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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재] 11시 11분의 전화 (Part. 3)

여고생너무해ᕙ(•̀‸•́‶)ᕗ2017.03.31 10:23조회 수 47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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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은 향수님께서 잠밤기에 올려진 괴담을 소재로 쓰신 것입니다.
향수님의 허락 하에 잠밤기에 연재합니다.

그 후의 기억은 마치 잘라낸 듯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한참 후에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건 내 방 천장의 익숙한 무늬였는데, 원래 하얀 색이었던 벽지가 어째서인지 노랗게 보였다. 깨어난 직후에는 너무 몽롱해서 때가 탔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하늘이 노랗다'는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여자친구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을 어지간히도 마셨던 모양이다. 후에 알아보니 그 날 내가 불러낸 녀석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아마 술집 하나가 문을 닫을 때마다 친구 한 녀석과 헤어지고 다른 술집에 들어가면 또 다른 녀석을 만나기를 반복했나 보다.

희미했던 정신이 점차 뚜렷해짐과 동시에 나는 강렬한 자극을 느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역한 냄새였다. 지난 밤, 방 안 아무데나 토해 놓은 덕에 악취가 진동했다. 그 다음으로는 심각한 위통이 느껴졌다. 듣자하니 나는 소주건 맥주건 양주건 간에,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술만 주구장창 마셨던 모양이다. 이러니 속이 쓰린 게 당연했다. 이윽고,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쑤셔왔다. 사람은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데도,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리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다녔을 내 모습이 눈앞에 훤히 펼쳐졌다.

'일단, 일어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힘을 준 순간, 잠시 바닥과 멀어지나 했더니 오히려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간밤의 과음과 구토 때문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이토록 무기력한 나 자신을 발견하자, 그제서야 눈물이 났다. 한 번 눈물이 나기 시작하자, 이윽고 그것은 오열로 변했다. 한심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워서,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펑펑 울었다. 뺨에 말라붙어 있던 토사물이 눈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울다가 기력이 소진해 버린 나는,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통화목록의 아무 번호로나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를 받은 건 8년이나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지내온 죽마고우였다. 나는 지금 당장 내 집으로 와 달라는 한 마디만을 겨우 남기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그 이후 몇 달간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하나 뿐인 아들을 걱정하셨던 부모님도, 내 사연을 안타깝게 여겼던 친구들도, 잇단 결근에 걱정이 되어 문병을 온 직장 동료들도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꼴을 보면 질색을 하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는, 이제 담즙 섞인 토사물의 악취를 지우기 위해 뿌린 방향제 냄새가 더 지독했다. 바닥에는 육안으로도 그 두께가 확인될 만큼의 먼지가 쌓여 있었고, 내가 하루 종일 누워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침대 옆에는 인스턴트식품의 쓰레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지못해 세수나 양치 정도는 했지만, 몇 달간 목욕은커녕 샤워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서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면도를 하지 않아서 수염이 삐죽삐죽 흉하게 자랐고, 며칠 가다 내키면 감는 머리는 기름으로 번들거렸다. 밤낮이 바뀐 탓에 햇빛이라고는 본 적도 없어서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열악한 영양 상태로 인해 볼은 쑥 꺼지고 몸은 야위었다. 그래도 잠은 많이 자서 기미는 생기지 않았지만,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폐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내게 질려 버린 부모님조차 찾지 않는 내 오피스텔에 한 친구 녀석이 계속 와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건 술이 떡이 돼서 돌아온 날 전화를 받고 바로 달려와 준 바로 그 녀석이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벌써 회사에서 연달아 승진하고 있는 녀석이라 많이 바쁠 테였지만, 그래도 친구로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인지 이틀에 한 번은 꼬박꼬박 찾아와서 도와주었다. 참 고마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게 닥친 심리적 타격이 너무 커서인지 당시에는 감사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스토커의 전화는 변함없이 걸려오고 있었다. 친구의 간호 덕에 기력을 되찾은 나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도 보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이미 번호는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쪽을 생각해서 바꾸지 않았는데, 정작 자기는 그렇게 쉽게 바꿔 버리다니….'

분노와 슬픔과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혼자서 곱씹고 있을 때, 다시 스토커의 전화가 걸려왔다. 시계를 보니, 역시 11시 11분이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흑, 흑흑."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익숙한 소리. 한동안 침묵 속에서 들리지 않았던 그 울음. 그리고, 여자친구에게 악마의 말을 속삭였던 가증스러운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다 망가졌어!! 네가 전화만 안 했어도, 그 따위 거짓말만 안 했어도 헤어질 일은 없었단 말이야!!"

그 후로 몇 분이나 나 혼자서 지껄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침 튀겨가며 욕을 하던 나는 문득 수화기 너머의 울음소리가 멎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인사불성이 된 나에게, 그 사실은 공포 대신 더 큰 분노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서 나를 무시하는 그 여자를, 진심으로 증오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뭔데? 당장 대답해! 왜 무시하는데!!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전화를 한 거 아냐, 아니면 끊어!!"
"…훗."

웃음소리와 비슷한,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이 정말로 웃음소리였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멍하니 앉아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나에게 오는 전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 물꼬를 튼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넘쳤지만,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고, 사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의 여자에게는 얼마든지 원망하고, 질책하고, 한탄하고 욕할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을 만큼 한심한 나 자신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11시 11분의 전화를 거는 여자에게만은 더없이 제멋대로 굴 수 있었다. 정도가 심해져서 내가 완전히 자신을 잊고 오만해질 즈음이면, 그녀는 나를 비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그 비웃음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꿈의 종막을 알리는 새벽의 알람과도 같았다.

매일 11시 11분부터 새벽이 밝을 때까지, 이제는 내가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말을 쏟아냈다. 여자는 이제 울지도 않고 내 말을 들어주었다. 처음 며칠간은 무작정 화만 냈지만, 할 말은 금방 없어졌다. 목적도 계기도 잃은 행위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짓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 스토커 또한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지극히 드문 하나의 인격이었다. 

결국 나는 점차 그녀에게 나의 추억이나 과거 이야기 따위를 들려주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즐겁기까지 했다. 아주 오랫동안 전화를 하는 동안에, 평생의 원수는 어느 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인간쓰레기가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을 유일한 대상이 되었다. 그녀를 통해, 나는 밤부터 새벽까지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해가 뜨면, 그녀의 미묘한 비웃음 소리를 듣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또 하나의 세계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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