까 바깥 출입은 커녕 집안에서조차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거겠죠.
자매의 옆엔 텅 빈 보습 크림 용기가 몇 개씩이나 차곡차곡 쌓아올려져 있네요.
그치만 오늘 하루동안 바른 양일 뿐이에요.

" 언니, 다 발랐어. "

" 고마워. 민지야. 매번 미안해. "

" 미안하면 떡볶이 사줘! 나가자. 언니 집에 너무 오래 있었어. "

" 떡볶이는 돈 줄테니까 나가서 2인분 사와. 밖엔 안 나갈래.. "

" 바깥 공기 쐬고 싶잖아. "

" 베란다에 가면 되니까. 언니는 염려 말고. "

" 그 소리 아니잖아. 지하철 타고 싶다며, 문구점도 가보고 싶다며. "

" 안 되니까, 안 되는 줄 아니까 하고 싶다는 거였어. "

" 누가 그래? 불법이라도 돼? "

" 민지야.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언니도 사람을 쳐다보면서 생각을 해, 평가를 하구. "

" ... "

" 넌, "

" ... "

"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잖아. "

" 언니. "

"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

" 언니.. "

" 나, 그만 아프고 싶어. 예쁜 꽃이 먼저 꺾인다지만, 못난 꽃은 먼저 밟히는거야. "

" 미안해. "

" 아프다, 민지야, 언니는 마음이 너무 아파. 아픈데, 여기가, 여기가 욱씬거리는데, 나보고 살라고 해. "

" 언니, 떡, 떡볶이 사올까? 계란 넣을까? 김말이는? "

" 얘가.. 뜬금없게, 너 먹구 싶은대로 사와. "

저런, 민지가 서두르는군요. 
영 매끄럽지 못한 마무리였어요.

2.

민혜는 태어날 때부터 희귀한 체질이었어요. 
바싹 마른 미이라처럼 피부가 사방팔방으로 갈라진 채 태어났죠.
처음엔 죽은 채 태어난 줄 알았을 거에요. 그러나 아기는 울었어요, 살아있다는 걸 우렁차게 알렸어요.
조금만 늦었더라도 아마 유산한 줄 알았겠지만 산모와 아기 둘 다 건강했습니다! 
아기의 갈라진 피부만 빼면요. 

의사는 그녀를 할리퀸 어린선이라고 진단했어요.
그러나 민혜를 퇴원시키던 날, 의사는 민혜의 바싹 마른 손가락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 어린선이 아닙니다, 어머니.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는 증상이에요.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민혜의 피부는
마치 물을 주지 않은 화분처럼 건조합니다. 항상 관심을 가져주세요. 여기까지 밖에 도움을 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

원인불명, 마치 이유없이 생긴 여드름처럼 그녀의 병은 찾아온 걸까요?
아닐지도 모르죠. 어머니는 그제사 털어놓았어요. 임신 중 찾아온 두통을 견디지 못 하고 종류가 다른 진통제를
몇 개 집어먹었다구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그게 원인은 아닐 거라며 다독였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을
하염없이 쥐어뜯었어요. 그 순간에도 화분은 바짝바짝, 마르고 있었어요. 얼른 크림을 발라줘야죠, 어머니-?

그러다 2년 뒤에 민지가 태어났어요.
아-주 귀여운 꼬마였지요.


3.

" 언니! 떡볶이 여기, 근데 지금 떡볶이가 문제가 아니야! 지금 비 와! "

" 정말? 정말? "

" 응! "

비에 홀딱 젖은 민지는 뭐가 좋은지 민혜를 불러대네요,
민혜도 웃어요. 밖에 안 나간다더니 외출복을 주섬주섬 갈아입어요.

" 가자 가자- "

어라? 민혜가 민지 손을 잡고 앞장까지 서요.
말이 틀린걸. 
모자에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아주 중무장을 하긴 했지만 밖에 안 나간다던 사람치곤
너무 적극적으로 나가는걸요? 옥상으로 향하네요.
마침 비는 땅을 충분히 적실만큼 내리고 있어요. 
우산, 우산 써야죠. 근데 왜 민지는 언니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죠? 자기만 안 젖으면 다인가.

