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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파랴라2021.12.09 16:32조회 수 2028추천 수 1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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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이 곳에 떨어진지 아주 오래되었다는 얘기를 먼저 하고 싶다. 얼마나 오래냐고? 그건 잘 모르겠다. 여기서는 시간이 우스꽝스럽고 다르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초 단위나 분 단위로 딱딱 맞춰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곳 자체가 시간의 흐름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흘러가고, 어떨 때는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빠르게 흘러간다.




처음 이 곳에 떨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정말 갑자기 일어난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사실, 아직도 무시무시한 일인 건 맞다. 다만 이곳에 익숙해질 만큼 아주 오랫동안 여기 있게 되었을 뿐이다.

내가 떨어진 이 곳은, 당신이 어디 출신이냐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이름들로 불려 왔다. 누군가는 '우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구멍'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거대한 무덤'이라든가 여러가지로 불렀다. 정말 많은 이름으로 불렸지만 그 이름들은 모두 아이들이 불렀던 것들이다.

나는 이곳을 '구덩이'라고 부른다.




나는 사촌들이랑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구덩이에 떨어졌다. 사촌들은 엄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놀러왔고, 어른들이 저녁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 놀고 있기로 했다. 사촌형들과 놀 땐 늘 그랬듯 즐거워서 방방 뛰었다. 나는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빠르게 방으로 뛰쳐들어가 침대 밑에 숨었다. 몸집이 무척 작아서 밑으로 비집고 들어가기에 충분했다. 제대로 숨기 위해 밑에 버려진 지 오래인 인형으로 앞을 가리고, 가능한 한 더 뒤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리고는 사촌형이 숫자 세기를 멈출 때까지 두근두근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형이 집을 휘젓고 다니는 소리며, 한 명 씩 찾아낼 때마다 발각된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들이 들렸다. 형이 내 방으로 다가올 때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방문이 발칵 열리고 침대 밑으로 형의 발을 보았을 때 웃으면서 숨을 참았던 기억이 난다. 그 때, 나는 떨어졌다.




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본 적이 있나? 그 애니메이션에서 앨리스가 토끼굴로 떨어지는 장면이 있다. 내가 떨어진 것도 그거랑 비슷했다. 난 엄청 오~~랫동안 떨어졌고, 떨어지는 동안 마치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덩이에는 바닥이 있었고, 떨어지던 나도 곧 알 수 있었다. 바닥은 앨리스가 착지했던 체크바닥 같은 게 아니었다.




내가 착지한 바닥은 부드럽고 푹신푹신했다. 공포가 날 사로잡기 전에 잠시 멍하게 있었다. 허둥지둥 일어나서 올려다보니, 저 위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사촌형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엄청 작고 불분명하게 들렸다. 마치 몇 마일은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벽을 타고 올라갔지만 계속해서 떨어졌다. 정말 오랫동안 벽을 타려고 노력했다. 떨어질 때마다 벌떡 일어나서 다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집 근처 나무들을 수천 번이고 쉽게 쉽게 올라가곤 했다. 근데 여긴 왜 다를까? 구덩이에 대한 사실 하나는, 구덩이 속은 우리 집과는 전혀 다르고 그래서 비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위를 올려다 봤을 때, 아까까진 몰랐던 뭔가를 깨달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진짜' 절망을 맛본 것이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 잔뜩 쉰 목소리로 이렇게 내뱉었다. 

"아니야!! 안 돼!! 멈춰!! 가지마! 가지마!"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남겨져 버렸다.




