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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할 대한민국 대표 군인

유머봇2020.07.24 23:34조회 수 318추천 수 2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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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장군


광복이전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오산학교 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 (중국 육군 귀주 강무당) 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 로 임관하였고 이후 상해 임정 법무총장 신규식 과 군무총장 노백린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 군비단(상해 독립군 군비단)을 이끌었다.


이후 대한의용군사회 참모장을 지내다가 러시아 내전 ( 시베리아 내전 ) 도중 백군에 일본군이 개입했다는 게 알려지고 자유시 참변 이 벌어지자, '적의 적은 동맹'이라는 취지로 적군에 투신하여 임정계열 무장단체를 같이 지휘하게 되었고 백군의 공세에 맞서 하바로스크까지 이어진 적군의 지연철수전 과정에서 백군에게는 악명을, 적군에게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 사령관을 지냈다.

1926년 10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여 동로군 소교참모가 되었고 이어 중교인사참모를 거쳐 1927년 3월에는 상교로 진급하였다
1928년에는 독립연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차 북벌전쟁간 용담전투에서 공헌을 세워 공로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19로군 정보국장등을 역임하였으며 상해로 복귀 후에는 국민혁명군 상해 병기창 주임으로 있으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와 접촉하여 이봉창 , 윤봉길 의 거사에 필요한 폭탄을 제작하여 지원하였다.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에 따르면, 이 일이 있은 후 일본에서 왕웅이라는 중국 군인을 색출하기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때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김홍일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호 일서(逸曙)를 쓴 왕이슈(왕일서, 王逸曙)란 이름으로 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추격이 심해지자 상해에서 내륙으로 전근을 가게된 김홍일은 병기분야의 참모장교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중국군은 중앙군과 지방군 마다 화기 및 탄약 등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그 운용과 유지가 어려웠는데 여기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1933년에는 제2로군 총지휘부 상교참모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에는 국민혁명군 제102사단 참모장이 되었다.
102사단은 귀주군이 주축으로 당시 사단장이 귀주 강무당 동기였다.
중국 중앙군이 추진했던 지방군 군제 통일에 협력하게 설득하여 102사단으로 전환시켰고 102사단이 무한회전 만가령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됨에 따라 1939년 5월 국민혁명군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나탁영(러줘잉, 羅卓英) 상장의 제19집단군(야전군 급) 참모처 처장으로 부임하였고 1941년 샹가오 회전(상고회전, 上高會戰) 초기에 부상당한 제19사단장 탕보인(당백인, 唐伯寅)을 대신하여 사단장 직을 임시로 맡아 전투 승리에 일익을 담당했다.


이후 중국 국민혁명군 최고위 군사교육기관인 육군대학 특별반(2년 과정)에 입교하였다.
특별반 졸업 후인 1944년 1월에는 제1병단 참모처 처장에 보임되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장제스(장개석) 에게 직접 창설안을 기획하여 보고한 당사자로 해당 안이 채택되자 당시 전국의 지식청년 지원병(학도병)들을 조직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제19집단군 참모 시절 사령관이던 뤄줘잉(나탁영, 羅卓英) 상장 지휘 하에 국민혁명군의 신편 지식청년군 창설을 주도하였다.
(청년군 참모장 등 역임)

이후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 광복군 사령부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계급은 참장 으로 오늘날 소장 지위.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광복군 한인참모장 왕일서(王逸曙)가 이 분. 2번째 가명

자세한 것은 자서전인 『대륙의 분노』 참조.

광복이후

일제가 패망한 후인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위밍 (두율명, 杜聿明) 장군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2성장군)으로 남경 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김홍일(당시 왕일서/왕이슈)이 너무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의 여건 및 처우 개선과 한국으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구해주는 일을 하자 두위밍 장군이 전체회의에서 "왕 장군은 무슨 조선인들의 대표요?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선인들을 돕는단 말이오?"라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참모들이 웃으면서 "조선인들의 대표지요"라고 말을 했고, 그가 사실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두위밍 장군은 한교사무처장이라는 직책을 신설하여 그가 조선인들을 지원하는데 총력을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귀환하려고 하는데, 북한 과 남한 중에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과거 연해주 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의 분란이었던 자유시 참변 을 겪은 김홍일은 남한을 선택했다고 한다.



