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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손톱을 먹은 쥐의 삶

wkdfj234d2020.06.02 04:15조회 수 1010추천 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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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사 대성당. 로마네스크 특유의 석재 구조물로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다.

뒷편에 피사의 사탑도 보인다>



 



피사의 대성당(Duomo di Pisa)은 이슬람 교도들을 대패시킨 팔레르모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려 건축되었다.

본래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피사는 이후 지중해 무역 거점으로 급부상하면서 직전까지 비잔틴 제국과 각축을 벌여 온 이슬람 세력과 분쟁을 일으켰더랬다.

인근의 제노바와 함께 이교도에 직면한 피사는 맹렬하게 무슬림들을 공격했고,

1016년엔 사르데냐 섬에서,

1063년엔 팔레르모에서 이슬람 세력을 정벌했다.

이렇게 해서 막대한 전리품을 얻은 피사가 자축의 의미로 대성당을 세운 것이다.

피사 대성당은 하늘에서 보면 십자가 형태를 띠도록 설계 됐고,

정 중앙에 돔 모양의 둥근 지붕을 씌워 놓았다.

외부는 각종 조각상으로 치장했으며 층층이 아치형 기둥으로 떠받쳤고,

이탈리아 화가 치마부에의 "전능하신 그리스도"를 비롯한 많은 예술 작품들이 내부를 수놓아,

대성당의 안팎 어느 곳을 보더라도 미적 가치는 탁월하다고 하겠다.



 



그치만 진짜 유명한 것은 따로 있다.

그래,

피사의 사탑 ! 피사의 사탑은 물론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모양새지만,

기울어져 있다는 특징 때문에 유명해졌다.

지을 때부터 기울어져 있는 바람에 공사 기간만 200년에 달하도록 늘어졌고,

그러고도 계속 기울자 1990년에 경사각 수정 공사를 실시했다.

탑의 남쪽이 기울어있으니,

북쪽 기반을 깎아버리는 거지. 결과는 대성공하여 더 이상 탑이 눕는 일은 없어졌고,

안전 상의 이유로 금지되던 관광객들의 탑 입장도 허가 됐다.

덕분에 오늘날에도 탑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지경이다.



 



한데,

피사의 사탑은 본래 대성당에 딸려있는 종루였다.

피사 사람들은 이것을 지금의 두 배는 되는 높이까지 쌓아서 이탈리아 제일 가는 첨탑을 세우려 했지만,

땅이 꺼지는 바람에 거기서 그쳤다.

말하자면,

설계 당시 본연의 기능과 의미는 대성당 본관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탑을 구경하러 왔다가 대성당을 곁다리로 볼 뿐,

그 반대로는 하는 법이 없다.



 



사실,

인간사에서 이러한 일은 제법 자주 벌어진다.

맥도날드의 해피밀을 사먹는 사람들은 조그만 버거보다 사은품인 장난감을 더 애지중지 하지 않던가? 죠스는 소설이 원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너무 성공하는 통에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화만 회자되고 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주객전도 현상이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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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도.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 송 양공이다.

때때로 춘추오패에서 그의 이름을 빼기도 한다>



 



송 양공(襄公) 자보(玆甫)는 송 환공(桓公) 어열(御說)을 이어 즉위한 춘추시대의 군주다.

태자에 임명될 당시,

자보는 배 다른 형 목이(目夷)의 자질이 더 뛰어나니 그가 더 적합하다며 자리를 고사하려 했는데,

서출인 목이보다 적자가 더 나을 것 같았던 환공이 거부했다.

이윽고 양공이 나라를 물려받자,

그는 목이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우애를 돈독히 다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송 양공이 도리를 아는 군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기원전 643년,

등극 8년만에 그의 본색이 드러난다.

제 환공의 죽음으로 천하에 패자(覇子)가 사라진 것이다.

제 환공은 아들만 여섯을 낳았으나,

그 중에서 적장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제나라의 후계구도는 아수라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 양공은 마침 송 땅에 망명 중이던 태자 소(昭)를 지원해 공위에 앉히는데 성공하니,

그가 바로 제 효공(孝公)이다.



 



일짱 조진 사람이 일짱 먹는 게 국룰이잖아? 패권국이었던 제의 후계자를 손아귀에 넣고 좌우하게 됐으니,

콧대가 솟을대로 솟은 양공은 제 환공이 그러했듯이 타국 제후들을 소집하면서 맹주를 자처했다.

