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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길어지는 손가락 왈츠

title: 보노보노김스포츠2015.08.10 13:45조회 수 608추천 수 1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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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선생님을 이렇게 모셨습니다. 저희 딸은 피아니스트인걸요, 그런 모습이 사교계에 알려졌다간.. "

" 이해합니다. 평판이 사람을 죽이는 건 순식간이니까요. "

의뢰받은 환자의 아버지는 환자가 처한 상황을 내게 몇 번이고 설명했지만,
맞장구를 치면서도 눈으로 보기 전엔 믿기 힘들었다.
손가락이 길어지는 병.
거인증도 봐왔고 다지증도 수없이 다뤄봤지만 점점 손가락이 길어지는 병이라니.

" 루디, 선생님 오셨다. 문 열고 들어가마. "

" ... "

대답 대신 방 안에선 피아노 소리만이 낮게 새어나왔다.
문이 열리자 피아노 소리가 맑게 들려왔다.

" 루디. 선생님께 인사하렴. "

" 안녕하세요. "

" 얘가. 사람 눈을 보고 인사해야지. "

타이르는 루디의 아버지를 만류한 나는 루디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았다.

" 루디, 안녕? 나는 오슨이란다. "

" 오슨 선생님. 안녕하세요. "

"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구나. "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칭찬하며 손가락을 살폈다. 
길쭉한 손가락, 마디에서 마디 사이가 한 뼘은 족히 될 법한 길이.
피아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은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연주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 선생님은 너를 낫게 해주려고 온거야. "

" 정말요...? "

" 물론이지. "

" 수술해야 하나요? "

" 필요하다면. 하지만 아프게 하지 않을게, 약속하마. "

" ... 하지만. "

" 무슨 일이니. 말해보렴. "

" 벌써 의사 선생님도 세 분째에요. "

" 세 분? "

그 말에 루디의 아버지를 돌아보자 그는 시선을 피한 채 시계 보는 시늉을 했다.

" 처음엔 손가락이 길어보인다고 생각했죠. 남들보다 조금 길다는 걸 알았을 때 오셨죠. 
그 분의 성함은 마이튼이셨구요. "

마이튼, 알아. 들어본 적 있다.
의술 실력은 괜찮은 사람인데 포기했단 말인가.

" 두번째는 렌디 선생님. 손가락이 남들의 두 배만큼 길었을 때 오셨죠. "

' 외과 수술 실력으론 문제 없는 사람들이야, 절단 수술이 아니니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순 없었던 건가. '

" 선생님이 세번째구나. 그동안 우리가 널 지치게 해서 미안하구나. "

" 오슨 선생님. 제 손가락이 징그럽다고 생각하시나요? "

" 전혀. "

" 하지만 보세요. 전 징그러워요. "

루디가 피아노 치는 걸 멈춘 채 들어보인 손가락은 루디의 이마를 넘어 한참이나 위로 솟아있었다.

" 선생님. 이 손가락을 보세요, 점점 길어져요. 내일이면 더 길어질 거에요. "

" 선생님이 연구해보마, 피아노를 치기에 좋은 옛날 손가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

"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렌디 선생님이 이 시대 의학으론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

" ...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는 의사야. "

" 아버지가 돈이라면 충분히 드린다고 했지만 그 문제가 아니라고도 하셨어요. 이래도 잘못 들은 건가요? "

" 루디, 그래서 오슨 선생님이 오신거야!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라! "

" 아버님, 괜찮습니다. 루디의 이야기 하나 하나가 진료에 도움이 되니까요. "

" 선생님, 제 손가락이 나을 수 있나요? 선생님들은 처음에도, 두 번째에도 그렇다고 대답하셨죠,
지금 제 믿음은 반에서 또 다시 반토막이 나있어요,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실 수 있나요? "

"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

" 이 이상은 힘들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로부터 멀어지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

" 내일부터 치료를 시작해보자. 그 전에 손가락을 좀 재어봐도 될까. "

" 네. "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 자르고, 꿰매기만 해온 내게 자라는 걸 멈추게 할 방법은 어려운 숙제였다.

2. 

우편을 통해 각지의 의술인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루디를 찾아갔다.

" 어제에 비해서.. 자랐구나. "

" 아아아. "

그녀는 주먹을 쥐려했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오열하는 소녀 옆에서 무슨 위로를 해야할지.
한참 외모를 가꾸는데 신경 쓰일 나이의 소녀에게,
괜찮아, 지금 모습도 예뻐,
그런 말은 조롱에 불과할텐데.

" 우선-, 내과적인 방법과 외과적인 방법 둘 다 써보기로 하자. "

" 으흑. "

그녀의 손가락 길이를 재어 약간의 여유를 두고 제작한 철제 고정기.
나무를 키울 때 위로 자라는 걸 막아 옆으로 자라게 하듯이,
고정기를 통해 인위적으로 그녀의 손가락 성장을 막기로 했다.