" 후아.. "

이상한데, 민혜는 비를 맞는게 아무렇지 않은가봐요.
오히려 그녀에게 해방감을 가져다주나봐요.
민혜가 선글라스를 벗어요, 눈곱이 껴서 지저분하던 그녀의 눈이 점점 맑게 뜨이네요.
알고 보니 제법 눈이 예쁘네요.

" 민지야, 언니는 지금이 너무 좋아. 너두 좋아. "

" 헤헤. 나도 오늘 같은 날이면 다 좋아. "

민혜는 그 말과 함께 모자도, 마스크도 다 벗어버렸어요.
피부에 전혀 흡수되지 않은 듯 그대로 남아있던 크림이 번들거리네요.
바르지 않았다면 건조한 피부는 쩌적, 쩌적 가뭄이 온 논바닥처럼 갈라졌을테니까
이정도면 만족해야죠. 갈라지진 않았잖아요. 

민혜가 하늘을 쳐다봐요, 그녀의 눈이 감기더니, 비를 마주해요.
민지는 어느새 멀찍이 떨어져 우산을 쓴 채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어요.
비는 어느새 제법 많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민혜는 그에 맞춰 윗도리를 벗었어요,
이어서 아래까지 벗고 완전히 전라의 몸이 되어버렸어요.

" 언니, 그러다 감기 들어! 추우면 말해! "

" 아하. 괜찮아. 고마워. "

늘 건네는 말에 따라온 건 건성으로 한 대답.
민지는 여전히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고 민혜는 이제 양팔을 활짝 벌린 채 비를 받아들이고 있어요.
아! 저건,
마치 화분에 물을 주는 것 같아요.
화분이 살짝 마른 감이 있을 때 마침 다가온 물조리개가 주는 한바탕의 단비, 그거에요.


4.

원인 불명의 피부 각화증. 
치료법 불명.

불치병. 그러나 아주 우연한 계기로 민혜의 맨살을 보게 된 건 아주 어릴 적의 일이었어요.
민혜의 체질 탓에 남들처럼 평범히 유원지나 명승지에 갈 수 없었던 가족이 피서철을 최대한 피해 인적이 없는 계곡을
찾아갔던 첫 가족여행, 그 날 밤 예상치 못 한 폭우를 만나 불어나는 계곡물을 피해 가족 모두 한바탕 난리법석을 떠는데,
막상 텐트를 거두고 자리를 피해보니 처음 보는 여자애 하나가 가족 틈에 끼어있었지 뭐에요.

" 너 누구니? 혼자 왔니? "

" 엄마, 왜 그래. 나야. 어두워서 안 보여? "

" 민혜야? 너 민혜라고? "

" 왜 그래애. "

그때 가족들은 처음 알게 되었어요. 비를 오랫동안 맞으면 민혜의 각질이 조금씩 씻겨진다는걸.
이후 희망을 가지고 가습기도 들여놓고, 분무기로 피부도 적셔주며 일상 속에서 민혜의 완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어요.
딱 하루에요. 비 오는 날에,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비를 맞아야만 각질이 사라진다는 건 그렇게 알게 되었죠.

왜? 어째서? 원인이 뭐야? 분석하시려구요? 소용없어요.
애초에 화분처럼 마른 그녀 자체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으니까요.


5.

민지는 이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둔 채 빗 속의 민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요.
꽤 시간이 지났고, 민혜의 머리에서부터 씻겨내려온 각질이 눈꽃처럼 바닥을 흐르고 있네요.
무심코 바라보면 예쁜 꽃잎이 바닥을 수놓는 모습 같기도 해요.

화분은 어디로 갔을까요, 촉촉하고 매끈한 살결이 그 자리를 대신 했어요.
오늘까지만 해도 보습크림 몇 통을 겹겹이 바른 채 끙끙 앓던 그 갈라진 민혜가 맞나요?
매끈한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모든 맵시가 그녀가 아름다운 아가씨란 걸 말해줘요.
민지를 고민에 빠지게 한 여드름 하나 없는 얼굴을 보세요, 
그 얼굴을 바라보는 민지 역시 무척 몰입한 모습인걸요. 전혀 지루한 감이 없어요.