직후에 스스로 내질렀던 비명소리와 저질렀던 행동들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주위의 벽들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바닥에 마구 발을 굴리면서 머리를 쥐어 뜯었다. 숨을 쉴 수 없었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구토를 했다. 콧물과 위액 때문에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광란의 에너지는 얼마 안 가 다 소진됐고, 나는 바닥에 쓰러져 몸을 떨며 움츠리고 있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뭔가 시도해보고 알아내기에는 너무 기괴하고 이상했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팔로 어깨를 감쌌다. 이 상황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선이었다. 나는 굉장히 고집이 센 편이고, 아빠는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모든 것들을 제대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적어도 한 번 이상 얘기했었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육 개월이나 동생의 존재를 무시했으니, 절대 아빠 말이 과장된 건 아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잠들었을 뿐이고 지금은 악몽을 꾸는 것 뿐이라고 믿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밖에 다른 설명이 뭐가 있겠는가? 난 몇 번이나 침대 밑에 숨어들어 갔었고 그 땐 구덩이같은 게 없었다. 비록 어린 애긴 했어도 침대 밑에서 구덩이가 마법처럼 짠 하고 나타날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야, 이건 악몽일 뿐이고 곧 깨게 될 거야. 




구덩이 속의 공기는 축축했고 썩은 냄새가 났다. 불쾌할 정도로 더워서 입고있던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벽도 바닥도 전부 따뜻하고 눅눅했다. 좀 진정이 되었을 때, 벽이 천천히 확장과 수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닥은 가끔씩 올라왔다 내려갔고, 움찔거리기도 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목구멍 속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구덩이 속은 완전히 어둠이었다.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들고 최대한 어둠 속에 눈을 적응시키려고 해도 그저 어두울 뿐이었다. 시각을 대신해서 다른 감각들이 무리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구덩이 속에서 새어나오는 끔찍한 냄새가 너무 심해서 입 속에서도 냄새가 느껴질 정도였다. 귀는 벽과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아주 작은 질퍽거리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숨소리.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한 번 들리기 시작하자 계속 들렸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면서도 어둠 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의 바로, 내 손은 두 개의 작은 덩어리에 닿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두 덩어리가 벌어지자 손가락에 뜨거운 공기가 느껴지고, 마른 혀가 내 손가락을 핥았다.

구덩이 속에 나 혼자가 아니었다.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손을 거뒀다.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지만 구덩이는 별로 크지 않았다. 겨우 오두막 정도의 크기에다 둥근 모양이다. 벽을 가이드로 삼아 움직였지만 결국 내가 도망치려고 했던 그것에게로 돌아갔다. 얼어붙은 상태로, 그것이 다가와 소리를 지르고 공격을 해올거라 생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숨은 쉬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길 기다려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게 우호적인지 알아보기 위해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두려웠다. 나는 그것이 뭔지 볼 수 없지만, 그것 역시 날 볼 수 없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날 똑바로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내가 잠들면 덤벼들려고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것도 나처럼 이곳에 떨어진 걸까? 벽에는 어떤 문도 나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이곳을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올라가는 것 뿐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없는 상태다.




나는 출구 없는 함정에 갇힌 것이었다. 내가 닳아 없어지거나 그것이 더 참지 못 하고 나를 죽이기 전까지는 계속 이 어둠 속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내 생각은 틀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머리 위에서 옅은 빛이 다시 새어들어왔다. 처음엔 다시 기어 올라가자고 생각했지만, 호기심이 앞섰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최대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은 너무 어두워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벽은 뿌연 빛 속에서 빨갛고 분홍빛이 도는 하얀색처럼 보였다. 마치 근육의 색깔처럼. 벽에는 이상한 덩어리들이 툭 튀어나와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것들은 딱딱해 보였고 어떤 것들은 부드러워 보였다. 그 질감이나 벽이 움직이는 모양새는 정말로 내가 살아있는 것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 때 어떤 움직임이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내가 '그것'을 보고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내 나이 또래의 여자 아이였다. 예전에는 분명 예뻤겠지만, 지금은 더 이상 예쁘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여자애의 머리카락은 검고 양갈래로 땋여 등 뒤로 늘어뜨려졌다. 피부는 창백한 회색이었고 몇 군데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입술은 그애의 눈 만큼이나 파랬다. 여자애는 날 보며 웃었고, 썩은 이가 드러났다. 내게 손도 흔들어 보였는데 손가락 두 개는 관절만 남아있었다. 그 애가 입은 다 해진 나이트 가운은 우리 엄마가 어렸을 때 잠옷으로나 입을 법한 촌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침을 꿀꺽 넘기고 부들거렸다. 여자애는 엄청 끔찍한 외양이었지만 날 공격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구덩이 속에 다른 사람은 더 없었고, 그애는 그런 상태임에도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눈싸움을 하다가, 걔가 나한테 우호적인지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별다른 선택도 없었다. 여기엔 걔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을 걸어봤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고, 우리가 있는 곳은 어디고, 여기서 나갈 방법은 있는지 물어봤다. 여자애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모른다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움직이면서 뭔가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속삭임조차 없었다. 그저 악취나는 공기만이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이 때 나는 이 구덩이의 첫 번째 법칙을 알아냈다: 여기 온 자들은 절대 '말로써' 서로 의사소통 할 수 없다.

