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줄 요약 있으니까 긴거 싫으면 밑으로 가셈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1912년 뉴욕주 뉴욕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 로버트 오펜하이머보다 8살 어린 동생이었음.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이었던 오펜하이머 형제의 아버지는 양복사업에 젊은시절에 뛰어들어 성공해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고 해.
형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이라는 업적을 남겼다면 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과학 박물관 익스플로러토리움(Exploratorium)의 설립자라는 업적을 남김.
형의 권유에 따라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버클리 대학교의 방사선 연구소에서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연구팀을 이끌었다고 해.
하지만 물리학자로서의 커리어는 미네소타에 부임한지 2년만에 하원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에서 프랭크의 공산당 입당 경력이 문제시되어 끝나게 됨.
캘리포니아에서 박사학위 중이던 1936년 버클리 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중이던 재키 이본느와 결혼한 오펜하이머는 이듬해 함께 미국 공산당에 입당해 3년간 활동해. 고등학교 때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줄곧 진보적인 정치 성향을 유지하였다고 해.
결국 사상문제로 조교수에서 해임된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콜로라도주 파고사 스프링스에서 1500에이커 규모의 소목장을 시작함. 거의 10년동안 목장일을 했는데 프랭크는 지역 목장 협회의 회장을 할 정도로 목장주 일을 열심히 함.
그러다가 목장일이 지겨워졌는지 1957년 파고사 스프링스 고등학교에서 과학교사 일자리를 잡음. 프랭크는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면서 고물상에서 자동차 부품을 찾아 열역학과 전기학 원리를 이해하거나 병든 동식물을 돌보며 생물학의 기본을 깨우치는 등 특별한 체험 학습을 병행했는데 이게 엄청 유명해져서 1959년에 콜로라도 대학에서 과학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연수프로그램의 강사로 초빙될 정도였음.
1967년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체험형 과학 박물관을 대학과 첨단기술 회사가 많고 개방적인 분위기인 샌프란시스코에 짓기로 결정함. 처음에는 고향인 뉴욕을 1순위로 생각했지만 아내 재키가 서부 정착을 권유했다고 해. 샌프란시스코에는 오펜하이머 부부의 지인도 많이 살고 있었고 버클리에서 연구하는동안 프랭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2년 동안 지냈기 때문에 익숙한 곳이었어.
프랭크는 지역 언론, 물리학계 인맥을 활용하고 박물관 이름에 예술을 붙여서 포장하는 전략을 동원해 1969년 이곳을 샌프란시스코 시 정부로부터 연 1달러에 임대하는것에 성공함. 그리고 새로운 과학 박물관의 이름을 팰리스 오브 파인 아트 앤드 사이언스(The Palace of Arts and Science)라고 정함.
박물관 이름에 예술을 붙인 만큼 상주예술가를 두고 과학과 예술을 융합한 프로그램도 진행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 그리고 나중에 박물관 이름을 익스플로러토리움(Exploratorium)으로 바꿈
익스플로러토리움은 2013년에 원래 자리인 팰리스에서 같은 샌프란시스코의 베이 지역에 위치한 피어15로 이전해.
현재 익스플로러토리움은 하루 평균 4000여 명, 연간 140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는 세계적인 과학관으로 체험을 통해 과학적 원리와 현상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해 놓은게 특징이라고 함. 둘러보는데는 3~4시간 정도 걸린데.
3줄 요약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동생이다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형의 권유로 물리학자가 되었으나 공산당 활동 전적으로 인해 미네소타대학 조교수에서 짤리고 시골에서 목장주, 과학교사를 했다
과학교사를 하면서 체험형 과학 학습을 진행해 유명세를 얻어 콜롬비아 대학 교수로 복귀했고, 샌프란시스코에 과학 박물관 익스플로러토리움을 설립하여 1985년까지 박물관 관장을 맡았다
참고문헌신지은,"흥미로운 조합": 프랭크 오펜하이머와 익스플로러토리움의 설립,한국과학사학회지, 제41권 제3호 (2019), 247-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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