그러나 졸렬하게도 송 양공이 집결을 명한 제후들은 증(鄫),

등(隊),

조(曹)처럼 한결 같이 잡국이었고,

강대국들은 부담스러울까봐 부르지도 않았다.

그마저도 끗발이 안 먹혀서,

증나라 같은 경우 이틀이나 늦게 참석했다고 한다.

대노한 송 양공은 증의 군주를 잡아다 가마솥에 삶아버렸고,

그 고기로 오랑캐 신인 수수에게 제를 올렸다(= 동이족을 포섭하기 위해). 이 같은 행태에 대경실색한 조나라 군주는 말도 않고 집에 가버렸고,

여기에 또 킹 받은 송 양공이 군사를 일으켜 조를 쳤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때마침 정(鄭)이 초,

노,

진 등의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후방을 염려하는 척 하며 이 실속 없는 전쟁을 끝낸 송 양공은,

그들 중 우두머리 격인 초에게 회맹을 갖자고 청한다.

이 기회에 초의 속국들이라 할 수 있는 제후들과 다리를 놓아달라는 취지였다.

송 양공의 계산에 따르면 강대국인 초의 위세를 빌려 열국들을 불러 모은 후,

자신의 은덕으로 감화시킨다면 송나라가 패국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어이 없는 요구에 초는 순순히 응했지만,

실은 다른 꿍꿍이가 초에게도 있었다.



 



송 양공을 비롯한 많은 제후들이 회맹한 기원전 641년,

누가 맹주를 맡을 것인지를 두고 송과 초가 다투었다.

당시 초의 군주는 초 성왕(成王) 미군(!!!)으로,

왕을 자칭했지만 작위는 자작이었는데,

공작위인 양공이 회맹연에서 노골적으로 초 성왕을 모욕했다 : 

"나는 조상의 공로로 상공의 벼슬에 오른 고로, 천자조차 나를 대할 때 빈객의 예로 맞이하십니다.

그대(= 초 성왕)는 주 왕실에서 내린 벼슬(= 자작)을 버리고 멋대로 왕이라 칭하니, 

가짜 왕이 어찌 진짜 공작에 비하겠소?" 하지만 송 양공은 어리석어도 한참을 어리석었으니,

초 성왕이 되받아쳤다 : "그래요? 그럼 여기 제후국들을 당신이 불러 모았어야지,

왜 나더러 불러달라 한 것이오? 이래도 내가 당신에 비하지 못한단 말이오?" 그러고는 복병들을 시켜 송 양공을 납치해버린다.



 



초 성왕은 송 양공을 붙잡으면 송에서 내란이라도 날 줄 알았지만,

다행히 목이가 송을 잘 건사했다.

때문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양공은 그냥 풀어주게 되었다.

하지만 패업을 꿈 꾸던 양공이 감읍하며 물러날 리가 없지.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송 양공은 초의 앞마당인 정나라를 치고자 했고,

이에 정에서도 초에 원군을 요청했다.

초군과 송군은 홍수(泓水) 강에서 대치한다.



 



여기서 송 양공은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범했다.

초군이 홍수를 도하해 넘어오자,

이를 기회라 여긴 장군들이 "지금 대열이 흐트러진 초군을 쳐야 승산이 있습니다.

무기와 사기가 우리보다 뛰어난 초군을 이길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입니다.

"라고 간했는데,

송 양공은 "저들은 무기도 많고 훈련도 잘 되었지만,

인의가 없도다.

나는 인의로써 적을 상대할 것이니,

주 무왕이 3천 군사만으로 은나라 억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인의 덕분이니라." 라며 거절한다.

 강을 다 건너와 대오를 정비한 초군과 정정당당히 맞서겠다는 뜻이었다.

참모진은 "전쟁터는 사람을 살육하는 곳인데 인의 타령이라니,

이런 ***가 어딨는가." 라며 혀를 찼다고.



 



당연히 정예 초군에게 상대도 안 되는 송군은 깨강정이 되도록 털리고,

송 양공 본인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시름시름 앓다가 1년 뒤에 죽고 만다.

사람들은 송나라 군주가 쓸데 없이 초나라 군병들한테 인자했다면서 대차게 까는 의미로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성어를 만들기에 이른다.

재밌는 점은,

송을 칠 적에 제 효공도 가담했다는 점이다.

인의를 논하면서 사람을 삶아죽였던 놈 답게,

자신이 효공을 후원해 놓고도 그다지 인덕을 베풀지 않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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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휘종(徽宗) 조길(趙佶). 후일 금나라에 붙잡혀서 혼덕공(昏德公)으로 불리운다>



 



북송의 정세는 신종,

철종의 2대를 거치면서 굉장히 심각해져 있었다.