구덩이는 살아있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증거는 없다. 살아있건, 없건 사악한 것임에 분명하다. 여기 있는 동안, 내가 알던 상식과 완전히 어긋하는 온갖 이상한 '법칙'들을 발견했다. 이상한 시간의 흐름과 서로간의 소통불능은 시작에 불과했다.




구덩이 안에서 당신의 몸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내 정신연령은 아홉 살짜리 정신연령보다 훨씬 성숙해졌지만, 내 몸은 그대로 머물렀다. 내 몸이 하는 것이라곤 썩는 것 뿐이다. 아주 느리게 진행되지만 고통은 없다. 어느 정도냐면, 머리를 헤집던 내 손에 두피가 딸려나올 때까지 썩고 있다는 걸 몰랐을 정도다. 구덩이 속에서는 육체적인 고통도 배고픔도 갈증도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며 쌓여가는 무감각만이 있을 뿐.




빛이 들어올 때면 가끔씩 구덩이 속으로 물건들이 떨어진다. 인형, 신발, 책, 옷. 여러분이 침대 밑에서 발견하는 아주 평범한 것들이다. 요즘 들어서는 전자제품들이 자주 떨어지고 있지만. 아주 가끔 귀중한 것들도 떨어진다. 내가 떨어지고 얼마 안 가, 다른 아이가 떨어졌는데 그 여자애는 신문을 가지고 떨어졌다. 희미한 빛 속에서 우리 셋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짧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썩어가고 있던 여자애는 아비게일이라는 이름이었고, 1964년부터 구덩이에 있었다. 걔는 가끔가다 내 어깨를 쿡 찌르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더 이상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비게일은 이 구덩이를 스쳐지나간 수많은 이름들을 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아비게일은-손가락이 몇 개 없는 사람으로선 최선을 다해 빨리- 자신이 떨어진 인형을 꺼내기 위해 어떻게 침대 밑으로 들어갔는지, 그리고 언제 구덩이에 삼켜졌는지에 대해 썼다. 아비게일은 그 때 열 살이었다.




가장 최근에 희생이 된 애는 일곱 살짜리 카일라였다. 카일라는 내가 구덩이에 떨었을 때처럼 무서워하진 않았다. 카일라는 아빠를 피해 침대 밑으로 들어갔는데, 그 애의 아빠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카일라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뭐든 집보다 낫다고 썼다. 그 애 생각으로는,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었던 자신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날짜는 2002년이었다.

느낌 상으로는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지만, 내가 떨어졌던 추운 날 밤은 1998년의 어느 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세 명이 되었지만 별로 의미가 없었다. 일단 구덩이가 어두워지면 우리는 서로를 만지는 것 말고는 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아비게일은 찔끔찔끔 우릴 흔들곤 했는데, 우리가 잠이 들까봐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 구덩이에 빛이 들어왔을 때 카일라는 창백하게 변했고, 갖고 온 신문은 구덩이 속 습기 때문에 푹 젖어버렸다. 그렇게 망가져버렸지만 아직 쓸 구석은 남아있었다. 아비게일은 매릴랜드에 살고 있었고, 카일라는 텍사스에서 왔다. 그리고 나는 뉴잉글랜드에 있었다. 구덩이는 절대 한 군데에 머무는 게 아니었다. 아비게일의 고개가 자꾸 숙여지는 걸 보고 혹시 피곤하냐고 물어봤다. 아비게일은 그 질문에 충격을 받더니 어떤 경우에라도 절대 잠이 들면 안 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잠이 들면 지는 거라고 썼다. 거기에 대해 좀 더 캐물었지만 아비게일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빛이 다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모두 벽을 기어오르면서 시간을 보냈다.