귀국후

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귀국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 준장 으로 임관되었다.
이전의 풍부한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았다.
이로써 그는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초의 장군 임관자로 기록되었다.
뒤이어 역시 육군이었던 이응준 , 채병덕 , 그리고 해군의 손원일 도 준장으로 임관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후 육군사관학교 7대 교장(1949.1.15.~1950.6.10.), 육군 참모학교장 (1950.6.10~) 으로 후진 양성에 매진하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절인 1949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는데, 역시 한국군 역사상 최초 사례다.
이번에도 이응준, 채병덕, 손원일 등이 김홍일의 뒤를 이어 소장에 임관했다.


육군 사관학교 교장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9년에는 <국방개론> 이라는 저서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이 지향해야 할 국방력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자칫 공백으로 남아있을 뻔 했던 건군 초기 및 6.25 이전의 군사연구분야에서, 국군 내부에 이러한 식견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인물이 있었다는 점에 많은 의의가 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건군의 사상사적 지향을 제시한 것으로 그 의의를 부여하기도 했다.



상비군의 유효상한 비율을 인구대비 8/1000(즉, 0.8%) 수준으로 설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1949년 인구 3000만대비 상비군 24만이 적정하다고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육군은 공세적 작전을 취해 적을 국내로 들이지 않고 전장을 국외로 정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에 따라 1개 사단은 전차, 모터사이클, 기관총, 각종 화포 등 중급장비로 갖춘 12000명으로 하고 최소 15개의 상비사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중에서 만주와 시베리아의 대평원작전에서 장갑사단 3개 및 차량화사단3개, 국경 산악지대작전에 산악사단 2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육군과 함께 입체전 을 위해 폭격기를 위시한 공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해당 저서가 나온 1949년에 공군이 독립하면서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다만 해군력 건설은 공군 등과의 합동작전을 통해 적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소형함정 중심의 연안해군 정도가 적합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대양해군 팬들이 실망합니다

이러한 내용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김 장군이 독일의 기계화 전격전 교리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으로 이는 국민혁명군 시절 육군대학에서 수학한 내용이 바탕이 된 것 같다.


또 다른 하나는 김 장군의 가상적 인식이라 할 수 있는데 1949년 집필당시에는 주적을 북한이 아닌 중국이나 소련으로 설정하고 북한은 종속 변수로 보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쩌리취급

이와 관련 향후 전쟁의 가능성도 조심스레 지적을 하면서 강국간의 냉전은 더욱 심화하여 가능 양이 제3차 세계대전이 장차 폭발될 상으로 파악했으며 소련이 북한 인민정부를 배양하여 일전을 결심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다만 남한의 군사력은 진공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미국의 원조가 미약하다고 지적하며 국가간의 관계에서 외교로 국방을 건설한다는 연합 국방은 믿을 길이 못된다고 판단하였다.


즉 김 장군은 장차 한국이 당면할 전쟁은 북한 방면에서 소련에 의해 촉발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며 이에 대해 한국이 기계화 부대를 가동하여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나아가 요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또한 한국은 현대 군대에 가장 필요한 석유가 없고 해외 식민지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더러 장차에도 가질 희망이 박약하다고 지적하는 냉정한 현실 판단도 포함되었다.