아시다시피,

북송은 이상하리만치 군대가 약해 여기저기 평화유지비 명목으로 외국에 바치는 재물이 막대했다.

또한 세대를 거듭하면서 정착한 관료제의 규모가 과하게 커졌고,

지주들이 부당하게 토지를 잠식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한마디로,

나라 안에 새는 돈이 너무 많았다.

이에 신종은 왕안석을 위시한 개혁파 신료들을 앞세워 국내의 부정부패 척결과 줄어든 세수 확충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득권 세력과의 반발로 인해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그 사이 이도 저도 아닌 미봉책들만 남발되어 부작용이 더욱 심해졌다.

이를 놓고 신하들끼리 서로 지지하는 사안 별로 나뉘어 당파싸움을 벌인 것은 물론이다.

신종의 뒤를 이은 철종도 이 문제를 고쳐보려 했으나,

그가 뜻밖에도 25살에 요절하면서 다음 차례인 휘종에게 대업이 맡겨졌다.



 



송 휘종 조길은 신종의 서출이자 철종의 이복 동생이라서 본래 황위와는 관련 없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철종이 후사 없이 죽은데다,

평소 황태후가 총애했기 때문에 조길이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에게 3대에 걸친 구법/신법 당파 싸움과 현실 정치의 묵은 모순을 해결할 무거운 과업이 주어졌는데,

조길은 과연 잘 풀어낼 수 있을까?



 



우선 휘종은 잡기에 굉장한 소질이 있었다고 전한다.

보통 황제가 뭘 해봤다고 자랑하면,

높으신 분 비위 맞춰주느라 사장님 나이스샷을 외쳤겠지만,

휘종은 진짜로 실력자였다.

 글씨면 글씨,

그림이면 그림,

악기면 악기,

그야말로 못 하는 게 없었다.

수금체라는 본인만의 서체를 만들었으며,

시도 잘 지었고 산수화에도 능했다.

예악을 정비해 고려에도 영향을 끼쳤을 지경. 뿐만 아니라 바둑도 잘 두었다고도 하며,

대관다론(大觀茶論)이라는 다도 문화에 대한 글을 집필하는 등 차 문화를 발달시키는데도 앞장 섰다.

게다가 축국도 잘 했단다.

황순원과 천경자와 김광석과 이세돌과 손흥민이 한 몸으로 태어났다면 진작에 주모는 과로사 했겠지.



 



그러나 정치는 쥐뿔만큼도 몰랐다.

분명히 아버지 대에 국고가 비는 문제를 인지했고,

그것을 고치고자 다시 2대에 걸쳐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휘종은 오히려 돈을 물 쓰듯이 써버렸다.

응봉국(應奉局),

조작국(造作局) 등의 조직을 신설해 안 그래도 비대한 관료 조직을 더 키웠는데,

이들이 하는 일도 오직 휘종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기 위한 일 뿐이었다 : 응봉국은 멋지게 생긴 수석이나 아름다운 화초를 수집해 황제의 정원을 꾸미는 업무를 맡았고,

조작국은 골동품과 희귀한 질료를 모아 황제의 공예품을 만들어 올리는 일을 했다.

그 규모도 놀라워서,

고작 휘종의 갬 - 성을 위하는 일로 배 열 척 씩을 동원했다고 한다.

열 척의 선단을 강(綱)이라 불렀으므로,

사람들은 휘종의 취미를 돕는 수집단을 일컬어 "화석강(花石綱)"이라 했다.



 



이 따위로 사치를 부리니 버틸 재간이 있나. 휘종은 망하지 않으려고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부여했으며,

토지를 재측량한다는 명목으로 일부러 짧은 척도를 동원한 뒤 남는 땅은 국유화하는 식으로 세수를 늘렸다.

하지만 진작부터 지주들의 농간,

화석강 놀음으로 인한 부역 때문에 이중고를 겪던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기어이 1120년,

방랍의 난이 발발한다.

방랍과 반군은 거병한지 열흘만에 1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크게 호응을 얻었고, 응봉국과 조작국이 설치된 항주를 먼저 칠 만큼 독기가 가득차 있었다.



 



방랍의 난은 송 조정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는데,

규모도 규모였지만 타이밍이 문제였다.