비가 민혜의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어내렸어요.
꽃잎 밭 위에 선녀가 살며시 내려앉은 듯, 아름다운 선을 가진 여체가 오롯이 서있어요.
아무 옷도 입지 않은 모습이 경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느낌이 경외심마저 들게 해요.
민지가 우산을 쓰면서까지 기다린 이유가 있었군요.

" 언니 진짜 예쁘다.. "

그 말에 민혜가 싱긋 웃는데, 민지의 마음이 설렐 정도로 해맑은 미소였어요.


6.

" 떡볶이 잘 먹었어, 민지야. "

" 무슨. 언니 돈인데. 다음에도 여기서 사올까? "

" 저기. "

" 응? "

" 미안한데, 진짜 미안한데, 아까 내가 한 말은 다 잊어. "

" 엥? 뭔 소리? 아까 얘기한 거? 무슨~ 내가 마음에 담아둘까봐? 안 그래. "

" 그게, 나, 지금 나가고 싶어. "

" 어? "

" 나가고 싶어. 나, 예쁜 옷 입혀줘. " 

" 진짜지? "

" 응. 스타킹은 어떻게 신는거야? 너 신은 거 보니까 너무 예뻐서. "

" 오? 오? 대박, 잠시만 기다려! 검스 들고 올게! "

" 아, 너무 큰 소리 내지는 말구.. 부끄러워. "

" 섭하게 무슨 소리야, 다 가져올게! 내가 다 봐놨어! "

평소엔 피부가 쓸리는 탓에 펑퍼짐한 산모용 옷이나, 티셔츠에 통반바지만 입던 민혜가 
오랜만에 내린 비를 맞고 온 덕에 기분이 들뜬 모양이에요. 
앞으로 두세시간 정도는 지금 모습으로 다닐 수 있거든요.
그 덕분에 민증도 만들고, 증명사진도 찍고, 나머지 다른 사회적인 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거죠.
그 시간 외엔 일체 집 밖으로 나가질 않았으니 민혜의 인간 관계라곤 가족들이 전부였던거지만.

" 이 스타킹, 이렇게 입는거니? " 

" 발 끝에 손 이렇게 잡아봐, 응, 당겨, 괜찮아. 안 찢어져. 더, 더. 그렇지! "

민지의 조언대로 옷을 입은 민혜가 마침내 한 벌을 갖춰입었어요.
이번엔 우산을 챙긴 그녀가 집 밖으로 나서요, 어? 왜 또 옥상이죠?
아마 마음의 준비를 하려나봐요. 바로 세상으로 나가기엔 그녀 마음 속의 벽이 너무 높아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내는 그녀에게 외출이란 곧 어항 밖에 내어놓은 금붕어의 심정이었겠죠.
마음을 조금 안정시킨 다음 나서려는거죠. 좋아요. 민지도 굳이 따라오지 않았군요.

어어어?
왜 가만히 있어요, 뭐가 문제에요? 잠시, 민혜의 시선이-, 맞은 편 빌라 옥상을 향하고 있군요!
아! 잘 생긴 청년이 민혜와 똑같은 표정, 똑같이 멈춰버린 자세로 마주보고 있어요.
그렇군요, 민혜는 사랑할 나이가 된 지 오래였어요.

" 그쪽 빌라 사세요? "

태어나서 처음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관심을 받아본 거에요, 그녀가!

" 네? 네에, 저어, 그쪽두, 그쪽 빌라에 사..세요? "

사랑할 나이의 아가씨 마음이 흔들리네요, 남자도 무심해보이지 않아요.
서로 두근대고 있어요, 빌라와 빌라 사이 간격은 넓었지만 마음이 닿았어요.

" 저어, 초면에 실례지만 굉장히.. 예쁘시네요. "

" 아! 안녕히 계세요! 죄송합니다! "

" 저기요! 저기요! 오해하지 마세요! 저 그런 놈 아니에요! "

예쁘다, 그 말 한마디가 민혜를 흔들어놨어요, 그 순간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어요.
저런, 우산까지 버려둔 채 집으로 뛰어들어왔군요, 문을 닫자마자 민혜는 주저앉아버려요.