6.25전쟁기간

6.25 전쟁 이 발발하자 곧바로 열린 군 원로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였다.
공식전사에 의하면 군 원로들과 함께 한강 방어를 제안했으나 당시 육군총참모장 겸 국방부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이 거부하여 한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졌다고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김홍일 장군의 회고록에서는 전 병력을 모아서 결전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지연전을 할 것인지 결정하고 병력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을 게제했으나 전략연구를 해본 인사가 없어서 자신의 주장이 공허했다고 적혀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신성모 , 채병덕 ,김홍일, 유동열 , 지청천 , 이범석 , 김석원 이고 광주 5사단장 이응준 장군은 상경으로 불참 하였는데 김홍일, 김석원, 지청천, 이범석 등 경험많은 숙장들은 한강방어선 구축을 주장한데 반해 정작 국방부장관 신성모, 참모총장 채병덕은 그 결정을 미뤘다.
채병덕은 회의장을 나서면서 "늙은이가 자꾸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자고 우긴다" 라고 하며 화를 내면서 매번 지기만 한 장개석 군 장군이 무슨 장군이냐며 했다.
그러나 정작 채병덕은 일본군 병기장교 출신으로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같은 일본군 출신으로 포병 소좌출신인 군번1번 이형근 장군조차 채병덕을 무시했을 정도.
김석원 역시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를 그 어느때보다 김홍일 장군이 열을 올리며 한강선 결전 을 주장했고 이에 대해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이 적극 동조했으나 국방장관 과 총참모장 이 구체적인 대답을 않고 희망섞인 기대만 하고 있어 유야무야 끝났다고 표현하고 있다.
김계원 역시 회고록에서 채병덕이 김홍일을 '후퇴만 하던 중국군 경력가지고 무슨.....'이라고 비하했다는 비슷한 내용의 증언을 하고 있다.
(정작 자신은 패전국 일본의 전투경험 없는 병기장교이면서... 여담으로 채병덕은 식사후에는 늘 낮잠을 때렸다고 한다.
그래서 낮잠타임에 결제서류를 가져가면 읽어보지도 않고 결제를 해줬다고... 이덕분에 해병대 창설이 결제된다.
읽어보지도 않고 해병대 창설을 결제한 덕분에 채병덕은 해병대가 생긴 이후에야 해병대 창설을 알고 화를 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그 다음날 김홍일은 6월 27일 채병덕의 요청으로 1사단 작전지도 를 맡게 된다.
이 요청에 따라 파주로 달려가보니 당시 백선엽 이 지휘하던 1사단이 예상외로 선전 하고 있었고, 1사단을 작전지도하기보다는 의정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습격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뒤 적 전차가 창경원에 침입 하였다는 전보를 듣게 된다.
이에 그는 곧바로 백선엽에게 공격작전을 취소하고 도강 후 후퇴하여 한강 동안에서 방어에 대비하되 수색과 행주에 공병대를 파견하여 선척을 집합하고 치중부대를 먼저 도하시킨 다음 부근 민가를 몇 집 헐어 그 재목으로 보병이 통과할 부교를 가설하는 것을 지도 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육본의 명령 이 사수였기에 어쩔 수 없다는 답을 한다.
이에 김홍일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때 정말 답답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아무튼 백선엽이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은 직속 상관이 아니었기에 명령이 아니라 조언이라는 한계를 느낀 김홍일은 채병덕에게 찾아가 철수를 건의했지만, 철수 그거 뭐임? 이러는 채병덕 앞에서 말이 먹히지가 않았다.


전황은 심각해졌고, 채병덕은 계속해서 수도사수!! 북진통일!! 나가자!! 이러고 있었으니... 결국 5개 사단 이 철수하기 이전에 한강철교와 한강 인도교가 폭파당했다.
결국 북한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여 대부분의 병력이 흩어지게 되었다.
1사단 마저 사단장인 백선엽 이 부대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후퇴해서 한강 이남에서 다시 살아 만나자"고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 때 구원 투수로 등장,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보직한다.
말이 사령부지 휘하 병력은 커녕 참모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1인 사령부였으나 병력을 수습하여 3개 사단으로 구축해 낸다 . 공식전사에서는 채병덕이 김홍일 장군을 시흥사사령관으로 임명 했다고 적었으나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김홍일 장군이 이응준 장군과 함께 피로에 쩔어있던 채병덕에게 찾아가 설득해서 시흥사 자리를 쟁취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김홍일 장군이 부임하면서 국군의 전투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단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라주바예프의 전쟁보고서의 내용이다.
초기만 해도 부실한 부대 로 적혀있던 한국군에 대한 언급이 갑자기 6일만에 견실한 전투부대 로 이야기가 바뀐다.
라주바예프는 보고서에는 한국군의 초기대응이 부실하고, 주로 소화기와 대인화기 중심이므로 전차대대의 공습을 받으면 급격히 무너졌다 등의 평가를 했다.
그러나 김홍일 장군이 부임한 이후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한국군 포병이 포대 단위의 경우 매우 효과적이고 견실한 사격 통제, 사격의 정확도 등이 보여졌다 고 서술되어 있다.
역시 화력덕후의 피는 속일 수가 없다 백선엽 의 <군과 나>에 의하면, 부하에게 보라복 을 말끔하게 다려오라고 한 다음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서 흩어져 도망치는 병력들을 불러 세웠다고 한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에게 신뢰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 다시 부대에 복귀하게 한 것.