휘종은 당시 송이 화평을 구걸해오던 요가 여진족 국가인 금과의 교전으로 휘청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요에게 빼앗긴 옛 땅을 되찾을 꾀를 생각해내고,

금과 연합해 요를 치려 했던 것이다.

휘종은 앞으로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 만큼을 금나라에 보내겠으니 요를 나눠먹자고 꼬드겼고,

이에 금이 응하여 요를 쳤다.

그런데 방랍의 난이 터지는 바람에,

금군과 협공을 가하려던 송군은 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되어야 했다.

비록 방랍군은 1년만인 1121년에 궤멸되었지만,

그 1년 동안 출병을 지체한 탓인지 금에서는 송 군주가 차도지계(借刀之計)를 쓰려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부랴부랴 군을 재편성하여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요를 막타 치러 보낸 휘종은,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 한다.

금이 혼자서 요 황제를 수도까지 몰아넣어 놨건만, 이걸 못 이겨서 연전연패만 거듭했기 때문이다.

금 입장에서는 충분히 송과 요가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볼 만 한 상황. 결국 송이 더 많은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개입한 금이 단숨에 요의 연경을 함락하면서,

요는 멸망하였다.

송군이 약하다,

약하다 했지만 이 정도로 약할 줄은 송 휘종 자신도 몰랐으리라.



 



자,

요가 끝장 났으니,

약속대로 송도 할 일을 해야지? 그러나 송 휘종은 갑자기 헛바람이 들었는지,

금에게 줘야 할 재물과 땅들을 쥐고서 놓지 않았다.

도리어 휘종은 요의 패잔병들과 은밀히 접촉해 금에 협공을 가할 계획까지 세운다.

이게 잘 됐으면 또 모를까,

금방 누설되면서 금나라를 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1125년,

금 태조 아골타가 친병하여 송을 에워쌌다.



 



휘종의 대응은 심플했다.

 아들 조환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게 그것이다.

그가 바로 북송 마지막 황제 흠종이다.

일단 흠종은 사태 수습을 위하여,

더더욱 많은 공물과 땅뙤기를 바치겠다는 약조를 하고 원흉이라 할 수 있는 간신들을 처형함으로써 겨우 금군을 물릴 수 있었다.

하지만 조정 내의 주전파들이 밀어붙이자 태도를 바꾸어 또 다시 금을 **였다.

이번엔 제대로 빡친 금나라가 요보다 더 빨리 송을 박살내는 바람에, 흠종과 휘종은 나란히 포로가 되었다.



 



두 사람은 금나라 땅에서 죽었다.

흠종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만은,

휘종은 일국의 황제로서 결코 지탄을 피할 수 없었다.

애국하는 마음이 예술에 대한 애착의 1/10이라도 있었더라면,

차라리 일찌감치 선위하고 상황으로 물러나 그토록 하고 싶었던 예술을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과오가 지나쳐서 나라와 일가,

자기 자신의 신세를 망쳐버렸고,

금에서는 한껏 조롱하는 의미로 혼덕공(= 덕을 망친 놈)이란 작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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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신종(神宗) 주익균(朱翊鈞).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응당 만력대제라 불러 마땅하다>



 



주익균도 준비된 군주는 아니었다.

부황 융경제가 고작 6년만에 죽는 바람에,

열 살 나이로 대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송 휘종과 달리,

신종에게는 장거정이라는 필두 재상이 있었다.

장거정은 황제의 스승으로서 신종에게 제왕학을 엄히 가르쳤고,

섭정으로서 내외 국정에 지대한 업적을 세웠다.

먼저 토지를 재측량해 은닉된 땅을 찾아내고,

쓸데 없이 복잡한 세금들을 하나로 통폐합했으며,

향후 모든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정했다(= 일조편법). 이같은 조치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 유구하게 이어진다.

그 뿐인가? 남과 북으로 국경을 정비하여 왜놈이나 오랑캐가 준동하지 못하게 방비한 것도 그의 공이다.

장거정에 힘입어 명나라는 한 시름 돌리게 되니,

사람들이 이 시기를 만력중흥이라고 불렀다.



 



1582년,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성년이 된 신종이 친정을 할 시간. 그런데 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장거정의 일가붙이를 몰살하고(장거정은 부관참시),

그의 당여들을 궐 밖으로 내쫓는 일이었다.

생전에 장거정이 부정부패했음을 들은 신종이 처음엔 그를 두둔했으나,

조사를 명해 실상을 파악한 뒤 대노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이 때 장거정의 식솔들은 문초가 진행되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못 마셔서 굶어 죽는 이가 속출했고,

장거정을 거드는 이는 여지 없이 파직 당해 쫓겨났다.