' 이게, 뭐지? 심장이 뚫린 거 같아, 뜨거운 뭔가가.. '

" 하아. "

민지가 양치질을 하다말고 그런 민혜를 의아하게 바라보네요.

" 민지야.. 나, 기분 이상해. "

" 웅. 잠깡망. 양티질 중이라 임 쫌 헹구게-, 가르르, 퉤. 왜? 기분이 왜 이상한데? "

" 아까 옥상 가서 모르는 남자랑 마주쳤는데, 그때부터 심장이 뛰는거야.. "

" 헐, 남자? 잘 생겼어? "

" 그게, 잘 생겼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아니지, 잘 생긴 거 같아. 맞아. 잘 생겼어. "

" 뭐야~ 언니, 그래서? 마주친게 다야? "

" 거기 사냐고 서로 묻고, 그 사람이 나보고 예쁘대.. "

" 그래서? 번호 물어봤어? 아니면 영화 보자고 했어? "

" 근데 갑자기 기분이 너무 이상해져서 다시 들어왔어.. "

" 뭐야-! 김빠지게. "

" 사랑하는걸까? "

" 겨우 두 마디 해놓고? "

" 마음이 가는걸 어떡해. "

" 헤-헤, 우리 언니가 사랑하는 나이가 되셨어? "

" 놀리진 말구. "

민지가 뿌듯해보여요, 꼭 사랑에 대해 훈수할 때는 자기가 언니 같은데요?
물론 그런 쪽으론 민지가 경험이 더 많긴 하지만 말이에요.

" 그럼 다시 가볼까? "

" 나, 지금 괜찮아? "

그 말에 민지가 자세히 살펴보자 뺨이 갈라지고 있어요,
이런, 이래서야 한 시간 뒤엔 걷잡을 수 없어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 보습 크림을 발라야 해요.

" 꼭 지금이 아니라도 다음에 비 오면 더 예쁘게 꾸민 다음 가보자! 이 앞 빌라라며,
잠시 보는 건 어려운 일 아닐걸? "

" 몇 층 몇 호인지도 모르잖아, 나 너무 부끄러운데.. "

" 부끄럽긴? 남자도 누나 예쁘다며, 그거 진짜 예쁘니까 한 소리야. 어라? 혹시 저 사람이야? "

" 누, 누구? "

창가에 기대있던 민지가 누군가를 가리키자 민혜가 쏜살같이 창가로 다가갔어요.
반대편 빌라 앞에 나와 이쪽 빌라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남자, 누군가를 몹시 찾고 있어요.
분명 그 남자 맞군요!

" 어떡해! 저 남자 맞아. "

" 오- 잘 생겼어 잘 생겼어! 완전 훈남이야! "

" 떨려서 못 보겠어, 아. "

" 얼른 비가 와야겠네, 언니. 다음에 보면 좀 튕겨, 좋다고 덜컥 좋아요, 좋아요, 하지 말고. 알았지?
근데 언니 크림 발라야겠다. "

" 벌써? 어머, 진짜네.. 나도 참. "

민혜는 아마 몰랐을 거에요, 자신의 마음 속에도 사랑의 씨앗이 있었다는 걸.
몹시 고민해왔겠죠. 있을까, 없겠지, 그러나 있었던거죠. 싹까지 틔운거죠.
사랑받고 싶고 사랑주고 싶은 그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다음에 비가 촉촉히 내릴 때면 아마 멋진 무지개빛 다리가 걸쳐질 거에요,
자매는 그 주제로 오랜만에 웃음꽃을 피웠어요.


7.

" 민지야. 뉴스 틀어봐. "

민지가 민혜 눈치를 보며 텔레비전을 켰어요,
때 마침 일기 예보가 나오네요.

- 이번 주 역시 아쉽게도 단비 소식은 없겠습니다, 전국에 연일 계속된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상 기후로 인해 전선의 이동이 예년과 판이하게 움직이면서 언제 비가 올 것으로 예측하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오늘의 습도는...