" 자, 손가락을 뻗어보렴. "

" 선생님, 싫어요, 이걸 쓰면 피아노를 칠 수 없잖아요. "

" 하지만 손가락이 자라는 걸 막을 순 있을거야. "

" 피아노 없이 이런 흉한 걸 차고 살라구요? 이건 수갑이에요, 절 구속하잖아요. "

" 선생님이 약을 지어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부탁하마. 손가락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되면 풀도록 하자. "

" 약이 있다면 서둘러 주세요. "

" 많은 의사들이 힘써줄거야. 자. 손가락. "

그녀의 흰 손가락에 고정기를 끼우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 했다.
사교계에 소문이 날까봐 집 밖으론 나가지도 못 하는 그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건 피아노,
그것마저도 빼앗아버린 탓에.


3.

몇 몇 의사로부터 의술적인 답변과 시약이 도착했다.
성장을 더디게 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그들의 말에 희망을 얻었다.
이른 아침부터 마차를 불러 타고 루디의 집으로 달렸다.

" 루디, 선생님 오셨다. 선생님. 들어가보시죠. "

" 감사합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른 자세로 누워있는 루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루디, 괜찮니? "

식은 땀을 흘리며 앓고 있는 그녀.

" 루디? "

" ...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

들어보이려 했지만 몇 번 끙끙대다 포기한 건 고정기가 착용된 손가락,
손가락이 성장하는 속도 때문에 고통이 찾아온건가.
원래라면 더 길어졌어야 할 뼈가 억지로 성장하지 못하게 된 탓이겠지.

" 그래도 손가락은 더 길어지지 않았어, 루디. "

" 정말요, 정말인가요, 그럼 저 더 버틸 수 있어요. "

" 손가락을 봐야하니까 고정기를 풀도록 하자. "

손가락은 길어지지 않았다. 
가져온 약을 루디에게 먹이고,
떨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펴주었다.

" 많이 아팠겠구나. "

"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 무슨 소리하는거야. 피아노를 치려면 예쁜 손가락으로 돌아가야지. "

" 자라지 않았다고 해서 짧아진 게 아니니까요. "

" 루디. 일단 자라지 않는 것만으로도 희망은 있는거야. "

" 희망이요, 처음도 지금도 항상 희망은 가지고 있지만 희망의 끝이 꼭 긍정적인 건 아니죠. "

" 부정적이지도 않지. "

" 그렇게 운에 매달릴 필요없잖아요. 이성적으로 선택한다면-.. "

" 한다면? "

" 차라리 손가락을 두 마디 정도 자르면 피아노 치기엔 불편하지 않을테니까요. "

" 그게 이성적인 선택이라고? 루디! "

" 전 피아니스트에요, 피아노가 삶의 이유에요, 지금 제 모습은 시체에 가까워요. "

"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 지금 이러고 있을 뿐이야. "

" 피아노를 치기 위해? 언제까지? 1년? 2년? 길어진 손가락이 짧아지는 약도 있나요? "

" 언제가 되더라도 불가능하진 않아. "

" 그게 언제냐구요! "

" 손가락을 잃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야-. "

" 그러나 피아노를 얻는다면요? 제겐 그게 더 중요해요. "

" 손톱 없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단 얘기야? "

" ... "

손가락을 짧게 해줄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나도,
손가락을 자르고 피아노를 치겠다고 대답한 루디도,
서로 모순된 말을 하고 있다.

희망,
그래. 그 말은 고문이구나.
루디. 미안하다.


4.

늦잠을 잤다.
희귀한 환자에 대한 의술인들의 관심 덕에 받아야 할 자료도, 보내야 할 자료도 많았다.
밤새 연구한 탓에 아침에 찾아가기로 한 루디의 저택에 점심을 먹고서야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피아노?

미칠듯이 달려가 문을 열자,
고정기를 풀어버린 채 어제보다 한 뼘이나 길어진 손가락으로 멀리서 의자도 없이 선 채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루디가 보였다.

" 루디! 무슨 짓이냐! "

" 놔요! "

" 약속과 틀리잖아! "

" 무슨 약속! 손가락을 짧게 해준다는 약속을 어긴 건 선생님이죠! "

" 시간을 달라고 했잖니, 이것 봐! 더 길어졌잖아! "

" 언제까지 고정기를 달 순 없어요! 선생님, 전 새장 속에 사는 새가 아니에요,
날면서 노래하고 싶어요. "

" 정말 네가 자유를 바랬다면 참을 줄도 알아야 해. "

" 지금 전 자유로워요, 손가락을 잘라주시거나, 아니면 절 내버려두세요! "

...

" 아버님! 아버님! 제 부탁과 틀리잖습니까! "

곧장 루디 저택의 안방으로 향했다.
화가 났다. 루디가 고정기를 벗지 못하도록 도와달라고 전했건만,
저 지경이 된 루디를 살피지 않다니. 
의사만 부르면 다가 아니야.
환자에게 중요한 건 가족의 격려와 관심이라고!

" 아버님! "

문을 열자,
부인과 함께 나란히 목을 맨 그가,
모빌처럼 서로 빙글빙글-..