특히 장거정이 중용해 장군이 된 척계광은 왜구와 여진족을 모두 박살낸 최영급 명장임에도 불구하고 옷을 벗어야 했으며,

그만한 사람 없으니까 재기용해야 한다고 건의한 사람들도 벌을 주었다.



 



그러더니 그 유명한 칩거에 들어갔다.

신종은 그야말로 국가의 대소사에서 거의 손을 놓았고,

제발 조정에 복귀하시라는 신하들이 땡볕에 쓰러지도록 호소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30년을 파업했다.

때문에 명나라는 한동안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했다.



 



일각에서는 신종이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벌인 일 아니냐는 주장을 한다 : 앞서 말했듯,

장거정은 신종을 엄히 가르쳤다.

경전을 외게 하고는 못 해냈을 때 불같이 날뛰었고,

10년 내내 공부를 시키면서 도학군주가 되도록 쉼없이 채찍질 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알짜배기 땅마다 알박기를 시전했고,

대궐보다 더 큰 집을 지었으며,

뇌물로 착복한 돈만 해도 황제 자신의 재산보다 많았단다.

여기에 현자 타임이 와버린 신종이 "인간 따위는 쓰레기다,

큭큭..." 하며 인간불신을 드러낸 행위가 파업이란 뜻.



 



또 한 편으로는,

장거정의 개혁에 반발한 지주층 및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중앙 정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한 신종이 결단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 장거정은 서원을 철폐하고 언관들을 핍박해 선비들을 옥죄었고,

조정의 기강을 잡겠다고 법가적 엄벌주의에 기반한 통치 풍조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개혁파 인사들을 문무 요직에 발탁했으니 그 반발이 컸다.

다만 장거정 생전에 신종의 총애와 신임이 두터워 감히 대적할 자들이 없었는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복고주의가 고개를 들었고 신종이 장거정 없이 그들을 다루기 어려웠지 않았냐는 뜻.



 



하지만 내 생각엔 신종이 충격 먹어서 삐뚤어진 것이나 신하들과의 파워게임에서 진 게 아니라,

원래 성정이 그랬던 것 같다.

신종이 군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일에 몰두한,

권위주의적 인간이란 말씀이다 : 신종은 재위기간 내내 백성들의 곤궁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자신의 열락을 위해서는 탕진하기 일쑤였다.

어려서부터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장거정이 몇 번이나 뜯어 말려야 했으며,

초호화 무덤을 축조하는데 혈안이 돼서 명의 1년 예산을 훨씬 웃도는 돈도 흥청망청 써댔다.

뿐만 아니라 신종이 내시나 궁녀 같은 아랫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등의 학대를 자주 했다고 한다.

장자를 낳고도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태자 책봉을 20년이나 미뤘고,

결정한 후로 황태자를 홀대해서 파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에서의 행보도 그렇고,

신종은 희한하게도 실리보다 자신의 고집에 따른 결정들을 많이 내렸는데,

모두 제왕적 풍모가 있었다.

 명색이 황제니까 제 맘대로 하겠다는 거지.



 



특히 신종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운 일이야말로 황제의 권위를 위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신종 당시 명나라에는 3번의 큰 변란이 있었는데,

영하의 역/임진왜란/파주의 역을 통틀어 만력 3정이라 한다.

이 때는 영하의 역을 진압하고 2년이 겨우 지난 시점이었고,

누르하치가 건주 여진족을 통합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 외국으로 원군을 보내겠다는 결정은,

본토로 왜적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전략적 판단 외에도 정무적 동력이 필요했다.

명 조정 내에서도 참전론자와 반대론자로 나뉜 신료들 간의 파벌 싸움이 극에 달했다.

장기간의 칩거,

무리한 축재와 이를 위한 중과세로 황권이 위태로움을 안 신종은 조공국인 조선에 관대한 원조를 결단함으로써 따꺼의 품격을 대외적으로 널리 표방하고,

왜놈처럼 감히 정명가도(征明假道) 따위 헛소리를 하는 놈들의 기를 꺾는 효과를 노렸다.

 그래야 또 놀지.



 



때문에 그의 별명은 조선황제였다.

자기 나라 일을 열성적으로 돌봤어도 모자랄 판에,

남의 나라에 위엄을 떨치기 위해 군대도 두 차례나 보내주고(1차는 5천 명,

2차는 20만 명) 식량도 어마어마한 양(양곡 백 만 석 = 대략 10만 톤)을 쏟아 부었다.