" TV 꺼.. "

켤 때만큼이나 빨리 화면이 꺼지고,
민혜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 껴져있네요.

지옥 같은 가뭄이 이어지고 있어요.
저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용수가 부족한 도시에선 제한 급수가 시작되고 있어요.
그말은 곧 민혜가 제대로 씻고 있지 못 한다는 이야기였고,
당연히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죠.

흙처럼 푸석푸석해진 얼굴에 딱딱한 각질이 덮혔고, 
그 각질이 갈라지며 마치 협곡을 연상케했어요.

물 안 준 화분-,
아차, 민지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민혜는 창 밖 맞은 편 빌라를 바라보며 한없이 딴생각에 잠겨있어요.


8.

" 가자! 병원에 가자! 나아야지! "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민혜의 손을 잡고 그녀를 질질 끌어요.

" 왜 그래애! 나 안 가! 병원 한 두번 가봤어? 나 때문에 아파트 팔고 빌라로 왔잖아!
우리 가족 중에 누가 빌라 좋다고 그랬어? 병원비 때문에 판 거잖아! 나 안 낫는다고!
보면 몰라? 아빠도 아니까 나 집에 놔둔 거잖아, 이 빌라까지 팔면 어디로 갈건데! "

" 니 엄마도 허락했어, 빌라? 빌라가 뭐 대수야? 너만 낫는다면 빌라가 아니라 길바닥에
나앉아도 되니까 그런 걱정 할 필요없어! 이번 가뭄 좀 봐! 아빠 마음이 아픈 건 생각 안 하니? "

" 엄마 허락이 문제야? 아빠 마음이 문제야? 안 낫는 불치병이 병원 가기로 합의하면 나아준데?
의사들도 포기했잖아! 그만큼 했으면 포기하자, 비는 어차피 또 올 거잖아, 나 진짜 괜찮아. "

민혜는 안 가려고 안간힘을 써요,
민지는 어느 편에 서야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고 있죠.

" 너 이대론 못 놔둬, 시집 갈 나이가 금방인데 아빠가 이대론 못 넘겨.
너 지금 피부를 보고 어떻게 참니! 가자니까! "

" 아 왜 그래 진짜! 왜! 왜! 나도 낫고 싶다고! 나도 예쁘게 꾸미고 화장품 바르고 하고 싶다고!
맨날 기분 나쁜 크림이나 잔뜩 바르고, 바른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근데 어떡해! 원래 이런건데!
나 때문에 엄마 아빠 힘든 거, 그게 더 못 참겠단 말야! 차라리 그 돈으로 우리 가족들 잘 먹고 잘 사는데 썼으면
좋겠단 말이야! "

" 왜 이래! 너! 마음 약한 소리 하지마! 니가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병도 물러가는거야!
엄마 아빠가 바라는 건 네가 낫는 거 뿐이야, 치료 받자, 응?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자. "

" 안 가. 안 가. 돈 낭비 하지마. 난 이대로 살거야. "

" 빨리 따라와! 쓸데없는 소리 하지말고! 이깟게 뭐라고, 왜 못 나아? 다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놓는데
뻔히 살아있는 사람이 왜 못 나아? "

" 안 간다니까- 으으. "

아무리 민혜가 버텨도 아버지의 완력을 이길 순 없죠.
한 발짝, 두 발짝 끌려가던 민혜가 겨우 입을 여네요.

" ... 갈게, 아빠. 갈게. 놔줘. 옷 갈아입고 올게. "

" 헉, 헉. 그래. 민혜야. 아빠가 너 사랑해서 그래.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

" 알아.. 아빠 마음 알아요. 내가 이래서, 나 때문에.. "

" 또 나쁜 소리. 민혜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런 생각 아빠는 안 해. "

" 나 있잖아, 내가 너무 미워요.. "

민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어요,
민지는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있다가 외투를 걸쳐입어요.

" 민지야. 아빠는 차 시동 걸고 있을테니까 언니 데리고 와. "

" 네에. "


9.