 

벽을 기어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습기 때문에 축축하고 붙들고 있기도 힘들다. 아비게일이 더 힘들어했다. 손 상태가 말이 아닌데다 발 상태는 더 안 좋았다. 내 어깨에 아비게일을 받치고 들어올리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그 애는 더 높이 올라가지는 못 했다. 그런 상황이어도 아비게일은 우리 셋 중에 가장 나가려는 의지가 강했다. 카일라는 우리들 중에 가장 사정이 나았다.

몸놀림이 재빠르고 다람쥐처럼 벽을 타고 오를 수 있었다. 만약 카일라가 정말 원했다면 아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일라는 구덩이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유일한 아이였다. 카일라의 가장 큰 공포는 구덩이에 갇히는 게 아니라 아빠의 분노였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구덩이는 감옥이지만, 카일라에게는 탈출구였다.



어둠이 다시 찾아오면 그 애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이곳에 와서 생긴 버릇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기 위한 슬픈 시도. 좀 진정이 되고 그 애들의 숨소리가 들리면 손을 놔주었다. 그리고는 그저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 나를 쿡쿡 찌르는 아비게일도 느끼면서. 어떤 때는 노래도 부르고 혼잣말도 했다. 내가 한 때 노래도 부르고 말도 했었다는 걸 기억하기 위해서다. 내가 구덩이에 대해 가장 간과했던 부분이 이 순수한 '지루함'이었다.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공상을 하곤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추억들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가족들에게 돌아간 체 하는 것이다. 내 꿈 속에서 사는 데에 도사가 되어 버렸다. 공상을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아비게일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그 애의 쿡쿡 찌르는 손도 약해져 간다는 걸 깨닫지 못 했다. 그 애의 손이 영원히 날 찌르지 못하기 전에 말이다.

그 다음 구덩이에 빛이 들어왔을 때, 아비게일은 사라져 있었다. 카일라와 나는 아비게일을 찾으러 다니다가 아비게일의 몸 일부가 벽에서 튀어나와 있는 걸 발견했다. 포기해버리고 잠이 들어버린 희생양을 구덩이가 집어삼킨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진실이 날 각성시켰다. 다시 어둠이 찾아왔을 때 나는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계속 카일라를 깨우려고 했지만 카일라는 나보다도 어렸고 구덩이 밖으로 나갈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아비게일이 사라지고 얼마 안 가, 카일라도 평화롭게 벽 속에 파묻혔다. 신문만 남기고서.




카일라 이후로도 많은 아이들이 구덩이로 떨어졌다. 4살부터 12살까지의 남자애들과 여자애들. 구덩이에 대해 설명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카일라의 신문이 너무 젖어 잉크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번져버렸다. 다른 물건들도 아이들을 따라서 떨어졌다. 대부분은 쓸데 없었지만 작동이 되는 손전등이 떨어졌을 땐 축복과도 같았다. 비록 오래가진 않았어도. 배터리를 낭비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구덩이 안의 이상한 시간흐름 때문에 배터리가 부식돼 버렸다. 심지어 부식된 배터리에서 흘러나온 유독물질도 느껴보지 못 했다. 하지만 손전등으로 얻을 건 다 얻었다. 손전등의 밝은 빛 때문에 잠시동안 눈 앞이 안 보였지만, 일단 눈이 적응하자 내가 갇힌 이 감옥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입구의 희미한 빛으로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한 모습이었다.