자국민들은 이미 두 번의 전쟁과 황제 본인의 사치,

무덤을 짓는 대토목 공사로 피골이 상접할 지경이었지만,

지존이신 황제 폐하께서 알 게 뭐람. 그의 기록적인 태정(怠政)은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조선의 연산군을 봐. 갑자사화 이후 고작 2년 동안 정사를 방치한 걸로 반정에 왕위를 잃고 묘호도 못 받았고,

신하들이 두고두고 임금 꼽 주는 수단으로 써먹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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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안토니누스(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헤라클레스인 줄 알았지?>




콤모두스는 20살에 즉위하여 로마를 물려 받은 사람으로,

오현제 시절의 전성기를 끝내고 군인 통치기를 연 장본인이다.

영화 「조커」에서 명연기를 선보인 호아킨 피닉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콤모두스 역을 맡은 바 있는데,

이 인물은 실제 콤모두스와 많이 다르다.

영화 속 등장인물인 콤모두스는 부황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비롯한 애정결핍과 황위를 향한 갈망,

누이인 루실라에게 품은 금단의 애욕 등으로 뒤엉켜 혼돈한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실존인물 콤모두스는 그냥 방탕했다.



 



콤모두스는 검투 경기를 너무도 좋아해,

자주 경기를 베풀어 시민들과 함께 관람했다.

로마 황제들이 여론의 불만을 잠재울 때 쓰는 상투적 방법이지만,

콤모두스의 경우 순전히 본인이 검투사를 매우 동경해서 그랬던 것 같다.

그가 직관하던 경기에서 베테랑 검투사들이 서로 죽을까봐 미적거리며 소극적이게 싸우자,

"오늘 이 경기장에서 검투사는 한 놈도 살아 나가지 못 한다"며 모든 검투사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게 했다.

마산아재들도 롯데가 죽쑤면 똑같은 대사를 날릴테니,

그의 펜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있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자신이 검투사를 자청했다.

중세 시절 마상 창 시합을 벌이던 기사들과 달리,

당시 로마에서 검투사의 사회적 지위는 싸우는 광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걸 1등 시민인 황제가 해먹겠다고?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콤모두스는 검투사가 되기 위해 검투사 조합에도 가입하고,

개인 연습장도 축조했으며 자신과 대전할 상대를 신중히 고르기까지 했다.

젊은 황제가 혈기를 주체 못 하고 중2병에 빠져 헛짓거리를 하는구나.



 



... 라고 하기엔 너무도 실력이 출중했다.

콤모두스는 700전이 넘도록 검투 경기에 참여해 전승했다.

그가 상대를 직접 지목했으니만큼 약골만 상대한 것 아니냐,

또는 명색이 황제인데 상대방이 어떻게 전력을 다 했겠느냐는 지적도 일리 있다.

그러나 콤모두스는 짐승들을 상대로도 엄청난 전적을 올린 바 있다.

그 당시 베스티아리(Bestiarii)라고 맹수들과 모의 사냥을 연출하는 검투사도 인기 있었는데,

콤모두스는 이 직종에도 도전해 코끼리,

호랑이,

하마,

곰 등을 잡아 죽였으며 타조나 말 같이 발빠른 짐승들은 활로 쏘아 잡았다.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하룻동안 사자 100마리를 죽였단다.

곰이 무슨 안목이 있어서 황제를 알아봤겠어. 이같은 기록은 콤모두스의 강건함이 초인적이었고,

따라서 검투사로서 그가 이룩한 전적이 가치 있음을 반증한다.



 



그러나 철인황제(哲人皇帝)라고 불리웠던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는 달리,

콤모두스는 위정자로서의 덕목은 그다지 갖추지 못 했다.

정사는 일절 돌보지 않았고,

허랑방탕하게 놀아재끼며 국고를 탕진하며 나라를 좀먹었다.

콤모두스 시절 로마는 계속된 전쟁과 전염병,

기근과 대화재로 시민들의 피로가 극에 달했는데,

황제라는 작자가 처첩 300명(+ 미소년 시동)을 끼고서 공공연하게 매관매직으로 돈 놀이나 했으니 민심이 고울 리가 없다.