" 또 돈 낭비야. 나을 리가 없어. 아빠도 아마 기대 안 하실거야. "

" 아닐걸! 아빠는 나을 거라고 믿고 계실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뭐. "

" ... 민지야, 난 꼭 네가 내 언니 같더라. 항상 난 언니라는게 너한테 투정이나 부리구.. "

후드티를 눌러쓴 민혜가 빌라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아버지 차가 오고 있어요.

" 잠깐만, 민지야, 나 목 쪽이 좀 쓸려서.. 잠깐만. "

" 응. 천천히 해. "

무심결에 대답한 민지가 고개를 돌리자 맞은 편 빌라 입구에 안면이 있는 남자가 서있어요,
뭐죠, 아차! 민지가 다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민혜는 모자를 벗고 있었어요.
더군다나 민혜의 눈도 누군가의 시선과 마주친 듯 했어요.

" 쯧쯧! "

남자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시선을 피해버렸어요.
그게 전부였어요.

" 얘들아, 타라~! "

아버지 차가 앞에 도착했지만 민혜는 타지 않았어요.

" 안 간다고 했잖아, 왜 아프게 하는데, 왜 더 아프게 하는데! 진짜 미워! "

민혜가 소리치며 모자를 벗었어요, 그 소란에 놀란 남자가 민혜의 얼굴을 보곤 아예 질색하며
도망치듯 빌라 입구로 들어가버렸어요. 민지는 그 남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요.

청순하고 아름다운 언니의 얼굴을 예쁘다고 말해줬던 남자,
사랑에 빠지는 달콤한 첫 느낌을 선물해준 저 남자가,
같은 사람인 언니의 다른 얼굴은 이토록 혐오하다니,

왜?
대체 왜?
같은 사람인데 뭐가 달라서?
'언니'가 아니라서?
'화분언니'라서?

나쁜 새끼.
민지는 남자가 몹시 괘씸해졌어요.

" 집 밖이고 뭐고, 이제 그냥 방에만 박혀있을래,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

" 민혜야! 민혜야? "

민혜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버렸어요.
그 뒤를 아버지와 민지가 급히 따라갔어요.


10.

똑똑똑

아버지가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어요.
민지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뒤에야 왜 민혜가 그렇게 민감했는지 알 수 있었겠죠.
첫 사랑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딸이 몹시 염려되었겠죠. 
먼저 민혜가 다닐 병원에 가있었던 어머니도 전화 한 통에 달려와 민지와 함께 뒤에 서있어요.

" 민혜야...? "

...

" 민혜야, 아빠가 미안해. 상처주려고 한 게 아니야. 알지? 우리 딸. "

...

" 아빠가 정말 미안해. "

끝내 아버지는 방문 앞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 진짜로 미안해. "

그렇게 낳아버린 엄마 아빠 탓인가요?

그렇게 태어난 언니 탓인가요?

아니면, 그렇게 쳐다보는 '사람들' 탓인가요?

그 모든 걸 바라보는 민지는 그저 복잡한 감정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어요.


11.

하루가 지났는데도 물 달라는 소리 한 번이 없었어요.
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큰일나는데-, 건조한 상태로 방치되면 끝내 터져서 피가 흐를텐데,
이대로 놔둘 순 없었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방문을 따고 들어가기로 결정했어요.

열쇠공이 도착했고, 문을 따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죠.
아버지는 그 옆에서 계속,

" 민혜야- 기분 나빠하지마. 알겠지, 밥은 먹어야지. 응? "
" 억지로 안 데려갈게, 이제 스트레스 받게 안 할게, 우리 딸 아프게 안 할게. "

민혜를 달래었죠.

하지만 열쇠공이 문을 따고,

" 자, 열렸습니다. "

그렇게 문을 연 순간,

사람들 모두 멍하니 한참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민혜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다만 아주 고운 흙처럼 생긴 가루만이 방 한 구석에 쌓여있었어요.

화분에 쓰면 좋겠다 싶은,

아주 고운 가루가 있었어요.   





출처 : 오늘의 유머 환상괴담 님.
 
 
 


자연보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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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by Dorothy) 홍수 (by 민석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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