이렇게 긁어모은 병력으로 한강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또한 맥아더 와 직접 만나서 한강선 방어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였고 현재 부족한 탄약과 무기의 공급, 그리고 미 공군에 의한 한강철교의 파괴를 요구했다.
그러면서 약 1-2주 정도를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지연전을 펼쳐 미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 에서 7일이나 버티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이후 수도사단, 1사단,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미군과 협조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낙동강 방어작전 에서 안강-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제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때 명태사건으로 1사단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던 김석원 장군이 시흥국민학교 지휘소로 김홍일 장군을 찾아와 도와줄 일이 없겠냐며 찾아온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곧 재편된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진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이 분이 구국영웅인 이유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 하고 지연작전을 기획 했다는 것이다.
당시 전군이 총 8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에 5개 사단이 사라졌다.
그나마 1사단은 중화기와 소화기는 상실했지만 제대를 유지하면서 퇴각했고,(편제를 유지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당시 1사단 예하 연대들은 통신이 유지되는 중대가 절반도 안됐다.
사단, 연대 지휘부만 똘똘 뭉쳐서 한강 도하에 성공한거) 중부의 6사단 , 동부의 8사단 은 적을 격퇴하면서 후퇴 중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5개 사단 은 전 병력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약장을 떼어내고 한강변에 달려가 병사들과 싸우면서 뗏목을 타고 한강으로 남하하려고 했다고 적혀있다.
그야말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렇게 무너진 병력을 수습하고 다시 이를 전투능력을 갖출 수 있을 정도로 조직화 했다.
만약 이렇게 조직화하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지연작전이나 낙동강 전선을 유지할 병력 자체가 없어서 무너졌을 것이다.


거기에 단순히 병력을 모은 것만이 아니라 병력을 적절하게 배치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7연대인데 17연대가 시흥사에 도착하자 병력이 부족함에도 후방으로 후퇴시켜 수습할 시간을 마련하였다.
1사단의 경우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백선엽의 군과 나에 서술되어 있듯이 백선엽은 한강 도하 이후 병력을 찾을 수 없어서 소문을 듣고 시흥사에 가보니 1사단 병력이 남아있어 재회할 수 있었다고 서술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김홍일 장군이 퇴각중이던 병력을 수습하고 1사단을 수습한 것 이다.
만약 김홍일 장군이 없었으면 1사단은 제대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1사단이 제대를 유지하면서 철수했다면 백선엽이 자서전에서 우리 남쪽에서 살아서 보자는 말을 병사들에게 했다고 적었을리가 없다.


시흥사 인사배치도 적절했는데 당시 김홍일 장군의 시흥사는 그냥 1인 사령부였다.
기껏해야 김홍일 장군과 당번병, 그리고 부관 정도였다.
김홍일 장군의 이전 직책이 비전투부대인 학교장이었으니 휘하 병력이 있을리가 만무하다.
거기에 한국군의 철수장면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라 장교들은 약장을 떼어 누가 장교인지 병사인지를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을 수습하여 순수 지휘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철수하던 유재흥을 붙잡아 참모장을 시키고, 퇴각 중이던 무슨 장교를 찾아 부관을 시키고, 소대장이 부족하면 하사를 소대장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진행한 것이다.
이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은 예루살렘 방어전을 진행한 이벨린의 발리앙 정도다!

그렇기에 국방부전사편찬연구소는 김홍일 장군에 대해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격찬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전 당시 채병덕의 전략적 과오로 인한 군사적 위기를 대부분 수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 는 1군단 이 된다.
김 장군은 당연히 초대 1군단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국군의 지연작전을 기획한다.
이때 임명장의 내용을 보면 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사단급 제대운영 경험이 있는 김홍일 장군을 임명한다고 되어있다고 한다.


이후 이 분이 세우신 지연작전에 따라 국군은 북한군을 적절히 저지하였고, 김석원 과 같은 예편된 사람을 곧바로 기용하여 수도사단으로 임명하는 등, 적절하게 인재를 배치하였다.
이 분이 있었기에 낙동강 전선 이라는 것이라도 만들어질 수 있었고, 그 결과 인천 상륙작전 도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미군의 역할이 한국의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김홍일이 한강 이남에서의 지연전을 대성공시켜 무려 7일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다.
이러한 성공이 아니었다면, 이후 전투에서의 방어와 인천상륙작전 등의 반격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점에서 6.25 초기 방어 당시 김홍일의 공로는 아무리 높이 평가받아도 지나치지 않다.


퇴역과정과 이후

50년 9월 1일 부로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전보된다.
그 이유는 미 고문관과의 갈등이다.
이에 대해서 김홍일 장군도 스스로 미군과 갈등이 심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8사단장인 이성가 장군이 철수하던 중에 북한군의 공세가 심해 먼저 보급기차를 후방으로 보내고 병력을 퇴각시키자 미 고문관이 달려와 왜 보급품을 병사들에게 배급하지 않았냐, 이거 횡령아니냐 하는 식의 발언을 해서 전황과 국군의 현황을 천천히 설명했지만 이해하지 못하고 횡령이다는 말만 반복하자 뚜드려 패주고 싶었다 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이 미군 지휘부의 명령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자 미군에서 이승만에게 와서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이승만이 김홍일을 찾아가 설득한 일화가 있다.
결국 인천상륙작전 직전 김홍일 장군은 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장으로 밀려난다.
한국군에서 군단급 제대를 운용해 본 유일한 경험자 이며 중일전쟁 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야전 지휘관이 갑자기 한직으로 밀려난 이 사건에 대해 전쟁초기 수도사단을 지휘했던 일본군 출신 김석원 준장은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