끝끝내 로마 군중이 들고 일어나 황궁으로 향했고,

대경실색한 콤모두스는 자신을 대리해 정무를 보던 클레안드로스를 참수해서 책임을 묻고서야 성난 시민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물론,

콤모두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즉위 2년 차에 그가 의지하고 따랐던 큰 누나,

루실라에 의한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루실라는 야심만만하고 표독스러운 인물로 기록 되어 있는데,

남동생이 황제가 되자 그를 죽여버릴 계획을 세웠더랬다.

이 일에는 원로원과 근위대장,

심지어는 콤모두스의 장인까지 참가했다.

죽을 뻔한 경험 이후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콤모두스는 루실라 일가를 유배에 처한 뒤 죽여버렸고,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을 줄줄이 박살냈다.

일각에선 콤모두스가 노회한 루실라계 정치인들을 역모로 엮어서 한 큐에 보내버리는 수완을 발휘했다고 보기도 하는데,

나는 단순히 공포와 실망감 때문에 무분별하게 벌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원로원씩이나 되는 사람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했으며,

그들의 인망을 고려해 행여나 복수할지도 모르는 식솔들까지 다 죽였으니까. 이후 마테르누스의 역모,

로마 봉기 등을 겪으면서 사람이 완전히 넋을 놓아 버린 게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가 원로원에게 자신을 신격화 해 달라고 요청한 건은 욕 먹어 마땅했다.

망상이 도진 콤모두스는 자신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주피터(= 제우스)의 아들이고,

그 중에서도 천하무적으로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 주장하며 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콜로세움에도 자기 석상에 곤봉을 추가하고,

사자 동상을 발치에 둬서 매우 의도가 다분해 보이는 연출을 지시했다.

사자가죽과 곤봉을 장식한 그의 흉상은 이 때문에 만들어졌는데,

실로 과분한 물건이다.

콤모두스가 무슨 치적이 있다고 살아 생전에 신으로 추앙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한술 더 떠서 아예 로마의 건국 군주 로물루스와 맞먹으려고 들며 달력도 새로 지정하고,

로마에 자기 이름을 붙이려는 등 망발을 일삼았다.

죽기 직전에는 검투사이자 집정관으로서 행세하려고 하는 통에,

시민들과 귀족들의 공분을 샀다.



 



검투사로 태어났더라면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을 콤모두스는,

자신이 믿었던 침실 시종과 레슬링 교관에 의해 암살 당했다.

콤모두스 사후 권력 승계는 마치 예정된 수순인 양 신속하고 기계적이게 이뤄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암살에 가담하고 기대했음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은 "소확행"이란 말을 아는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의 신조어란다.

20***의 청년 문화를 주도한 동력은 소확행이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벌써 2년 전이니까 딱히 신조어는 아니겠네. 이러한 말과 개념이 청년들 사이를 넘나들며 문화의 한 요소로 정착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소확행은 사실 이시국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으로 쓴 말이다.

풍요로운 물질 문명을 구가한 일본에서는 점차 자본 만능주의에 빠져 소모적이고 퇴폐적인 문화가 퍼졌다.

이에 하루키는 일상에서의 작은 기쁨으로부터 고갈된 정신적 행복감을 보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소확행이란 개념을 창안하고 실천하길 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이 직전에 유행했던 미니멀 라이프,

욜로(YOLO) 등과 함께 쓰이면서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보다 지금 당장의 고된 현실을 위해 작게나마 힐링을 하라는 의미로 변화했다.



 



하지만 내 나이 유행에 민감한 방년 22세,

나는 물론이고 우리 동년배들도 누구 하나 소확행이란 말을 실제로 입밖으로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단어를 SNS와 광고지에서 많이 본 기억이 난다.

이 말은 희한하게도 "가성비"라는 또 다른 신조어와 잘 붙어다니며 제품을 열심히 홍보해댔다.

올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나만의 소확행 미니 선풍기,

남편 도시락을 채워줄 가성비 냉동식품으로 소확행하세요 ~ 같은 문구로 많이 접했지. 이는 내 기억력이 고작 그것 밖에 안 되는 소치이기도 하나,

소확행을 유행어로 밀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시사한다고 하겠다.



 



또한 소확행으로 대표되는 소비 트렌드에는 몇 가지 발칙한 전제가 엿보인다 : 첫째,

"소소한" 소비 규모의 정의다.

우리가 소확행 라이프를 즐기기 위해서 소비해야 하는 물건들은 결코 소소한 가격으로 매대에 오르지 않는다.

당신이 퇴근해서 따뜻한 물에 샤워하려면 야근을 안 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야근 수당이 곧 샤워값이다.

가족과의 여행? 물론 좋지. 하지만 여행 경비는 한 두 푼이 아니다.