벽과 바닥은 살같은 빨간 빛이었고 지쳐버린 아이들의 팔들이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벽에 있었던 이상한 덩어리들은 모두 구덩이가 집어삼킨 아이들과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벽을 따라 빛을 비추자, 예전 희생자 중 하나가 벽에 있는 물건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올라갈 때 쓸 디딤돌로 말이다. 처음엔 흥분과 함께 희망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쪽 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다시 빛이 들어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꽤 걸렸다. 몇 번이나 미끄러졌지만 디딤돌을 잡고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덩이가 내 에너지를 조금씩 앗아가는 걸 알았다. 얼마나 더 많이 올라가야 할 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난 해냈으니까.

마침내 입구에 다다랐다.




내 손이 구덩이의 끄트머리를 넘어갔다. 그리고 나무바닥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서서히 썩어가며 감각도 같이 잃어갔지만, 내 발밑으로 느꼈던 우리집의 나무바닥 감촉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절대 착각할 리 없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바람에 가슴 밖으로 튀어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몸을 끌어올리자 반쯤 밖으로 나왔다. 끝까지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다시 힘이 모일 때까지 좀 기다려야 했다. 너무 오랫동안 올라온 데다 가슴에 느껴지는 바닥의 느낌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어둡고 비좁은 공간이었다. 손으로 휘젓자 장난감이 만져졌다. 그 때 비로소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그곳은 침대 밑이었다. 시야 한 구석에서 수면등 빛이 보였다. 나는 그 부드러운 빛에 감탄했다.




수면등이 깜빡깜빡거렸다.

그러자 구덩이가 다시 날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거센 해류에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것 같기도 했다. 때로는 놓아주는 것도 같다가 수면등이 깜빡 거릴 때마다 다시 거세게 잡아당겼다. 공포에 질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힘을 두 배로 끌어올렸지만 수면등이 거의 꺼져가면서 나 역시도 구덩이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내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침대 끝에 삐져나와있는 손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그 손을 잡았다. 잠시 동안, 그 손이 날 끌어올려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손은 내가 닿자마자 격렬하게 뿌리쳤다. 구덩이가 나를 완전히 집어 삼켰을 때 귀가 찢어지도록 큰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그 높이까지 올라갈 수 없었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도 구덩이를 빠져나가지 못 했다. 나만큼 올라갔던 아이는 여덟 살 소년 카이였다. 그 애는 체조를 배웠고 엄청나게 재빠르며 유연했다. 그 애가 겪은 것도 나와 거의 비슷했다. 구덩이에 다시 집어삼켜지기 전에 몸의 반절이 나와 있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자신의 스케치북을 이용해서 카이는 자신이 누군가의 침대 밑에 있었다고 얘기했다. 


그 애도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보고 잡았지만, 그 손은 그를 떨쳐내 버렸다. 우리 경험에서 유일하게 달랐던 점은 그 애가 수면등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본 유일한 빛은 벽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지만, 벽장 안 전구가 나가버렸고 그 때문에 다시 구덩이로 끌려 들어왔다. 그 얘기를 듣고, 구덩이가 열릴 때마다 들어왔던 그 빛이 사실은 수면등이거나 밤에 사람들이 켜놓았던 작은 빛이었던 걸까하고 추측하게 되었다.




난 정말로, 카이가 다음 번엔 해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덩이가 그의 에너지를 전부 집어삼켜 버리자 카이도 카일라처럼 똑같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결국 구덩이 안에서 영원히 잠이 들고 말 것이다. 머리에 어떤 생각이 떠오른 후로, 그 생각 때문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이란 이 구덩이의 마지막이자 가장 잔인한 법칙 때문에 영영 탈출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그 법칙은 바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어렸을 땐 나도 우스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을 보편적인 두려움이다. 전등 스위치를 끈 후 어둠 속에서 내달린다거나, 괴물을 피하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쓴다든가, 누군가 잡아채는 일이 없도록 침대 밖으로 손이나 발이 삐져나가지 않게 한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우리 모두는 한 번 쯤 침대 아래에서 뻗쳐오는 더럽고 차가운 손에 대해 상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 손들은 여러분을 끌어 내리려고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저 빠져나오고 싶을 뿐이다.




ㅁㅇ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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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할아버지집에서 명함찾음.reddit (by 오레오) 가짜 비둘기 (by 파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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