해임의 근거로는 이른바 안동철수작전에서 입은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이 지적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철수를 반대하던 1군단 지휘부와 무조건적인 철수를 강권했던 미 고문단의 견해 차이가 주라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미 고문단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병력손실에 대한 책임을 철수를 반대했던 김 장군이 지게 된 셈이다.


김홍일, 김석원 두 노장의 특징은 미군 고문관의 판단에 잘 따르지 않는데다 미군으로의 작전지휘권 이양을 극도로 싫어했다 . 때문에 미군의 반격작전을 진행하는데 두 사람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결국 두 노장은 동시 퇴장했다.
특히 밑의 부하들에 대한 영향력은 대단했는데, 프란체스카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도 이 두 노장의 파워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물러나게 하면 후폭풍이 크겠지만 미국에서 원하는 일이라 진행했다고 적혀있다.


이에 반해 당시 3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의 회고에 따르면 김홍일, 김석원 두 사람에 대한 극찬과 함께 당시 지연전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김홍일 장군과 김석원 장군에 대한 걱정으로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신하여 각각 육군종합학교장, 육군 지휘검열단장으로 발령을 내었다.


결국 더 이상 야전 경험을 살릴 수 없었던 김홍일은 1951년 육군 중장 ] 으로 예편하였고, 중국통 경력을 살려 전후 중화민국 대사가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 일어나자 군정 기간 동안 외무부장관 으로 재임했다.
그러나 박정희 가 군에 복귀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민주공화당 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한데다가 한일협정까지 맺자 박정희와 결별.

한국독립당 을 재창당하여 정계에 뛰어들었으나, 선거에서 참패한데다 단 한명의 국회의원이 하필이면 김두한 . 결국 김두한이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 이니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이니 하는 사건들을 일으키자 한독당 자체가 자연스럽게 소멸해버린다.


이후 신민당 에 입당해 7대, 8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을 지냈다.
신민당의 당수를 지냈고 이후 신민당 총재 유진산 의 노선에 반발하여 1973년 양일동 등과 신민당을 탈당하고 민주통일당 (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다.


만년에는 광복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1980년 향년 83세로 타계했다.
유해는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고, 묘비명은 '광복회 회장 김홍일 장군'이다






우리가 배우는 일제강점기 도시락폭탄 제작 공급자이자 군 지휘관으로 일본과 전쟁
한국전 당시 미국이 끼어들기 전까지 방어해낸 방어선 총 책임자

역사에 기록하고 교과서에도 나올만한 장군인데
박정희와 대립해서 알려지지 않은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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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 빗길 이런상황 조심하세요.4 유머봇 268 3
1840 국가에서 사이트를 규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jpg3 유머봇 721 2
1839 흔한 초등학교 1학년 교사의 점심시간2 유머봇 292 4
1838 삼성 갤럭시 Z 폴드2 실사3 유머봇 221 4
1837 출소하는 조두순 나영이가 원한 형량...jpg2 유머봇 231 5
1836 피나치공 주작 스트리머 송대익 일침 댓글.jpg2 유머봇 186 1
1835 26살먹고 처음 카페간 사람 jpg2 유머봇 217 2
1834 날아다니는 죽음의 소금통 jpg3 유머봇 293 4
1833 오늘도 수고하시는 택배기사님들4 유머봇 220 4
1832 오늘의 유머 아베 코로나 걸린거 아냐???4 유머봇 203 2
1831 Taiwan 의 친구 日本이 친구한테 한 짓 알려 줌.2 유머봇 234 3
1830 (주의) 바이크 중침사고4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296 2
1829 "방귀 때문에"•••승객 흉기로 찔러 중상 입힌 택시기사5 title: 하트햄찌녀 190 2
1828 정찬성도 대적 불가능한 사람4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275 3
1827 홍수 났던 대전 산책로 근황3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273 5
1826 가짜사나이 2기 의외의 지원자3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214 3
1825 흉기를 타고 온 악마4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232 4
1824 남의 개 두 마리 물어죽인 로트와일러 견주의 변4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174 2
1823 주한미군 방위비 인상시 김현종차장이 미국에 요구한것2 title: 잉여킹조선왕조씰룩쎌룩 15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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