가성비 맛집,

가성비 물건,

내 지갑이 얇으니 우선은 택한다만,

싼 게 비지떡인데다 웬만해선 브랜드 제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할 뿐 그다지 싸다고 할 수 없다.

이는 소확행이란 생활 방식에 있어서 요구되는 지출은 소소하지 않은데도,

기업에서 "이 정도면 소소하죠."라고 설득하면 우리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확실한 행복" 에 대한 보장이다.

소확행은 욜로족들의 소비 행태를 근원으로 하는 신생 트렌드다.

그러니 욜로족의 라이프 스타일과 소확행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는 본질적으로 같다 : 미래의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현실의 확실함만 취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사실 소확행의 "확실한"이라는 말은 "(미래의) 불확실한" 행복에 비해 "(지금 당장) 확실한" 행복을 수식하기 위해 있는 말이다.

이는 행복의 즉시성을 강조하는 개념일 뿐,

정말로 당신이 행복하도록 해주겠다는 뜻은 아니다.

즉,

소확행으로 당신이 확실하게 행복해지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행복"과 "힐링"의 혼용이다.

소확행이 유행을 타기 직전까지 청년들의 삶에서 오르내리던 사회 현상은 "힐링"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정서적 동요가 끓어오르는 청년들은,

사소한 보상을 통해 안정감을 선사하는 힐링 라이프에 매료됐다.

소확행은 그저 힐링이 장착했던 미래관을 좀 더 어둡고,

확정적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 우리 미래는 계속 불투명할 테고,

우리는 그것에 기대기에 너무 지쳤으니까,

그냥 지금 사소한 것으로 행복하자는 게 소확행 아닌가. 그런 점에서 소확행과 힐링은 결말이 같다.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청년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무한재생에 빠진다.

힐링과 소확행 모두 지금 행복해져도 괜찮다는,

일종의 감성 회복에 가까운 생활양식이지 본질적인 행복의 취득이 아니다.

 이를 망각한 채 소확행의 정신을 따르다보면,

순간적인 만족이 끝나고 남는 공허감이 다시 새로운 단기적 욕구를 부채질 한다.

그렇게,

청춘들은 소확행의 덫에 점점 빠져든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치자 꽃.png



<치자꽃. 3월부터 피기 시작한다.

꽃말은 행복,

한 없는 즐거움>



 



소소하고 확실하게 우릴 행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잠시 시간을 내서 모교를 방문하거나,

노을 질 때 하늘을 보거나,

퇴근하고 맥주 한 캔 마시거나,

저녁 반찬 뭐가 나올지 궁리하며 길을 걷거나,

인강 대신 영화 한 편 보는 것은 눈부시게 값지다.

이러한 삶의 한 모습들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다들 한 번쯤 겪어본 경험들이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놓칠 만큼 치열하고 무료하게 살아간다는 뜻이 된다.

무엇 때문에? 바로 그 불확실하지만 위대한 가능성으로 빛나는,

행복한 미래를 위한 준비 때문 아니었나? 어떻게 일개 기업 따위가 감히 우리의 미래를 함부로 불행하다고 단정 짓는단 말인가? 당신들은 어차피 넘을 수 없는 벽 안에 갇혔으니,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 말 할 수 있단 말인가?



 



장기간의 불황과 청년실업,

고도로 가열된 경쟁 체제는 우리로 하여금 탈력을 느끼게 했다.

여기서 따지기엔 너무나 거대한 담론이 될 숱한 문제들로 청년들은 상처 입고 울분이 쌓였다.

때문에 우리 삶에 위로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인생과 노력과 업적을 인정해주고,

내가 나아갈 수 있게 기회를 주고,

나로 하여금 세상이 더 발전했다는 확신이 들도록 해주는 진짜 위로다.

"해도 어차피 안 될 텐데,

뭐하러 노력하니,

그냥 이대로 눌러 앉으렴" 하고 기업이 선심 쓰듯 팔아주는 소확행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런 위로. 



 



그것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삶을 긍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찾고,

우리가 있어 세상이 더 좋아졌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일은 우리 몫이다.

비록 고되고,

기약 없는 기다림이 될 수도 있지만,

저들 말대로 무가치하고 부질 없는 낭비는 결단코 아니다.

행복을 위해 미래에 투자하는 우리들의 노력을 쓸데 없는 짓 하는 걸로 바라보는 저들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겠지. 우리 삶의 주객이 뒤바뀌지 않도록,

우리부터가 부단히 애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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