저택의 멀리서 들려오는 신들린 피아노 왈츠 소리에 맞춰서,
빙글-,
빙글-..

" 신이시여. "

탁자 위에 놓인 보석상자 밑엔 부부의 유서가 있었다.
루디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사교계에 이미 퍼져있다고,
그녀를 위해 재산을 수없이 썼지만 불가능한 일일 거라고,
남은 재산은 루디의 손가락 절단 수술과 새 피아노 구입에 사용한 뒤
그녀를 거두어 부디 피아노만이라도 치고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글.

불쌍한 루디..


5.

" 루디. "

왈츠다,
두 눈을 부릅 뜬 채 피아노를 두들기다시피 하는 그녀의 모습과 대조되는 경쾌한 음악소리..

" 루디. "

" 내버려둬요. "

그새 더 길어진 것 같은 손가락은 내 착각일까.
착각이길 바래본다.

" 선생님을 용서하렴. "

" 무슨 짓이에요! "

쏜살같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 널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어! "

" 놔요! "

묶여버린 루디의 손가락에 고정기를 착용시키려 했지만 어제에 비해 한 뼘이나 늘어버린 까닭에 
고정기가 맞지 않았다.

" 젠장! "

" 아버지는 어딨어요? 아버지! 아버지께 말하겠어요, 의사가 할 행동인가요? "

" 루디! 아버님은.. 네게 줄 새 피아노를 사러 가셨어. "

" ... 또 거짓말을 하는 눈을 뜨고 있군요. "

" 뭐? "

" 내 손가락을 낫게 해줄 수 있냐는 물음에 대답하던 그 눈동자랑.. 똑같아. "

" 마음대로 생각하거라. 다만 널 위해서 하는 일이야. 용서해라. "

"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그게 그렇게 죄인가요! 손가락이 이렇다는 이유로 절 구속할 권리는 없어요! "

" 우리 모두 지쳤다. "

" 오슨 선생님! 풀어달라구요! "

" 루디, 미안하다. 우리 모두 너무 지쳤어. "

졸음이 쏟아졌다,
꿈틀거리는 루디를 보면서도 눈꺼풀이 점점 감겼다.

...

얼마나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이 살며시 뜨였다.
살짝 어두워진 창밖. 희미한 햇빛 사이를 가리며 움직이는 나뭇가지들,

아니,
그건 손가락이다.
굉장히 긴 손가락-..
침대에 누워있는 루디로부터 반대편 벽에 누워있는 내 수술가방까지 뻗어버린 긴 손가락!

" 아앗! 루디! "

살짝 열린 수술가방을 헤집고 칼을 집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고 한다.

" 무슨 짓이야! " 

" 피아노를 칠 거에요. "

" 이익-. "

몸을 던져 칼을 빼았으니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손가락이 다닥다닥 감겨
나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그 힘이라고 해봤자 여린 아가씨가 가진 형편없는 수준이었기에
나는 수술가방에 칼을 집어넣곤 가방을 닫았다.

" 루디, 넌 지금 마음의 병까지 얻었구나. "

" 그래요! "

" 널-.. 치료할 방법을 찾아오마. "

" 오지 마세요, 차라리. 절 내버려두세요. 지금 여기서도 피아노는 칠 수 있으니까! "

말 그대로 그녀의 손가락은 그새 길어져 침대에 누워서도 벽에 붙은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지경이었다.

" 어디 가지 말고 착하게 기다리거라. "

" 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걸로 족해요. "

" 내일 보자. "

" ... 잠시만요, 선생님-. "

" ... "

" 가지 마세요, 저 무서워요. "

" ... "

" 선생님, 어디, 어디 가세요,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계시죠? "

" ... "

선생님, 선생니임-

그녀가 부르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방을 나서는 내 목을 무언가 간지럽혔다.
그 길쭉한 손가락들이겠지!
그 손가락은 집요하게 내 목을 바삭바삭 긁으며 나를 붙들어매고자 애썼다.
이젠 싫었다.

" 선생님! "

그 외침이 두려워져 달리다시피 저택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목덜미엔 그 손가락이 남긴 감촉이 남아있었다.
마차를 불러놓지 않아 저녁 노을 아래 걸어서 언덕을 내려가야했다.
문득 바라본 저택 창문으로 길쭉한 손가락 열개가 빠져나와 허공을 미친듯이 휘젓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 ... "

나는 무시했다.

아니,

무서웠다.

의사로서 해결할 수 없는 그 병도,
죽지 않는 불치병에 걸렸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피아노를 잃은 피아니스트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포기해버린 나 자신도.

그녀를 다시 보러올까 고민했지만,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왈츠 소리에 그 고민조차도 거둬버렸다.

훌륭한 연주였다.
다시 듣지 못할 그 왈츠를,
나는 '길어지는 손가락 왈츠'라고 이름 붙였다.



ㅡ 길어지는 손가락 왈츠, 끝.


출처 : 환상괴담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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